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들은 무정한 가장행렬을 바라보듯, 이 변모하는 도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낡은 마오쩌둥 모자에 헤어진 헝겊 슬리퍼를 신은 그들은 길모퉁이나 공원에 앉아서 몇 시간이고 변화된 세상이 펼쳐지는 것을 응시하곤 했다. 그들을 보면 가슴이 뭉클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내전과 일본 침략 시대에 태어나서 대약진운동 시대의 기근을 가까스로 견뎌내고, 문화혁명의 소용돌이에서 용케 생명을 부지한 그들이 이제 필요 없는 존재들로 밀려나고 만 것이다. 어느덧 흰색으로 변한 머리를 인 그들의 얼굴은 역사로 인해서 주름살이 잡혔거나 텅 비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 가끔 그들의 표정이 평화로워지고, 심지어 재미있다는 듯한 표정으로 변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 나는 무슨 행복한 기억이 그들의 머릿속을 스칠까 궁금했다. (25)
고고학자 오럴 스타인은 로프 사막의 전망대를 조사하다가 배달되지 않은 편지들을 발견했다. 소그드어로 쓰인 이 메시지들은 그 연대가 313년까지 거슬러올라간다. 그것은 지금까지 발견된, 종이 위에 쓰인 최초의 편지들이다. 글씨는 먹으로 쓰여 있다. 한 편지는 오래 잊혀진 아내의 넋두리를 담고 있다("당신의 아내가 되느니 차라리 개의 아내 또는 돼지의 아내가 되는 것이 낫겠다!") (47)
"그분들은 내가 가는 것을 원치 않으셨죠. 농부였으니까요. 그분들은 내가 들에서 일을 돕기를 바라셨지요." 그가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어쨌든 나는 갔지요. 하지만 열일곱 살 때 다시 떠나야 했습니다. 공산혁명이 일어났고, 승려들이 사방으로 흩어졌지요. 처음에 나는 공부를 계속했습니다. 그러다가 1964년에 정부가 내게 결혼하라고 지시했어요. 그들은 승려들이 다른 사람들과 같아지기를 바랐지요." (83)
사실 만리장성은 진정한 방어요새로서는 의미가 없었다. 훈족, 몽골족, 만주족은 거의 마음대로 만리장성을 넘나들었다. 중국학자 오윈 레티모어는 만리장성이 건설된 것은 유목민들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라, 중국인들을 그 안에 가두어놓기 위해서였다는 이론을 제시하기도 했다. 만리장성은 물리적인 방어능력보다는 엄청난 상징성에 의미를 두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야만서오가 문명, 빛과 어둠을 갈라놓는 선이었다. 그것은 몸서리치는 부정의 행동이었다. ... 러시아인들이 죄지은 사람들을 시베리아로 내쳤듯이, 중국인들은 천자의 제국에서 나오는 모든 쓰레기를 만리장성 밖으로 내던졌다. 반대자, 죄인, 심지어는 어리석은 자들까지도.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자신들을 정화했다. (118)
그러나 중국의 불교는 개방적이었다. 여기서 그 창시자의 완성을 향한 엄격한 여행은 신비의 구름 속으로 빠져들었고, 수많은 신들로 부서졌다. 불교는 민간신앙을 흡수하기도 했다. 몇몇 성소의 경우에는 천장에 힌두교의 신들과 연꽃이 가득 그려져 있었고, 심지어 머리가 아홉 개인 용과 도교의 온갖 신들--날개달린 유령과 말, 인간의 머리를 가진 새들, 그리고 하늘을 나는 신선--이 등장하기도 했다. 인간의 머리를 가진 새들, 그리고 하늘을 나는 신선--이 등장하기도 했다. 서왕모는 떨어지는 꽃보가 속으로 불사조들이 끄는 썰매를 타고 달렸다. 이처럼 이곳에서 꿈꾸는 저 세상은 안정된 것이 아니었다. 동물과 인간, 이승과 저승이 우주의 회오리바람 속에 뒤섞이고 신앙 간의 경계가 휩쓸려 사라지는 혼돈의 세계였다. (123)
하지만 여기서 나온 문헌들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다양한 문화의 세계를 드러내 보여주었다. 경건한 불경 원고는 다른 용도로 쓰인 종이를 덧붙여 빳빳하게 했는데, 이 덧붙인 종이가 불경보다 더 많은 정보를 전해주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것들은 물목, 유언장, 법률 문서, 사적인 편지 등이었다. 중국의 가요와 시도 나왔다. 자질구레한 일들을 기록한 문서도 있었다. 월경통을 완화해달라는 기도와, 심지어 죽은 당나귀에 대한 제문도 있었다. 예법편람의 한 편지는 간밤에 술에 취해서 무례하게 행동한 것을 사과하는 손님의 편지였다. 한 여승이 검은 소를 물물교환으로 얻었는가 하면, 다른 여승은 노예를 유산으로 남겼다. 어떤 사람은 차와 술이 벌이는 논쟁을 글로 쓰기도 했다. 중국어로 된 엄청난 양의 기도문 옆에는 산스크리트, 티베트어, 위구르어, 소그드어, 허톈어, 투르크어로 된 문서들도 있었다. ... 그야말로 다양한 언어와 인종의 흔적이 나타나 있었다. (128)
