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들어진 신 - 신은 과연 인간을 창조했는가?
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한음 옮김 / 김영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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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에 띤 오역을 아래 적어 둠. 이것은 역자의 단순 착각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임. 다시 말해 전체 번역의 수준을 의심하는 것은 아님! 이 책, 전반적으로 번역 괜찮음.

 

p.217  맨 아래 단락

"다시 말하지만 생명의 진화기원는 오직 한 번 일어나야 했을 독특한 (혹은 독특했을 수 있는) 사건이었기에, 생명의 진화는 생명의 기원과 전혀 경우가 다르다. 종이 자신의 환경에 적응하는 양상은 수없이 많다."

 

- 생명이 생겨나는 것과 생겨난 생명이 진화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과정임을 계속 설명하고 있음. 생명의 탄생은 딱 한 번 일어난 일--'엄청난 우연설'이 작용 가능함, 생겨난 생명이 각 환경에 맞춰 진화하는 일은 각개로 일어나지만 또 상당한 법칙--여기선 우연설은 해당이 안 됨--을 따르는 일이었음. (그 뒤에 진화하는 생명들 중 의식을 갖게 되는 경우는 물론 또 하나의 엄청난 도약임.) 이 장에서는 기원에 대한 설명방식 중 하나로서 인본 원리를 소개하고 있음.

- 원문: "The evolution of life is a completely different case from the origin of life because, to repeat, the origin of life was (or could have been) a unique event which had to happen only once. The adaptive fit of species to their separate environments, on the other hand. is millionfold, and ongoing." (원서 p.139)    

 

 

유신론적 신앙 체계 내에서 신은 인간사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는 기도자에게 응답하고 죄를 용서하거나 처벌하며, 기적을 이룸으로써 세계에 개입하고 선행과 악행에 시시콜콜 관심을 가지며, 우리가 언제 선행과 악행을 행하는지... 안다. 한편 이신론자는 초자연적 지성을 믿지만, 그 지성이 우주를 지배하는 법칙들을 설정하는 일에만 관여할 뿐 인간사에 개입하거나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범신론자는 초자연적인 신을 아예 믿지 않지만 신이라는 단어를 자연이나 우주 또는 그 움직임을 지배하는 법칙을 가리키는 비초자연적 동의어로 사용한다. ... 이신론자는 신이 일종의 우주적 지성이라고 보는 반면 범신론자는 신을 우주 법칙의 비유적 또는 시적 동의어라고 본다는 점에서 다르다. 범신론은 매력적으로 다듬은 무신론이다. 이신론은 물을 타서 약하게 만든 유신론이다. (33)

그렇다고 누군가를 격분시키거나 상처 주는 것을 지지한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다른 면에서는 지극히 세속적인 우리 사회에서 종교가 걸맞지 않은 특권을 누린다는 점이 의아스럽다. 모든 정치가들은 자신이 등장하는 모욕적인 만화에 익숙해져야 한다. ... 종교는 뭐가 그렇게 특별하기에 그런 특권을 누리는 것을 당연시하는 걸까? ...
나는 이 책에서 종교에 대한 존중이 비할 바 없이 지나치다는 관점에서 내 견해를 펼치고자 한다. 나는 일부러 분노를 자극하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다른 것들을 다룰 때보다 더 부드럽게 종교를 다룬답시고 미적지근하게 글을 전개해 나가지도 않을 것이다. (47)

"미합중국 정부는 그 어떤 의미에서도 기독교에 토대를 두지 않고, 법이나 종교나 이슬람교에 대한 어떤 증오도 지니고 있지 않으며, 앞서 말한 주들은 이슬람 국가에 대해 어떤 전쟁도, 적대 행위도 한 적이 없으므로, 종교적 견해에서 비롯되는 어떤 구실도 결코 두 나라의 화합을 해치지 않을 것임을 선언하는 바이다."
......
세속주의를 토대로 한 미국이 지금 가장 열성적인 기독교 국가가 되어 있는 반면, 입헌군주가 수장인 국교가 있는 영국이 가장 덜 종교적인 국가가 되어 있다는 역설적인 사실이 자주 언급되곤 한다. (65)

"영국에 대해 말할 때 시골 신부가 주요인물로 등장하는 경우가 있다. 잘 닦은 신발, 친절한 태도, 차에 대한 애정...... 이런 점잖고도 별난 모습은 비종교인을 불편하게 만들지 않는 종교를 대변했다. 그는 실존주의적 불안을 유발하지도 않을 것이고, 구원을 받았느냐는 물음으로 당신을 몰아붙이지도 않을 것이며, 십자군 전쟁에 나서라고 설교하거나 더 높은 권위자의 이름으로 길섶에 폭탄을 파묻는 짓은 더더욱 하지 않을 것이다."
... 더 나아가 프레이저는 멋진 시골 신부가 사실상 영국 전역에 기독교에 맞설 수 있는 백신 역할을 했다고 말한다. (67)

제시된 명제는 너무나 무의미해서 확률이라는 그럴 듯한 이름으로 부를 수가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신의 존재 문제가 원칙적으로 대답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전제로부터 그의 존재와 비존재가 동등한 확률을 갖는다는 결론으로 건너뛰는 오류를 흔히 접하게 된다. (83)
......
중요한 것은 신이 반증 불가능하냐가 아니라(반증 불가능하지 않다) 신의 존재가 개연성이 있느냐이다. 그것은 다른 문제다. 일부 반증 불가능하지 않은 것들은 다른 반증 불가능하지 않은 것들보다 개연성이 훨씬 떨어진다고 판단된다. 신을 확률 스펙트럼과 무관하다고 볼 이유가 전혀 없다. 그리고 신이 증명될 수도, 반증될 수도 없기 때문에 신의 존재 확률이 50퍼센트라고 가정할 이유도 명백히 없다. 앞으로 알게 되겠지만, 사실은 정반대다. (87)

