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서 걸어나온 사람들 - 산월기(山月記) / 이능(李陵)
나카지마 아츠시 지음, 명진숙 옮김, 이철수 그림, 신영복 추천.감역 / 다섯수레 / 199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물론 일찍이 온 고을에서 귀재라 불리던 내게 자존심이 전혀 없었다고는 말하지 않겠네. 그러나 그것은 겁많은 자존심이라고 해도 좋을 만한 것이었다네.

나는 시로써 명성 얻기를 원하면서도 스스로 스승을 찾아가려고 하지도 친구들과 어울려 절차탁마에 힘쓰려고도 하지 않았다네. 그렇다고 해서 속인들과 어울려 잘 지냈는가 하면 그렇지도 못했지. 이 또한 나의 겁많은 자존심과 존대한 수치심의 소치라고 할 수 있을걸세. 내가 구슬이 아님을 두려워 했기 때문에 애써 노력하여 닦으려고 하지 않았고, 또 내가 구슬임을 어느 정도 믿고 있었기 때문에 평범한 인간들과 어울리지도 못했던 것이라네. 나는 세상과 사람들에게서 차례로 떠나 수치와 분노로 말미암아 점점 내 안의 겁많은 자존심을 먹고 살찌우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네. 인간은 누구나 다 맹수를 부리는 자이며 그 맹수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각 인간의 성정이라고 하지. 내 경우에는 이 존대한 수치심이 바로 맹수였던걸세. 

 
<산월기> 

 

내 짧은 인생에서 반 정도의 시간을 저 고민을 하면서 보냈다. 나는 구슬일까? 어느 날은 나는 진정 빛나는 구슬이다. 나의 가치에 내가 놀라며 그래! 난 구슬이었어. 평범하지 않았던 거야. 그런 우월감에 빠져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자신감에 몸을 떨기도 했었다. 그리고 어느날은 내가 구슬이 아니었음이 여실히 드러나고, 또 나 조차도 나는 그저 쓸모없는 돌덩어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날은 온갖 좌절과 실망이 밀려왔다. 산월기의 한 대목을 읽으면서 마음이 두근두근 거렸던 것은 뜨끔했기 때문이었다.  

구슬도 그저 방치해 둔다면 녹이 슬고 때가 낀다. 하물며 완전히 아름답지 않은 구슬인 경우에는 항상 광을 내야 한다. 나는 그런 사실을 자꾸만 잊어버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