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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신 - 신은 과연 인간을 창조했는가?
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한음 옮김 / 김영사 / 2007년 7월
평점 :
* 눈에 띤 오역을 아래 적어 둠. 이것은 역자의 단순 착각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임. 다시 말해 전체 번역의 수준을 의심하는 것은 아님! 이 책, 전반적으로 번역 괜찮음.
p.217 맨 아래 단락
"다시 말하지만 생명의 진화기원는 오직 한 번 일어나야 했을 독특한 (혹은 독특했을 수 있는) 사건이었기에, 생명의 진화는 생명의 기원과 전혀 경우가 다르다. 종이 자신의 환경에 적응하는 양상은 수없이 많다."
- 생명이 생겨나는 것과 생겨난 생명이 진화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과정임을 계속 설명하고 있음. 생명의 탄생은 딱 한 번 일어난 일--'엄청난 우연설'이 작용 가능함, 생겨난 생명이 각 환경에 맞춰 진화하는 일은 각개로 일어나지만 또 상당한 법칙--여기선 우연설은 해당이 안 됨--을 따르는 일이었음. (그 뒤에 진화하는 생명들 중 의식을 갖게 되는 경우는 물론 또 하나의 엄청난 도약임.) 이 장에서는 기원에 대한 설명방식 중 하나로서 인본 원리를 소개하고 있음.
- 원문: "The evolution of life is a completely different case from the origin of life because, to repeat, the origin of life was (or could have been) a unique event which had to happen only once. The adaptive fit of species to their separate environments, on the other hand. is millionfold, and ongoing." (원서 p.139)
유신론적 신앙 체계 내에서 신은 인간사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는 기도자에게 응답하고 죄를 용서하거나 처벌하며, 기적을 이룸으로써 세계에 개입하고 선행과 악행에 시시콜콜 관심을 가지며, 우리가 언제 선행과 악행을 행하는지... 안다. 한편 이신론자는 초자연적 지성을 믿지만, 그 지성이 우주를 지배하는 법칙들을 설정하는 일에만 관여할 뿐 인간사에 개입하거나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범신론자는 초자연적인 신을 아예 믿지 않지만 신이라는 단어를 자연이나 우주 또는 그 움직임을 지배하는 법칙을 가리키는 비초자연적 동의어로 사용한다. ... 이신론자는 신이 일종의 우주적 지성이라고 보는 반면 범신론자는 신을 우주 법칙의 비유적 또는 시적 동의어라고 본다는 점에서 다르다. 범신론은 매력적으로 다듬은 무신론이다. 이신론은 물을 타서 약하게 만든 유신론이다. (33)
그렇다고 누군가를 격분시키거나 상처 주는 것을 지지한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다른 면에서는 지극히 세속적인 우리 사회에서 종교가 걸맞지 않은 특권을 누린다는 점이 의아스럽다. 모든 정치가들은 자신이 등장하는 모욕적인 만화에 익숙해져야 한다. ... 종교는 뭐가 그렇게 특별하기에 그런 특권을 누리는 것을 당연시하는 걸까? ... 나는 이 책에서 종교에 대한 존중이 비할 바 없이 지나치다는 관점에서 내 견해를 펼치고자 한다. 나는 일부러 분노를 자극하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다른 것들을 다룰 때보다 더 부드럽게 종교를 다룬답시고 미적지근하게 글을 전개해 나가지도 않을 것이다. (47)
"미합중국 정부는 그 어떤 의미에서도 기독교에 토대를 두지 않고, 법이나 종교나 이슬람교에 대한 어떤 증오도 지니고 있지 않으며, 앞서 말한 주들은 이슬람 국가에 대해 어떤 전쟁도, 적대 행위도 한 적이 없으므로, 종교적 견해에서 비롯되는 어떤 구실도 결코 두 나라의 화합을 해치지 않을 것임을 선언하는 바이다." ...... 세속주의를 토대로 한 미국이 지금 가장 열성적인 기독교 국가가 되어 있는 반면, 입헌군주가 수장인 국교가 있는 영국이 가장 덜 종교적인 국가가 되어 있다는 역설적인 사실이 자주 언급되곤 한다. (65)
"영국에 대해 말할 때 시골 신부가 주요인물로 등장하는 경우가 있다. 잘 닦은 신발, 친절한 태도, 차에 대한 애정...... 이런 점잖고도 별난 모습은 비종교인을 불편하게 만들지 않는 종교를 대변했다. 그는 실존주의적 불안을 유발하지도 않을 것이고, 구원을 받았느냐는 물음으로 당신을 몰아붙이지도 않을 것이며, 십자군 전쟁에 나서라고 설교하거나 더 높은 권위자의 이름으로 길섶에 폭탄을 파묻는 짓은 더더욱 하지 않을 것이다." ... 더 나아가 프레이저는 멋진 시골 신부가 사실상 영국 전역에 기독교에 맞설 수 있는 백신 역할을 했다고 말한다. (67)
