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초간
데이비드 폴레이 지음, 신예경 옮김 / 알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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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출근길에 나는 (출근 시간대 대부분의 버스가 그러하듯이) 그야말로 입추의 여지없이 사람들이 꽉꽉 들어찬 버스를 타고 있었다. 지하철 역에서 회사 앞까지는 한 정거장. 그 사이에 버스는 우회전을 한 번 하게 되는데 나는 간신히 손잡이에 의지해 균형을 잡고 서 있었다. 사람이 가득 들어찬 버스가 우회전을 하면 사람들은 한 쪽으로 쏠리게 되고 옆에 서 있는 사람에게(안 그래도 이미 닿아 있었지만!) 더욱 밀착하게 되는 것은 당연지사. "어~어~어~"하면서 균형을 유지하려고 하다가 옆 사람의 발을 밟게 될 수도 있는 것이고. 

나는 그 날도 최대한 옆 사람에게 피해를 안 주려고 두 발로 딱 균형을 잡고 서 있는데 내 뒤 쪽에 서 있던 여자 한 명이 팔뒤꿈치로 나를 계속해서 밀어내는 것이었다. 굉장히 신경질적인 그 팔놀림. '이 여자가 지금 뭐하는 거야?'라는 생각에 뒤를 돌아다봤는데 내 얼굴을 향해 내뱉는 말. "왜 발을 밟고 난리야!".

저런 사람한테 대꾸해봤자 똑같은 사람밖에 더 되겠나라는 생각에 그냥 아무 말도 없이 내렸지만 곱씹을 수록 너무 분하고 억울했다. 바닥에서 발을 뗀 적도 없는 나에게 자기 발을 밟았다고 하질 않나, 만약 발을 밟았다고 하더라도 일부러 밟은 것도 아닌데 저렇게 무례하게 말을 했어야 했나, 나도 그 자리에서 맞받아 톡 쏴주고 왔으면 좀 덜 억울했을까...등등.

   

주고 받으면 기분 좋은 선물이 있는 반면 주고 받을수록 서로에게 해가 되는 것도 있다. 그것은 바로 스트레스.

하지만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로서 인간은 누구나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로 인한 스트레스를 주고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를 어째! 스트레스를 계속 꾹꾹 눌러 참자니 답답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고 그렇다고 누군가에게 불만을 털어놓자니 기분 나쁜 이야기를 듣는 것이 반가운 일만은 아닐 것이기에 그 또한 망설여지고. 그렇다면 나는 정말, 정말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라고 고민하던 순간에 이 책이 내 앞에 나타났다.

『3초간』. '눈 깜짝할 사이에 분노와 짜증을 잠재우는 감정조절의 원리'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학부에서는 경제학을 전공하고 응용 긍정심리학으로 석사를 받은 저자, 데이비드 폴레이는 국제 긍정심리학 학회의 창립 상임이사이기도 하다. 그는 20년 전 택시를 타고 가던 중 자신의 인생을 바꾼 경험을 하게 된다. 당시 그는 근처에 있던 다른 운전자의 과실로 큰 교통사고를 당할 뻔 했는데 무사히 살아났다는 안도감을 느끼는 것도 잠시, 상대 운전자가 그가 탄 택시 운전자에게 오히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비난하는 것을 보고 놀라고 만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토록 터무니없는 일을 당하고도 택시 운전자는 고함을 지르는 상대 운전자에게 미소를 지으며 행운을 빌어줬다는 것. 당시, 어떻게 그렇게 대처할 수 있었느냐고 묻는 저자에게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고 한다.

"사람들은 대부분 쓰레기차와 같다. 마음속에 온갖 좌절, 분노, 실망을 꽉꽉 채운 채 돌아다닌다. 만약 그대로 내버려둔다면 그들은 가지고 다니던 쓰레기 감정을 온통 우리에게 쏟아낼 것이다."

타인의 감정적인 공격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그 택시 운전자의 모습에서 깨달음을 얻은 저자는 그 일을 계기로 타인의 부정적 감정에 상처받지 않는 법, 나아가 남에게 상처주지 않는 법에 대해 고민하고 연구해오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바로 '3초 법칙'이다.