과학은 `어떻게`라는 질문들에만 관심이 있고, `왜`라는 질문들에 대답할 자격이 있는 것은 신학뿐이라는 말은 지겨울 정도로 진부하다(그리고 많은 진부한 표현들과달리, 그것은 옳은 것도 아니다). `왜`라는 질문이란 대체 무엇일까? `왜(why)`로 시작하는 영어 문장이 모두 다 타당한 질문은 아니다. 유니콘은 왜 공허한가? 아예 대답할 가치가 없는 질문들도 있다. 추상은 무슨 색깔일까? 희망은 무슨 냄새일까? 문법적으로 옳은 질문이라고 해서, 그 문장이 의미 있다거나 우리의 진지한 관심을 끌 자격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뿐 아니라 설령 그 질문이 진정한 것이라고 해도 과학이 답할 수 없다는 사실이 종교가 답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91)

나는 오랜 인생 경험을 했지만 그처럼 어리석은 생각은 한 번도 접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에 열거되어 있는 경이로운 증명들 가운데는 그와 같이 터무니없는 것들이 많다.
......
41. 정서적 공갈 논증. 신은 당신을 사랑한다. 그런데 어떻게 당신이 무정하게 신을 믿지 않을 수 있는가? 따라서 신은 존재한다. (135)

그러자 왓슨이 이렇게 대꾸했다. "저는 우리가 무언가를 위해 존재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단지 진화의 산물일 뿐입니다. 그러면 누군가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요. `저런, 목적이 없다고 생각하다니 당신의 인생은 참 황량하겠소.` 하지만 나는 맛있는 점심을 먹을 기대감에 차 있습니다." 그 말대로 우리는 함께 맛있는 점심을 먹었다. (159)

비개연성 논증은 복잡한 것들이 우연을 통해 출현할 수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우연을 통해 출현하다`가 `계획적인 설계 없이 출현하다`와 동의어라고 규정한다. 그러니 그들이 비개연성을 설계의 증거라고 생각하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
다윈주의를 깊이 이해하면 설계가 우연의 유일한 대안이라는 손쉬운 가정에 신중한 태도를 보여야 하며, 서서히 복잡성이 증가해가는 계단을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윈 이전에도 흄 같은 철학자들은 생명의 비개연성이 반드시 생명이 누군가에 의해 설계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며, 그저 대단을 떠올릴 수 없다는 의미임을 간파했다. 다윈 이후 우리 모두는 설계라는 개념 자체가 의심스럽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껴야 했다. (176)

앳킨스는 앞서 언급한 책에서 가능한 한 노력을 들이지 않고 생명이 있는 우주를 창조하려는 게으른 신을 가정한 후 이 생각의 흐름을 이어가다가 마침내 현명하게도 신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 앳킨스는 차근차근 게으른 신이 할 일을 줄여나감으로써 결국 그가 아무 일도 하지 않게 하는 데 성공한다. 그는 아예 존재하는 수고조차 하지 않을지 모른다. 우디 앨런...의 푸념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오는 것 같다. "신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나는 그가 악하지 않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신에 대해 할 수 있는 최악의 말은 기본적으로 그가 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184)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의 특수한 사례륽 찾는 것은 기본적으로 비과학적인 방식이다. 현재의 무지로부터 주장을 펼치는 특수한 사례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가 비판한 `틈새의 신(God of the Gaps)` 전략과 똑같은 그릇된 논리에 기댄다. 창조론자들은 현재의 지식이나 이해에 나 있는 틈새를 열심히 찾아다닌다. 틈새가 발견되면 그것은 기본적으로 신이 채워야 하는 것이라고 가정된다. ... 신비주의자들은 수수께끼에 기뻐하며 그것이 신비로 남아 있기를 바란다. 과학자들은 다른 이유로 수수깨끼에 기뻐한다. 그것은 그들에게 할 일을 주기 때문이다. 8장에서 다시 거론하겠지만, 일반적으로 말해 종교가 미치는 진정으로 나쁜 효과 중 하나는 "몰이해에 만족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가르친다는 점이다. (196)

나는 이 애매한 변명을 늘어놓는 신학자들이 무지막지하게 부정직하다는 인상을 받지는 않으며, 오히려 그들이 정직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피터 메더워...가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책으로 테야르 드 샤르댕...의 <인간의 현상>을 꼽으면서 했던 말이 저절로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 책의 저자는 남들을 속이기 전에 자신을 속이는 엄청난 수고를 했다는 점에서 부정직을 용서받을 수 있다." (239)

이 글을 읽는 생물학 전공자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나는 다윈의 생각이 엄밀하게 말해서 집단 선택 즉, 성공한 집단이 메타집단으로서 딸 집단을 퍼뜨린다는, 진정한 의미의 집단 선택이 아니라는 말을 덧붙여야겠다. 오히려 다윈은 이타적으로 협력하는 구성원들을 지닌 부족이 더 널리 퍼지고 개체수도 더 늘어난다고 보았다. 다윈의 모형은 영국에서 회색 다람쥐가 붉은 다람쥐를 몰아내고 늘어난 사례와 더 유사하다. 즉 진정한 집단 선택이 아니라 생태적 대체 말이다. (262)

