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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내가 죽은 집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영미 옮김 / 창해 / 200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히가시노 게이고의 수작들은 일찌감치 소개되었나 보다. '비밀'이나 '백야행'을 비롯해서 좀 완성도 높은 최근작들은 국내 출판사들이 앞 다투어 번역, 출간해버린 것 같다.
요즘 소개되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들은 80~90년대의 초기작들이 많고 작품 자체의 치밀함이나 속도 또한 약간 허술한 편이다.
'옛날에 내가 죽은 집'은 표지부터 기시 유스케의 대작 '검은집'을 능가할 것처럼 보인다.
시뻘건 갈대밭에 촛불을 들고 서있는 소녀의 뒷모습과 그녀가 바라보는 불 켜진 검은집. 적어도 겉표지만큼은 올 여름 최고의 호러 소설 같다.
하지만 내용은 끝없이 지리하게 늘어지는 스릴러 소설이다.
주인공은 동창회에서 우연히 옛여자친구였던 사야카와 연락이 닿게 된다.
그녀의 부탁으로 돌아가신 그녀의 아버지가 살아생전에 가끔 들렀던 외딴 집을 조사하러 가게 된다.
그리고 먼지만 가득 쌓인 23년 전 11시 10분에 시계가 멈춰버린 그 집을 탐구하는 작업이 지루하게 계속된다.
한동안 두 주인공이 알아낸 것이라고는 어린 남자아이의 세 가족이 살았다는 사실, 20년도 더 지난 옛날 돈이 있다는 사실, 전기제품이나 달력이 없었다는 사실 등 그리고 사야카가 그 집에 있었다는 어렴풋한 기억뿐이다.
1/3 정도 이런 조사가 계속된 뒤에는 집에 있던 일기장을 탐구하는 작업이 계속된다.
물론 이 작품에서도 히가시노 게이고의 깔끔한 글 솜씨는 나무랄 데 없다.
단 두 명의 주인공과 외딴 집이라는 소재만으로 시종일관 능수능란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데다가 아이 방에 있던 천체망원경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촘촘하게 얽힌 복선과 반전들을 다양하게 준비해 놓았다.
역자의 허풍처럼 '실존소설'의 경지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누구에게나 모른 척 하고 싶은 '옛날에 자신이 죽은 집'이 있을 것이라는 의미심장한 문장에는 충분히 공감이 간다.
하지만 이 작품의 불운은 너무 뒤늦게 출간되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작가의 집필 순서와 상관없이 차라리 '비밀'이나 '백야행'같은 걸작들보다 일찍 소개되었더라면 훨씬 더 후한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
어쨌든 개인적으로는 무척 재미있게 읽은 편이다.
퍼즐 맞추기 스타일의 정통추리소설에 가까운 모범적인 구성의 작품인데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음산하고 초초한 분위기를 물씬 풍기기 때문이다.
익숙한 듯 낮선 이 작품에 몰입할 수만 있다면 히가시노 게이고의 재능을 충분히 음미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