 

1단계.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상대가 부정적인 감정을 던질 때마다 곧바로 호응할 것이 아니라 3초만 생각하라. '내가 지금 화를 내면 저 사람이 변할까?' '그가 내뱉는 불평에 맞장구쳐주는 게 우리 모두에게 도움이 될까?' '원래 내가 할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게 뭐였더라?' 와 같이 감정적인 반응을 하기 전,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야 한다. 내가 하려는 말이 앞으로의 상황을 좋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거나 원래 하려고 했던 일과 직결된다면 해도 좋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2단계. 미소를 짓는다

우리의 뇌는 감정상태에 따라 표정에 대한 지시를 내리기도 하지만 반대로 표정을 읽고 그에 맞춰 감정상태를 재설정하기도 한다. 즉 행복해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으니까 행복한 것이라는 말이 과학적으로도 맞는 이야기인 셈이다. 그러니 1단계를 통해 감정적인 반응이 나에게 전혀 도움되지 않는다는 해답을 이끌어낸 후 이성적으로 상황을 납득했다면, 이번에는 미소를 지으며 기분전환을 시도해보자. 우리의 감정상태는 우리의 웃음에 걸맞게 리모델링에 들어갈 것이다.

 

3단계. 다른 일로 주의를 돌린다

원래 하고 있던 일 또는 하려고 했던 일에 바로 돌입한다. 순식간에 기분 나쁜 일로부터 주의를 돌린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앞의 두 단계가 확실히 이루어진다면 이 단계가 그렇게 어렵게 느껴지지만은 않을 것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이 감정조절 단계를 여러 번 연습함으로써 점점 기분 나쁜 일로부터 주의를 돌리는 일이 쉬워졌다고 이야기했다. 당신도 할 수 있다!

 

내 나이대의 사람들에게 물으면 그들의 삶에 가장 큰 스트레스를 주는 요인으로 '직장 생활'을 꼽는다. 다행스럽게도 지금의 내 직장 생활은 불만의 요소보다는 만족스러운 요소가 더 많은 것이 사실이다. 무엇보다 내가 몸담고 있는 곳에서 추구하는 가치가 내가 추구하는 가치와 일직선상에 놓여있고 함께 일하는 동료들이 마음에 들고 내가 다루는 일이 나의 관심사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위 '직장 스트레스'는 나를 피해가지 않았다.

 

이 책의 저자는 말한다. 살면서 노력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은 많다고. 그 대표적인 것이 남이 나에게 쏟아내는 무심하고 짜증나고 분노섞인 말 한마디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런 타인의 감정공격을 얼마나 받고 있는지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며 공격을 받았을 때 대처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무지하다고 말이다. 책의 서두에는 '마음 근육 테스트'라는 것이 나오는데, 여기서 마음 근육이란 '타인의 감정공격을 가볍게 튕겨버리는 단단한 마음 근육'을 일컫는다. 독자는 작가의 3초 법칙을 본격적으로 접하기에 앞서 이 간단한 테스트를 통해 내가 타인으로부터 받는 감정공격에 얼마나 잘 대처하고 있는지, 그리고 나는 타인에게 얼마만큼의 감정공격을 퍼붓고 있는지를 확인해 볼 수 있다.

 

작가의 말마따나 세상을 살다 보면 타인으로부터 영향을 받기도 하고 우리가 타인에게 영향을 주기도 한다. 긍정적인 영향만 주고받기에도 부족한 시간에 부정적인 영향까지 주고받을 필요, 뭐 있을까.

나쁜 영향은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라면) 해결의 노력을 하고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이라면) 차라리 깔끔하게 웃어넘기고 무시하는 기술이 필요하다. 그래야 부정적인 감정을 불필요하게 내 마음 속에 담아둠으로써 나의 정신 건강, 신체 건강에 해를 입히고 참고 참아온 나의 분노를 다른 누군가에게 퍼부음으로써 억울한 사람을 한 명 더 만드는 사태를 피할 수 있을 듯하다.