설계적 입장이 실제로 설계된 것들 뿐 아니라 설계되지 않은 것들에도 작동되는 것처럼, 지향적 입장도 계획적인 의도를 지닌 것들뿐 아니라 의도를 지니지 않은 것들에도 작동한다는 점에 주의하자. (279)
......
우리는 우리에게 중요한 행동을 하는 실체에게 의도를 갖다 붙이도록 생물학적으로 프로그램되어 있다. (280)

종이 접기와 그림 베끼기, 두 기술의 핵심적인 차이는 무엇일까? 종이 접기 기술은 일련의 불연속적인 동작들로 이루어지며, 각 동작은 따로 떼어내도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동작들은 대부분 "종이를 반으로 접어라" 같은 것들이다. 집단의 어느 구성원이 그 단계를 엉성하게 수행한다고 해도 다음 구성원은 그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명확히 알아차릴 것이다. 종이 접기의 단계들은 `자기준거적`이다. 그 단계들이 `디지털`적인 이유는 그 때문이다. ... 반면 그림을 베끼는 것은 아날로그적인 기술이다. 이는 누구나 시도할 수 있는 기술로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정확하게 베끼지만 완벽하게 베끼는 사람은 없다. 또 그 정확도는 그것에 기울이는 시간과 정성에 따라 달라지며, 시간과 정성의 양은 연속적으로 변한다. 게다가 일부 집단의 구성원들은 이전의 모형은 곧이곧대로 베끼기보다는 꾸미고 `개선하고자` 한다. (298)

예술가들이 선배 예술가들의 착상과 동기를 본뜨고, 새 동기들은 다른 동기들과 맞물릴 때에만 살아남을 수 있으므로 각각의 예술 학파와 장르는 서로 대체될 수 있는 밈복합체들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사실 복잡한 도상들과 상징들을 추적하는 예술사라는 학문 분야 자체는 밈복합체를 연구하는 분야라고 볼 수 있다. 세부 사항들은 밈풀의 기존 구성원들에 따라 선호되거나 거부되어왔을 것이며, 그 구성원들에게 종교적 밈들이 들어 있을 때도 종종 있을 것이다. (305)

이곳 지구에서 우리는 입장이 좀 묘하다. 우리 각자는 잠시 이곳에 들를 뿐이며, 이유는 모르겠지만 때로는 신성한 목적을 지닌 채 이곳에 들르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일상생활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아는 것이 하나 있다.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에게 행복을 주는 사람들의 웃음과 안녕을 위해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317)

성적 욕망은 인간의 야심과 투쟁 중 상당히 많은 것들의 배후에 있는 추진력이며, 그중 상당수는 빗나간 것들이다. 이것이 조상들의 생활에서 유래한, 빗나간 결과라면, 관대해지고 연민을 느끼려는 욕망에도 같은 말이 적용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 원시적인 성욕 법칙이 문명이라는 여과지를 거치면서 <로미오와 줄리엣>의 연애 장면이 되어 등장하듯이, `우리 대 그들의 투쟁`이라는 원시적인 뇌의 법칙은 캐풀렛 가와 몬터규 가의 지속되는 다툼의 형태로 출현한다. 반면에 이타주의와 감정 이입이라는 원시적인 뇌의 법칙들은 셰익스피어 연극의 서로 화해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를 기쁘게 하는 빗나간 형태로 나타난다. (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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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비아니 구이를 연습하다.

 

 

첫 번째 연습 (10/16, 辛未)

  • 실패했어도 연습은 연습이니까 기록으로 남김.
  • 역시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음. 고기 포를 떠내지 못하고 칼이 방황하는 사이에 고기 두께가 경기순환곡선을 그리기 시작. 급속도로 의욕을 읽고 5*6센티로 자르는 등의 일체 요구사항을 모른 척 하기로 마음 먹음. 내 맘대로 고기를 가위로 오려내 석쇠에 구움.
  • 육고기는 날로 먹을 수 없다는 신념에 따라 고기가 탈 때까지 붙들고 있음.
  • 그래도 불에 구워 맛은 있다는 고객님들의 평가. 석쇠로 구우면 웬만하면 다 맛있는 듯.  
  • 동시에 진행한 잡채와 북어찜은 괜찮게 나왔지만 별로 마음의 위로는 안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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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유교화 과정 - 신유학은 한국 사회를 어떻게 바꾸었나 너머의 역사담론 4
마르티나 도이힐러 지음, 이훈상 옮김 / 너머북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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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게 읽었고 가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가끔 비문, 또는 비문까지는 아니어도 명확하지 않은 문장이 나와 논리의 흐름이 탁해져 아쉽네요.

원문의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 번역 단계에서 커버가 가능한 것들로 보입니다.

설사 원문이 불명확한 것이라해도, 그렇다고 번역도 똑같이 불명확하게 갈 것이 아니라

1) 저자에게 물어보아 명확하게 만들거나 

2) 역자가 개입하여 하나의 명확한 문맥을 잡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번역은 그 자체로 이미 적극적 해석이니까요.

 

다음에 개정할 때 이런 부분 다듬는다면 지금도 좋은 책이 더 좋게 되겠습니다, 편집자님&역자님!

