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응주의자 대산세계문학총서 168
알베르토 모라비아 지음, 정란기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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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첼로는 집요하게 정상성에 집착하는 인물이다. 그에게 있어 정상성이란 그 나이 또래의 남자라면 거의 비슷하게 할 행동들을 하는 것이다. 보통의 정상적인 여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가정을 꾸리고 사회의 주류 집단에 소속되어 군중 속에서 안락하게 순응하며 사는 삶. 마르첼로의 삶의 목적은 바로 이런 것이다. 근데 이런 정상적인 삶이란 것을 마르첼로처럼 굳이 의식하며 꼭 그렇게 살아야겠다고 스스로 굳건히 결심하며 사는 사람들이 누가 있을까? 정상성이란 것은 그냥 살다보니 옆에 사람들과 비슷하게 살아지는,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보편적으로 그렇게 흘러가는 그런 거 아닌가 말이다. 누가 마르첼로처럼 이토록 비장하게 정상적인 삶을 살겠다고 자신의 삶을 철저히 통제하며 사느냐 말이다.

 

마르첼로는 남들과 똑같은 담배를 사며 만족해하고 버스에서 사람들과 부딪히는 게 정상적인 것이라며 좋아한다. 또한 당시 이탈리아의 주요 정치 세력은 파시즘이라 스스로 파시스트가 되는 것이 정상이라는 논리를 세우며 정부 비밀 요원으로 활동한다.

근데 가만 들여다보면 마르첼로가 정상성이라고 주장하는 남성성에의 집착이 약간 좀 부자연스럽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같았고, 모든 이와 다를 바가 없었다. 같은 몸짓으로 같은 상표의 담배를 사는 사람들, 심지어 빨간색 옷을 입은 여인이 지나가면 얇은 옷 아래 풍성한 엉덩이가 흔들리는 것을 훔쳐보기 위해 고개를 돌리는 남자들과도 똑같았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 동작은 개인적 성향이 아니라 의도된 모방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101쪽)


여자를 훔쳐보는 행위를 본능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다른 남자들이 하는 걸 보고 모방해야지만 할 수 있는 마르첼로는 과연 꽤나 금욕적이고 예의바른 남자라서 그런 걸까?


노인은 친밀한 몸짓으로 마치 여자에게 그러듯 남자의 팔이 아니라 허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와 함께 나란히 대기실 안을 걸으면서 매우 낮은 목소리로 다급하게 속삭였다.

무심한 눈으로 그 장면을 지켜본 마르첼로는 갑자기 노인에게 미친 듯 한 증오심이 생기는 것을 느끼고 스스로도 깜짝 놀랐는데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110쪽)


남자에게 다정하게 행동하는 노인에게 마르첼로는 왜 증오심이 생길까? 동성끼리 스킨쉽 하는 장면에 과하게 화를 내는 마르첼로는 대체 왜 그럴까?

 

마르첼로는 단추를 채우지 않은 상의에 총검이 흔들리게 둔 채 연인처럼 서로의 허리에 팔을 두르며 걸어가는 군인 두 명을 보며 그날 밤 처음으로 경멸과 매우 흡사한 감정이 생기는 걸 알게 되었다.  (419쪽)

 

거리에서 흐트러진 수많은 군인들을 보고서도 아무렇지 않다가 유독 다정하게 걷는 저 두 군인들을 볼 때 마르첼로는 분노가 인다.

이쯤 되면 마르첼로가 집착하는 남성성이란 것에 묘한 기운을 감지하게 된다. 무릇 혐오란 두려움에서 싹트는 것이 아니던가? 마르첼로는 자신의 남성성에 자신이 없는 것을 넘어 내면에 어떤 의문이 내내 자리 잡고 있다는 두려움이 이 소설 곳곳에서 포착된다.

마르첼로가 동성애자인지는 소설 속에서 명확하게 다루진 않지만 성정체성에 대해 깊은 고민이 있었던 흔적은 보인다. 그가 정상성에 집착하게 된 이유도 근원적으로 따지고 보면 이런 고민들 때문이라는 걸 느낄 수 있다.

 

그가 무겁게 가지고 있는 동성애 기질에 대한 고민은 어린 시절의 사건에서 생겨난 것이었다.

13살 무렵 곱상한 외모 때문에 학교에서 여자아이 같다고 놀림을 당하던 마르첼로는 어느 날 집에 가던 길에 아이들에 의해 강제로 치마를 입는 굴욕을 당하게 된다. 그때 리노라는 남자가 마르첼로를 구해주게 된다. 그 일을 계기로 마르첼로는 리노의 차에 타게 되고 리노는 총을 주겠다고 유혹해 마르첼로를 집에 데려가 강간 하려 했다. 그때 마르첼로는 리노를 총으로 쏴 죽이고 도망쳐 나왔다.