 

하지만 늘 그렇듯 관건은 '실행'.

저자의 말대로 기분나쁜 상황을 겪자마자 바로 미소를 지으며 그 일을 무시해 버리는 것이 쉽지만은 않겠지만, 그래도 지난 몇일 간 이 책에서 조언한 내용을 마음에 담고 살아보니 정말 효과가 있긴 하다. 일상의 자잘한 스트레스가 충격적인 하나의 사건이 주는 스트레스 만큼, 때로는 그 이상의 악영향을 줄 수도 있다고 한다. 사건을 겪은 순간 만으로도 이미 불쾌한 일 때문에 개인의 소중한 건강과 일, 그리고 다른 순간들까지 해를 입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 책을 한 번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참고로, 각 챕터의 마지막에는 '감정 지키기 연습'과 '3초 법칙 활용법'이 정리되어 있어서 도움이 되고, 책의 말미에는 참고문헌도 정리되어 있어 관련 분야에 대해 좀 더 읽어보고 싶은 독자들에게 정보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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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주가족 미끄럼대에 오르다
기노시타 한타 지음, 송태욱 옮김 / 바다출판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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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노시타 한타. 나로서는 이름도 처음 듣는 작가였다. 프로필을 읽어보니 이렇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때까지는 야구소년.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학원을 다니며 파친코로 생계 유지. 이후 영화감독이 되고자 영화 전문 학교에 입학했으나 강사진과 싸우고 중퇴. 그리고 나서 극단을 결성해 각본가와 배우로 활동하다 극단 해산 후 남은 배우 한 명, 스태프 세 명과 또 다른 극단 창단. 극단 활동을 하면서 배우 양성소의 강사로도 활약을 했지만 그 양성소가 파산하게 되어 오갈 데 없어진 학생들과 또 다른 극단 창단. 연극을 하면서 지인과 술집을 운영하기도 했는데 개점 후 술집 문을 닫을 때까지 5년 동안 하루하루를 술로 지새움. 이후 작가로 데뷔했는데 데뷔작, 『악몽의 엘리베이터』는 영화, 드라마, 연극으로 옮겨졌고 40만부의 누적 판매량 기록. 현재는 술을 끊음.

 

파란만장 하다.

그리고 책 내용도 꼭 그렇다. 파란만장.

 

내가 좋아하는 일본 영화 중에 <녹차의 맛>이라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는 괴짜 가족인 하루노 가족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이 사람들, 참으로 엉뚱하다. 하지만 내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이런 과한 엉뚱함 속에서도 정겨움과 유머와 따스함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이 내가 영화, <녹차의 맛>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처음에 『폭주가족, 미끄럼대에 오르다』라는 책의 제목과 간략한 줄거리를 접했을 때, 나는 영화, <녹차의 맛>을 떠올렸다. 대학생 연인에게 버림을 받은 아빠는 일본에서 가장 긴 미끄럼을 한 번 타고 나면 실연의 상처를 잊을 수 있을 것이라며 가족 여행을 제안한다. 그리고 아빠의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그 여행을 흔쾌히 따라나서는 나머지 가족 구성원들. 여기까지만 읽어도 등장인물들의 캐릭터가 평범하지는 않겠구나 싶었다. 나도 모르게 나는 이 책과 이미 마음에 든다는 결론을 내린 영화 사이의 유사성을 찾고 있었다. 아마도 나는 <녹차의 맛>과 유사한, 내 기준에서 수용할 수 있는 정도의 유머와 감성코드를 기대했었던 것 같다.

 

책은 술술 잘 읽힌다. 책의 뒷머리에 등장하는 옮긴이의 말에는 '무척 즐겁게 번역했다'고, '영화 만큼은 아니지만 드라마를 보는 만큼의 속도로 번역한 것 같다'고 쓰여 있었다. 번역자도 흥이 나서 술술 번역해 내려갔던 것처럼 독자로서 나도 속도면에서는 막힘없이 술술 잘 읽어내려갈 수 있었다.

