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름다운 사람 하나
고정희 지음 / 푸른숲 / 1996년 11월
평점 :
품절
대학시절 처음 만난 고정희의 시에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너무나도 애잔하고 서럽고 쓸쓸하고 외롭고 따뜻한 그의 시들... 한없이 외롭고 높고 쓸쓸한...! 나의 20대를 지나면서 히말라야를 걸을 때도,끝없이 이어진 팔달령을 한없이 걸어 나갈 때도, 깊고 깊은 지리산 계곡들을 넘어갈 때에도 최대한 짐을 줄인 내 배낭 속에 항상 함께 했던 책이 바로 이 시집이었다.
고정희로 인해 알게 되었고 또 그래서 더욱 사랑하게 된 고정희를 품은 지리산. 내 삶의 굽이굽이마다 능선 한자락에 올라 민족지산 지리산을 눈에 담을 때 세상 그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말할 수 없는 따뜻한 위로를 받을 수 있었음을 시인에게 감사한다. 여성해방운동에 몸담았던 시인의 삶은 스스로에게는 더욱 엄격했기에 강팍하고 고달팠으나 그의 시는 더할 수 없이 사람에 대한 애정으로 따뜻하고 애처로우니 더욱 애닯다. 분명 동시대를 잠깐 함께 했는데 그가 살아 있을 땐 내가 그의 존재를 몰랐고, 그를 알게 된 이제는 그가 이 세상에 함께 있지 않다니 슬프고도 또 슬프다.
서 시
제 삶의 무게 지고 산을 오르다
더는 오를 수 없는 봉우리에 주저앉아
철철 샘솟는 땀을 씻으며, 거기
내 삶의 무게 받아
능선에 푸르게 걸어주네, 산
이승의 서러움 지고 산을 오르다
열두 봉이 솟아 있는 서러움에 기대어
제 키만한 서러움 벗으면, 거기
내 서러운 짐 받아
열두 계곡 맑은 물로 흩어주네, 산산
쓸쓸한 나날들 지고 산을 오르다
산꽃 들꽃 어지러운 능선과 마주쳐
제 생애만한 쓸쓸함 묻으면, 거기
내 쓸쓸한 짐 받아
부드럽고 융융한 품 만들어주네, 산산산
저 역사의 물레에 혁명의 길을 잣듯
사람은 손잡아 서로 사랑의 길을 잣는 것일까
다시 넘어가야 할 산길에 서서
뼈 속까지 사무치는 그대 생각에 울면, 거기
내 사랑의 눈물 받아
눈부신 철쭉꽃밭 열어주네, 산, 산, 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