 

몇 개의 예만 들면:

  • p.139 "조선 초기 공신 중 소수 무인은 예외이지만 [누가?]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부상한 것을 시사할 수 있는 분명한 사회적 요소가 없다는 사실은 고위관리의 사회적 기원에 대한 연구와도 일치한다."
  • p.152 "다시 말해서 고대의 제도와 의례를 만든 이들은 이 제도와 의례가 인간의 본성을 면밀히 검토하고 사회제도를 인간의 요구에 맞춤으로써 백성의 마음을 평화롭게 하여 위협하지 않고도 순순히 따라오도록 한 뒤 확립되었으므로 모델로 확실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사회 기능의 제도화는 인간 본성에 강요하지 않고 고대 제왕들의 통치가 지속되도록 보장해야 한다."  앞 문장에 기대와 뒷 문장 뜻을 대충은 알겠는데, 뒷 문장 자체로는 비문임.
  • p.172 "고대에서 이상을 처음 발견했을 때 느낀 흥분이 점차 시들고 부적절한 입법 절차로 불편함이 자리 잡으면서 갈등은 고조되었다. 분명히 고려 전통의 힘과 법률의 도입 그리고 실제 적용 3자 사이에 지체[지체?]가 있으리라고 [누가?] 예견하지 못했다."
  • p.406의 첫번째 문단의 중국과의 비교 부분도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 안 잡힘. 한국의 종족은 사회적으로 단일, 경제적으로는 불균일. 중국의 종족은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불균일. '그럼에도' 한국의 종족에서는 경제적 차이로 인한 사회적 지위 상실이 가능? 무슨 의미인지... 이런 난맥상이 자주 나타남.

 

당시 유교 연구는 주로 육두품에 속하는 이들이 수행하였는데, 이들은 출생 신분에 따라 정부에서 정책을 결정하는 최고 지위에 접근하는 길이 봉쇄된 부류였다. 유교는 출생의 존비와 정치적 출세라는 원래의 고리를 절단하지는 못했다. 그렇더라도 유교는 그 뒤 이러한 고리를 약화시켜 성취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함으로써 고위관직에 나아가는 것을 결정하는 합리적 기준을 추구하는 일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34)

허형 등이 힘을 기울인 주요한 논제는 신유학을 공부한 한국의 초기 학생들의 사고에도 분명히 반영되었다. 이제현은 새로운 이념의 성격을 ‘실학’實學이라고 하였는데, 충선왕에게 충언하는 것의 대의도 실용이었다. 충선왕은 언젠가, 한국이 중국 문물에 그토록 친숙한데도 학자들은 왜 모두 불교에 집착하며 문제[章句] 습득 같은 사소한 것에 사로잡혀 있느냐고 물었다. 고전을 이해하여 자신들의 행동을 닦는 학자들은 어디에 있는가? 이렇듯 학문이 황량해진 것과 관련하여 이제현은 그 책임이 분명히 국왕에게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역설하였다. "만약 국왕께서 교육기관을 확대하고 육경…에 충분히 존경을 표하며 선왕의 도를 분명히 한다면 어느 누가 ‘진유’眞儒(참된 유학)에 등을 돌리고 불교를 따르겠습니까? 아무도 문체의 하찮음에 매여 ‘실학’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42)

신유학의 어떠한 요소가 소수 엘리트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까지도 이러한 낙관론이 지배하도록 정당화하였는가? 이 질의에 대한 답변의 핵심은 의심할 나위 없이 인간의 본성이 정말로 착한가, 나쁜가와 관계없이 인간은 선해질 수 있다는 유교의 확신에 있다. … 예를 들면 부패한 불교 관습을 바꾸는 일은 어떻게 착수해야 하는가? 감정에서 출발해야 하는가? 제사를 잘 가다듬는 데에서 출발해야 하는가? 감정에서 출발한다면 이는 엄밀히 말해 내면에서 출발함을 뜻하며, 제사를 가다듬는 데에서 출발한다면 이는 외부에서 출발함을 뜻한다.
...... 정도전만이 이러한 식견을 가진 것은 아니다. 조선 초기에는 외부의 자극을 활용해 인간을 인간다운 고유함으로 인도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폭넓게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인간이 완전해질 수 있다는 이러한 믿음은 인간 본성이 최고조로 실현될 환경을 조성하라고 요구한다. 그 같은 환경은 오로지 인간 본성의 변덕스러움을 고려하는 입법, 다시 말해 유교에 기초를 둔 입법으로 실현될 수 있다. (47)

고려에서 조선으로 전환하는 시기에 전문 집단으로서 유의 본질을 이해하려면 이들의 사회적 지위를 고려해야만 한다. 신유학은 엘리트의 지위를 확립해주는 중요한 방법을 새롭게 제공하였다. … 그렇지만 고려 말부터 조선 초기에 신유학을 갈고닦는 일은 기존 귀족 체제 출신으로서 자신들의 전문지식을 이용하여 권력을 키우려 한 부류들의 전문적 특성이 되었다. 이렇듯 신유학 교육의 기초가 된 우월성을 강조하는 견해도 세습과 상층계급의 특권에 대한 전통적 중요성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오히려 사회적 귀속에 대한 사회적 기준을 다시금 강화하였다. (50)

신유학에는 사회정치적 개혁에 대한 분명한 가르침이 들어 있어, 고대 중국에서 성인 군주들이 통치한 모범 세계를 실현할 수 있다는 보증을 받아냈다. 더욱이 신유학을[의?] 개혁하려는 추진력은 실천자[무엇의 번역어인지?]를 행동주의자로 바꾸어 사회 변화를 위한 정강...에 참여하도록 만들었다. 조선 초기의 신유학자들은 이렇듯 행동에 대한 요구에 감염되어 한국 사회를 유교화하는 개혁 정강을 결정하고 이행하기 위하여 분투하였다. 그리하여 중국에서 11세기 왕안석...의 개혁이 실패한 이후 이들의 정강은 동아시아 세계에서 가장 야심차고 창조적인 개혁 시도가 되었다. (50)

