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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고 해밀턴
더글러스 스튜어트 지음, 구원 옮김 / 코호북스(cohobooks) / 2024년 6월
평점 :
작가 더글러스 스튜어트가 2020년 부커상을 수상한 “셔기 베인”을 아주 인상 깊게 읽었었다. 읽은 지 몇 년이 지났는데도 알콜 중독 어머니 때문에 고생하는 셔기 베인이 내 기억 속에서 문득 끌려 나오곤 한다. 착하고 어머니를 너무 사랑하고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더 안쓰러웠던 소년 셔기 베인.
그래서 더글러스 스튜어트의 두 번째 소설이 번역되어 나온 걸 알았을 때 반가워하며 책을 사 놓았는데, 다른 책들에 우선순위가 밀려 이제야 읽게 되었다. 사실 주인공이 진탕 고생하는 내용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일부러 미루고 미루다가 읽었다는 게 진실에 더 가깝다.
“셔기 베인”과 마찬가지로 이 소설도 대처 시대의 정책으로 스코틀랜드의 경제 기반이던 철강과 조선업이 무너져 실업자가 넘쳐나던 1990년대 초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의 암울한 워킹클래스 가족의 삶을 배경으로 한다.
15살 먼고 해밀턴은 34살의 알콜 중독자 어머니 모모와 18살의 형 하미시, 16살인 누나 조디와 함께 살고 있다. 아니 함께 살고 있어야 하는데 엄마 모모는 돌봐야할 미성년 자식들이 버젓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도 없이 가출해 애인과 함께 산다. 형 하미시는 벌써 애기 아빠가 되어서 어린 여자 친구의 부모님 집에서 살다가 가끔 집에 들르는 수준이다.
실질적으로 먼고의 어머니 역할을 하고 있는 건 누나 조디다. 15살이나 되었지만 먼고는 누나의 무릎에 올라가 안겨있길 좋아하는 아직 어린이 같은 중학생이다. 고등학생인 조디도 아직 어린데 엄마처럼 동생 먼고를 보살피는 모습을 읽고 있자니 어찌나 마음이 아프던지... 거기다가 조디가 더 안쓰러운 건 주변에 발전적인 미래에 대한 방향을 제시해 줄 어른이 없어서 학교 선생님에게 의지했고 그러다 같이 자는 관계로 발전을 했다는 것이다. 비밀스러운 이 둘의 관계는 조디가 임신을 하는 바람에 깨지고 만다.
먼고의 형 하미시는 거리에서 약을 팔고 가톨릭 갱단과 패싸움을 벌이는 개신교 깡패단의 우두머리로 동네에 명성이 자자하다. 이런 하미시도 나름대로 막내인 먼고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고 돌보긴 한다. 남자다움이 한없이 부족하고 늘 엄마를 찾고 싸움도 못 하고 얼굴도 예쁘장하게 생긴 동생이 제발 좀 형의 명성에 먹칠하지 말고 옆에서 같이 싸움판에 끼어들어 주먹질도 하면서 남자답게 컸으면 하는 마음에 먼고를 때리고 갈구며 강하게 키우고자 들들 볶아대는 것이다.
먼고는 또래 친구도 없고, 그저 학교에서 집에 오면 돌아오지 않는 엄마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는 게 일이다. 마치 주인을 기다리며 가구를 물어뜯는 강아지처럼 집의 살림살이를 입에 넣고 씹어대는 전형적인 애정결핍 아이의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얼굴에 경련을 일으키는 틱 장애를 앓고 있기도 하다. 먼고가 꺼내놓고 표현하지 못 하는 슬프고 외로운 내면이 제어하지 못 하고 갑자기 불쑥 나타나는 얼굴 근육의 일그러짐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런 먼고에게 어느 날 친구가 생긴다. 바로 먼고가 사는 공영 아파트 바로 앞 단지 옥상에서 비둘기를 기르는 16살 소년 제임스다. 이상하게 처음부터 이 둘은 서로 대화가 잘 통하고 끌린다. 그렇게 몇 번 만나서 놀다가 어느새 서로를 만지게 되고 키스를 하게 된다. 먼고의 첫사랑이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이 둘의 애정행각이 동네에 소문이라도 나면? 폭력적이고 마초적인 분위기의 글래스고 이스트 앤드에서 동성애라? 절대 안 될 말이다. 이 둘은 남들 눈을 피해 가며 은근하게 서로 사귀고 사랑을 키워나간다.
하지만... 하필 하미시에게 애정행각을 들키고 만다. 동생이 그렇다는 걸 인정할 수 없는 하미시는 제임스를 죽도록 패놓고 순진한 동생이 더러운 가톨릭인 제임스에게 당한거라고 노발대발하는데...
