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놈아!"

드디어 서희 입에서 욕설이 굴러 나왔다.

"네에. 애기씨 말씀하시오"

"너 나를 막볼 참이구나"

"네에. 막보아도 무방하구 처음 본대도 상관없소이다. 십여년 세월 수천수만 번을 보아와도 늘상 처음이었으니까요"

길상은 끼들끼들 웃다가 또 고개를 푹 숙인다.

서희는 망토를 벗어던지고 방바닥에 굴러떨어진 꾸러미를 주워 물끄러미 쳐다본다. 그러더니 다음 순간 그것을 길상의 얼굴을 향해 냅다 던진다.

"죽여버릴 테다!"

서희는 방바닥에 주질러 앉아 울음을 터뜨린다. 어릴 때처럼, 기가 넘어서 숨이 껄떡 넘어갈 것 같다. 언제나 서희는 그랬었다. 슬퍼서 우는 일은 없었다. 분해서 우는 것이다. 다만 어릴 때와 다르다면 치마꼬리를 꽉 물고 울음소리가 새나지 않게 우는 것뿐이다.

"난 난 길상이하고 도망갈 생각까지 했단 말이야. 다 버리고 달아나도 좋다는 생각을 했단 말이야"

철없이 주절대며 운다.

"그 여자 방에 그, 그 여자 방에서 목도리를 봤단 말이야, 으흐흐흐흣......"

길상의 눈동자가 한가운데 박힌다.

"그 꾸리미가 뭔지 알어? 아느냐 말이야! 으흐흐......목도리란 말이야 목도리"

하더니 와락 달려들어 나둥그러진 꾸러미를 낚아챈다. 포장지를 와득와득 잡아 찢는다. 알맹이가 밖으로 나왔다. 그것을 집어든 서희는 또다시 길상의 면상을 향해 집어던진다. 진갈색 목도리가 얼굴을 스쳐서 무릎 위에 떨어진다.

"헌 목도린 내버려! 내버리란 말이야! 흐흐흐......으흐흐흣......"     

엄마 데려와! 엄마 데려와! 하며 발광하고 울부짖고 까무라치고 아무거나 잡히는 대로 집어던지고, 그칠 줄 모르게 패악을 부리던 유년시절, 그때 서희를 생생하게 어제 일처럼 기억하고 있는 길상이지만 길상은 어떻게 할 바를 모른다. 술이 깨고 정신이 번쩍 들지만 무릎 위에 떨어진 목도리를 집었다간 불에 덴 것처럼 놓고 또다시 집었다간 놓고 하면서 서희의 울음을 그치게 할 엄두를 못 낸다. 드디어 그는 목도리를 두손으로 꽉 움켜쥐고서 마치 훔쳐서 달아나는 도둑처럼 방을 뛰쳐나간다. 문밖에서 엿들으려고 서 있는 여관집 주인 여자와 하마터면 이마빡을 부딪칠 뻔했다. 제 방으로 돌아온 길상은 우리 속에 갇힌 짐승처럼,

"미쳤을까? 애기씬 미쳤을까?"

중얼리기며 맴을 돈다.


(토지 6권 126-127쪽)


드디어 마음을 고백하는 서희. 

길상이 앞에서만 보여주는 서희의 풀어진 모습 땡깡부리는 어린 시절의 모습으로^^

토지 2부에서는 서희와 길상이 커플 보는 재미가 아주 쏠쏠하다. 둘의 자존심 싸움에 숨막힐거 같다가 이렇게 탁 풀어지는 부분에선 가슴이 두근두근.

용정으로 배경이 옮겨가면 1부보다 재미가 떨어지는거 아닐까 걱정했는데 웬걸 계속 재밌잖아. 게다가 사투리가 덜해서 1부보다 읽기가 더 수월하기도 하고.

토지는 사전도 찾아 보면서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으려고 했는데 재밌어서 자꾸 속도가 붙네ㅋㅋㅋ

흥분하지 말고 차분차분하게 읽어야지. 이제 서희랑 길상이도 맺어졌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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