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유교화 과정 - 신유학은 한국 사회를 어떻게 바꾸었나 너머의 역사담론 4
마르티나 도이힐러 지음, 이훈상 옮김 / 너머북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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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게 읽었고 가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가끔 비문, 또는 비문까지는 아니어도 명확하지 않은 문장이 나와 논리의 흐름이 탁해져 아쉽네요.

원문의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 번역 단계에서 커버가 가능한 것들로 보입니다.

설사 원문이 불명확한 것이라해도, 그렇다고 번역도 똑같이 불명확하게 갈 것이 아니라

1) 저자에게 물어보아 명확하게 만들거나 

2) 역자가 개입하여 하나의 명확한 문맥을 잡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번역은 그 자체로 이미 적극적 해석이니까요.

 

다음에 개정할 때 이런 부분 다듬는다면 지금도 좋은 책이 더 좋게 되겠습니다, 편집자님&역자님!

 

몇 개의 예만 들면:

  • p.139 "조선 초기 공신 중 소수 무인은 예외이지만 [누가?]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부상한 것을 시사할 수 있는 분명한 사회적 요소가 없다는 사실은 고위관리의 사회적 기원에 대한 연구와도 일치한다."
  • p.152 "다시 말해서 고대의 제도와 의례를 만든 이들은 이 제도와 의례가 인간의 본성을 면밀히 검토하고 사회제도를 인간의 요구에 맞춤으로써 백성의 마음을 평화롭게 하여 위협하지 않고도 순순히 따라오도록 한 뒤 확립되었으므로 모델로 확실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사회 기능의 제도화는 인간 본성에 강요하지 않고 고대 제왕들의 통치가 지속되도록 보장해야 한다."  앞 문장에 기대와 뒷 문장 뜻을 대충은 알겠는데, 뒷 문장 자체로는 비문임.
  • p.172 "고대에서 이상을 처음 발견했을 때 느낀 흥분이 점차 시들고 부적절한 입법 절차로 불편함이 자리 잡으면서 갈등은 고조되었다. 분명히 고려 전통의 힘과 법률의 도입 그리고 실제 적용 3자 사이에 지체[지체?]가 있으리라고 [누가?] 예견하지 못했다."
  • p.406의 첫번째 문단의 중국과의 비교 부분도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 안 잡힘. 한국의 종족은 사회적으로 단일, 경제적으로는 불균일. 중국의 종족은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불균일. '그럼에도' 한국의 종족에서는 경제적 차이로 인한 사회적 지위 상실이 가능? 무슨 의미인지... 이런 난맥상이 자주 나타남.

 

당시 유교 연구는 주로 육두품에 속하는 이들이 수행하였는데, 이들은 출생 신분에 따라 정부에서 정책을 결정하는 최고 지위에 접근하는 길이 봉쇄된 부류였다. 유교는 출생의 존비와 정치적 출세라는 원래의 고리를 절단하지는 못했다. 그렇더라도 유교는 그 뒤 이러한 고리를 약화시켜 성취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함으로써 고위관직에 나아가는 것을 결정하는 합리적 기준을 추구하는 일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34)

허형 등이 힘을 기울인 주요한 논제는 신유학을 공부한 한국의 초기 학생들의 사고에도 분명히 반영되었다. 이제현은 새로운 이념의 성격을 ‘실학’實學이라고 하였는데, 충선왕에게 충언하는 것의 대의도 실용이었다. 충선왕은 언젠가, 한국이 중국 문물에 그토록 친숙한데도 학자들은 왜 모두 불교에 집착하며 문제[章句] 습득 같은 사소한 것에 사로잡혀 있느냐고 물었다. 고전을 이해하여 자신들의 행동을 닦는 학자들은 어디에 있는가? 이렇듯 학문이 황량해진 것과 관련하여 이제현은 그 책임이 분명히 국왕에게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역설하였다. "만약 국왕께서 교육기관을 확대하고 육경…에 충분히 존경을 표하며 선왕의 도를 분명히 한다면 어느 누가 ‘진유’眞儒(참된 유학)에 등을 돌리고 불교를 따르겠습니까? 아무도 문체의 하찮음에 매여 ‘실학’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42)