하지만 누구는 빨강을 더 없이 좋아하고 또 다른 누구는 빨강을 지독히도 싫어하듯이 동일한 대상이라도 누군가로부터는 총애을 받고 또 누군가로부터는 그 만큼의 대접을 못 받을 수도 있는 듯하다. 결론을 말하자면, 나에게 이 소설은 그다지 마음에 남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세계평화를 위해 뭘 할 수 있느냐고요? 집에 돌아가 당신의 가족이나 사랑하세요." -테레사 수녀-

책의 서두에 등장하는 한 문장. 이 책의 주제다. 그런데 이 주제를 형상화하기 위해 이렇게 극단적인 사건과 캐릭터들까지 동원해야 했을까라는 의문이 든다. 가정교사와 육체관계를 맺는 고등학생 아들, 이십 대 초반의 나이에 벌써 세 번의 결혼과 이혼을 겪은 딸, 그 딸을 잊지 못해 나에게 다시 돌아오지 않으면 가족을 몰살시켜 버리겠다고 협박을 하는 야쿠자 피라미같은 딸의 전남편, 남편의 사후 보험금을 노리고 본심을 숨기고 테레사 수녀처럼 살아가는 부인, 딱히 하는 일 없이 이 여자 저 여자랑 계속 바람이 나는 남편, 그리고 매력적인 외모 덕에(?) 몸을 함부로 굴린다는 비난을 받는 가정교사, 교통사고에 납치, 강간미수, 그리고 마지막에는 어이없는 죽음까지.

 

(다시) 옮긴이의 말을 보면 이런 문장이 나온다.

'뭔가를 읽을 때마다 의미를 찾아내려는 것도 병이다.'

나는 그런가 보다. 뭔가를 읽을 때마다 의미를 찾아내려고 하는 것 같다. 그런데 그것이 나의 독서 성향인 걸 어찌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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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 - 인생도처유상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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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으로만 읽게 되는 책이 있는 반면 어떤 책은 눈과 마음으로, 그리고 매우 드문 경우 눈과 마음과 더불어 발로도 읽게 되는 책이 있다.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가 나에게는 바로 이 세 번째 카테고리에 속하는 책이다.

 

지난 1993년 이 시리즈의 첫 번째 답사기인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남도답사 일번지』가 출간된 이후 장장 18년 만에, 그리고 다섯 번째 답사기인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다시 금강을 예찬하다』가 출간된 지 10년 만에 저자 유홍준이 다시 우리 곁을 찾아왔다. 이번에 그가 선사하는 이야기는 바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인생도처유상수』.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 정말 재미있다. 재미있고 재미있고 또 재미있다.

 

미술사학자인 저자는 지난 2004년부터 2008년까지 문화재청장으로서 공직에 몸 담았던 바 있다. 문화재청장 재직 시절, 숭례문 방화사건 등과 관련하여 언론의 뭇매를 맞기도 했었지만 공직에 몸 담은 이상 필부필부들과 동일한 행동을 한다 하더라도 그것에 더 큰 의미가 부여되고 그렇기에 뺨 한 대 맞고 끝날 일에 곤장 백 대를 맞게 될 수도 있는 법. 오랜만에 그의 답사기를 접하니 저자의 과거와 관련된 일들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런 내용들은 일단 접어 두고 책 자체에만 온전히 집중하여 읽어 보기로 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 "사랑하면 알게 된다."는 말을 써가며 독자들에게 문화유산에 대한 사랑을 호소하던 저자가 이번에 독자들을 데리고 가는 곳은 바로 경복궁과 전남 순천 선암사, 달성 도동서원과 거창, 합천, 부여, 논산, 보령 지역이다. 특히 저자는 문화재청장 재직시절의 경험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경복궁 이야기와 5도 2촌(일 주일 중 5일은 도시에서, 나머지 2일은 농촌에서는 지냄)의 삶을 실천하며 제 2의 고향으로 삼은 충남 부여 지역의 이야기를 위해서는 각각 4장씩을 할애하고 있다.