고려 여성들에게 경제력의 원천은 남자형제들과 나누어 갖는 상속권이었다. 상속권을 부여받는 여성은 매력 있는 신부일 뿐만 아니라 그 가문의 중요한 구성원이기도 했다. 재산을 소유하고 있는 딸이나 누이가 혼인한다고 해서 가문이 이들을 져버리는 것은 가문에 대한 이해에 맞지 않았다. 오히려 사위나 매부를 신부 가문으로 데려오는 일은 필요하고도 바람직한 일이었다. 신혼부부는 처가에 거주하기로 합의함으로써 이렇듯 다양한 이해를 중재할 수 있었으며, 대개 혼인 중매자들이 이를 절충했다. 그리하여 각 세대에서는 딸과 자매를 잃어버리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남자 구성원들을 통하여 정치적 사회적 이익을 획득하게 된다. 그 같은 생활제도는 아주 가까운 관계인 짝, 예를 들면 사촌과 혼인하는 것이 포함될 때 분명히 더 잘 어울렸다. 그리하여 친족과의 유대는 공통 경제 이해로 더욱 강화되었다. (99)

불교 전통은 장례에 큰 영향을 주었다. 묘지명은 유교 문화의 전달자라 할 지위 높은 명사까지도 자기존재에 대한 더 깊은 의미를 불교관점에서 보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사찰에서 임종을 기다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가령 유명한 최사추는 왕실 동쪽에 있는 자운사에서 죽었다. 그리고 유명한 유학자 이색조차 한양 동쪽에 있는 자운사에서 죽었다. 그리고 유명한 유학자 이색조차 한양 동쪽에 있는 신륵사에서 생을 마쳤다. 일부 여성은 죽음이 가까워졌다고 느끼면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어 죽었다. (114)

수세기 동안 고려 사회는 성격이 점차 바뀌었다. 확산되는 중국의 영향으로 부계 중심의 철학이 공계적인 한국의 원래 친족 체제에 미묘하게 덧붙은 것이다. 그 결과는 전통으로부터의 거대한 전환이 아니다. 오히려 전통 한국 체제가 개인과 집단에 부여하는 선택의 폭을 점차 좁히는 것이다. 고려 사회주직 고유의 융통성과 전략은 부계를 기초로 한 규칙에 점차 제한되면서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게 되었다. 위로부터 추진된 이러한 발전이 정부에 몸담고 있는 엘리트 계층의 공직 영역에 영향을 준 것이다. 반면 귀족의 사적 생활로는 거의 뚫고 들어가지 못했다. 그리고 사회의 하위계층에도 거의 침투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왕조 말기에 신유학이 도래하기 위한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때맞춰 한국 사회가 부계적 변환을 완결한 것은 바로 이 신유학 이데올로기의 추진력 덕분이다. (126)

조선 초기 공신 중 소수 무인은 예외이지만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부상한 것을 시사할 수 있는 분명한 사회적 요소가 없다는 사실은 고위관리의 사회적 기원에 대한 연구와도 일치한다. 성명을 확인할 수 있는 조선 초기 관리의 절반가량은 어떤 출계집단 출신인지 알려져 있다. 대체로 약 158개 출계집단이 이를 대표한다. 사회적 배경이 알려진 관리들의 절반가량이 그 가운데 32개 출계집단에서 배출되었다. 이들 친족 집단의 3분의 2는 12세기 중반부터 고위관리직을 차지한 구성원을 배출했다. 말하자면 그들은 고려 귀족의 핵심에 속했다. 분명히 새로 출현한 출계집단은 많지 않았다. ... 요컨대 이들 증거는 새 왕조에 들어 세력을 얻은 새로운 사회 세력은 없었으며 이미 확고하게 굳어진 귀족 가문 출신의 후손이 최고위직을 계속 맡고 있었음이 틀림없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140)

조선왕조를 건립한 이들이 명나라 사례에서 보듯이 어려운 경제상황 때문에 원나라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킨 농부들이 아니라 고려 귀족의 후손이라는 사실이 분명하다면 조선 왕조의 건국을 한국 사회사의 획기적 사건으로 만든 저 역동성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그것은 새로운 왕조의 지적 기반을 확립한 이들이 연구한 자료, 다시 말해서 신유학의 경전에서 나왔음이 분명하다. 바로 이 문헌이 그들에게 도덕적 원칙을 기초로 한 새로운 사회정치적 질서에 대한 전망을 제시하여 그들 당대에 이 같은 질서를 재창조하도록 만든 것이다. (140)

신유학이 처음 도입된 13세기 후반에는 이것이 불교와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을 막으려 하지 않았다. 심지어 신유학을 수용한 처기에 이제현은 신유학 개념에서 불교와 동의어를 찾으려고까지 했다. 즉 그는 불교의 `자비`를 유교의 `인`, `희사`를 유교의 `의`...와 연결했다. 하지만 그 후 신유학자들은 이제현의 유명한 제자 이색이 불교를 철저하게 비판하지 못했다고 비난했다. 비록 그는 불교 신자들의 경제적 낭비를 문제 삼기는 했지만 철학적 비판은 피했던 것이다. 고려 말기 유교는 여전히 불교적 환경에 있었으며 유학자들도 대부분 불교를 사회적 위협으로 간주하지는 않았다. (147)