신유학의 어떠한 요소가 소수 엘리트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까지도 이러한 낙관론이 지배하도록 정당화하였는가? 이 질의에 대한 답변의 핵심은 의심할 나위 없이 인간의 본성이 정말로 착한가, 나쁜가와 관계없이 인간은 선해질 수 있다는 유교의 확신에 있다. … 예를 들면 부패한 불교 관습을 바꾸는 일은 어떻게 착수해야 하는가? 감정에서 출발해야 하는가? 제사를 잘 가다듬는 데에서 출발해야 하는가? 감정에서 출발한다면 이는 엄밀히 말해 내면에서 출발함을 뜻하며, 제사를 가다듬는 데에서 출발한다면 이는 외부에서 출발함을 뜻한다.
...... 정도전만이 이러한 식견을 가진 것은 아니다. 조선 초기에는 외부의 자극을 활용해 인간을 인간다운 고유함으로 인도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폭넓게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인간이 완전해질 수 있다는 이러한 믿음은 인간 본성이 최고조로 실현될 환경을 조성하라고 요구한다. 그 같은 환경은 오로지 인간 본성의 변덕스러움을 고려하는 입법, 다시 말해 유교에 기초를 둔 입법으로 실현될 수 있다. (47)

고려에서 조선으로 전환하는 시기에 전문 집단으로서 유의 본질을 이해하려면 이들의 사회적 지위를 고려해야만 한다. 신유학은 엘리트의 지위를 확립해주는 중요한 방법을 새롭게 제공하였다. … 그렇지만 고려 말부터 조선 초기에 신유학을 갈고닦는 일은 기존 귀족 체제 출신으로서 자신들의 전문지식을 이용하여 권력을 키우려 한 부류들의 전문적 특성이 되었다. 이렇듯 신유학 교육의 기초가 된 우월성을 강조하는 견해도 세습과 상층계급의 특권에 대한 전통적 중요성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오히려 사회적 귀속에 대한 사회적 기준을 다시금 강화하였다. (50)

신유학에는 사회정치적 개혁에 대한 분명한 가르침이 들어 있어, 고대 중국에서 성인 군주들이 통치한 모범 세계를 실현할 수 있다는 보증을 받아냈다. 더욱이 신유학을[의?] 개혁하려는 추진력은 실천자[무엇의 번역어인지?]를 행동주의자로 바꾸어 사회 변화를 위한 정강...에 참여하도록 만들었다. 조선 초기의 신유학자들은 이렇듯 행동에 대한 요구에 감염되어 한국 사회를 유교화하는 개혁 정강을 결정하고 이행하기 위하여 분투하였다. 그리하여 중국에서 11세기 왕안석...의 개혁이 실패한 이후 이들의 정강은 동아시아 세계에서 가장 야심차고 창조적인 개혁 시도가 되었다. (50)

고려 여성들에게 경제력의 원천은 남자형제들과 나누어 갖는 상속권이었다. 상속권을 부여받는 여성은 매력 있는 신부일 뿐만 아니라 그 가문의 중요한 구성원이기도 했다. 재산을 소유하고 있는 딸이나 누이가 혼인한다고 해서 가문이 이들을 져버리는 것은 가문에 대한 이해에 맞지 않았다. 오히려 사위나 매부를 신부 가문으로 데려오는 일은 필요하고도 바람직한 일이었다. 신혼부부는 처가에 거주하기로 합의함으로써 이렇듯 다양한 이해를 중재할 수 있었으며, 대개 혼인 중매자들이 이를 절충했다. 그리하여 각 세대에서는 딸과 자매를 잃어버리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남자 구성원들을 통하여 정치적 사회적 이익을 획득하게 된다. 그 같은 생활제도는 아주 가까운 관계인 짝, 예를 들면 사촌과 혼인하는 것이 포함될 때 분명히 더 잘 어울렸다. 그리하여 친족과의 유대는 공통 경제 이해로 더욱 강화되었다. (99)

불교 전통은 장례에 큰 영향을 주었다. 묘지명은 유교 문화의 전달자라 할 지위 높은 명사까지도 자기존재에 대한 더 깊은 의미를 불교관점에서 보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사찰에서 임종을 기다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가령 유명한 최사추는 왕실 동쪽에 있는 자운사에서 죽었다. 그리고 유명한 유학자 이색조차 한양 동쪽에 있는 자운사에서 죽었다. 그리고 유명한 유학자 이색조차 한양 동쪽에 있는 신륵사에서 생을 마쳤다. 일부 여성은 죽음이 가까워졌다고 느끼면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어 죽었다. (114)