제시된 명제는 너무나 무의미해서 확률이라는 그럴 듯한 이름으로 부를 수가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신의 존재 문제가 원칙적으로 대답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전제로부터 그의 존재와 비존재가 동등한 확률을 갖는다는 결론으로 건너뛰는 오류를 흔히 접하게 된다. (83) ...... 중요한 것은 신이 반증 불가능하냐가 아니라(반증 불가능하지 않다) 신의 존재가 개연성이 있느냐이다. 그것은 다른 문제다. 일부 반증 불가능하지 않은 것들은 다른 반증 불가능하지 않은 것들보다 개연성이 훨씬 떨어진다고 판단된다. 신을 확률 스펙트럼과 무관하다고 볼 이유가 전혀 없다. 그리고 신이 증명될 수도, 반증될 수도 없기 때문에 신의 존재 확률이 50퍼센트라고 가정할 이유도 명백히 없다. 앞으로 알게 되겠지만, 사실은 정반대다. (87)
과학은 `어떻게`라는 질문들에만 관심이 있고, `왜`라는 질문들에 대답할 자격이 있는 것은 신학뿐이라는 말은 지겨울 정도로 진부하다(그리고 많은 진부한 표현들과달리, 그것은 옳은 것도 아니다). `왜`라는 질문이란 대체 무엇일까? `왜(why)`로 시작하는 영어 문장이 모두 다 타당한 질문은 아니다. 유니콘은 왜 공허한가? 아예 대답할 가치가 없는 질문들도 있다. 추상은 무슨 색깔일까? 희망은 무슨 냄새일까? 문법적으로 옳은 질문이라고 해서, 그 문장이 의미 있다거나 우리의 진지한 관심을 끌 자격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뿐 아니라 설령 그 질문이 진정한 것이라고 해도 과학이 답할 수 없다는 사실이 종교가 답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91)
나는 오랜 인생 경험을 했지만 그처럼 어리석은 생각은 한 번도 접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에 열거되어 있는 경이로운 증명들 가운데는 그와 같이 터무니없는 것들이 많다. ...... 41. 정서적 공갈 논증. 신은 당신을 사랑한다. 그런데 어떻게 당신이 무정하게 신을 믿지 않을 수 있는가? 따라서 신은 존재한다. (135)
그러자 왓슨이 이렇게 대꾸했다. "저는 우리가 무언가를 위해 존재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단지 진화의 산물일 뿐입니다. 그러면 누군가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요. `저런, 목적이 없다고 생각하다니 당신의 인생은 참 황량하겠소.` 하지만 나는 맛있는 점심을 먹을 기대감에 차 있습니다." 그 말대로 우리는 함께 맛있는 점심을 먹었다. (159)
비개연성 논증은 복잡한 것들이 우연을 통해 출현할 수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우연을 통해 출현하다`가 `계획적인 설계 없이 출현하다`와 동의어라고 규정한다. 그러니 그들이 비개연성을 설계의 증거라고 생각하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 다윈주의를 깊이 이해하면 설계가 우연의 유일한 대안이라는 손쉬운 가정에 신중한 태도를 보여야 하며, 서서히 복잡성이 증가해가는 계단을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윈 이전에도 흄 같은 철학자들은 생명의 비개연성이 반드시 생명이 누군가에 의해 설계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며, 그저 대단을 떠올릴 수 없다는 의미임을 간파했다. 다윈 이후 우리 모두는 설계라는 개념 자체가 의심스럽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껴야 했다. (176)
앳킨스는 앞서 언급한 책에서 가능한 한 노력을 들이지 않고 생명이 있는 우주를 창조하려는 게으른 신을 가정한 후 이 생각의 흐름을 이어가다가 마침내 현명하게도 신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 앳킨스는 차근차근 게으른 신이 할 일을 줄여나감으로써 결국 그가 아무 일도 하지 않게 하는 데 성공한다. 그는 아예 존재하는 수고조차 하지 않을지 모른다. 우디 앨런...의 푸념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오는 것 같다. "신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나는 그가 악하지 않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신에 대해 할 수 있는 최악의 말은 기본적으로 그가 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184)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의 특수한 사례륽 찾는 것은 기본적으로 비과학적인 방식이다. 현재의 무지로부터 주장을 펼치는 특수한 사례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가 비판한 `틈새의 신(God of the Gaps)` 전략과 똑같은 그릇된 논리에 기댄다. 창조론자들은 현재의 지식이나 이해에 나 있는 틈새를 열심히 찾아다닌다. 틈새가 발견되면 그것은 기본적으로 신이 채워야 하는 것이라고 가정된다. ... 신비주의자들은 수수께끼에 기뻐하며 그것이 신비로 남아 있기를 바란다. 과학자들은 다른 이유로 수수깨끼에 기뻐한다. 그것은 그들에게 할 일을 주기 때문이다. 8장에서 다시 거론하겠지만, 일반적으로 말해 종교가 미치는 진정으로 나쁜 효과 중 하나는 "몰이해에 만족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가르친다는 점이다. (196)
