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덟살 루시가 부모와 헤어져 바닷가 커다란 집에 하인 부부와 함께 쓸쓸히 남겨지게 되는 소설의 도입부는 참 드라마틱하다. 거기에 영국으로부터 아일랜드가 독립하게 되는 당시의 시대 배경은 드라마틱한 이야기에 강렬한 개연성까지 더해져서 사건을 탄탄하게 만든다.
도입부를 읽으면서 이 이야기는 영화 제작자들이 탐낼만한 이야기겠다 싶었다.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 거기에 있을법한 우연들이 겹쳐져 만들어낸 비극적인 사건이란 구미가 당기는 영화의 도입부가 아닌가?
그런데 소설을 계속 읽어나가다 보니 이것을 영화로 만들 수는 없겠다 싶었다. 영화가 되려면 이 소설의 장점들을 많은부분 포기해야 겠구나 싶었던 거다.
한 예로 도입부의 영화같은 사건 이후 가장 기대되는 전개는 과연 루시가 부모를 다시 만나게 될까인데 그 기대는 만약 이 소설을 영화화 한다면 영화의 클라이막스가 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 클라이막스는 우리가 흔히 기대하는 환희가 될 수 없었다.
윌리엄 트레버가 창조한 루시라는 인물은 단순하게 감정을 터트리는 인물이 아니다. 겉으로 고요한 외면을 하고 있지만 루시의 내면은 소설을 다 읽고 나서도 잡힐 듯 잡히지 않는다. 내가 루시를 이해했다 생각했지만 마지막에 가서 과연 내가 이해한게 맞나 싶을 정도로 충격을 받기도 했다.
윌리엄 트레버의 스타일은 인물의 감정을 드러내놓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는 문장과 문장사이의 미묘한 감정들, 숨겨진 숨결들로 인물을 말한다.
이런 스타일을 영화 속에 어떻게 담아낼 수 있단 말인가!

 

 

 


2.

어린 루시는 성장해서 이제 연애를 한다. 루시의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
하지만 나는 루시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한 짓에 대해 부모가 돌아와 용서해 줄때까지 사랑을 할 수 없다 고집하는 루시.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나는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류와 같이 너무 이상한 궤변을 루시가 늘어놓고 있다고 생각했다.
루시는 왜 꼭 용서를 받아야 사랑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루시의 그런 감정이 뭔지 이때까지 나는 잘 몰랐다.
하지만 정신병원에 입원한 호라한이라는 인물을 루시가 찾아가는 행동을 할 때 비로소 루시의 감정이 어떤건지 알 거 같았다.
호라한은 루시가 부모와 떨어지게 되는 사건의 원인을 제공한 인물이다. 그로인해서 루시의 비극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래서 호라한은 그의 삶 내내 자신이 비극을 초래한 인물이라는 가책에 시달린다. 결국은 자신이 루시를 죽였다고까지 망상하며 완전히 미쳐버린다.
루시는 그런 호라한을 이해했다. 루시 자신 또한 부모를 고통스럽게 한 가책에 내내 시달렸을 것이기에... 어린시절내내 그런 가책과 함께 부모를 기다려왔다고 생각하니 결국엔 미쳐버린 호라한과 루시가 뭐가 다를까 싶었다.
유일하게 호라한을 이해하는 인물이 루시였다는 것을 알고 났더니 루시의 비극이 어마어마하게 크게 다가왔다. 루시는 호라한처럼 가책을 떨칠 수 없다면 행복할 수 없었던 거다. 그래서 사랑도 마음껏 할 수 없었다. 어쩌면 루시는 호라한 만큼이나 미쳐있었을지도 모른다.

 

 

 

 

 

3.

루시는 노인이 된다. 여전히 바닷가 커다란 집을 홀로 지키며 살아간다. 집은 늘 깔끔하고 주변의 자연은 아름답다.
루시의 일상은 언뜻 아무렇지 않게 늘 그런 일상으로 고요하게 흘러가는 것 같다.
하지만 루시는 생각한다. 한번도 말로 꺼내 놓아 보지 않았지만 루시의 일생내내 품고있었을 "나는 어렸을때 죽었어야 했다."는 생각.
소설의 마지막, 루시의 일상이 담담히 펼쳐지는 와중에 나온 이 고백에서 나는 얼얼했다.
그제서야 나는 깨달았던 거다. 루시는 끝끝내 괜찮지 않았구나 하고.
윌리엄 트레버 스타일의 인물들은 감정을 말하지 않고 덤덤하게 행동하면서 독자들을 안심시키곤 한다.

큰 상처를 가지고 있지만 일상적인 삶을 고요하게 처리하는 그들을 보고 있으면 내심 괜찮겠거니 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괜찮지 않다. 그냥 살아갈 뿐이다.
반복 되는 일상과 규칙적인 시간안에서 내 몫의 상처를 인내하고 살아가는 것.
루시 골트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사실 조금 슬펐다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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