나는 머릿속에서 그의 이 말과 씨름을 했다. 물론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그가 왜 이런 말을 했는지 알고 있었다. 그의 동포들은 중국인들이 냉담하고 억제되어 있다고 비난했다. 그가 말했다. "그들이 집을 짓는 것을 봐도 그걸 알 수 있어요. 직사각형 아니면 정사각형뿐이지요," 그는 두 손으로 입방체를 쌓아올리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우린 꽃처럼 집을 짓지요." 모스크의 꽃 같은 돔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시인이고 음악가들이에요. 심정적으로 우리는 그들보다 더 자유롭다고요!" (146)
"당신은 베일을 쓰지 않죠?" 볓이 뜨거운 지금도 그녀는 맨머리였다. "난 여전히 당원이에요. 내가 머리를 가린다면,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할 거에요." 그녀의 분노가 되살아났다. "하지만 난 무엇보다도 엄마예요. 난 내 아이들을 신자로 키우고 싶어요. 신은 우리 동포들에게 아주 중요해요. 그들은 매우 가난하거든요. 우리가 신에게 의지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도시 사람들에게도 그런 일이 일아나고 있고요. 우리 삶은 너무 힘들거든요. 그리고 당은 우리에게 뭐 하나 해주는 게 없고." (190)
그는 어릴 적부터 마나스에 대해서 배웠다. 구전되는 설화 속에서 신격화된 이 초인적인 창건자는 그의 민족에게 정체성을 주는 원천이었다. 그 외에 내세울 키르기스인이 있었겠는가? 제정 러시아는 그들을 가파르고 격리된 계곡들에 정착시키고, 여러 부족으로 나눔으로써 그들이 민족의 개념을 가지지 못하게 했다. 그들은 아득한 옛날부터 이어져내려온 그들의 족보를 외울 수 있었다. 그것이 그들의 나라였다. ... 1924년 스탈린이 그들의 경계선을 정해주었다. 스탈린은 강압적으로 그들을 집단화했고, 그들의 언어를 적는 문자를 만들었으며, 그러는 과정에서 인근에 그들의 인척 카자흐인들과 그들을 격리하기 위해서 많은 외래어를 차용해 사용하게끔 했다. 이제 소련의 비전은 사라졌고, 그들은 반신화적인 민족의 개념에 집착하고 있다. (207)
원래 마나스는 여러 개의 서사시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한다. 이 나라의 언어와 경계선을 정한 사람들이 러시아인들이었던 것처럼, 전해오던 이 전설을 음유시인들에게서 수집하고 그것을 수정해서 더욱 발전시킨 사람들 역시 러시아인들이었다. 그들이 그렇게 한 것은 키르기스인들을 터키계의 다른 이웃 민족들과 분열시키기 위해서였다. 키르기스 민족국가는 어떤 의미에서는 스탈린의 선물이었다. ... 전설은 어디에나 서릴 수 있다. 마나스도 황제와 마찬가지로 그 자신의 시간 속에 머물고 있다. 민족은 철학자 레닌이 말한 것처럼 진정한 과거가 아니라 그 민족이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민족이 무엇을 기억하고 있고 무엇을 잊어버리느냐에 의해서 속박된다. (233)
늙은 여인들--어린 시절을 기근과 집단농장의 고난을 겪으며, 부모를 여의는 슬픔 속에서 보낸 희생자들--에게 용서받을 일이 무엇이 있을까? 그중 한 노파가 움켜쥐고 있던 지팡이를 내려놓으며 땅바닥에 엎드려 운다. 나는 그녀를 일으켜세우고 싶었다. 그러나 이 슬픔이 자기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그것은 확산된, 거의 비개인적인 슬픔이다. 그것은 내가 동정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고난은 보속...의 혹독한 시련이다. 그리스도의 상처가 그것을 인정하고 있다. (258)