나는 이 애매한 변명을 늘어놓는 신학자들이 무지막지하게 부정직하다는 인상을 받지는 않으며, 오히려 그들이 정직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피터 메더워...가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책으로 테야르 드 샤르댕...의 <인간의 현상>을 꼽으면서 했던 말이 저절로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 책의 저자는 남들을 속이기 전에 자신을 속이는 엄청난 수고를 했다는 점에서 부정직을 용서받을 수 있다." (239)
이 글을 읽는 생물학 전공자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나는 다윈의 생각이 엄밀하게 말해서 집단 선택 즉, 성공한 집단이 메타집단으로서 딸 집단을 퍼뜨린다는, 진정한 의미의 집단 선택이 아니라는 말을 덧붙여야겠다. 오히려 다윈은 이타적으로 협력하는 구성원들을 지닌 부족이 더 널리 퍼지고 개체수도 더 늘어난다고 보았다. 다윈의 모형은 영국에서 회색 다람쥐가 붉은 다람쥐를 몰아내고 늘어난 사례와 더 유사하다. 즉 진정한 집단 선택이 아니라 생태적 대체 말이다. (262)
설계적 입장이 실제로 설계된 것들 뿐 아니라 설계되지 않은 것들에도 작동되는 것처럼, 지향적 입장도 계획적인 의도를 지닌 것들뿐 아니라 의도를 지니지 않은 것들에도 작동한다는 점에 주의하자. (279) ...... 우리는 우리에게 중요한 행동을 하는 실체에게 의도를 갖다 붙이도록 생물학적으로 프로그램되어 있다. (280)
종이 접기와 그림 베끼기, 두 기술의 핵심적인 차이는 무엇일까? 종이 접기 기술은 일련의 불연속적인 동작들로 이루어지며, 각 동작은 따로 떼어내도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동작들은 대부분 "종이를 반으로 접어라" 같은 것들이다. 집단의 어느 구성원이 그 단계를 엉성하게 수행한다고 해도 다음 구성원은 그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명확히 알아차릴 것이다. 종이 접기의 단계들은 `자기준거적`이다. 그 단계들이 `디지털`적인 이유는 그 때문이다. ... 반면 그림을 베끼는 것은 아날로그적인 기술이다. 이는 누구나 시도할 수 있는 기술로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정확하게 베끼지만 완벽하게 베끼는 사람은 없다. 또 그 정확도는 그것에 기울이는 시간과 정성에 따라 달라지며, 시간과 정성의 양은 연속적으로 변한다. 게다가 일부 집단의 구성원들은 이전의 모형은 곧이곧대로 베끼기보다는 꾸미고 `개선하고자` 한다. (298)
예술가들이 선배 예술가들의 착상과 동기를 본뜨고, 새 동기들은 다른 동기들과 맞물릴 때에만 살아남을 수 있으므로 각각의 예술 학파와 장르는 서로 대체될 수 있는 밈복합체들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사실 복잡한 도상들과 상징들을 추적하는 예술사라는 학문 분야 자체는 밈복합체를 연구하는 분야라고 볼 수 있다. 세부 사항들은 밈풀의 기존 구성원들에 따라 선호되거나 거부되어왔을 것이며, 그 구성원들에게 종교적 밈들이 들어 있을 때도 종종 있을 것이다. (305)
이곳 지구에서 우리는 입장이 좀 묘하다. 우리 각자는 잠시 이곳에 들를 뿐이며, 이유는 모르겠지만 때로는 신성한 목적을 지닌 채 이곳에 들르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일상생활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아는 것이 하나 있다.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에게 행복을 주는 사람들의 웃음과 안녕을 위해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317)
성적 욕망은 인간의 야심과 투쟁 중 상당히 많은 것들의 배후에 있는 추진력이며, 그중 상당수는 빗나간 것들이다. 이것이 조상들의 생활에서 유래한, 빗나간 결과라면, 관대해지고 연민을 느끼려는 욕망에도 같은 말이 적용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 원시적인 성욕 법칙이 문명이라는 여과지를 거치면서 <로미오와 줄리엣>의 연애 장면이 되어 등장하듯이, `우리 대 그들의 투쟁`이라는 원시적인 뇌의 법칙은 캐풀렛 가와 몬터규 가의 지속되는 다툼의 형태로 출현한다. 반면에 이타주의와 감정 이입이라는 원시적인 뇌의 법칙들은 셰익스피어 연극의 서로 화해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를 기쁘게 하는 빗나간 형태로 나타난다. (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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