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숨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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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소 노동자들에게는 믿고 의지할 것이 오로지 조선소에서 주어지는 노동밖에는 없었다. 그들은 온종일 힘써 노동하면서도 노동에 갈급했다. 노동은 그들에게 일종의 구원이자 일종의 축복이었으며 일종의 善이었다. 그리고 노동은 일종의 종교이기도 했다. 그들은 노동을 통하여 회개했고, 노동을 통하여 죄 사함을 받았다. 그들이 구하여야 할 것은 노동밖에 없었다. 행하여야 할 것 또한 노동밖에 없었다. 축복과 평안도 노동 안에서 갈구했다. 그들은 하루 동안 힘써 노동을 구하고, 힘써 노동을 행하였다. 노동을 구하는 한 그들은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염려하지 않아도 되었다. (29p) 

 

아침 저녁으로 오고가는 지하철에서 이 책을 읽었다. 나는 서로의 인내심을 시험하며 먹고 살기 위해 아둥바둥 출근하는 이들 속에 섞여있었다. 그들 속에 섞여 있다는 것이 어느 날엔 안심이 되었다. 나는 노동을 하는 인간이다. 나는 밥벌이를 하고 있다.  '철'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인물은 조선소 노동자가 되기 원한다. 황량하고 배 곯은 사람으로 넘쳐나던 마을에 조선소가 들어서면서 그곳 사람들은 그곳이 자신에게 노동을 제공해 줄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그 믿음대로 조선소는 그들에게 노동을 할 수 있는 은혜(?)를 베풀었다. 그들은 그 은혜를 입을 수 있음에 감사하며 온 몸이 늙은이처럼 쪼그라들정도로 평생을 일했다. 일을 하는 동안 그들의 혀는 점점 쇠처럼 무거워져 아무도 일할 때는 말을 한마디도 내뱉지 않았다. 노동에 미쳐 노동을 구하는 삶이었다.  

 

이 책을 보는 와중에 김훈 작가의 '밥벌이의 지겨움'이라는 책 제목을 보았다. 아......그렇다. 평생을 밥벌이를 해야 하는 일에 대한 지겨움에 대한 이야기를 김숨 작가는 조선소 노동자들을 통해 풀어냈다. 그런데 단순히 노동자들에게 이것은 지겨움이라는 투정 섞인 감정이 아니었다. 이들은 노동을 통해서 배불리 먹기도 했지만 결국 노동으로 인해 몰락했다. 모두 피를 토하며 죽을 때 까지도 노동을 원했다.  

이력서를 아무리 써도 전화 조차 오지 않았던 시간이 있었다. 그때 나는 노동을 할 수 없어서 불안했다. 노동을 할 수 없다는 것은 곧 경제력이 없다는 것이며, 그것은 모든 생활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나는 조선소 노동자들처럼 노동의 은혜를 입었다. 그런데 이것이 참 이상하다. 그렇게 갈구하던 노동이 점점 나를 잠식해간다. 무엇인지 모르게 야금야금 노동에게 먹히고 있는 듯 하다. 어느 순간 뒤 돌아보니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점점 잊어가고 있었다.  

노동은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모든 인간에게 그렇다. 노동을 하면서 우리는 균형을 잡을 수 있을까? 노동에 우리 자신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 그것은 아마 평생의 숙제가 될 것이다.  

