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집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29
손석춘 지음 / 들녘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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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책에는 이진선이라는 한 혁명가의 인생역정이 스무 살 시퍼런 청년의 시기부터 일흔이 넘기까지의 삶이 일기형태로 빼곡히 담겨져 있다.

일제치하 연희전문에서 만난 윤동주, 일본 유학시절의 황장엽, 빨치산 투쟁의 이현상, 남로당 시절의 박헌영 등 우리나가 근현대사의 걸출한 인물들이 이진선의 삶과 교차되어 한 편의 대하드라마를 보는 듯 하다. 간간히 님 웨일즈가 쓴 아리랑의 김산이 떠오르기도 하였는데, 이진선의 삶이 안타깝고 애닯은 것은 그가 진정 순수한 사회주의 혁명가였고, 해방 이후 북한의 변질 속에서 몸부림치며 괴로워한 지식인이었다는 점이다.

사랑하는 부모와 처자식의 죽음을 겪고 같은 길 가던 동지들마저 비참하고 억울한 죽음으로 모두 앞서 보낸 뒤에도 결코 늙을 수 없는 이 혁명가는 그가 꿈꾸는 '아름다운 집'을 지어 사랑하는 이들앞에 보여주겠노라는 희망이 있었기에 꿋꿋하게 남은 생을 살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집권 이후 시대착오적 봉건지배체제를 구축하려는 김일성 지도부에 이진선은 끊임없이 갈등하고 괴로와하며 인생의 후반부를 살아나간다.

다만, 참으로 다행이고 또 다행인 것은 비록 지천명의 나이를 지나서이지만 그의 일생의 두 번째 여인인 최진이와 재회하게 된 것이다. 최진이마저 없었다면 이진선의 말로가 얼마나 외로왔을 까. 칠순의 나이에도 이진선은 비참한 현실에 끊임없이 좌절하면서도 다시 희망하고 꿈꾸기를 멈추지 않는다. 바로 그 점이 너무나도 안쓰러웠다. 이 가슴 따뜻한 노혁명가가 일흔이 넘은 나이에 손주에게 얼음보송이 사주려고 아껴두었던 돈까지 탈탈 털어서 최진이에게 금반지를 선물한 대목에서는 기어이 눈물을 떨굴 수 밖에 없었다.

민족해방을 위해, 또 해방 뒤 통일조국을 위해 소중한 한 목숨 기꺼이 바친 혁명가들 앞에 한반도의 오늘이 어떻게 비춰질지 모르겠다. 일제치하에서는 일신의 안일을 위해 친일했던 자들이 해방 후에도 역시 기득권을 이어가는 이 땅의 현실이 얼마나 어이없고 원통할까. 다만 이 한 권의 책으로 이름없이 사라져간 그들 앞에 다소나마 위안이 될지도 모르겠다.

나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우리 지금 어디에 있는가
- 1938. 4.1. 이진선 일기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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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옷
아멜리 노통브 지음, 함유선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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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멜리 노통 매니아가 많은 듯 하여 도대체 어떤 작가이길래? 하고 궁금한 마음에 선택하게 된 책이 바로 이 <시간의 옷> 이었다. 처음 얼마간을 읽어 나갔을 때, '아, 이거 뭐야? 초등학교 때 읽었던 환타지 소설류인가?' 하는 생각은 잠시, 점점 노통의 이 대화체 소설에 빠져들어갔다. 26세기의 아이큐 190의 천재인 셀시우스가 설명하는 잘 이해되지 않는 이론들에 가끔씩 갸우뚱 거리긴 했으나, 한 호흡 쉬기조차 어려우리 만큼 노통과 셀시우스 두 사람의 대화를 숨막히고 재미있게 따라다녔다.

아멜리 노통을 좋아할 수 밖에 없게 된 이유는 온갖 경계를 끊임없이 넘나드는 놀라울 정도의 해박한 지식(진위 여부를 떠나서)이나 재기발랄한 상상력 뿐만 아니라, 귀엽다고까지 느껴지는 촌철살인의 위트와 빛나는 유머이다. 스티븐 스필버그 영화를 보면서 '스필버그는 분명 천재야!' 했던 것처럼 노통 역시 21세기의 천재임이 분명하다. (26세기의 셀시우스는 노통을 멍텅구리로 규정한다 ^^;;) 후반부 이후 혹시나 했던 결말로 이어져서 약간 아쉬울 뻔 했으나, 셀시우스에게 건네는 마지막 인삿말에 완전히 노통에게 매료당했다. 원어로 한 번 읽어봤으면...! 좋아할 만한 작가를 발견하게 된 것 같아서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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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사람 하나
고정희 지음 / 푸른숲 / 199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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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시절 처음 만난 고정희의 시에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너무나도 애잔하고 서럽고 쓸쓸하고 외롭고 따뜻한 그의 시들... 한없이 외롭고 높고 쓸쓸한...! 나의 20대를 지나면서 히말라야를 걸을 때도,끝없이 이어진 팔달령을 한없이 걸어 나갈 때도, 깊고 깊은 지리산 계곡들을 넘어갈 때에도 최대한 짐을 줄인 내 배낭 속에 항상 함께 했던 책이 바로 이 시집이었다.