 

오랫동안 기다려 온 책이라서 더 반가웠던 것일런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저자가 그야말로 '발로 뛰어가며' 한 자 한 자 적어 내려간 이 책을 읽다 보면 감사하기도 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내 발바닥도 근질거려 종국에는 '책상 머리에만 앉아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 않은가!'라는 생각이 고개를 쳐들고 마는 것이다.

특히 서울에 살고있는 사람으로서 대중교통으로도 쉽게 찾아갈 수 있는 경복궁과 관련된 글을 읽으면서는 조만간 주말에 하루 날을 잡아 경복궁을 다시 한 번 둘러보리라,라는 결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많은 사람들의 애정어린 노력을 통해 오랜 기간에 걸쳐 복원된 광화문을 통해 경복궁으로 들어가 흥례문을 거치고 금천교를 지나 근정전과 사정전, 강녕전과 교태전, 경회루에 이르기까지 마치 내 집을 둘러보듯 천천히 둘러보리라.

 

이 책이 마음이 들었던 이유는 여럿 있지만, 그 중에서 몇 가지만 짚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우선, 답사 장소를 소개하면서 그와 관련된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한데 녹아내여 그 장소를 공간적은 물론 시간적으로까지 소개하고 있다는 점. 또한, 그 장소와 관련된 자신의 경험과 생각까지 소개함으로써 그 장소가 역사 속에 죽어있는 장소가 아닌 독자인 나와 동시대를 공유하는 살아 숨쉬는 장소로 느껴지게 한다는 점. 그리고 함께 읽으면 좋을만한 책들을 본문 중간중간에 소개해 준다는 점. 여기에 마지막으로, 저자가 풀어놓는 유쾌한 에피소드들을 읽다 보면 자칫하면 지루하고 고루하게만 느껴질 수도 있는 우리의 전통이나 역사가 너무나도 매력적으로 다가온다는 점 등이다.

 

이번에 6권이 나오면서 기존에 출간된 1권부터 5권짜리를 다시 다듬어서 재출간 했다고 하던데 다시 한 번 모든 시리즈를 읽고 저자의 발걸음을 따라 우리의 문화유산, 아니, 나의 문화유산을 답사해 보고 싶은 충동이 든다.

정말 멋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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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변경선 문학동네 청소년 9
전삼혜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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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9년 단편소설, 「딱」으로 대산대학문학상을 수상한 전삼혜 작가. 그녀의 장편소설을 읽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쓰지 않는 작가는 없는 듯하다. 그리고 여기, 내가 보기에는 상당히 어린(1987년 생이다.) 작가, 전삼혜는 『날짜변경선』이라는 제목의 다분히 자전적인 소설을 내놓았다. 놀라운 것은 내가 스스로를 알 것 다 아는 성인이라 여겼던 대학교 1학년 때 초등학생이었고 내가 가슴에 늠름하게 이름표 달고 국민학교에 입학할 때 쯤 세상을 향해 첫 울음을 터뜨렸을 이 작가가 풀어낸 이야기는 나와 내 동년배 친구들이 공유하던 이야기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소설, 『날짜변경선』에는 세 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우진, 윤희, 그리고 현수. 이들의 삶이 교차하는 지점에 '백일장'이 있고, 인터넷 모임터 '날짜변경선'이 있다.

이들 셋은 소위 '백일장 키드(Kid)'다. 시가 좋아서, 시를 읽고 쓸 때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해서 예고로 편입까지 해 백일장에 참가하는 우진.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 이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그림을 잘 그렸으면 그림을 그렸을 것이고 노래를 잘 불렀다면 음악을 했을 것이라는, 하지만 거의 매번 참가하는 백일장마다 상을 휩쓰는 윤희. 그리고 왜 그런지 딱 꼬집어 설명할 수는 없지만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에 상 한 번 못타면서도 꾸준히 백일장에 참가하는 현수. 이들은 각기 다른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백일장에 참가한다. 그리고 글을 쓰는 행위를 통해 서로를 질투하고, 오해하고, 미워하고, 미래에 대해 고민하던 이들은 서로에게 다가가고 이해하고 사랑하고 믿게 된다.