덧 - 김숨작가의 '철'은 기괴하다. 그 기괴함이 노동을 갈구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더 부각시켜주고 있다. 하지만 읽는 내내 천명관작가의 '고래'가 떠올랐다. 분명 내용은 다르지만 소설의 분위기라든지, 인물들의 캐릭터 등이 비슷하다고 느껴졌다. (물론 이건 전적으로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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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라니, 선영아 작가정신 소설향 18
김연수 지음 / 작가정신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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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아름다울까, 사랑이 아름다울까? 물론 기억이다. 기억이 더 오래가기 때문에 더 아름답다. 사랑은 두 사람이 필요하지만, 기억은 혼자라도 상관없다. 사랑이 지나가고 나면 우리가 덧정을 쏟을 곳은 기억 뿐이다. 사람도 없는 막차버스 맨 뒷자리에 나란히 앉아 집에까지 가는 동안 뭐가 그리 즐거웠던지 한없이 웃었던 기억, 아파트 근처 으슥한 벤치에 어깨를 붙이고 앉아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문득 말을 멈추고 어색한 마음에 둘이서 처음 입맞췄던 기억, 자존심 때문에 공연히 투정을 부리다가 되려 그런 자신의 모습이 싫어 그만 혼자서 울어버린 기억, 사랑이 끝난 뒤 지도에 나오는 길과 지도에 나오지 않는 길과, 차가 다니는 길과 가다니지 않는 길과, 가로수가 드리워진 길과 어두운 하늘만 보이던 길을 하염없이 걸어다니던 기억, 모든 게 끝나면 유통기한이 지난 식료품처럼 사랑했던 마음은 반품시켜야만 하지만, 사랑했던 기억만은 영수증처럼 우리에게 남는다. 한 때 우리가 무너가를 소유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증거물, 질투가 없는 사람은 사랑하지 못한다고 말 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억이 없는 사람은 사랑했다는 증거를 제사할 수 없다.

 

 

 

아니, 도대체 김연수는 모르는게 뭐야! 그는 심지어 사랑이 뭔지도 알아!

<사랑이라니, 선영아>를 준비가 많이 필요한 소설에 들어가기에 앞서 막간을 이용해서 쓴 소설이란다. 막간을 이용해서 어떻게 이런 소설을 쓰냐 말이다!  

이런 질 낮은 (?) 감상문은 쓰지 않으려고 했는데, 김연수 작가의 소설을 읽다 보면 어느 순간 독자의 입장이 아니라 팬의 입장이 된다. 어떤 가수를 좋아하는 열렬한 팬의 심정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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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에서 걸어나온 사람들 - 산월기(山月記) / 이능(李陵)
나카지마 아츠시 지음, 명진숙 옮김, 이철수 그림, 신영복 추천.감역 / 다섯수레 / 199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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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일찍이 온 고을에서 귀재라 불리던 내게 자존심이 전혀 없었다고는 말하지 않겠네. 그러나 그것은 겁많은 자존심이라고 해도 좋을 만한 것이었다네.

나는 시로써 명성 얻기를 원하면서도 스스로 스승을 찾아가려고 하지도 친구들과 어울려 절차탁마에 힘쓰려고도 하지 않았다네. 그렇다고 해서 속인들과 어울려 잘 지냈는가 하면 그렇지도 못했지. 이 또한 나의 겁많은 자존심과 존대한 수치심의 소치라고 할 수 있을걸세. 내가 구슬이 아님을 두려워 했기 때문에 애써 노력하여 닦으려고 하지 않았고, 또 내가 구슬임을 어느 정도 믿고 있었기 때문에 평범한 인간들과 어울리지도 못했던 것이라네. 나는 세상과 사람들에게서 차례로 떠나 수치와 분노로 말미암아 점점 내 안의 겁많은 자존심을 먹고 살찌우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네. 인간은 누구나 다 맹수를 부리는 자이며 그 맹수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각 인간의 성정이라고 하지. 내 경우에는 이 존대한 수치심이 바로 맹수였던걸세. 

 
<산월기> 

 

내 짧은 인생에서 반 정도의 시간을 저 고민을 하면서 보냈다. 나는 구슬일까? 어느 날은 나는 진정 빛나는 구슬이다. 나의 가치에 내가 놀라며 그래! 난 구슬이었어. 평범하지 않았던 거야. 그런 우월감에 빠져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자신감에 몸을 떨기도 했었다. 그리고 어느날은 내가 구슬이 아니었음이 여실히 드러나고, 또 나 조차도 나는 그저 쓸모없는 돌덩어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날은 온갖 좌절과 실망이 밀려왔다. 산월기의 한 대목을 읽으면서 마음이 두근두근 거렸던 것은 뜨끔했기 때문이었다.  

