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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 나이트
커트 보니것 지음, 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3월
평점 :
"당신은 도대체 언제부터 그를 사랑하게 되었소? 아이 때부터?" 내가 물었다.
"아이 때 부터, 그리고 여자가 된 뒤에도, 사람들이 나에게 당신이 쓴 작품을 모두 주면서 그걸 자세히 읽어보라고 하더군요. 그때 난 여자로서 당신은 사랑하게 됐어요."
"미안하지만, 난 당신의 문학적 취향을 칭찬할 수가 없소."
"당신은 이제 사랑이 인생의 유일한 목적이라는 걸 믿지 않는군요?"
"그렇소."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행여 그런게 있다면 도대체 무엇인지 말해주세요." 그녀는 간절히 애원했다."사랑이 아니어도 좋아요. 뭐라도 있다면 말해주세요!" 그녀는 누추한 방 안에 널려 있는 물건들을 일일이 가리키며, 이 세상은 고물상에 불과하다는 나의 생각을 절묘하게 연출해냈다. "저 의자를 위해 살겠어요. 저 그림을 위해, 저 난방 파이프를 위해, 저 소파를 위해, 저 벽의 갈라진 틈을 위해 살겠어요! 그것들을 위해 살라고 말해주세요. 그러면 그렇게 하겠어요!"
그녀의 힘없는 두 손이 이번에는 나를 붙잡았다. 그녀는 눈을 감고 슬피 울었다."사랑이 아니어도 좋아요." 그녀가 속삭였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말해줘요."
"레지." 나는 부드럽게 말했다.
"말해줘요!" 그녀의 손에 힘이 되살아나 내 옷에 약한 폭력을 가했다.
"난 늙은 남자요." 나는 무기력하게 말했다. 그건 겁쟁이의 거짓말이었다. 난 늙은 남자가 아니었으니까.
"그래요. 늙은 남자님,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말해줘요. 당신이 무엇을 위해 사는지 말해줘요. 그러면 나도 그것을 위해 살겠어요. 여기서든, 여기서 구만리 떨어진 곳에서든! 왜 당신이 계속 살기를 원하는지 말해줘요. 그러면 나도 계속 살 거예요!"
(283~284p)
마더 나이트에서 위의 장면이 중요한 장면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저 장면을 읽고, 또 읽고, 나중에는 소리 내어 읽어 보았다. 나는 하워드가 되어 매몰차고, 혹은 무심하게 레지에게 말했다. 그리고 나는 결국 하워드에게 아무것도 될 수 없었던 레지가 되어 애원하고 매달리는 심정으로 그녀의 말들을 읽어내려갔다. "당신이 무엇을 위해 사는지 말해줘요. 그러면 나도 그것을 위해 살겠어요."
하워드는 어쩌면 현실에 있을 수 없는 사람인지 모른다. 자신의 죄를 모두 인정하고, 그 대가를 당당하게 받기를 원하고, 그는 어떤 것도 부인하지 않는다. 겁 내는 것 또한 없어 보인다. 그는 수 많은 사람을 죽였음에도 사랑을 노래하고, 예술을 이야기한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멋지다. 그런데 하워드 주변에는 결국 보통 사람일 수 밖에 없는 나약한 사람들이 있다. 많은 인물들이 그의 주변에 있었지만 나는 레지가 계속 마음에 남았다. 나 또한 지극히 평범한 보통 사람이기 때문일까? 삶의 이유가 하워드였고, 하워드가 살아가는 이유가 곧 자신의 삶의 이유라고 생각했던 한 여인은 결국 그 사랑 때문에 파멸했다.
위의 장면만 보고 마더 나이트가 사랑이나, 연애 감정만을 이야기하는 소설이라고 생각하지는 않길 바란다. 마더 나이트에는 섣불리 감상을 말하기 어려울 정도의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하워드 w. 캠벨 2세의 인생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누구라도 레지처럼 하워드를 사랑하게 되고, 그 처럼 멋지게 살기 어렵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멋지다는 것은 그의 태도나 자세에 대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