수세기 동안 고려 사회는 성격이 점차 바뀌었다. 확산되는 중국의 영향으로 부계 중심의 철학이 공계적인 한국의 원래 친족 체제에 미묘하게 덧붙은 것이다. 그 결과는 전통으로부터의 거대한 전환이 아니다. 오히려 전통 한국 체제가 개인과 집단에 부여하는 선택의 폭을 점차 좁히는 것이다. 고려 사회주직 고유의 융통성과 전략은 부계를 기초로 한 규칙에 점차 제한되면서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게 되었다. 위로부터 추진된 이러한 발전이 정부에 몸담고 있는 엘리트 계층의 공직 영역에 영향을 준 것이다. 반면 귀족의 사적 생활로는 거의 뚫고 들어가지 못했다. 그리고 사회의 하위계층에도 거의 침투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왕조 말기에 신유학이 도래하기 위한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때맞춰 한국 사회가 부계적 변환을 완결한 것은 바로 이 신유학 이데올로기의 추진력 덕분이다. (126)

조선 초기 공신 중 소수 무인은 예외이지만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부상한 것을 시사할 수 있는 분명한 사회적 요소가 없다는 사실은 고위관리의 사회적 기원에 대한 연구와도 일치한다. 성명을 확인할 수 있는 조선 초기 관리의 절반가량은 어떤 출계집단 출신인지 알려져 있다. 대체로 약 158개 출계집단이 이를 대표한다. 사회적 배경이 알려진 관리들의 절반가량이 그 가운데 32개 출계집단에서 배출되었다. 이들 친족 집단의 3분의 2는 12세기 중반부터 고위관리직을 차지한 구성원을 배출했다. 말하자면 그들은 고려 귀족의 핵심에 속했다. 분명히 새로 출현한 출계집단은 많지 않았다. ... 요컨대 이들 증거는 새 왕조에 들어 세력을 얻은 새로운 사회 세력은 없었으며 이미 확고하게 굳어진 귀족 가문 출신의 후손이 최고위직을 계속 맡고 있었음이 틀림없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140)

조선왕조를 건립한 이들이 명나라 사례에서 보듯이 어려운 경제상황 때문에 원나라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킨 농부들이 아니라 고려 귀족의 후손이라는 사실이 분명하다면 조선 왕조의 건국을 한국 사회사의 획기적 사건으로 만든 저 역동성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그것은 새로운 왕조의 지적 기반을 확립한 이들이 연구한 자료, 다시 말해서 신유학의 경전에서 나왔음이 분명하다. 바로 이 문헌이 그들에게 도덕적 원칙을 기초로 한 새로운 사회정치적 질서에 대한 전망을 제시하여 그들 당대에 이 같은 질서를 재창조하도록 만든 것이다. (140)

신유학이 처음 도입된 13세기 후반에는 이것이 불교와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을 막으려 하지 않았다. 심지어 신유학을 수용한 처기에 이제현은 신유학 개념에서 불교와 동의어를 찾으려고까지 했다. 즉 그는 불교의 `자비`를 유교의 `인`, `희사`를 유교의 `의`...와 연결했다. 하지만 그 후 신유학자들은 이제현의 유명한 제자 이색이 불교를 철저하게 비판하지 못했다고 비난했다. 비록 그는 불교 신자들의 경제적 낭비를 문제 삼기는 했지만 철학적 비판은 피했던 것이다. 고려 말기 유교는 여전히 불교적 환경에 있었으며 유학자들도 대부분 불교를 사회적 위협으로 간주하지는 않았다. (147)

조선 초기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이들에게 고대 중국 제도를 채용하는 것은 법과 질서를 복구하기 위한 자의적인 방법이 아니라 한국 자신이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던 과거와의 관계를 다시금 활성화하는 것이었다. 한국 역사와 중국 고대를 연결했다고 생각되는 인물은 고대 한국에서 두 번째로 뛰어난 통치자인 기자였다. ... 정도전은 주나라의 창시자 무왕이 기자를 조선의 제후로 임명하였다고 했다. 그리고 기자가 국정을 모범적으로 수행하여 조선을 전 세계에 알렸다고 진술했다. ... 정도전에게 조선 왕조 건립은 기자 조선을 복구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기자의 가르침을 동시대 상황에 옮겨놓음으로써 태조에게 기자의 선정善政울 재창조하도록 하였다. (153)

