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밤은짧아 > 부끄럽습니다.
'무슨 일인가 일어난다. 그리고 그 순간, 예전으로는 되돌아갈 수 없다. 그것이 내가 아는 리얼리티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연수
'세계의 끝 여자친구'를 읽다가 이 문장을 만났을 때 나는 파란색 색연필을 들고 있었고 이 문장에 아주 굵게 밑줄을 그었다. 그리고 한 열 두번쯤 이 문장을 반복해서 적었다. 바로 이것이었다. 내가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 이유 말이다. 무슨 일인가가 너무 많이 일어났다. 이미 나는 예전으로 되돌아 갈 수 없는데 거기에 진짜 내가 빠진 듯 했다. 요즘 내가 꽤 많이 듣고 있는 말은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라던가, '의도가 뭐야?' 라는 말이었는데 그럴 때 마다 나는 그저 웃었다. 바보같이 웃는 것도 한 두번이지 이건 정말 생각없어 보이잖아! 라고 스스로를 한심하게 여기고 있을 때 어떤 문장이 두더지처럼 튀어올랐다.
'넌 세계관이라는게 없어.'
그래서였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이제부터라도 세계관을 구축하기 위해 나도 생각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아니,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공부를 하기로 마음 먹었다. 인문학을 공부하면 나도 세계관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는 꿈같은 기대. 그러면서도 개념없는 내가 듣기에는 벽이 너무 높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운이 좋게 강의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지만 강의를 들으러 가는 마음이 그리 편하지는 않았다.
아, 그런데 채운 선생님께서는 '재현'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설명하시면서 기존의 세계관, 보편적인 관념을 부정하라고 말씀하셨다. 오. 선생님. 세계관이랄게 없었던 저는 어떻게 하나요? 부수고 말고 할 것도 없으니 다행인 것인가요? 아니면...이 강의를 통해서도 전 그럴듯한 세계관을 얻을 수 없는 건가요? 갖가지 의문과 불안감이 들고 일어났지만 나는 부끄러움을 타는 사람이기에 또 입을 다물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필기한 노트를 뒤적이며 생각했다. 선생님의 말씀대로라면 이 사회를 살아가려면 응당 '세계관' 정도는 가져야 지적인 인간이라는 소리 좀 듣지 않겠어? 라고 생각했던 그 것 자체가 내 세계관, 나의 보편적인 관념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 말이다. 그렇게 하나하나 따지고 보니 나는 얼마나 귀가 얇고 세뇌시키기 쉬운 사람인지. 보편적으로 자주 들리는 세상의 잣대에 얼마나 자주 나를 대보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 잣대에는 나는 언제나 한참 모자란 사람이었다.)
마지막에 선생님께서 해주셨던 말씀이 생각난다. 이미 여러분들은 샛길로 빠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이것은 어찌보면 김연수 작가의 말과 일맥상통한다. 그러니까 내가 이 강의를 들은 것도 나에게 무슨 일인가가 일어난 것이 된다. 나는 강의를 듣기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겠지. 그것이 기쁘다. 앞으로 남은 9개의 강의가 기대된다. 적어도 금요일만큼은 아무것도 머리에 들어있지 않은 상태로(뭐, 평소에도 무엇이 많이 들어있진 않지만) 강의를 들으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