사탄이 세상을 뒤집어엎고 인간을 쏟아버렸다는 얘기였다. 그 책임은 환영에게 돌려지고 있었다. 더 알 것도, 더 물을 것도 없었따. 수용소 군도를 운영하던 공산당 간부들은 이미 오래 전에 메달과 연금을 받고 은퇴했다. 그중 한 사람에게도 죄를 묻지 않았따. 러시아는 과거에 대해서 등을 돌려버렸던 것이다. 그것을 내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홀로코스트... 이후로 나의 세계는 기억을 의무로 삼았다. 그런데 러시아는 중국과 마찬가지로 망각을 택했던 것이다. 망각을 택함으로써 민족이 생존할 수 있었다고 작가 샬라모프는 말했다. 국가가 진실 위에 건설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259)
100만 명이 죽고, 인구의 절반이 집을 잃었으며, 성소의 문에는 거지들이 줄을 서 있지만--지뢰에 다리를 잃은 사람들이 의족을 앞에 늘어놓았다--이 사람들에게는 침해되지 않은 유산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동정을 거부하는 정신이었다. 그들은 북쪽의 친척들보다 더 날카로워 보였다. 이 사람들은 더 명랑하고 더욱 화난, 더 정중하고 더욱 엄격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281)
그들은 하소연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화를 내고 있었다. 그들이 제외되고 있다는 사실, 그들을 따로 격리된 저열한 사람들로 낙인찍었던 탈레반의 행태가, 사태가 안정된 지금에도 다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화를 내고 있었다. "우리들에 대해서 써주세요." 그들이 말했다. (286)
마지막으로 나는 마을로 들어가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살펴보았다. 7년의 가뭄으로 들판과 작물, 그리고 그들의 삶마저 말라버렸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들의 평균 수명은 마흔세 살이라고 한다. 이런 살벌하고 각박한 환경 속에서도 사람들이 아직 동정심을 잃지 않는 것이 신비스러웠다. 낯선 사람에게 담배를 권하고, 원수의 아들을 차마 죽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322)
나는 조심조심 군중 주위를 돌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를 향한 얼굴들도 변하지 않았다. 그들은 마치 나의 존재를 알아차렸다가 다시 잊어버린 듯 온화하고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아마도 내 주위의 인종적 다양함이 나를 보호해주는 것 같았다. 내가 그들에게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 발밑의 포석은 회색과 핑크색이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하나가 된 나 자신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내 얼굴은 몇 달 동안 바람과 햇볕에 그을려 검게 변해 있었다. (331)
하지만 알리라는 그 친구는 지나치게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이었다. 약간 미친 것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였다. 그는 정부 소속의 통계 전문가라는데, 할 일이 없는 것 같았다. 걸음걸이가 단정치 못했고, 목을 길게 뽑은 탓에 몸이 앞으로 기울어진 듯 보였다. 알리는 무척 말이 빨랐다. 그는 자신의 어휘를 연습했고("유토피아"와 "가설"이 그가 애용하는 단어였다), 그의 어휘에는 고색창연한 단어와 현대의 단어가 어지럽게 뒤섞여 있었다. (342)
"단언하건대, 우리 국민의 90퍼센트는 이 율법학자들을 미워합니다. 우리는 그들이 물러가기를 바라지요. 그들은 우리에게 울라고만 가르칩니다. 이 나라는 순교자들의 나라이지요. 도시마다 후세인의 친척이 되는 사람의 묘가 있어요. 나도 시아파 신자이지만 내 생각에는 수니파가 더 좋아요. 그들은 이렇게 질질 울지는 않거든요. 우리에게는 노래나 춤이 없어요. 슬픔만이 있지요." (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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