조선 초기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이들에게 고대 중국 제도를 채용하는 것은 법과 질서를 복구하기 위한 자의적인 방법이 아니라 한국 자신이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던 과거와의 관계를 다시금 활성화하는 것이었다. 한국 역사와 중국 고대를 연결했다고 생각되는 인물은 고대 한국에서 두 번째로 뛰어난 통치자인 기자였다. ... 정도전은 주나라의 창시자 무왕이 기자를 조선의 제후로 임명하였다고 했다. 그리고 기자가 국정을 모범적으로 수행하여 조선을 전 세계에 알렸다고 진술했다. ... 정도전에게 조선 왕조 건립은 기자 조선을 복구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기자의 가르침을 동시대 상황에 옮겨놓음으로써 태조에게 기자의 선정善政울 재창조하도록 하였다. (153)

주자의 <근사록...>과 <소학>도 사서와 함께 일관된 몸체를 형성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신유학의 정수를 담은 <근사록>은 특히 15세기 후반 사회적 입법화에서 중요한 책이었다. 이 책은 철학적 개념을 일상생활의 관심사와 명확하게 연결하면서 도덕적 의무의 실천을 바탕에 두고 정리하였다. 그리고 출계집단을 분명히 밝혀 조상 숭배를 제도화할 것을 강조하였다. 또 이 문헌은 수신에서부터 국가를 굳건한 도덕적 기반 위에 올려놓는 것까지 몇 단계를 모색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정치 문제를 해결하는 기본 텍스트이자 유용한 길잡이로 간주되었다. (162)

고대에서 이상을 처음 발견했을 때 느낀 흥분이 점차 시들고 부적절한 입법 절차로 불편함이 자리 잡으면서 갈등은 고조되었다. 분명히 고려 전통의 힘과 법률의 도입 그리고 실제 적용 3자 사이에 지체가 있으리라고 예견하지 못했다.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정신으로 무장했으리라 기대되던 관리 세계에 새로운 사회 개념을 수용하고 강화하는 것을 저해하는 세력이 숱하게 많았다. 그 같은 혐오가 불러일으킨 가장 분명한 결과가 <경국대전>이다. 그것은 `고제`의 기초 위에 고려 전통을 재구성하려는 거의 한 세기에 걸친 시도를 반영하였다. 그렇지만 이 같은 개혁의 추진력은 사회생활의 중요한 영역, 예컨대 상속 문제에서 전통과 혁신의 타협으로 약해졌다. 이후 그것[경국대전을 말하나?]은 자주 도전을 받았으며 의례편람[책 이름인가?]의 권위에 눌리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그것[무엇?]은 한국 사회의 독자적 질서를 설명하고 정당화하는 데 종종 성공적으로 사용되었다. (172)

신유학의 행동 강령은 조선 왕조가 전개되면서 제기된 다양한 사회, 정치, 경제적 이슈에 착수함으로써 스스로 추진력을 얻게 된 웅장한 구성체였다. 우선 현존하는 사회적 무질서를 대처할 실용적 대안을 찾는 과정에서 고전들 속의 교훈을 사회 정책으로 치환하였다. 그 다음에는 유학자로서 사명감이 점차 차별화되었다. 끝으로 유학자들은 고유 전통이 지속되는 것의 중요성을 충분히 고려하였다. ...... 결국 사회적 유교의 한국적 형태를 설명하는 틀을 제공해준 것은 바로 이같이 확장된 형태의 신유학 철학이었다.
그리하여 조선 사회에는 재구성된 문인계급이 일어났느데, 이들은 한편으로는 혈통과 세습을 기초로 지도적 역할을 주장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신유학적 지식을 이데올로기의 도구로 생각했다. 이 같은 도구로 사대부들은 송나라의 신유학자들이라면 꿈에도 가능하지 않았을 정도로까지 사회정치적 환경을 다시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이다. (177)

그렇게 해서 송나라 신유학자들은 강력한 부계친 이데올로기를 공식화하였는데, 그 구체적인 표현이 조밀하게 조직된 단계... 출계집단에 나타난다. 그리고 이 집단에 일종의 일체감을 부여하는 공동 행위의 하나가 바로 조상에 대한 의례, 즉 제사였다. 제사를 통하여 그 집단의 기가 활성화되고, 가계는 제사를 통하여 더욱 강화된다. 조상에게 제사를 지냄으로써 후손은 조직화되었고, 같은 선조의 기로 결합되었다. 이 집단은 변화하는 세대의 자연 법칙에 따라 내적 원동력을 발전시키는 반면, 바깥 세계를 향한 안정된 하나의 단위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송대 신유학자들의 관념은 고대 중국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으며, 자신들의 시대에 뿌리내리는 데도 성공하지 못한 매우 이상적인 체계였다. (185)

서자의 봉사는 실제로 문제가 있었는데, 이것이 출계 계통을 분명하게 세우는 것과는 반대로 치달았기 때문이다. 서자 계승은 본가가 단절되면서 결과적으로 조상에 대한 본가의 특권이 지가로 옮겨가는 것을 의미하였다. 더구나 서자에게 봉사 우선권을 주는 것은 귀천을 무시하거나 심지어 폐기하여 사회 이동을 불러올 위험이 있었다. 서자의 지위가 갖는 넓은 사회적 함의의 관점에서 볼 때, <경국대전>이 서자를 가능한 한 입후자 또는 봉사자로 언급하려고 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조선 초기 입법가들은 첩의 아들을 조금은 인정함으로써 첩의 운명을 완화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것이 인간의 감정과 법적 합리성이 타협한 것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이는 왕조 후반 이후까지 존속하지는 못했다. (211)