고정희로 인해 알게 되었고 또 그래서 더욱 사랑하게 된 고정희를 품은 지리산. 내 삶의 굽이굽이마다 능선 한자락에 올라 민족지산 지리산을 눈에 담을 때 세상 그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말할 수 없는 따뜻한 위로를 받을 수 있었음을 시인에게 감사한다. 여성해방운동에 몸담았던 시인의 삶은 스스로에게는 더욱 엄격했기에 강팍하고 고달팠으나 그의 시는 더할 수 없이 사람에 대한 애정으로 따뜻하고 애처로우니 더욱 애닯다. 분명 동시대를 잠깐 함께 했는데 그가 살아 있을 땐 내가 그의 존재를 몰랐고, 그를 알게 된 이제는 그가 이 세상에 함께 있지 않다니 슬프고도 또 슬프다.

서 시

제 삶의 무게 지고 산을 오르다
더는 오를 수 없는 봉우리에 주저앉아
철철 샘솟는 땀을 씻으며, 거기
내 삶의 무게 받아
능선에 푸르게 걸어주네, 산

이승의 서러움 지고 산을 오르다
열두 봉이 솟아 있는 서러움에 기대어
제 키만한 서러움 벗으면, 거기
내 서러운 짐 받아
열두 계곡 맑은 물로 흩어주네, 산산

쓸쓸한 나날들 지고 산을 오르다
산꽃 들꽃 어지러운 능선과 마주쳐
제 생애만한 쓸쓸함 묻으면, 거기
내 쓸쓸한 짐 받아
부드럽고 융융한 품 만들어주네, 산산산

저 역사의 물레에 혁명의 길을 잣듯
사람은 손잡아 서로 사랑의 길을 잣는 것일까
다시 넘어가야 할 산길에 서서
뼈 속까지 사무치는 그대 생각에 울면, 거기
내 사랑의 눈물 받아
눈부신 철쭉꽃밭 열어주네, 산, 산,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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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생의 한가운데
루이제 린저 지음, 강두식 옮김 / 문예출판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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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의 최고의 책 중에 하나인 <생의 한가운데>의 속편이라 할 수 있는 책… 슬프고도 실망스럽다. 마흔 살을 넘긴 니나가 한 남자와의 관계에 천착하게 됨으로써 자신의 재능과 열정을 모두 유보하고, 종교에 대해 갈등하다가 어느 순간 화해와 함께 카톨릭에 귀의하다니… 특히 니나와 그 남편의 사랑은 예전에 읽었던 김원일의 '사랑아 길을 묻는다'를 떠올리게 했다. 파멸의 길을 뻔히 내다 보면서도 걸어갈 수 밖에 없는 숙명이라며 니나는 자꾸만 자기의 생을 내맡기는 이유가 뭘까? 전작에서 보아왔던 생의 한가운데에서도 결코 꺾일 줄 모르던 생에 대한 열정과 에네르기, 폭풍 한가운데의 고요한 눈과 같은 놀라울 만한 평상심 등은 사라지고 모든 것을 그저 남자와의 운명에 내맡긴 듯한 생의 태도가 쉽게 납득이 가질 않는다. 내 나이 마흔이 되서 읽으면 다르게 이해할 수 있을까? 제발 그러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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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마을 헤이온와이
리처드 부스 지음, 이은선 옮김 / 씨앗을뿌리는사람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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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의 미디어평은 거의 신뢰하지 않는데, 이 책은 독자리뷰가 없는 대신 책의 미리보기가 올라와 있어서 몇 페이지를 읽어봤는데 아! 이거다, 싶었다.

3년 전, 한참 주식투자에 열을 올리고 있었을 때, 엄청난 수익율을 올리면서 평가총액이 9자리숫자로 간 적이 있었다. 그 때 나의 야심찬 계획은 다름아닌 종로5가 등산용품 장비점 골목에 자그마한 산악전문서점을 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몇 개월 뒤에 원금만을 겨우 회수했기 대문에 미수에 그치고 말았으나 한동안 헌책방 주인이 꿈이었던 나에게 이 책은 딱 걸린 셈이었다.

그러나 이게 웬걸... 온갖 기행을 일삼는 아주 독특한 한 인간의 횡설수설 장광설이 장장 400페이지에 걸쳐 끊임없이 이어진다는 것 뿐이다. 놀라운 것은 저자가 대단한 두뇌의 소유자임에는 분명하다는 것. 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새로운 인물들의 이름이 적어도 두세명은 나온다. 정말 대단한 기억력이고, 인적 네트웍 구성력에 경탄을 금할 수가 없다.

이야기 전개는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고 있으나 중구난방 왔다갔다 하는 통에 읽는 내내 정신이 하나도 없다. 엄청난 가치의 헌 책을 눈먼 주인에게 형편없는 헐값에 매입하여 엄청난 수익을 남기고 되파는 비즈니스와 수천명에 이를 것에 분명한 다양한 주변인들, 중반부 이후 기계문명의 도입에 대한 강한 거부감, 미국의 인디언 이야기 등이 버물려서 읽는 이로 하여금 그 엄청난 횡수에 결국 어이가 없어지게하고 만다.

책값이 아까와서 꾸역꾸역 읽은 책... 무지 아깝다! (책 보고싶은 분은 연락주기 바랍니다. 공짜로 양도하겠습니다. -_-;;) @ 저자인 리차드 부스의 인간적인 매력은 있다. 신문이나 잡지에서 쪽글로 읽는 정도였다면 다만 충분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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