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의 핀볼 - 무라카미 하루키 자전적 소설, 개정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윤성원 옮김 / 문학사상사 / 2007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한 계절이 문을 열고 사라지고, 또 한 계절이 다른 문으로 들어온다. 사람들은 황급히 문을 열고 이봐, 잠깐 기다려, 할 얘기가 하나 있었는데 깜박 잊었어. 하고 소리친다. 그러나 그곳에는 이미 아무도 없다. 문을 닫는다. 방 안에는 벌써 또 하나의 계절이 의자에 앉아서 성냥을 켜고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다. 잊어버린 말이 있다면 내가 들어줄게. 잘하면 전해 줄 수 있을지도 몰라. 하고 그는 말한다. 아니, 괜찮아. 별로 대수로운 건 아니야. 하고 사람은 말한다. 바람 소리만이 주위를 덮는다. 대수로운 일아 아니다. 하나의 계절이 죽었을 뿐이다.  

 

제이에게 얘기하고 나자 견딜 수 없을 정도의 허탈감이 쥐를 엄습했다. 겨우겨우 몸을 하나로 모으고 있던 여러 의식의 흐름이 갑자기 각자의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한 것 같기도 했다. 어디까지 가야 그 흐름들이 다시 하나로 합쳐질 수 있을지 쥐는 알 수가 없다. 언젠가는 망망한 바다로 흘러 들어갈 수 밖에 없는 어두운 강의 흐름이다. 두 번 다시 합쳐질 수 없을 지도 모른다.25년이란 세월은 오로지 그것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 같기도 했다. 왜 그럴까? 쥐는 자신에게 물어봤지만 알 수가 없다. 좋은 질문이지만 답이 없다. 좋은 질문에는 언제나 답이 없다.  

 

2000년도에 나에게는 쥐가 있었다. 핀볼기계를 찾아 떠나기 전에 쥐는 나와 함께 였다.  

우리는 12시마다 심야 라디오를 들었다. 같은 라디오 방송을 들으면서 방송이 끝날 때 까지 전화로 하루에 있었던 아주 사소한 일들을 이야기했다. 그 아이는 음악을 좋아했고, 나는 책을 좋아했다. 우리는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서 끊임없이 이야기를 했다. 우리는 가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전화기를 들고만 있기도 했다. 그럴때면 나는 전화기 너머로 그 아이가 누워 있는 방안에 공기까지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아직 17살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무렵 그 아이는 무엇에 홀린 듯이 17살을 벗어던지고 핀볼기계를 찾아 떠났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그 아이를 찾기 위해 난 이곳 저곳을 헤매다녔다. 그 아이는 원래부터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이 정말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떠나버렸다. 너무 말끔하게 떠나버려서 무엇을 위해 슬퍼해야하는지 가끔 헷갈리기도 했다.    

그 아이가 하루키의 열렬한 팬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그러고보니 나는 하루키를 전혀 좋아하지 않았다. 그 아이가 하루키의 팬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 나는 하루키 책이라면 들춰보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1973년의 핀볼을 집어든것은 순전히 보라색 책 표지가 눈길을 끌었기 때문이었다. 미안한 말이지만 그래, 한번 얼마나 대단한 하루키인지 읽어나 보자! 라는 심산이었다. (그 전에 읽었던 그 유명한 상실의 시대는 나에게 상실감만 안겨주었었다.) 그런데 ... 1973년의 핀볼을 읽으면서 나는 쉽게 페이지를 넘기지 못했다. 자꾸 눈길이 멈췄고, 입으로 한 문장을 곱씹고, 여러가지 뒤엉킨 기억과 감정을 풀어나가기 바빴다. 그건 그러니까, 대단한 하루키의 소설이었다.  

지금에 와서야 알겠다. 그 순간에는 이해와 사랑, 세상에 온갖 좋은 것들로도 그 아이를 붙잡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아이는 성장 중이었으니까. 성장하고 있는 아이에게 미지의 세계, 가져보지 못한 세계, 가보지 않은 세계보다 더 매력적인 것은 없으니까.  

그러고보면 예전이나 지금이나 나는 참 모든 것이 늦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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