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은 늦어서 못 먹고 나가고, 점심은 나가서 하던 일을 끊을 수 없어 패쓰했다.
집에 오니 4시. 그때까지
먹은 거라곤 라떼 한잔.
바로
눕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일. 일단 집 앞 국밥집에 갔다. (다행히
우리집 코앞에 괜찮은 국밥집이 있다.)
국밥을 먹으며 수첩을 꺼내 직사각형(이것은 밥상)을 그리고, 그 안에 동그라미를 여러 개 그린 뒤 이름을 붙이기 시작했다. 이건 밥, 이건 미역국, 이건 잡채, 이건 해파리, 이건 김치, 이건 케익, 이건 과일....... 내일이
아빠 생신이다. 엄마가 알아서 장 봐와 차리라고 하셨다, 흑.
그렇다면 상의 노른자위에는 제대로 된 고기요리를 하나 놓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소고기 서근을 끊었다. 이 소고기로부터 예상되는, 이 소고기를 가지고 의도하는, 이 소고기가 되어야만 하는 결과물은
언젠가 어느 한정식 집에서 맛있게 먹었던 너비아니 구이. 한식 52개
메뉴 중 하나다.
내일의 실전을 위한 오늘의 연습.
그러나 이 소고기 덩이에서 떨어져 나와 오늘 저녁 우리집에서 사용된 부분은 결국 너비아니가 되지 못했다.
첫 단계인 포뜨기와 커팅이 엉망이 되면서, 현실의 소고기는 너비아니라는 이데아로부터
갈수록 멀어졌다.
마지막 단계인 굽기에도 실패했다. 가운데 것은 타고, 바깥 것은 가까스로 익고. 그 사이 육즙은 소천하시어 전체적으로 고기에 윤기나 촉촉함이란 없다.
내 손에 남은 결과물은 삐뚤빼뚤한 초등학생 글씨 같은 느낌을 준다.
이것에 붙일 수 있는 정직한 이름은 아마도 ‘익힌
고기'?
내일 부모님과 함께 먹을 실전 너비아니는 좀 더 나은 모양이길 기도한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