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의 독자 보통의 독자 1
버지니아 울프 지음, 박인용 옮김 / 함께읽는책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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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참 예쁘다. 그런데 이 책, 참 어렵다.

 

버지니아 울프의 첫 번째 에세이집, 『보통의 독자』.

난해하기로 유명한, 그래서 왠만하면 한 번 읽기 시작한 책은 끝을 보고야마는 나조차도 몇 번이고 두 손 두 발 다 들게 만든 버지니아 울프임에도 불구하고 '울프가 전제로 한 독자는 특별한 문학 훈련을 받지 않은 일반 독자'이며 그렇기 때문에 '격식을 차리지 않고 열린 자세로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듯 썼다.'라는 추천의 글에서 용기를 얻어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왠걸! 어렵다. 문장이 긴 데다 읽다보면 생소한 표현도 많고 한국말 같지 않게 느껴질 때도 있다. '아무리 쉽게 썼다지만 버지니아 울프 맞군.'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고, 이 책이 번역서임을 여실히 보여준 번역가를 원망하게 된다. 여하튼 울프가 가정한 '보통의 독자'들보다 나, 수준이 한참 떨어지는 걸까,라는 야릇한 자괴감을 안고 책을 읽어 내려갔다. 사실 읽다가 중간에 한 번 포기하고 다른 책 두어 권을 읽은 후 용기를 그러모아 다시 읽기 시작했다. 마지막 장을 덮은 후에 스스로를 '장하다'고 느낀 것은 오랜만이다.

 

버지니아 울프(1882~1941)는 영국의 여류 소설가이자 비평가다. 서구 현대 문학의 기틀을 마련한 대표적인 모더니스트 소설가인 그녀는 현대 소설의 특징적 문학 기법인 의식의 흐름 기법(인간의 정신 속에 끊임없이 변하고 이어지는 주관적인 생각과 감각을 (특히) 주석 없이 설명해 나가는 문학적 기법)을 구사한 장편소설, 『등대로To the Lighthouse』, 『댈러웨이 부인Mrs. Dalloway』 등으로 널리 알려져있다. 버지니아 울프는 정신 질환이 심해져 자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소설, 서평, 전기, 에세이 등 다양한 장르의 글을 다수 발표했는데 1904년과 1922년 사이에만 500편이 넘는 수필과 서평, 그리고 논문 등을 당대의 주요 문학 저널에 발표했다고 한다.

쓰기 위해서는 읽는 것이 바탕이 되어야 하는 법. 그렇다면 버지니아 울프는 읽고 쓰는데 그야말로 '올인'했던 사람이 아닌가!

 

『보통의 독자The Common Reader』를 읽는 것은 버지니아 울프가 마음가는 대로 글을 끼적여 놓은 일기장을 몰래 엿보는 것과 같은 짜릿함을 선사한다. 이 책을 읽다보면 특정 주제에 대해 떠오르는 대로 생각의 가지를 뻗어나가는 그녀를 내 눈 앞에 그려보게 된다. 버지니아 울프는 스스로를 작가가 아닌 보통의 독자로 가정하고 제인 오스틴, 샬롯 브론테와 에밀리 브론테 자매, 다니엘 디포, 조지프 콘래드 등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작가들과 일반에게 덜 알려진 몇몇 작가들의 삶, 그리고 그들이 쓴 작품을 포함한 문학세계 전반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밝히고 있다. 이와 더불어 러시아 문학, 그리스어를 배우는 것, 당대의 문학에 대한 자신의 의견 등을 막힘없이 개진하기도 한다. 책을 읽으면서 버지니아 울프가 다양한 주제에 대해 얼마나 깊게 생각을 하는 사람인가를 어렴풋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리고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는 버지니아 울프가 이미 고전이 되어버렸지만 그녀의 글은 스스로를 '현대인'으로 여기고 생각을 전개시키고 있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하지만 역시, 작가와 시대를 아우르는 문학과 사회에 대한 빼곡한 지식을 지닌 버지니아 울프가 가정한 '보통'의 독자와 내가 생각하는 '보통'의 독자와의 간극은 메울 수 없는 것일까? 솔직히 말해 보통의 독자인 내가 이 책을 이해하는 것은 참으로 버거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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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여 저게 코츠뷰의 불빛이다
우에무라 나오미 지음, 김윤희 옮김 / 한빛비즈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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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978년 8월 21일 자 동아일보 3면. 이곳에 실린, 도서, 『안나여 저게 코츠뷰우의 불빛이다』의 소형광고를 찾았다. '이따위 숨찬 책은 만든적도 없다!'는 평화출판사의 고백과 함께 이를 드러내고 웃고 있는 것인지 울고 있는 것인지, 혹은 무언가를 이제 막 말하려는 참인지 알 수 없는 한 남자의 얼굴이 보인다.

