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 조/김남조-


당신을 나의 누구라고 말하리
나를 누구라고 당신은 말하리
마주 불러볼 정다운 이름도 없이

잠시 만난 우리
오랜 이별 앞에 섰다.

갓 추수를 해들인
허허로운 밭이랑에
노을을 등진 그림자 모양
외로이 당신을 생각해 온
이 한철

삶의 백가지 가난을 견딘다해도
이것만은 두려워했음이라
눈 멀 듯 보고자운 마음
신의 보태심 없는 그리움의
벌(罰)이여
이 타는듯한 갈망

당신을 나의 누구라고 말하리
나를 누구라고 당신은 말하리

우리
다 같이 늙어진 어느 훗날에
그 전날 잠시 창문에서 울던
어여쁘디 어여쁜
후조라고나 할까

옛날 그 옛날에
이러한 사람이 있었더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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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정하-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선뜻 그대에게 다가서지 않겠습니다.
내가 그대를 묵묵히 바라만 보고 있는 것은
내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대를 너무나 사랑해서임을 알아주십시오.

오늘따라 저렇게 별빛이 유난스런 것은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만 참고 또 참는
내 아픈 마음임을 헤아려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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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遠視)/오세영-



멀리있는 것은
아름답다
무지개나 별이나 벼랑에 피는 꽃이나
멀리 있는 것은
손에 닿을 수 없는 까닭에
아름답다.
사랑하는 사람아,
이별을 서러워 하지마라.
내나이의 이별이란
헤어지는 일이아니라 단지
멀어지는 일일 뿐이다.
네가보낸 마지막 편지를 읽기 위해선
이제
돋보기가 필요한 나이,
늙는다는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멀리 보낸다는
것이다.
머얼리서 바라다볼 줄을
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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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친구가 너 였으면 좋겠다./이해인-


친구와 나란히 함께 누워 잠잘 때면
서로 더 많은 이야기를 밤새도록 나누고 싶어
불끄기를 싫어하는 너였으면 좋겠다.

얼굴이 좀 예쁘지는 않아도
키가 남들만큼 크지는 않아도
꽃내음을 좋아하며 늘 하늘에 닿고 싶어하는
꿈을 간직한 너였으면 좋겠다.

비오는 날엔 누군가를 위해
작은 우산을 마련해 주고 싶어하고
물결위에 무수히 반짝이는 햇살처럼
푸르른 웃음을 아낄 줄 모르는 너였으면 좋겠다.

서로의 표정을 살피며 애써 마음을 정리하지 않아도
좋을 만큼 편안한 친구의 모습으로
따뜻한 가슴을 가진 너였으면 좋겠다.

한 잔의 커피향으로 풀릴 것 같지 않은
외로운 가슴으로 보고프다고 바람결에 전하면
사랑을 한아름 안아들고
반갑게 찾아주는 너였으면 좋겠다.

네 어릴 적 가지고 놀던 구슬이나 인형처럼
나를 소중히 여겨주는
온통 사랑스런 나의 너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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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백창우-


나 정말 가벼웠으면 좋겠다
나비처럼, 딱새의 고운 깃털처럼 가벼워져
모든 길 위를 소리없이 날아다녔으면 좋겠다
내 안에 뭐가 있기에
나는 이렇게 무거운가
버릴 것 다 버리고 나면
잊을 것 다 잊고 나면
나 가벼워질까
아무 때나 혼자 길을 나설 수 있을까
사는 게 고단하다
내가 무겁기 때문이다
내가 한 걸음 내딛으면 세상은 두 걸음 달아난다
부지런히 달려가도 따라잡지 못한다
나 정말 가벼웠으면 좋겠다
안개처럼, 바람의 낮은 노래처럼 가벼워져
길이 끝나는 데까지 가 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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