주자의 <근사록...>과 <소학>도 사서와 함께 일관된 몸체를 형성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신유학의 정수를 담은 <근사록>은 특히 15세기 후반 사회적 입법화에서 중요한 책이었다. 이 책은 철학적 개념을 일상생활의 관심사와 명확하게 연결하면서 도덕적 의무의 실천을 바탕에 두고 정리하였다. 그리고 출계집단을 분명히 밝혀 조상 숭배를 제도화할 것을 강조하였다. 또 이 문헌은 수신에서부터 국가를 굳건한 도덕적 기반 위에 올려놓는 것까지 몇 단계를 모색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정치 문제를 해결하는 기본 텍스트이자 유용한 길잡이로 간주되었다. (162)

고대에서 이상을 처음 발견했을 때 느낀 흥분이 점차 시들고 부적절한 입법 절차로 불편함이 자리 잡으면서 갈등은 고조되었다. 분명히 고려 전통의 힘과 법률의 도입 그리고 실제 적용 3자 사이에 지체가 있으리라고 예견하지 못했다.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정신으로 무장했으리라 기대되던 관리 세계에 새로운 사회 개념을 수용하고 강화하는 것을 저해하는 세력이 숱하게 많았다. 그 같은 혐오가 불러일으킨 가장 분명한 결과가 <경국대전>이다. 그것은 `고제`의 기초 위에 고려 전통을 재구성하려는 거의 한 세기에 걸친 시도를 반영하였다. 그렇지만 이 같은 개혁의 추진력은 사회생활의 중요한 영역, 예컨대 상속 문제에서 전통과 혁신의 타협으로 약해졌다. 이후 그것[경국대전을 말하나?]은 자주 도전을 받았으며 의례편람[책 이름인가?]의 권위에 눌리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그것[무엇?]은 한국 사회의 독자적 질서를 설명하고 정당화하는 데 종종 성공적으로 사용되었다. (172)

신유학의 행동 강령은 조선 왕조가 전개되면서 제기된 다양한 사회, 정치, 경제적 이슈에 착수함으로써 스스로 추진력을 얻게 된 웅장한 구성체였다. 우선 현존하는 사회적 무질서를 대처할 실용적 대안을 찾는 과정에서 고전들 속의 교훈을 사회 정책으로 치환하였다. 그 다음에는 유학자로서 사명감이 점차 차별화되었다. 끝으로 유학자들은 고유 전통이 지속되는 것의 중요성을 충분히 고려하였다. ...... 결국 사회적 유교의 한국적 형태를 설명하는 틀을 제공해준 것은 바로 이같이 확장된 형태의 신유학 철학이었다.
그리하여 조선 사회에는 재구성된 문인계급이 일어났느데, 이들은 한편으로는 혈통과 세습을 기초로 지도적 역할을 주장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신유학적 지식을 이데올로기의 도구로 생각했다. 이 같은 도구로 사대부들은 송나라의 신유학자들이라면 꿈에도 가능하지 않았을 정도로까지 사회정치적 환경을 다시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이다. (177)

그렇게 해서 송나라 신유학자들은 강력한 부계친 이데올로기를 공식화하였는데, 그 구체적인 표현이 조밀하게 조직된 단계... 출계집단에 나타난다. 그리고 이 집단에 일종의 일체감을 부여하는 공동 행위의 하나가 바로 조상에 대한 의례, 즉 제사였다. 제사를 통하여 그 집단의 기가 활성화되고, 가계는 제사를 통하여 더욱 강화된다. 조상에게 제사를 지냄으로써 후손은 조직화되었고, 같은 선조의 기로 결합되었다. 이 집단은 변화하는 세대의 자연 법칙에 따라 내적 원동력을 발전시키는 반면, 바깥 세계를 향한 안정된 하나의 단위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송대 신유학자들의 관념은 고대 중국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으며, 자신들의 시대에 뿌리내리는 데도 성공하지 못한 매우 이상적인 체계였다. (185)