 

어른이 되어서도 이 사건은 마르첼로를 내내 지배한다. 리노를 죽였다는 원죄에 더해 리노의 차에 올라탔다는 것, 리노의 유혹에 넘어갔다는 것으로 보아 자신에 대해서 자신도 다 알 수 없는 부분이 혹시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에 늘 휩싸이게 된다. 그래서 그는 이러한 비정상성이라는 의문을 떨쳐내기 위해 정상성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정상성이라는 것이 마르첼로의 머릿속에 얼마나 지독하게 들어차 있는지는 마르첼로와 줄리아의 결혼 후 첫날밤의 일화에서 맛볼 수 있다.

줄리아는 마르첼로와의 첫날밤을 치르기 전 고백을 한다. 아버지의 친구인 늙은 변호사가 어린 그녀를 강제로 범했고 그 관계는 몇 년간 계속되어 왔다고 마르첼로가 첫 남자가 아니라고. 마르첼로는 애초에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줄리아의 고백을 들으면서 화가 나거나 동정심 같은 감정은 일지 않으면서도 줄리아가 이렇게 고백하는 게 바로 정상성이지 않느냐며 내심 흡족해 한다. 자신은 리노와의 일을 절대로 고백할 수 없는데 반해 줄리아는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서 용서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 들자 자신의 과거를 고백했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줄리아의 정상성을 확인하는 것이라는 거다. 마르첼로는 이런 정상성의 여자와 결혼 한 자신은 정상성의 완성을 위해 아기를 생산하는 것에 매진하면 된다는 기이한 논리를 편다.

 

난 다른 모든 남자와 같은 남자야. 난 사랑을 했고, 여자와도 관계를 가졌고, 또 한 사람을 만들었어

 ( 227쪽)


첫날밤을 치른 후 매우 뿌듯한 마르첼로는 이렇게 생각한다. 굉장히 정상적이지 않은 마르첼로의 사고의 흐름. 너무나 모두와 같은 남자이고 싶은 마르첼로의 우스운 집착.

 

정상성을 위해 파시스트 정부에 적극 가담하고 있는 마르첼로는 파리로의 신혼여행 중 대학시절 자신을 가르쳤던 교수를 암살하는 일에 공조하기로 한다. 그런데 교수의 집에 방문한 마르첼로는 교수 부인인 리나에게 첫 눈에 반하게 된다. 리나에게 사랑의 감정이 들자 마르첼로는 흥분한다. 자신이 그토록 가장하고 싶었던 정상성이 리나와 사랑에 빠짐으로써 자연스럽게 획득된다는 것이 마르첼로를 안달나게 만들었다. 리나와의 사랑이 성공한다면 사랑하지 않지만 정상성 때문에 결혼 했던 줄리아도 버리고 정부 비밀요원 일도 다 버릴 수 있다고 마르첼로는 생각한다.

나는 여자를 사랑할 수 있다. 나는 드디어 정상이 되었다! 마르첼로의 진심은 바로 이것일 것이다.

하지만 리나는 동성인 줄리아에게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드러나고 마르첼로는 자신의 사랑이 응답 받을 수 없다는 것에 실망한다.

확신하지 못 하는 남성성 때문에 정상성을 갈망해야 했던 마르첼로 인생에 처음으로 사랑을 느꼈던 여자는 하필이면 여자를 좋아하는 여자였다는 이 아이러니.

마르첼로는 다시 정상성 추구라는 습성으로 돌아온다. 정부의 비밀요원 역할을 충실히 하는 것으로.

 

시간이 흘러 줄리아와의 사이에서 6살 난 딸을 둔 마르첼로는 이제 20년 이상 지속되어 왔던 파시즘 정권이 무너지는 현장을 본다. 그가 추구해왔던 정상성이란 것이 공식적으로 비정상성이 되는 순간을 맞이한 이때 마르첼로는 정상성이 신기루였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가족들과 도망을 치는 와중에 정상성이라는 집착을 끊어내고 새로운 삶에 대해 낙관하던 마르첼로는 다시 시작된 전쟁의 공습을 받고 최후를 맞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작가 알베르토 모라비아는 파시즘 정권에서 많은 핍박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니 파시즘이 위세를 떨쳤던 그 어리석은 시대의 인간군상을 이야기 하는 건 작가로서 당연한 선택일 것이다. 

이 소설은 결국 파시즘에 순응하는 인물을 내세워 당시 정상이라고 믿었던 것이 얼마나 비정상인지를 보여주면서 파시즘을 비판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마르첼로라는 인물이 가지고 있는 확실하게 자신할 수 없어서 오히려 과도하게 집착하는 남성성 이라는 특징과 내재된 폭력적 기질이 만나면 파시스트가 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바로 이런 것이 파시스트의 커다란 자격 요건일지도 모른다는 짓궂은 암시를 주기도 한다.

 


끊임없이 자신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는 인물의 사색이 주가 되는 소설로 문장이 단번에 싹 읽히지 않아서 읽는데 시간이 꽤 걸렸다. 몇 번을 읽어도 이해되지 않는 문장들도 있고... 내 이해력 문제인가 번역의 문제인가ㅠㅠ

그래서 좋은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별4개닷

 


(책은 깔끔하고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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