그의 이름은 우에무라 나오미(植村 直己, うえむら なおみ).

"너와 나는 절망이란 말을 쓰지를 말자"던, "위험한 곳이 어디냐, 불가능한 곳이 어디냐, 좀이 쑤신다. 한 번 해보는 거다."라던 나오미는 북극을 가로지른 그의 발자취가 한국땅에 알려진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84년 2월 13일, 세계 최초로 매킨리 동계 단독 등정 후 하산하던 중 영원히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절판되었던 『안나여 저게 코츠뷰우의 불빛이다』가 2011년 3월, 한빛비즈 출판사를 통해 복간되었다. 복간본의 제목은 『안나여 저게 코츠뷰의 불빛이다』. 이번 복간결정이 없었더라면 우에무라 나오미(이하 나오미)라는 존경스러운 한 인간에 대해 내가 알게 될 길이 과연 있기나 했을까? 감사할 따름이다.

 

'도전 앞에 머뭇거리는 당신을 위한 책'이라는 다분히 자기개발서적인 추천사가 달려있는 이 책은 추천사의 진부함이 무색하게 느껴질만큼 훌륭하다. 게다가 여행을 좋아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영하 50도를 넘나드는 극도의 추위 속에서 직접 사냥을 해서 식사를 마련하고 매일매일 추위에 곱은 손으로 텐트를 쳐가며 각 대륙 최고봉을 오르거나 극지방을 탐험할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는 나 같은 평범한 사람조차도 손에서 책을 놓기 힘들 정도로 흥미롭다. 

 

북극을 횡단하고 싶다는 마음 하나만으로 시작된 여행. 나오미는 그린란드의 야콥스하운을 출발해(1974.12.20.) 두 번의 생일을 북극의 눈보라 속에서 오직 썰매개들과 함께 보내고 1976년 5월 8일, 꿈에도 그리던 알래스카의 코츠뷰에 도착한다.

북극권 12,000km를 가로지르는 이 장대한 여정 동안 나오미는 거의 매일 일기를 쓴 것으로 보인다. 언제 끝날 지 모르는 먼 길을 떠나는 두렵고도 설레는 마음, 잠시 방심한 사이에 썰매를 끌던 개들이 모두 달아나버리고 혹한의 어둠 속에서 썰매와 단 둘이 버려져 이제 죽는구나라고 생각하던 순간, 출발지인 야콥스하운부터 함께 해 온 리더개, 안나가 몇 몇 동료들을 데리고 그의 곁으로 돌아와주었을 때의 환희, 예상보다 얼음이 빨리 녹기 시작해 썰매가 제 속도를 내지 못하게 되자 음식이 떨어지고 어설픈 사냥솜씨 덕에 개들의 먹이는 물론 자신의 끼니까지 걱정하게 되면서 살아남기 위해 최후의 수단으로 그 동안 동고동락해 온 썰매개들을 잡아먹어야하나를 심각하게 고민하던 순간, 홀로 추위와 어둠과 고독을 견디다 만난 극지방 이누이트 친구들의 환대와 아낌없는 도움에 감사하는 마음.


