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관한 짧은 이야기 1

사랑하는 사람들의 입에서는 제정신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말들이 쏟아져 나온다. 때로는 뜨겁고 격렬하게, 또 때로는 느리고 꾸준하게, 사랑은 사람들을 농락한다. 연인이 없으면 혼자 괴로워하는 데서 끝나는 게 아니라, 사회적 존재로서의 자신감을 잃고 지금까지의 삶에 대한 회의까지 느낀다. 소설과 시와 그림과 영화와 음악과 만화, 그리고 게임에서 사랑은 정말 다양한 색깔로 펼쳐진다.

<화이트 앨범>은 일본 리프사의 18금 연애시뮬레이션 게임이다. 하고, 또 하고, 급기야 백 시간 이상 플레이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게임을 할 때는 모른다. 그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게임 내내 자기를 사로잡은 감정의 실체에 대해 알 수 있다. 그것은 사랑이다. 연애 게임이니 사랑을 다룬 건 당연하다. 하지만 조금 특이하다.

다른 연애 게임과 달리 <화이트 앨범>의 주인공은 처음부터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고등학교 때부터 사귄 '유키'는 대학도 일부러 같은 학교를 들어간 사이다. 하지만 유키가 어린 시절부터의 꿈인 가수로 데뷔를 하면서 모든 것이 달라진다. 유명인이 되었다고 옛날 연인을 우습게 보는 건 아니다. 하지만 바쁜 스케쥴 때문에 만날 수 있는 시간이 별로 없다. 점점 인기가 높아지는 유키를 보면서 한편으로는 성공을 빌면서도 자기와 다른 세계의 사람이 되어버리는 게 두렵다.

다른 게임에서는 그저 마음에 드는 사람을 골라 연인이 되려고 노력하면 된다. 하지만 이 게임에서는 누군가를 만나 사랑을 하는 건 처음의 연인과 헤어지는 걸 의미한다. 게다가 새로 만날 수 있는 건 유키의 소꿉친구, 고등학교 때 제일 좋아하던 선배 등 모두 유키와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다. 누군가를 만나서 사랑하는 과정은 유키에게 상처를 준다. 그러면서까지 다른 사람을 사랑해도 괜찮을까? 마지막 콘서트를 마치고 다가온 유키에게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왜 이렇게 돼버린 거지?' 울먹이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어도 좋을 만큼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을까? <화이트 앨범>은 이런 물음을 지겨울 정도로 던진다.

이거 삼류 드라마에서 매일 보는 이야기 아냐? 그렇지 않다. <화이트 앨범>은 누가 누구를 배신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서로 사랑한다고 굳게 믿었던 두 사람이 헤어지는 데 특별한 이유는 없다. 단지 열심히 살아간다는 이유만으로 서로 엇갈리고 지치고 조금씩 믿음을 잃어간다. 가수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유키를 탓할 수는 없다. 반대로, 언제 날 지 모르는 시간을 기다리고, 간신히 만나도 불과 십 분도 같이 있지 못하는 상황에서 지쳐가는 걸 책망할 수도 없다. 그녀가 없는 공간에서 자신의 삶을 만들어 나갈 수밖에 없고, 두 사람의 거리는 천천히 멀어진다. 시간이 지난 후 돌아보면 그 때가 바로 그런 경과점이었다고 느낄 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이미 지나온 지점들로 돌아갈 수는 없다. 악의 없는 삶의 과정에서 엇갈림이 생기고, 사랑은 생명을 다한다.

영화나 소설이라면, 주인공들의 안타까운 상황에 마음만 아파하면 된다. 하지만 게임에서는 이 모든 일을 결정하는 건 바로 나다. 나의 선택에 의해 사람들이 상처를 입는다. 사랑은 그렇다. 사랑하는 상대, 그리고 다른 사람들까지 상처를 입힌다. 나의 선택이란 건, 상처입힐 대상을 갈아치우는 것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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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예진 2004-09-09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요나라님이 쓰신 거 맞죠? 이 게임 재미있나요?

sayonara 2004-09-09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 제가 쓴 게 아닙니다.
그리고 전 게임을 안해서리.. 그냥 사랑의 안타까움을 너무도 섬세하게 쓴 글이라서 퍼왔습니다. ^_^

sayonara 2004-09-10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관적인 글이지요. 사실 이런 사랑을 해본 적은 없지만 섬세한 표현과 간결한 글솜씨가 마음에 들어서 퍼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