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너무 예뻐서 마음에 들었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든 생각은 이해할 수 없지만 이해가 간다는 거다. 무슨 말인가 하면 이 소설 속에서 다루고 있는 두 사람의 관계, 정확히 말하면 주인공 마고 샤프가 맺는 관계는 상식 밖의 행동이고 부도덕하기도 해서 정말 저럴 수가 있나 싶게 어리석어 보인다. 하지만 작가 조이스 캐럴 오츠가 만들어낸 세계 속에서는 마고 샤프의 잘잘못을 판단하는 것에 앞서 이 인물이라면 그런 관계를 맺기도 하겠구나 하고 이해하게 된다. 인물을 들여다보는 작가의 집중력 있는 시선에 결국 설득당할 수밖에 없었다는 거다.

 

 

마고 샤프는 23살 대학원 1년생때 밀턴 페리스 교수의 신경심리학 연구소에 발탁되어 들어온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아버지뻘 되는 페리스 교수의 불륜상대가 된다.

 

 

실험실에서 페리스가 그녀를 꼭 집어 칭찬할 때면, 마고는 힘없이 쓰러질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얼굴에 피가 몰려 화끈거리고 커다란 행복감으로 심장이 뛴다. 마고는 줄곧 모범적인 여학생으로, 딸로 살아 왔기에 이런 일이 자주 있었다.

그녀는 순결한 딸이다. 당신이 그녀를 믿으면 결코 당신을 배신하지 않을 그런 사람이다.

(65)

 

 

하지만 이런 관계가 늘 그렇듯 교수는 다른 여자한테 관심이 옮겨가고 마고는 버림받는다. 사실 페리스 교수는 제자들의 연구를 훔쳐서 자신의 것으로 발표하고 이에 반항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막강한 권력과 인맥을 이용해 좋은 자리를 주지 않는 것으로 보복하며 젊은 여자들을 이리저리 사귀고 다니는 유의 사람이다. 이런 것을 마고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라면 그의 실체가 어떻든 눈 감아 버릴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마고 샤프다. 어찌되었든 자신은 페리스 교수 덕에 연구소에 들어왔고 교수까지 되었으니 그에게 고마워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고 샤프는 페리스 교수 앞에서는 말 잘 듣는 순결한 딸이 된다고 말한다.

 

 

맹목적인 마고의 페리스 교수에 대한 사랑은 어쨌든 내쳐지고  마고는 슬퍼한다. 그 슬픔은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 한다.

하지만 연구대상인 기억상실증 환자 엘리후 후프스에게만은 자신의 비밀을 털어 놓을 수가 있었다. 그는 현재의 일을 70초밖에 기억하지 못 하기 때문이다. 마고가 페리스 교수와의 감정을 기억상실증 환자에게 고백하면 그는 친절하게 공감해 주고 위로해 준 다음 그 일을 다 잊어버린다. 손상을 입은 뇌는 기억을 저장하지 못 한다.

 


E.H.가 마고를 안아 위로해준다. 이제껏 이런 식으로 마고 샤프를 안아준 사람은 없었다.

마고 샤프와 엘리후 후프스가 이토록 친밀하게 몸을 맞대고 있었던 적이 없었다. 두 사람이 이렇게 오랫동안 단둘이 었었던 적이 없었다. 방금 전 자신이 한 행동과 지금 하는 행동이 아주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은 마고는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빨리 뛰는데도 이 남자의 가슴에 얼굴을 묻는다. 그녀의 얼굴이 닿아 있는 부드러운 캐시미어 울과 불과 몇 센티미터 떨어진 가슴 속에는 기억상실증 환자의 심장이 따뜻하게 뛰고 있다.

아름다운 사람이야. 아름다운 영혼. 이 사람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야. 다른 사람이 아니고.

(129)

 

 

이렇게 마고의 사랑은 엘리후 후프스에게 옮겨간다. 늘 현재를 사는 사람, 사고를 당하기 전인 37살에 기억이 멈춘 사람, 언제나 상냥하게 인사하는 사람에게,

엘리는 마고를 기억하지 못 한다. 그는 늘 처음만난 사람으로서 마고에게 안녕-하세요하고 인사하고 마고는 똑같은 자기소개를 반복해야 한다. “저는 마고 샤프에요하고.

언제까지나 계속될 이 반복에 어쩌면 마고는 안심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엘리는 70초 마다 처음 만나는 마고를 결코 배신하는 일이 없을 테니까. 그는 페리스 교수처럼 마고를 절대 버리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마고는 엘리와 공식적으로는 연구대상으로 개인적으로는 사랑하는 상대로 30년을 함께한다. 마고는 엘리와 단 둘이 있을 때면 우리가 서로 부부라고 속인다. 그러면 엘리는 그 말을 믿고 당장 마고에게 사랑하는 여보라고 말해준다. 그리고 다시 70초가 흐르면 모든 걸 잊는다. 마고는 이런 식으로 엘리와 사랑을 했다.

마고에게는 친구도 가족도 없다. 그녀에게는 감정을 나눌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녀 자신이 30년 동안 연구에만 몰두하면서 그렇게 자신을 내버려뒀다. 그 연구의 대상은 바로 기억상실증 환자 그녀가 사랑하는 엘리다. 어찌 되었든 그녀의 입장에서는 30년 동안 열렬히 사랑을 한 셈이다.

 

 

기억상실증에 관한 메모 : E.H. 프로젝트(1965~ 1996)

그녀는 그를 만나고 사랑에 빠진다. 그는 그녀를 잊는다.

그녀는 그를 만다고 사랑에 빠진다. 그는 그녀를 잊는다.

그녀는 그를 만다고 사랑에 빠진다. 그는 그녀를 잊는다.

그들이 처음 만난 지 31년이 되던 해, 마침내 그녀는 그에게 작별을 고한다. 죽음을 맞이하던 순간 그는 이미 그녀를 잊었다. (9)

 

 


나는 사실 마고 샤프의 사랑이 너무도 허망해서 마음이 안 좋았다. 나는 마고가 했다는 사랑이 결코 사랑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런 식의 사랑은 그녀가 마고 샤프이기 때문에 하는 거다. 그녀는 외골수다. 과학자로서 연구 분야에서 뿐만 아니라 인간관계 안에서도 지독한 외골수다.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이라면 절대로 끝까지 배신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는 페리스 교수의 만행을 고발하는 것에 동참하지 않았다. 또한 엘리에 대한 혼자만의 사랑도 얼마나 지독한 외골수인가.

 

이런 인물을 작가는 진득하게 따라가면서 그 외양에서부터 심리까지 상세하게 펼쳐 보여준다. 그렇게해서 마고 샤프라는 개연성이 창조되었다. 마고 샤프니까 그런 사랑을 하는 것이라고 납득이 갔다. 그래서 점점 엘리와의 관계에 광기에 가까운 집착을 보이는 마고에게 섬뜩함을 느끼다가도 아무리 해도 상대방에게 응답받지 못 한다는 외로움이 그녀에게 보일 때 참 슬프기도 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자신만의 고집스러운 성향으로 잘못된 선택을 하는 인물과 함께 했다. 이런 인물을 보는 건 역시 마음이 안 좋다. 책장을 덮고 나서도 마고 샤프에 대해 계속 생각했다. 똑똑한 사람이 사랑은 똑똑하게 하지 못 했다. 감정이란게 그렇게 작용하지 않았다. 안타까운 마음이 한참을 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