실제 나오미가 경험했을 1년 5개월에 비하면 너무나도 간략한 300페이지 분량의 일기. 그 꾸밈없이 소박하고 현실적인 글을 읽다보면 코 앞에 살랑살랑 다가온 봄날이 오히려 비현실적이다. 마치 내가 여우털로 목 둘레를 덧댄 코트에 백곰바지, 해표가죽으로 만든 장화를 신고 안나를 위시한 썰매개그룹을 이끈 채 시오라파르크에서 리조류트를 향해 쏜살같이 달리는 썰매 위에 앉아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혹한의 추위 속에서 식량도 없이 혼자 헤매거나 꽁꽁 언 얼음이 갑자기 깨지면서 바닷물에 빠졌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나는 수준은 아니더라도 우리도 살다보면 참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을만큼 피곤하고 어디로 가야할 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앞길이 깜깜할 때 그저 '언젠가는 이곳에도 봄이 오겠지.'라든가 '누군가는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나를 찾아오겠지.'라는 생각만 하다가는 꼼짝없이 홀로 얼어죽을 수 밖에 없다.

눈에는 보이지 않는 알래스카 코츠뷰의 불빛을 따라 야콥스하운을 출발한 한 남자가 실제하는 코츠뷰의 불빛을 찾아 그것을 손에 쥔 이야기, 『안나여 저게 코츠뷰의 불빛이다』. 누구나 가슴에 코츠뷰의 불빛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의 불빛을 발견하기 위해 당신은 얼마나 도전했는가?'라는 물음에 당당하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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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재의 궁극의 문화기행 2 - 건축가 김원 편 이용재의 궁극의 문화기행 시리즈 2
이용재 지음 / 도미노북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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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본 건 또 있어가지고 소위 '건축가'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다.

어린 시절엔 우리집과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공사판이 벌어진 적이 있는데 그 때 그곳에서 노가다를 하는 아저씨들을 보며 멋지다, 멋져!라며 감탄한 적도 있었을 정도로.

도대체 이런 환상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를 고민해 보니 아무래도 범인은 엄마방에서 찾아 읽었던 『아름다운 집』인가 하는 잡지인듯하다. 그 잡지 어딘가에 소개된 널따란 정원에 둘러싸인 환상적인 집. 그 집 구석구석을 찍은 사진과 함께 실려있던 '건축가 OOO씨와 OOO씨 부부의 집'이라는 문구가 가슴에 콕 박혔었는지 그 후로는 왠지 '건축가'라고만 하면 귀가 쫑긋 서고 가슴이 콩닥거리는 게 아무래도 건축가 귀신에 씌여도 단단히 씌인 듯하다.

 

여기에 '사람이고 사물이고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는 본성이 더해져 평소에도 건축물들을 유심히 살펴보며 돌아다녔고 때때로 건축에 관한 책(주로 사진집)을 들춰보기도 하던 중, 『궁극의 문화기행-건축가 김원 편을 읽게 된 것이다.

 

저자가 '김원 실록'이라고 소개한 이 책은 김원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떤 과정을 통해 어떤 건축물들을 지어왔는지를 가감없이 소개한다. 건축가와 그의 작품이 뼈대를 이루지만 이야기는 그를 둘러싼 역사, 사회, 정치, 경제를 아우르며 살을 붙여나간다. 무겁다면 무겁다고도 할 수 있는 주제지만 가끔씩은 너무 가볍게 다루는 것은 아닌가하는 우려가 들 정도로 술술술 쉽게도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저자는 책 서두에 '이 책은 김원 선생조차도 손대지 않은, 그야말로 자신이 보고 들은 그대로 쓴 원고'라고 밝힌 바 있는데, 그럴듯한 문장을 만들어내기 위해 고민하지 않은 그저 툭툭 내뱉는 듯한 말투를 연상시키는 저자의 문체를 따라가다보면 '정말 그런가보다.' 싶기도 하다. 마치, 오프더레코드, 그런 거 따로 안 키운다, 단지, 오프더레코드 거리만 깡그리 모아서 이 책을 쓴다는 듯한 말투다.

 

책은 크게 다섯 부분으로 구성된다.

