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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의 불꽃 1 ㅣ 민음사 모던 클래식 23
톰 울프 지음, 이은정 옮김 / 민음사 / 2010년 5월
평점 :
절판
스스로도 미국의 지배층이라고 자부하던 전형적인 WASP인 주인공은 흑인 소년을 치는 교통사고를 낸다. 정확히는 그가 낸 게 아니라 그의 정부가 낸 것이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다양한 집단들이 움직이게 된다. 주인공조차도 이 사건에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지 못 했을 것이다. 억울하게 되었지만 주인공은 이 집단들에 의해 이리저리 휘둘리게 된다. 곱게만 자라온 이 귀족 남자는 엄청나게 다양한 사람들의 얽히고설켜 있는 관계들 속에서 점점 진흙탕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이 소설은 주인공의 몰락과정을 통해 미국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고자 한다. 당연히 그 모습이란 미국의 밝은 면이 아니라 누구도 자세히 보고 있기 좀 껄끄러운 뒷모습이다.
사실 이 소설의 이야기만 따라 간다면 그냥 어느 일간지의 기사 몇줄이면 충분하다. 한 백인이 흑인 소년을 치었고, 그래서 흑인 사회가 분개했으며 언론에서 연일 대대적으로 이 사건을 보도하게 되고 수사가 진행되어 용의자를 체포해 재판에 회부했으며 운운...
그런데 이 소설은 이 사건의 행간에 더욱 관심이 많다. 부패한 흑인인권단체, 일단 물고 보는 하이에나 같은 언론, 정치권의 눈치를 봐야하는 검찰, 흑인들의 표를 의식해야 하는 정치인, 돈이면 뭐든 하는 변호사 등등 그들 각각이 어떤 불순한 마음으로 이 사건을 몰고 가는지 그들이 이 사건으로 인해 얻어지는 이익은 무엇인지 그들은 왜 그렇게 행동 하는지... 즉 인물들 개개인에 주목하고 있다.
WASP, 흑인, 유태인, 아일랜드인, 영국인 등 미국을 구성하는 다양한 인종과 민족을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에게 부여해서 지겹도록 그들의 역사를 보여주고, 민족적 편견으로까지 굳어진 성향이나 각각이 처한 사연들을 세세하게 파고드는 이유가 바로 그래서일 것이다.
미국이라는 나라를 구성하는 이 다양한 개인들은 각자의 이익을 위해 분투한다. 신문에 난 몇줄짜리 기사를 보면 어떤 대의를 위해 분개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그들의 위치와 살아온 배경에 따라 최대한의 이익을 내기위해 사건을 유리하게 이용해먹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런 원리로 이 소설은 미국 사회와 정치를 분석하고 있다.
어쩌면 당연한 얘기를 하고 있는데, 소설에서 어떤 포장도 없이 너무 대놓고 콕콕 쑤셔대니까 아주 통쾌하면서 시원했다.
인간의 드러내고 싶지 않은 부분, 사악하기도 하고 치사하기도 한 감추고 싶은 부분 들을 등장인물들을 통해 가감 없이 보여주고 있는 점도 이 소설을 읽는 재미다. 읽으면서 내내 이 작가 되게 짓궂고 심술궂네 하고 키득대기도 했다. 물론 작가로서 마땅히 가져야할 자질이라는 의미로 욕이 아니다.
오랜만에 굉장히 마음에 드는 소설을 만났다. 재미는 물론이고 현실감과 현장감까지 두루 느껴지면서 작가가 의도한 바를 끝까지 길을 잃지 않고 흡입력 있게 보여주는 소설. 바로 이 소설이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