 

어린 시절에는 나도 백일장에 자주 참가했었다. 상을 타거나 할 때도 종종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 크면 글을 쓰는 사람이 되어야지'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다. 하지만 마음껏 좋아하는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과는 거리가 먼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전문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 되는 것 이외의 다른 꿈을 키우게 되었다.

물론, 나의 고등학교 시절이 우진과 윤희와 현수의 그것, 그러니까 백일장 키드의 그것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들이 하는 고민을 한 때는 나도 했었고 그들이 맛보는 좌절과 희망을 나 또한 경험한 바 있다. 게다가 고등학교 시절에는 대학만 들어가면, 대학교 시절에는 직장만 잡으면 나의 앞날은 마치 호호 불어가며 깨끗하게 닦은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맑은 날의 풍경처럼 선명할 줄로만 알았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그 또한 그렇지 않았다. 한 계단을 올라보면 그 다음 계단에 무엇이 있는지 도무지 보이질 않고 다음번은 다르겠지라는 생각으로 한 걸음 더 내딛어 보면 그 또한 매한가지인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고등학교 2, 3학년 아이들이 주인공인 이 책을 나는 마치 현재의 내 이야기이기라도 한 듯 마음을 담아 읽을 수 있었다.

 

『날짜변경선』에는 굉장히 드라마틱한 사건은 등장하지 않는다. 왕따 이야기까지 등장하는데 어떻게 그것이 드라마틱하지 않냐고 묻는다면 딱히 대답할 말은 없다. 하지만 이 소설이 그렇다. 등산장비를 완벽하게 준비해서 다리, 허리, 어깨 줄줄이 뻐근하도록 해발 몇 천미터를 올라가 봉우리를 찍고 내려오는 그런 극적인 소설이라기 보다는 신던 운동화 직직 끌고 언덕이라고 불러도 될법한 동네 뒷산엘 올라갔다 내려온 느낌이랄까. 그렇지만 동네 뒷산에도 희노애락은 있다. 그리고 그곳에는 세계의 유명산에서는 쉽사리 만나볼 수 없는 지극히 현실적인 우리의 일상이 숨어 있다.

 

과거의 우리의 이야기일 수도, 지금의 우리의 이야기일 수도, 그리고 어쩌면 미래의 우리의 이야기일 수도 있는 소설, 『날짜변경선』. 한 10년 쯤이 흐른 후에 이 작가가 어떤 글을 쓰게 될 지, 나는 그것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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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아비 일기 - 아프리카의 북서쪽 끝, 카나리아에서 펼쳐지는 달콤한 신혼 생활
싼마오 지음, 이지영 옮김 / 좋은생각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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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 보면 가끔씩 그런 작품을 만날 때가 있다. 자체 보다는 저자의 존재감이 더 크게 느껴지는 그런 작품. 그래서 저자가 이야기를 주무르는 솜씨가 좋든 나쁘든 '됐고! 이 작가, 한 번 만나보고 싶네.'라는 기분이 들게 하는 그런 작품.

최근 읽은 대만 작가 싼마오의 『허수아비 일기』가 나에게는 그러했다.

 

지난 2007년 조사한 '중국 현대 독자들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 100인' 중 싼마오는 6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그만큼 그녀는 소위 '인기 있는' 작가다. 물론 '싼마오와 그녀의 글들이 대중적인 인기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작품 자체의 문학성이 뛰어나지는 않다.'라는 이야기를 들은 것도 사실이다. 그녀의 작품이라고는 에세이집 딱 한 권 읽은 상황에서 필력이 좋네 안 좋네 글이 문학적이네 어쩌네 한마디로 단정지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개인적으로 싼마오가 신들린 필력을 지닌 작가라고 생각되지도 않는다.

