세계의 호수 아르테 한국 소설선 작은책 시리즈
정용준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10월
평점 :
품절



세계의 호수

내 마음을 따사롭고 감상적으로 만든 소설


오랜만에 한국 소설을 읽었다. 한국 사람이 쓴 한국 소설은 한국 사람만이 깊게 공감할 수 있는 한국의 맛이 있는 소설이다. 다른 언어로 이별과 작별의 차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 미묘한 차이는 장황한 설명이 아니더라도 그저 그 단어가 가진 느낌을 경험적으로 언어적으로 이미 우리는 공감하고 있다. 그래서 한국 소설이 반갑고 친근하게 느껴졌다.

이 책이 정말 소설인가 라는 의구심이 생겼다. 소설은 허구인데 저자 정용준이 직접 경험한 사실에 기반한 내용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온전히 일치하지는 않으나 얼핏 얼핏 주인공 윤기와 저자 정용준이 겹쳐 보이는 것은 분명 합리적 의심이다. 몇몇 구체적 단서들이 있긴하지만 추리놀이는 잠시 접어두겠다. 그냥 나만의 느낌적인 느낌이랄까.

여행지에서 뭔가를 결정하는 용기는 항상 옳아요. 하지만 그 용기는 한 번만 내세요. 그곳에선 뭔가를 결정하면 안 돼요. 그건 용기가 아니에요. 어리석은 거지. (중략) 여행지의 사건을 삶으로 끌고 오지 마세요. 복잡해진답니다.

p42

뭔가 의미 심장한 이 글귀는 되뇌어 읽을 수록 마음에 와 닿는다. 휴식을 위해 일상의 탈출을 위해 이런저런 이유로 떠나는 여행은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도 기쁘게도 행복하게도 만든다. 여행지에서의 설렘은 사람을 용기로 샘 솟게 한다. 그 원동력으로 우리의 삶은 새롭게 리프레쉬 되고 힘을 얻는다. 민영씨가 윤기에게 건넨 이 말은 우리에게도 해당한다. 여행지에서 뭔가를 결정하는 용기가 한 번으로 족하다는 선견지명은 소설을 다 읽은 후에도 기억에 남았다.

처음 여기 왔을 땐 여유롭고 한가한 일상이 좋았어. 해만 기울면 상점들이 문을 닫고 휴일에도 문을 닫지. 밤에 돌아다니는 사람들도 없고 소리 내는 이들도 없어. 순진한 아이들처럼 밤 되면 자는 세계에 요람처럼 누워 한동안 잘 지냈어. 그런데 곧 심심해지더라. 이런 걸 원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 세계는 분주하고 나는 여유로운 그런 상태를 원했던 거지. 세계 자체가 여유로우니까 한가함은 심심함으로, 심심함은 지루함으로, 지루함은 게으름으로, 느낌이 달라지더라고.

p95

작가로 살아가는 한윤기는 업무차 빈에 있다. 문득 옛 연인 무주가 떠올라 이메일을 보냈고 그녀를 만나러 스위스로 간다. 그간 연락없이 지냈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만난 그녀와의 재회는 우려와는 달리 자연스럽고 편안했다. 목수인 무주의 남편은 스위스로 입양되었던 사람으로 한국에 방문했을 때 무주를 만났고 무주는 남편을 따라 스위스로 떠났다. 딸 유나가 태어났고 스위스에서 살고있다.

한가로이 지내는 외국에서의 삶을 꿈꾼다. 나 역시도 그러하며 많은 이들이 그러하지 않을까. 그런 나에게 무주의 말이 남다르게 다가왔다. 여유롭고 한가한 삶을 꿈꾸지만 정작 그러한 세계로 가면 그렇지 않다는 이 말이 공감이 되면서도 마음 한 켠에 의구심이 자리한다. 그래도 한 번쯤 경험해보고 싶은 여유롭고 한가한 일상. 그 때 나 역시 그 여유로움이 게으름으로 변모할까.

잘 있는 걸까요? 낯선 방에 누워 있습니다. 오래전 애인의 집에 누워 있어요. 옆방은 그의 남편 방이고 그 옆방엔 그와 그의 딸이 잠들어 있습니다. 왜 나는 여기에 누워 있는 걸까요? 장크트갈렌이 어떤 도시인지 전혀 모르겠어요.

p109

여행지에서의 용기로 옛 애인의 집에 와 있는 윤기. 한 걸음 뒤에서 바라보면 참 재미있는 상황 아닌가. 작가 출신이기에 두 사람의 대화가 남다르다. 참 공감되는 두 사람의 이야기는 삶에 대해, 연인의 이별에 대해, 과거에 대해 자연스럽게 흘러가듯 펼쳐진다. 이별에 대해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두 사람은 어쩌면 익숙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일상의 어느 오후, 어쩌면 그들에겐 아무것도 아닐 장면을 감상적인 눈으로 보고 싶지 않은데 계속 눈이 갔다. 이상하고 아름다웠다. 이래서 민영 씨가 유럽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를 세 개의 호수라고 한 걸까?

p135

길지 않은 작은 책의 이 소설이 참 마음에 든다. 평온하면서도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이 포근한 느낌이 이 소설의 매력이라 생각한다. 자극적이지 않고도 만족스럽게 읽은 소설은 참 오랜만이다. 옛 애인을 재회해 나누는 근황, 함께 과거를 회상하며 나누는 이야기들, 낯선 스위스에서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는 일상, 세 개의 호수를 바라보며 즐기는 그 어느 오후의 따사로움. 감상적이고 싶지 않은데 감상적으로 젖어들게 하는 이 소설은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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