구슬도 그저 방치해 둔다면 녹이 슬고 때가 낀다. 하물며 완전히 아름답지 않은 구슬인 경우에는 항상 광을 내야 한다. 나는 그런 사실을 자꾸만 잊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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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임 작가정신 소설향 6
조경란 지음 / 작가정신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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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 아주머니가 남자 방에 대고 악쓰는 소리를 들었다. 이번 달에도 방세를 안 내면 아주 나갈 작정인지 알겄소. 꼭두 새벽이었다. 남자는 방안에서 옴짝도 하지 않았다. 내가 보는 앞에서 아주머니는 침을 발라 가며 꼼꼼히 돈을 세어본다. 꼭 십사만원이다. 이모는 아직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이모 지갑에서 천 원씩, 이천원씩, 어떤 때는 몇 백원씩 표 안나게 훔치고 있다는 것을. 그 돈은 내가 이곳에 온 날부터 지금까지 모은 돈이다. 그 돈으로 작은 책상을 사고 싶었다. 책상을 사고도 남을 돈이다. 하지만 나는 남자가 이 집을 떠나는 걸 원치 않는다. 그 남자를 잃고 싶지 않다. 
 

 

오래 전에 적어두었던 것 같다. 그런데 또 다시 읽어봐도 마음이 미칠 것 같다. 저 마음이 뭔지 다 안다고는 감히 저 주인공에게 미안해서 말을 못하겠다. 조금 알겠다. 조금만 알아도 그 막막함이, 그를 잃고 싶지 않은 절박함이 절절하게 느껴진다. 조경란은 하나의 장면을 통해 그 어떤 말보다 더 강렬하게 그 여자의 바람을, 욕망을, 외로움을 표현했다. '그 남자를 잃고 싶지 않다.' 라는 부분에서는 내 호주머니까지라고 털어서 그 여자를 돕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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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기술 책세상총서 4
밀란 쿤데라 지음, 권오룡 옮김 / 책세상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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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는 이해하기에 앞서 심판하고자 하는 타고난, 길들일 수 없는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종교와 이데올로기는 바로 이 욕망 위에 세워진다' 17p

 

'모험은 지평선 저 너머에 있는 것이 되고 향수는 감당해낼 수 없게 되었다. 일상의 권태 속에서는 꿈과 몽상만이 중요하다' 19p

 

'어째서 어제의 독일과 오늘의 러시아는 세계를 지배하려고 하는가? 더욱 부유해지기 위해서? 더 행복해지기 위해서? 아니다. 힘의 공격성은 완전히 제멋대로이고 아무런 동기도 없다. 그것은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원한다. 그것은 비합리적 순수이다.' 21p

 

'나는 소설의 역사를 이미 오래전에 고갈된 탄광에 비유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소설을 철학으로 바꾸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야기의 바탕 위에서 인간이라는 존재를 밝혀줄 수 있는 모든 수단, 합리적이거나 비합리적인, 서술적이거나 명상적인 것을 막론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기 위한 것이었고, 그리하여 소설을 최고의 지적인 종합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의 성취는 소설사의 완성인가, 혹은 먼 여행으로의 초대인가?' 27p

 

'저는 항상 소설을 두가지 차원에서 구성합니다. 첫번째 차원에서는 소설적 이야기를 구성하죠. 그 위에다 저는 주제를 전개시킵니다. 주제는 소설적 이야기 '속'에서 그리고 그것에 의해 끊이지 않고 이루어져 나가게 됩니다. 소설이 주제를 버리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만으로 만족해버리면 싱거운 것이 되고 맙니다. 반대로 어떤 주제는 이야기 바깥에서 독자적으로 전개될수도 있어요. 이러한 주제의 취급 방식을 저는 '탈선'이라고 부릅니다. ' 10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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