부모 지위와 관계없이 상을 똑같이 치르는 것은 근거가 있는 듯이 보였다. 하지만 인간적 요소에 덧붙여 재산 문제가 개입되므로 그러한 행동은 존비가 뒤섞이는 위험한 일로 이끌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 후 사대부는 사회적으로 지위가 낮은 양부모의 상을 치를 수 없다는 사실을 국왕의 전교로 확인하였다. 예조에서는 사대부가 자신들을 입양한 지위가 낮은 인물을 양부모로 부르지 말도록 하자는 요청도 들어주었다. ... 그리하여 한국적 맥락에서 상복은 신분 구조에 매이게 되었다. 비록 `인간의 감정`은 사회적 경계를 초월한다고 생각하였지만, 귀한 사람이 천한 사람에게 고개 숙여 인사할 수는 없었다. 상례 역시 한국의 최우선적 위계 원칙, 다시 말해서 사회적 구별짓기에 맞추어졌다. (266)

유교를 기초로 한 사회 교리의 채용과 실천은 조선 초기 한국의 사회 상황을 영구히 변화시켜놓았다. 그 변화의 핵심에 가정 영역이 있다. 여성은 사회 변화를 주도하지는 못했지만 사회 변화는 종종 남성보다 여성의 삶에 더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여성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유교적 사회사상의 문화적 접변...을 연구하는 데 적절할 것이다. (317)

봉건 중국의 귀족들 사이에서 행해진 일부다처제는 두 가지 원칙에 따라 규제되었다. 첫 번째 원칙은 혼인할 때 부인들을 한 가문에서 취해야만 했다. 그리고 두 번째 원칙은 그들과는 동시에 혼인해야만 했으며, 다시 혼인할 수는 없었다. 이는 귀족 가문 내부의 안정과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원칙인데, 그 이유는 지위와 가문의 배경이 같은 여성을 질투해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이 원칙은 혼인을 통한 유대를 한 가문으로 집중함으로써 귀족 가문 간의 상호 경쟁을 배제했다. (319)

왕실 혼례를 확립한 것은 국왕과 유료 관료 사회 사이의 이데올로기적 대화의 한 양상이었다. 유교 연구와 유교 이데올로기를 일상의 표준 규범으로 바꾸는 데 관심이 깊었던 세종은 독재적 군주였다. 혼례에서 그는 매우 예민한 사안을 처리해야만 했다. 이것이 고유 전통과 전래된 가치의 양립성에 대한 논란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이 논란은 양반 사회를 두 편으로 갈라놓았다. 그것은 중국식 모델에 의존하는 것을 옹호하는 태도와 고유 관습을 보호하려는 태도였다. ... 학자 관리들은 자신의 혼례를 유교식으로 치르기를 꺼려했으면서도 왕실의 혼례는 유교식 규범과 일치하라고 요구하였다. 이런 모순된 태도는 세종 이후 정치적 쟁점이 되었다. 다시 말해, 양반들이 왕실 혼례에 대해 유교 이데올로기적 순수성을 요구하는 것이 국왕 교화를 위한 주된 내용이 되었다. (339)

세종 재위기간에 여성이 외출하는 것에 대한 법령을 구체적으로 만들었다. 탈 때 몸이 모두 보이지 않는 가마를 왕명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타고 있는 여성의 지위를 표시하기 위해 색깔을 달리 칠하도록 하였다. 곧이어 신중한 사간원 대간들은 양반 여성은 공무를 볼 필요가 없기 때문에 낮에 거리를 다닐 수 없도록 하자는 내용의 상소문을 올렸다.
더 나아가 신유학을 신봉한 입법가들은 `여성의 길을 바로잡기 위해` 그리고 그들을 가사 영역에 가두기 위해 여성이 절에 자주 출입하는 것에 특별히 주목하였다. 1404년 여성이 부모를 추모하는 목적 이외에 절에 출입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 그렇지만 정부도 개탄하였듯이 법이나 권고사항은 별다른 효력이 없었다. 사찰에 출입하는 여성을 제한하려는 사간원의 노력은 1447년 열매를 맺었는데, 여성이 이런 위반을 하게 되면 최고 연장자와 가장 가까운 남성 친족이 공동 책임을 져야 한다는 판결을 국왕이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경국대전>에는 여성이 절에 출입할 경우 장 100대로 처벌하도록 기록해놓았다. (354)

여성이 남편 집으로 편입되는 것이 어떤 고상한 이상으로 합리화되든 여성에게 실제 삶은 고요하지도 엄숙하지도 않았다. 여성은 이데올로기가 자신의 세계에 부과한 기능과 가치에 본능적으로 반응하였다. 제도 안에서 여성은 자신과 자녀들을 보호하기 위해 최고의 생존전략을 고안할 수밖에 없었다. 이데올로기의 장막을 걷어냈을 때, 실제 정책이 모습을 드러냈다. 현실 정책이 여성의 가사 영역을 지배하였다. 남성 방관자에 비해 여성은 끊임없이 계획하고 계산하였고, 갈등과 긴장이 일상생활의 일부였다. ... 여성은 자살로 남편과 시부모의 학대에서 도피하였다. 자식의 안녕에 미치는 큰 이해관계 때문에 처첩 사이의 질투와 불화는 뿌리 깊었으며, 많은 적처는 남편이 낮은 계급 여성과 벌이는 애정 행각에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이러한 `부당성`에 처했는데도 신유학자들은 여성에게 올바른 행위를 하라고 고집했다. 결국 여성은 유교 이데올로기의 본질을 제공하는 역할을 담당해야 했으며, 조정과 사회에 `올바른 인간상`을 제시해야 했다. (380)