서자의 봉사는 실제로 문제가 있었는데, 이것이 출계 계통을 분명하게 세우는 것과는 반대로 치달았기 때문이다. 서자 계승은 본가가 단절되면서 결과적으로 조상에 대한 본가의 특권이 지가로 옮겨가는 것을 의미하였다. 더구나 서자에게 봉사 우선권을 주는 것은 귀천을 무시하거나 심지어 폐기하여 사회 이동을 불러올 위험이 있었다. 서자의 지위가 갖는 넓은 사회적 함의의 관점에서 볼 때, <경국대전>이 서자를 가능한 한 입후자 또는 봉사자로 언급하려고 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조선 초기 입법가들은 첩의 아들을 조금은 인정함으로써 첩의 운명을 완화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것이 인간의 감정과 법적 합리성이 타협한 것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이는 왕조 후반 이후까지 존속하지는 못했다. (211)

부모 지위와 관계없이 상을 똑같이 치르는 것은 근거가 있는 듯이 보였다. 하지만 인간적 요소에 덧붙여 재산 문제가 개입되므로 그러한 행동은 존비가 뒤섞이는 위험한 일로 이끌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 후 사대부는 사회적으로 지위가 낮은 양부모의 상을 치를 수 없다는 사실을 국왕의 전교로 확인하였다. 예조에서는 사대부가 자신들을 입양한 지위가 낮은 인물을 양부모로 부르지 말도록 하자는 요청도 들어주었다. ... 그리하여 한국적 맥락에서 상복은 신분 구조에 매이게 되었다. 비록 `인간의 감정`은 사회적 경계를 초월한다고 생각하였지만, 귀한 사람이 천한 사람에게 고개 숙여 인사할 수는 없었다. 상례 역시 한국의 최우선적 위계 원칙, 다시 말해서 사회적 구별짓기에 맞추어졌다. (266)

유교를 기초로 한 사회 교리의 채용과 실천은 조선 초기 한국의 사회 상황을 영구히 변화시켜놓았다. 그 변화의 핵심에 가정 영역이 있다. 여성은 사회 변화를 주도하지는 못했지만 사회 변화는 종종 남성보다 여성의 삶에 더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여성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유교적 사회사상의 문화적 접변...을 연구하는 데 적절할 것이다. (317)

봉건 중국의 귀족들 사이에서 행해진 일부다처제는 두 가지 원칙에 따라 규제되었다. 첫 번째 원칙은 혼인할 때 부인들을 한 가문에서 취해야만 했다. 그리고 두 번째 원칙은 그들과는 동시에 혼인해야만 했으며, 다시 혼인할 수는 없었다. 이는 귀족 가문 내부의 안정과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원칙인데, 그 이유는 지위와 가문의 배경이 같은 여성을 질투해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이 원칙은 혼인을 통한 유대를 한 가문으로 집중함으로써 귀족 가문 간의 상호 경쟁을 배제했다. (319)

왕실 혼례를 확립한 것은 국왕과 유료 관료 사회 사이의 이데올로기적 대화의 한 양상이었다. 유교 연구와 유교 이데올로기를 일상의 표준 규범으로 바꾸는 데 관심이 깊었던 세종은 독재적 군주였다. 혼례에서 그는 매우 예민한 사안을 처리해야만 했다. 이것이 고유 전통과 전래된 가치의 양립성에 대한 논란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이 논란은 양반 사회를 두 편으로 갈라놓았다. 그것은 중국식 모델에 의존하는 것을 옹호하는 태도와 고유 관습을 보호하려는 태도였다. ... 학자 관리들은 자신의 혼례를 유교식으로 치르기를 꺼려했으면서도 왕실의 혼례는 유교식 규범과 일치하라고 요구하였다. 이런 모순된 태도는 세종 이후 정치적 쟁점이 되었다. 다시 말해, 양반들이 왕실 혼례에 대해 유교 이데올로기적 순수성을 요구하는 것이 국왕 교화를 위한 주된 내용이 되었다. (339)