하지만 에세이집 『허수아비 일기』를 통해 드러나는 싼마오라는 인물은 참 매력적이다. 매력적이어서 나도 모르게 '그래, 글은 이 정도 쓰면 됐어. 이제 작가를 만나보고 싶다고!!'라는 생각을 하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어쩔꺼나. 이 작가,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된 지 올해로 20년째라고 한다!

 

많이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잠시 책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면,

『허수아비 일기는 저 먼 아프리카 땅 카나리아 제도에서 펼쳐지는 저자인 싼마오와 그녀의 남편인 호세(그렇다! 스페인 사람이다.)의 신혼일기다. 어린 시절 보았던 사막 사진에 마음을 빼앗긴 싼마오는 호세와 결혼을 하고 아프리카의 사하라 사막으로 덜컥 떠났다고 하는데 카나리아 제도는 사하라에 이어 그들이 두 번째로 보금자리를 잡은 곳이라고 한다.

 

책은 크게 2부로 나뉜다. 카나리아 제도에서의 일상을 담은 글들은 2부를 구성하고, '도둑 싼마오 이야기', '파란만장 유학기', '사랑하는 시어머니의 탄생'이라는 세 토막의 짧은 이야기가 대만의 어린 싼마오부터 스페인, 미국, 독일을 떠돌던 유학생 싼마오, 그리고 스페인 집안의 일원이 된 호세의 부인 싼마오의 이야기를 차례로 더듬으며 책의 1부를 구성한다.

저자를 소개하는 글에서 싼마오의 글은 '자유롭고 발랄하고 소탈하면서도 한구석에는 깊은 우수가 어려 있다'는 문구를 봤는데 정말 정확한 묘사인 듯하다. 그녀의 글은, 아니 그녀의 행동은-본인이 직접 했던 행동을 글로 옮긴 것이니 어쩌면 그녀의 글이라기보다는 그녀의 행동이라고 하는 편이 더 옳을 지도 모르겠다- 그야말로 거침없이 자유롭고 발랄하고 소탈했으며 동시에 무언가에 대한 아련한 향수를 느끼게 했다.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반항적이었던 아이에서 중국인으로서의 교양을 지키라는 부모님의 말씀을 지키고자 고군분투하다 어느 순간 그것이 능사는 아님을 깨달은 유학생 소녀, 자기만의 지혜와 재치로 새롭게 사귀게 된 이들와 연을 맺어가는 여인의 모습까지. 어쩌면 나는 싼마오에게 내 스스로의 모습을 투영하며 책을 읽어내려갔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것은 대만의 가족이 보고싶어 타이페이로 가출을 감행한 싼마오를 다시 카나리아 제도의 보금자리로 돌아오게 만들기 위해 호세가 보낸 편지들을 소개한 부분이었다. 싼마오가 없는 호세의 삶은 마치 한 달 동안 단 하루의 예외도 없이 계란만 쪄 먹고 삶아 먹고 볶아 먹고 튀겨 먹는 질리도록 무미건조한 삶, 바로 그것이었나보다. 친정으로 도망간 그녀를 다시 자기 곁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 애를 쓰는 호세의 모습이 참 귀여워 보였달까? 그리고 그런 호세의 귀여운 머리 굴리기에 진짜로 속은 건지 아니면 속아준 건지 홀딱 넘어간 싼마오의 모습도 너무 재미있고 사랑스러웠다.

 

이렇게 에너지 넘치고 '자신다운 모습'으로 삶을 살아낸 싼마오라는 작가가 요절했다는 사실을, 그리고 이토록 알콩달콩 신나는 신혼생활을 즐겼던 부부의 이별이 실제로는 너무나도 빨리 찾아왔다는 사실-결혼한 지 5년 만에 호세는 잠수사고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을 미리 알고 읽어서 그런지 번져 나오는 미소 속에 안타까움이 섞여들 수 밖에 없었던 독서였다.

 

천국 어딘가에도 카나리아 제도가 있다면 아마도 지금쯤 그곳에서 싼마오와 호세는 다시금 만나 알콩달콩 신혼일기를 이어가고 있겠지?

그러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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