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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산장 살인사건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히가시노 게이고를 처음 접했을 때에는 단번에 매료되었다.
희극인지 비극인지 모를 굉장한 반전의 '비밀', 정통추리소설을 충실하게 재현해낸 '호숫가 살인사건' 등 읽는 작품마다 화려한 재능을 아낌없이 뽐내는 천재 작가에게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의 작품들도 하나같이 수작들뿐이었다.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독특한 구성의 '용의자 X의 헌신', 휴머니즘과 스릴을 결합시킨 '편지', 독특하면서도 평범한 전개의 하이테크 스릴러 '브루투스의 심장' 등 하나같이 빼어난 작품들이다.
하지만 좋은 풍경도 계속 보면 질릴 뿐이고, 맛있는 음식도 자꾸 먹으면 물리는 것처럼 그의 작품들을 계속 읽다보니 자신도 모를 매너리즘에 빠지게 되었나 보다.
그래서인지 결국 이 작품 '백마산장 살인사건'도 히가시노 게이고의 균일하고 수준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범작일 뿐이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선사하는 재미와 스릴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그의 작품을 읽는 감흥이 약해진 것 같다. 마치 최근의 존 그리샴과 로빈 쿡이 말이 너무 많아지고 문장이 너무 늘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너무나도 훌륭한 작품들을 써왔던 히가시노 게이고의 다른 수작들에 비하면 '백마산장 살인사건'이 상대적으로 범작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단 애거서 크리스티와 코넌 도일을 연상시키는 고전적인 구성이 인상적이다.
그러면서도 셜록 홈즈의 '춤추는 인형'이나 에드거 앨런 포의 '황금벌레'의 암호와는 다르다는 식으로 재치 있는 구성을 보여준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트릭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영국동요 머더구스의 노래가 그리 대단하게 느껴지거나 크게 인상적인 편이 아니다.
그저 작가가 밀실 트릭만으로는 허전하니까 그럴듯한 소재를 하나 더 집어넣은 것처럼 겉도는 느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전밀실트릭을 충실히 재연해낸 것 같은 이야기면서도 결국에는 한 발짝 더 나아가는 결말 부분에서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재능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그 결말이 어찌나 산만하던지 마치 작가가 구상하고 있던 결말은 전부 다 쏟아놓은 것 같다. 모든 비밀과 트릭을 한꺼번에 밝히는 것이 아니라 찔끔찔끔 던져 놓으며 끝날 듯 끝나지 않는다.
이 작품으로 처음 히가시노 게이고를 접하는 독자라면 이후에 훨씬 더 좋은 작품을 감상할 수 있으니 행운일 테고, 이미 히가시노 게이고의 팬이라면 '백마산장 살인 사건'보다 훨씬 더 괜찮은 작품들이 널렸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