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그 불빛
 

바람이 부는 저녁, 거리를 걷는 일은 언제나 즐겁고, 아무리 걸어도 지치지 않았다. 거기다 너무 좋은 음악이 흐르는 미니 바에서 맛있는 칵테일까지 마셨다. 그곳에 앉아서 고개를 까딱까딱 흔들면서 나는 뭐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차피 크게 나쁠 것도, 좋을 것도 없다. 그저 이렇게 저녁에는 맛있는 술을 마시고, 좋은 음악을 들을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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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4-26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응-
 

'길가에서 강도를 만났을 때 돈이 아까워 목숨을 내놓는 바보는 없다. 살기 위해 강도에게 돈을 빼앗긴 우리는 주머니가 텅 비었기에 늘 공허하다. 그래서 무언가에 몰두하고 누군가를 사랑한다. 그렇지만 사랑도 일도 텅 빈 주머니를 완벽히 채우지 못한다. 살기 위해 돈을 빼앗긴 텅 빈 주머니. 이것이 불안과 허무의 근원이다. 그런데 그 주머니는 괴물이어서 우리가 성급하게 채우려들면 오히려 심술을 부린다. 삶의 지혜는 이 요술 주머니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있다.' 

작년에 나는 이 글귀를 몇 번씩 쓰고, 거의 외우다 시피 하며 다녔다. 라캉은 이 비유를 통해 거의 나에게 신격화 되었다. 이것은 그때 내가 느끼고 있던 불안함과 알 수 없는 허전함에 대한 이유였기 때문이다. 이건 거의 명확한 진단명을 얻은 기분이었다. 물론 진단명을 얻는다고 병이 낫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헷갈렸던 모든 잡다한 생각들을 접어두게 되었다. 요술 주머니를 지혜롭게 채울 수 있는 방법을 난 아직도 모른다. 그래서 자꾸 실수를 하고, 성급하게 결정을 내려서 손해를 본다. 죽을 때 까지 요술 주머니를 지혜롭게 채울 수는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불안감마저 들었다. 그래도 어쩌랴. 나는 사회에 첫 발을 내딛은 사회 초년생일 뿐이다. 능숙하게 가지는 못해도 배우는 것은 있겠지.  

그러고보니..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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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정하고 앉으면 정말 머리가 깨끗하게 초기화된다. 그야말로 '깨끗하게! 맑게! 자신있게!' 초기화된다. 이야기의 조각도, 하다못해 부스러기도 보이지 않는다. 써야한다는 강박관념과, 쓰고 싶다는 욕심과, 쓸 수 있을까?라는 불확신 등이 결합되어 아무것도 쓰지 못하고 있다. 결국 나는 쓰레기 같은 소설 한 편으로 쥐꼬리만한 상을 받고 노벨상 같은 우월감을 느끼고 몇 개월 간 한 장도 쓰지 못하고 있었다. 그건 정말 우스운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쓰지말자고 다짐한다고 해서 되는 일도 아니다. 그럴 때는 더 쓰고 싶다. 쓸 수 없는 상황에서는 머릿속이 와글와글거린다. 모두 머릿속에서 한마디씩 떠든다. 등장인물들은 셀 수 없이 많다. 나는 고결한 문학의 숨결을 느끼는 사람에서부터 저질, 삼류 소설을 쓰는 작가가 되기도 한다. 사실 쓸 수만 있다면 야하고 더러운 소설을 한번 써 보고 싶다. 이것은 어떤 탈출구가 될 것이다. 그런데 나는 야한 경험도, 더러운 경험도 가지고 있는 것이 없다. 쓸래야 써볼 것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읽거나 본 것을 쓰자니 그것은 어떤 느낌인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내가 왜 이런 쓸데없는 자기 고백을 이곳에 털어놓고 있는지 모르겠다. 요즘 책 말고는, 이야기 말고는 나를 위로해 줄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러고보니 책이 눈으로 빨려들 때는 분명 외로운 시기다. 이전에도 그랬다. 이야기가 공급되고, 또 그 만큼 나에게서 쏟아지길 원한다. 아직 공급이 덜 된 것인지 (하긴, 충분히 공급되려면 얼마의 시간이 더 필요할지는 계산도 되지 않는다.) 들어가기는 해도 나오지는 않는다.  

난 요즘 이야깃 거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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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밤은짧아 > 부끄럽습니다.

'무슨 일인가 일어난다. 그리고 그 순간, 예전으로는 되돌아갈 수 없다. 그것이 내가 아는 리얼리티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연수
  

'세계의 끝 여자친구'를 읽다가 이 문장을 만났을 때 나는 파란색 색연필을 들고 있었고 이 문장에 아주 굵게 밑줄을 그었다. 그리고 한 열 두번쯤 이 문장을 반복해서 적었다. 바로 이것이었다. 내가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 이유 말이다. 무슨 일인가가 너무 많이 일어났다. 이미 나는 예전으로 되돌아 갈 수 없는데 거기에 진짜 내가 빠진 듯 했다. 요즘 내가 꽤 많이 듣고 있는 말은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라던가, '의도가 뭐야?' 라는 말이었는데 그럴 때 마다 나는 그저 웃었다. 바보같이 웃는 것도 한 두번이지 이건 정말 생각없어 보이잖아! 라고 스스로를 한심하게 여기고 있을 때 어떤 문장이 두더지처럼 튀어올랐다.  

'넌 세계관이라는게 없어.'

그래서였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이제부터라도 세계관을 구축하기 위해 나도 생각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아니,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공부를 하기로 마음 먹었다. 인문학을 공부하면 나도 세계관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는 꿈같은 기대. 그러면서도 개념없는 내가 듣기에는 벽이 너무 높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운이 좋게 강의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지만 강의를 들으러 가는 마음이 그리 편하지는 않았다.  

아, 그런데 채운 선생님께서는 '재현'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설명하시면서 기존의 세계관, 보편적인 관념을 부정하라고 말씀하셨다. 오. 선생님. 세계관이랄게 없었던 저는 어떻게 하나요? 부수고 말고 할 것도 없으니 다행인 것인가요? 아니면...이 강의를 통해서도 전 그럴듯한 세계관을 얻을 수 없는 건가요? 갖가지 의문과 불안감이 들고 일어났지만 나는 부끄러움을 타는 사람이기에 또 입을 다물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필기한 노트를 뒤적이며 생각했다. 선생님의 말씀대로라면 이 사회를 살아가려면 응당 '세계관' 정도는 가져야 지적인 인간이라는 소리 좀 듣지 않겠어? 라고 생각했던 그 것 자체가 내 세계관, 나의 보편적인 관념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 말이다. 그렇게 하나하나 따지고 보니 나는 얼마나 귀가 얇고 세뇌시키기 쉬운 사람인지. 보편적으로 자주 들리는 세상의 잣대에 얼마나 자주 나를 대보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 잣대에는 나는 언제나 한참 모자란 사람이었다.)

마지막에 선생님께서 해주셨던 말씀이 생각난다. 이미 여러분들은 샛길로 빠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이것은 어찌보면 김연수 작가의 말과 일맥상통한다. 그러니까 내가 이 강의를 들은 것도 나에게 무슨 일인가가 일어난 것이 된다. 나는 강의를 듣기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겠지. 그것이 기쁘다. 앞으로 남은 9개의 강의가 기대된다. 적어도 금요일만큼은 아무것도 머리에 들어있지 않은 상태로(뭐, 평소에도 무엇이 많이 들어있진 않지만) 강의를 들으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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