세종 재위기간에 여성이 외출하는 것에 대한 법령을 구체적으로 만들었다. 탈 때 몸이 모두 보이지 않는 가마를 왕명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타고 있는 여성의 지위를 표시하기 위해 색깔을 달리 칠하도록 하였다. 곧이어 신중한 사간원 대간들은 양반 여성은 공무를 볼 필요가 없기 때문에 낮에 거리를 다닐 수 없도록 하자는 내용의 상소문을 올렸다.
더 나아가 신유학을 신봉한 입법가들은 `여성의 길을 바로잡기 위해` 그리고 그들을 가사 영역에 가두기 위해 여성이 절에 자주 출입하는 것에 특별히 주목하였다. 1404년 여성이 부모를 추모하는 목적 이외에 절에 출입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 그렇지만 정부도 개탄하였듯이 법이나 권고사항은 별다른 효력이 없었다. 사찰에 출입하는 여성을 제한하려는 사간원의 노력은 1447년 열매를 맺었는데, 여성이 이런 위반을 하게 되면 최고 연장자와 가장 가까운 남성 친족이 공동 책임을 져야 한다는 판결을 국왕이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경국대전>에는 여성이 절에 출입할 경우 장 100대로 처벌하도록 기록해놓았다. (354)

여성이 남편 집으로 편입되는 것이 어떤 고상한 이상으로 합리화되든 여성에게 실제 삶은 고요하지도 엄숙하지도 않았다. 여성은 이데올로기가 자신의 세계에 부과한 기능과 가치에 본능적으로 반응하였다. 제도 안에서 여성은 자신과 자녀들을 보호하기 위해 최고의 생존전략을 고안할 수밖에 없었다. 이데올로기의 장막을 걷어냈을 때, 실제 정책이 모습을 드러냈다. 현실 정책이 여성의 가사 영역을 지배하였다. 남성 방관자에 비해 여성은 끊임없이 계획하고 계산하였고, 갈등과 긴장이 일상생활의 일부였다. ... 여성은 자살로 남편과 시부모의 학대에서 도피하였다. 자식의 안녕에 미치는 큰 이해관계 때문에 처첩 사이의 질투와 불화는 뿌리 깊었으며, 많은 적처는 남편이 낮은 계급 여성과 벌이는 애정 행각에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이러한 `부당성`에 처했는데도 신유학자들은 여성에게 올바른 행위를 하라고 고집했다. 결국 여성은 유교 이데올로기의 본질을 제공하는 역할을 담당해야 했으며, 조정과 사회에 `올바른 인간상`을 제시해야 했다. (380)

송 전기에 당의 옛 귀족들은 권력에서 밀려나고 사회 배경이 다른 새로운 계급이 출현하였다. ... 이러한 상황 변화는 일반적으로 새로운 과거제도에 기인하는데, 당나라의 과거제도는 송대에 들어와서 정제되고 다듬어졌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하나의 요소에 불과하다. 상업의 급속한 발달, 도시화 그리고 갑자기 발전한 인쇄 산업 등을 통한 경제 성장은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징후였다. 그렇지만 170년이 채 지나지 않아 여진족이 북중국을 침입하여 금나라를 세우면서 송나라는 남쪽으로 물러났다. 이러한 충격적인 사건은 엘리트들을 둘러싼 사회 환경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상황 변화가 일어났음을 알려 주었다. 중국 사회에 최근까지 남아 있는 특질을 중국이 획득한 때는 바로 남송시대였다. (392)

가장 분명한 것은 중국의 신유학자들은 당나라 몰락에 개입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
이와 대조적으로 한국에서는 고려의 통치 계급과 조선의 그것 사이에 급격한 단절이 없었다. ...... 남송에서는 유학 교육을 받은 엘리트는 더는 관직 소지자가 아니었으며 관직 소지자는 세습 귀족을 대체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한국의 조선 왕조에서는 신유학자들이 관직자로서 위치를 확립하였으며 새로운 왕조의 세습 엘리트를 구성하였다. 그들은 유교의 친족 조직에 대한 자신들의 안목과 자신들과 사회의 나머지 사이의 경계를 긋기 위하여 점점 더 세련되고 제한된 관료제에 대한 요구를 결합하였다. 고려 왕조 이상으로 엘리트에 대한 정의는 국가의 합법성에 의존하게 되었다. (394)
......
한국에서 종족은 경제적으로 획일적이지는 않지만 사회적으로는 획일적이기 때문에 그토록 오랫동안 생명을 유지한 상층계급의 현상이었다고 정의할 수 있다. (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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