1. 문화시설: 조정래 태백산맥 문학관, 미당 서정주 시문학관, 국립국악당 등

2. 교육시설: 이화여자대학교 글로벌타워, 광주가톨릭대학교, 통일연수원 등

3. 주거,업무시설: 주한러시아대사관, 평창동 개인주택 등

4. 종교시설: 나주 순교성지, 공주 황새바위 순교성지,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등

5. 못다한 김원 이야기, 그리고 김수근

 

저자는 건축가 김원을 '대한민국 대표 건축가'라고 소개한다. 책을 다 읽을 즈음엔 그 말에 고개를 자연히 주억거리게 되는데 그도 그럴 것이 그 동안 봐 왔던 많은 굵직굵직한 건물들이 실제로 그의 손을 거쳐 탄생했기 때문이다. 내가 특히 재미있게 읽었던 부분은 관심분야과 관련된 '문화시설' 부분과 천주교 성당과 성지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종교시설' 부분이었다(비록 성당도 잘 안 나가는 불량 신자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엄연히 유아 세례를 받으신 몸이라고요!).

 

건축에 관한 도서답게 자료사진도 섭섭지 않을만큼 포함되어 있어 책을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다만 읽으면서 한 가지 신경쓰였던 부분은 거의 매번 공사를 수주하는 장면에서 등장하는 '김원의 OO고등학교 선배인 OOO', 혹은 '김원이 OO대학교 후배라서', '알고보니 OOO는 OO대학교 동기였는데' 등의 문구였다. 역시 한국에서는 학연, 지연 아니면 공사 수주도 안되는건가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대목. 다른 책이었다면 이런 부분은 두리뭉실 넘어갈 수도 있었을텐데 굳이 실제 사실 그대로 그냥 써 버린 것을 보면 이 책, 실록(實錄)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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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Q정전 문학동네 루쉰 판화 작품집
루쉰 지음, 이욱연 옮김, 자오옌녠 판화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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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한 예술가가 다른 예술가에게 영감이 되어온 예는 수도 없이 많다. 이런 창조적인 자극의 전파에 있어서 장르가 다르다는 것은 장애가 되지 않는다. 멘델스존이 셰익스피어의 동명의 희곡과 괴테의 「발푸르기스의 밤」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한여름 밤의 꿈>을 작곡한 예에서처럼.

 

중국 현대문학의 거장으로 꼽히는 루쉰(魯迅)『아Q정전』이 중국의 대표적인 판화가인 자오옌녠(趙延年)의 판화와 함께 돌아왔다. 루쉰의 글은 자오옌녠의 작업에 어떤 영향을 끼쳤으며 자오옌녠은 루쉰의 글을 어떻게 해석했을까를 궁금해하며 첫 장을 펼쳤다. 

 

이름이나 본적은 고사하고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대해서도 전혀 알려진 바가 없는(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그것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없기 때문이겠지만) 아Q는 웨이좡 마을의 토지신과 곡식신을 모시는 사당에서 지내면서 마을 주민들의 필요에 따라 이 집 저 집 날품팔이를 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인물이다.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아Q지만 자존심 하나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아 스스로를 웨이좡 마을의 그 누구보다도 '옛날에는 잘살았고' 아는 것도 많은 데다 '일도 잘하는' 거의 '완벽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게다가 사람들에게 늘 맞고 무시당하고 놀림을 받으면서도 그는 나름의 논리에 근거해 '그래도 결국 승자는 나'라는 결론을 내린다.

 

물론 아Q의 극단적인 자기 긍정성이 지닌 플러스 요인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잘 나가는 기업을 위해 SWOT분석이 필요하듯 우리 인간들도 어제보다 나은 오늘, 오늘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개인의 강점(Strength), 약점(Weakness), 기회(Opportunity), 위협(Threat) 요인을 분석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여기에 아Q의 문제가 있다. 그는 자신의 강점과 기회만 바라볼 줄 알았지 자신의 약점이나 자신을 둘러싼 위협요인의 존재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인물인 것이다. 현재 상황에 만족한다면 굳이 개선점을 찾을 필요를 못 느낄 것이며 그렇다면 언제고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아가도 문제될 것이 없다.