송 전기에 당의 옛 귀족들은 권력에서 밀려나고 사회 배경이 다른 새로운 계급이 출현하였다. ... 이러한 상황 변화는 일반적으로 새로운 과거제도에 기인하는데, 당나라의 과거제도는 송대에 들어와서 정제되고 다듬어졌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하나의 요소에 불과하다. 상업의 급속한 발달, 도시화 그리고 갑자기 발전한 인쇄 산업 등을 통한 경제 성장은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징후였다. 그렇지만 170년이 채 지나지 않아 여진족이 북중국을 침입하여 금나라를 세우면서 송나라는 남쪽으로 물러났다. 이러한 충격적인 사건은 엘리트들을 둘러싼 사회 환경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상황 변화가 일어났음을 알려 주었다. 중국 사회에 최근까지 남아 있는 특질을 중국이 획득한 때는 바로 남송시대였다. (392)

가장 분명한 것은 중국의 신유학자들은 당나라 몰락에 개입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
이와 대조적으로 한국에서는 고려의 통치 계급과 조선의 그것 사이에 급격한 단절이 없었다. ...... 남송에서는 유학 교육을 받은 엘리트는 더는 관직 소지자가 아니었으며 관직 소지자는 세습 귀족을 대체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한국의 조선 왕조에서는 신유학자들이 관직자로서 위치를 확립하였으며 새로운 왕조의 세습 엘리트를 구성하였다. 그들은 유교의 친족 조직에 대한 자신들의 안목과 자신들과 사회의 나머지 사이의 경계를 긋기 위하여 점점 더 세련되고 제한된 관료제에 대한 요구를 결합하였다. 고려 왕조 이상으로 엘리트에 대한 정의는 국가의 합법성에 의존하게 되었다. (394)
......
한국에서 종족은 경제적으로 획일적이지는 않지만 사회적으로는 획일적이기 때문에 그토록 오랫동안 생명을 유지한 상층계급의 현상이었다고 정의할 수 있다. (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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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은 늦어서 못 먹고 나가고, 점심은 나가서 하던 일을 끊을 수 없어 패쓰했다.

집에 오니 4. 그때까지 먹은 거라곤 라떼 한잔.

 

바로 눕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일. 일단 집 앞 국밥집에 갔다. (다행히 우리집 코앞에 괜찮은 국밥집이 있다.)

국밥을 먹으며 수첩을 꺼내 직사각형(이것은 밥상)을 그리고, 그 안에 동그라미를 여러 개 그린 뒤 이름을 붙이기 시작했다. 이건 밥, 이건 미역국, 이건 잡채, 이건 해파리, 이건 김치, 이건 케익, 이건 과일....... 내일이 아빠 생신이다. 엄마가 알아서 장 봐와 차리라고 하셨다, 흑. 

 

그렇다면 상의 노른자위에는 제대로 된 고기요리를 하나 놓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소고기 서근을 끊었다. 이 소고기로부터 예상되는, 이 소고기를 가지고 의도하는, 이 소고기가 되어야만 하는 결과물은 언젠가 어느 한정식 집에서 맛있게 먹었던 너비아니 구이. 한식 52개 메뉴 중 하나다.

 

내일의 실전을 위한 오늘의 연습.

 

그러나 이 소고기 덩이에서 떨어져 나와 오늘 저녁 우리집에서 사용된 부분은 결국 너비아니가 되지 못했다.

첫 단계인 포뜨기와 커팅이 엉망이 되면서, 현실의 소고기는 너비아니라는 이데아로부터 갈수록 멀어졌다.

마지막 단계인 굽기에도 실패했다. 가운데 것은 타고, 바깥 것은 가까스로 익고. 그 사이 육즙은 소천하시어 전체적으로 고기에 윤기나 촉촉함이란 없다.

 

내 손에 남은 결과물은 삐뚤빼뚤한 초등학생 글씨 같은 느낌을 준다.

이것에 붙일 수 있는 정직한 이름은 아마도 익힌 고기'?

 

내일 부모님과 함께 먹을 실전 너비아니는 좀 더 나은 모양이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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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덕생채를 연습하다.

 

 

첫 번째 연습 (10/15 庚午)

  • 오늘은 해 지고 나서야 여유가 생겼다. 가끔 그런 주말이 있다.
  • 도전해 볼 새로운 요리를 조리사 메뉴 중에서 골라 보려는데 전에 사둔 피더덕과 눈이 마주쳤다.
  • 그래, 너부터 손 봐 주마.
  • 단 시간에 쫓기지 않고 천천히 하마.
  • 밀린 팟캐스트 들으며 세월아 네월아 더덕을 다듬고 무쳤다. 한 시간은 흐른 듯.
  • 사진으로 보니, 주황색 담채화 한 장. 다시 말해, 색이 고르지가 못하다!
  • 특히 양념이 제대로 묻지 않은 허연 (게다가 굵은) 가닥들이 맨 위에 올라와 있어 민망! 이런 아이들은 적발하여 밑으로 숨기자, 다음엔.  
  • 파의 흰 쪽은 다 썼기에 파란 쪽을 채쳐 넣었더니 거뭇한 이물질로 보이기도 함. 가능하면 흰 부분을 사용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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