먼고의 엄마 모모는 이 얘기를 알콜 중독 치료모임에 가서 하게 된다. 모임에 참석했던 두 남자는 먼고를 자신들이 데리고 가서 어른 남자에게 배워야 하는 낚시나 사냥, 캠핑 같은 것들을 가르쳐서 진짜 남자로 만들어놓겠다고 모모를 구슬린다. 늘 남자들 말에 홀딱 넘어가 버리는 모모는 이번에도 그렇게 넘어가 버린다. 하지만 이번에는 술을 사주겠다는 말에 넘어가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자기파괴적인 행동이 아니라 아들을 잘 알지도 못 하는 낯선 남자들에게 맡겨버리는 행동이었다. 술에 취해 해롱대느라 상황파악을 못 하고 아들을 악당들한테 엄마인 제 손으로 넘겨주는 꼴...그렇게 먼고는 잘 모르는 두 남자와 함께 숲 속으로 캠핑을 떠난다.
숲 속에서 먼고는 15살 인생 최악의 고난을 겪는다. 같이 캠핑을 하는 두 성인 남자는 성범죄로 감옥에서 만난 사이였고 그런 범죄전과가 있는 사람들이 15살 나약해 보이는 온화한 소년과 아무도 없는 숲 속에 있으면 벌어질 일이란 뻔한 거 아니겠는가.
먼고는 그 고통스러운 폭력을 겪으며 제임스와의 아름다웠던 추억을 떠올린다. 비둘기 새장에서의 첫 만남, 같은 침대에 누워서 엄마가 죽던 날을 말하다 울음이 터진 제임스를 위로 했던 일, 둘이서 한 자전거를 타고 동네 밖을 나갈 때 제임스의 허리를 감싸 안았던 느낌, 입술이 부르트도록 계속했던 키스, 먼고가 16살이 되면 같이 동네를 떠나자 약속했던 일...
그리고 알콜중독자 엄마, 이제 곧 먼고 곁을 떠나갈 누나, 폭력적인 형. 비록 문제 많고 지긋지긋하지만 먼고가 너무나 사랑하는 가족들을 떠올린다.
먼고에게는 돌아가서 안길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돌아갈 집이 있는 한 먼고는 부서질 수 없었다. 그래서 용기를 낸다. 동네 패싸움에서 그저 맞고만 있었던 먼고는 여기 이제 없다.
그는 숲 속에서 악당을 처리하며 형 하미시보다 자신이 더 용감하다고 느낀다. 과연 폭력성으로 남자다움을 가린다면 그 누구보다도 먼고가 가장 남자답다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남자를 좋아하는 그 먼고 해밀턴이 말이다.
결말이 약간 모호해 여러 해석이 나올 수 있지만 나는 희망적인 결말이라 생각한다.
집으로 돌아온 먼고는 호수에서 시체가 나온 일로 경찰의 심문을 받을 뻔 하지만 형 하미시가 대신 나서주어서 위기를 넘긴다. 글래스고를 떠나려던 제임스는 먼발치에서 먼고와 미세한 눈빛을 교환한다. 그러니까 결국 먼고는 제임스와 함께 동네를 떠나게 되지 않을까?
어떤 것도 해결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작은 희망의 불씨가 살아있는 결말이란 생각을 하고나니 책을 덮을 때까지 막 답답하거나 암울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어둡고 우울하기만 한 이야기일까 봐 겁을 먹었었다. 하지만 막상 읽어보니 절망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배경에 가혹한 상황들이 곳곳에 나와 있기는 하나 어느 부분에서는 유머도 있고, 소년들의 풋풋한 첫사랑이 귀엽기도 해서 조금 웃기도 했다.
실업자와 알콜 중독자, 어린 10대 미혼모들이 가난하고 황폐한 거리에 넘쳐나는 도시지만 서로를 보살펴 주는 이웃들의 이야기도 있고, 문제투성이지만 서로를 어떻게든 챙기려는 해밀턴 아이들의 지긋지긋한 가족애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다. 엄마 없는 먼고와 조디를 따뜻하게 보살펴주는 아래층 아주머니 이야기에 그래도 참 다행이다 하면서 흐뭇해 했는데, 돌연 폭력 남편에게 맞으면서도 남편을 옹호하는 모습에 어찌나 답답하고 마음이 아프던지. 마냥 따뜻할 줄 알고 안심하며 마음을 놓고 있다가 이토록 현실적인 이야기가 툭 나와 버려서 암담하게 만든다. 정말 한시도 방심할 수가 없는 소설이었다.
흐린 날씨 속에서 구름에 가려져있던 햇빛이 살짝 들어왔다가 다시 먹구름이 껴 비가 오고, 비 그친 후 잠깐의 빛이 드는 요상한 날씨를 읽는 느낌이랄까...그러니까 가끔 마주치는 햇살에 조금은 안심할 수 있는 그런 이야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