 

루쉰은 신해혁명을 전후로 펼쳐지는 아Q로 대표되는 웨이좡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중국인들의 전근대적이고 모순되는 태도를 강하게 비판한다. 계속 그렇게 살다가는 혁명이 아니라 혁명 할아버지가 일어난다해도 그것은 단지 그럴듯한 이름을 빌린 기득권층의 자리바꿔앉기에 그칠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프랑스대혁명 때도 아Q는 있었다는 로맹 롤랑의 말처럼 아Q의 모습은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어느 곳에서든 발견된다. 어쩌면 내 안에도 아Q정신이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루쉰의 따끔한 일침을 교훈 삼아 나를 다시 되돌아 볼 기회를 가져야겠다.

 

아! 그리고 자오옌녠은 40점의 판화작품을 통해 『아Q정전』을 해석해 보였는데 소설을 다 읽은 후 그림만 훑어보는 것으로도 마치 책을 다시 한 번 읽는 것과 같은 가슴 뜨끔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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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이드 그린 토마토 민음사 모던 클래식 39
패니 플래그 지음, 김후자 옮김 / 민음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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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영화를 굉장히 재미있게 보았는데 알고보니 그 영화에는 원작소설이 존재하고 있었다고 치자. 혹은 감명 깊게 읽은 소설이 영화화 되었다고 가정할 수도 있겠다.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많은 영화가 감독이 어떤 방향으로 원작의 이야기를 해석하고 옮겨 놓았는가에 따라 동일한 이야기임에도 꽤나 다른 모습으로 관객들에게 보여지기도 한다. 누구는 영화가 더 좋았다고들 하고 또 누군가는 영화가 원작의 뛰어난 성과를 제대로 해석해내지는 못했다고들 한다.

그리고 아주 드물게, 원작과 영화가 모두 훌륭하다는 반응이 존재하기도 한다.

   

영화, <미저리>의 여주인공으로 널리 알려진 배우, 캐시 베이츠의 엉뚱하고도 귀여운 모습이 인상 깊었던 영화,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의 원작이 된 동명의 소설이 민음사의 '모던클래식 시리즈'로 나왔다는 이야기에 환호성을 내지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조용한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원작 소설에 대한 궁금증 또한 분명 생길 것 같다.

 

영화와 소설은 그야말로 '원작'이라는 단어가 무색하지 않게 동일한 구조로 전개된다. 다만, 나에게 무엇보다 큰 차이로 다가왔던 것은 그 옛날 휘슬스톱 카페를 운영하던 이지와 루스의 관계였다. 영화에서 그려졌던 조금은 어슴푸레했던 이 둘 사이의 관계에 비해 원작소설에서 그려진 이들 두 여인의 관계는 분명, '사랑',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말하는 남녀 간의 '사랑'의 바로 그 '사랑'이었다. 저자에 대한 사전 정보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글을 읽다가 '혹시나?'하는 생각에 책 앞 날개를 찾아 읽어보니 저자인 패니 플래그는 '레즈비언임을 당당히 드러내고 남녀평등 헌법 수정안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등 정치의식이 뚜렷한 작가'라고 쓰여 있었다. 주변에서 사랑에 빠지고 결혼하는 남녀 커플은 많지만 사랑에 빠지고 결혼하는 여-여 커플이나 남-남 커플과는 가까이 지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서로에게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사랑에 빠지는 이지와 루스의 모습이, 그리고 무엇보다 이들 둘이 사랑에 빠지고 한 집에 살며 부모로서 한 아이를 키워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주변인들의 모습이 더할 나위없이 자연스럽다는 것이 너무나도 새롭게 다가왔다. 내가 그 동안 '당연하'고 '정상적'인 사랑이라고 생각해왔던 것은 이성간의 사랑뿐이었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나는 얼마나 큰 편견에 사로잡혀 살아가고 있었던 것일까.

 

1980년대를 살아가던 삶의 방향을 잃은 의기소침한 가정주부 에벌린 카우치를 위로했던 1920년대의 앨라배마 주 휘슬스톱 사람들의 이야기. 특히 매일의 생활을 통해 스스로의 얼굴을, 그리고 삶을 만들어가며 살아간 이지의 모습에서 나도 조금쯤은 용기와 지혜와 웃음을 얻을 수 있었다.

드물게도 원작과 영화가 모두 좋았던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덕에 행복한 주말을 보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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