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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확인 홀
김유원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3월
평점 :
블랙홀. 사라진 필희. 남은 사람들.
필희가 사라졌다. 흔적도 없이. 남은, 남겨진 희영과 필성은 필희를 찾지만 찾지 못한다. 그렇지만 사라지지 않고 살아간다. 필희는 정말 저수지에 생긴 블랙홀로 들어갔을까. 사라진 필희. 사라지고 싶은 더 많은 사람들. 사라져 버린 사람과 남은,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
"이든을 섣불리 잃으려고 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내 것이 아닌 건 결국 잃게 마련이라고 생각하며 순옥은 살아왔다. 버리거나 버려지는 것 모두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다르게 생각해 보기로 했다. 살다 보면 모든 걸 한순간에 잃는 것 같아도, 살아보면 어떤 걸 완전히 잃기까지는 여러 단계가 존재한다고. 그러므로 완전히 잃지는 않을 기회 또한 여러 번 있다고. 때로는 잃지 않겠다는 의지가 상실을 막아주기도 한다. (...) 이든아, 어데 가지 말고 여기 있어래이. 어데 가지 말고 여기 있어레이." _113~114
내가 잃어버려 놓고, 먼저 손을 놓고는 어쩔 수 없었다고 스스로에게 거짓말 했다. 내가 놓은 게 아니라 상대가 떠나버린 거라고. 그건 내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하지만 순옥은 잃지 않겠다고, 섣불리 손을 놓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어디 가지 말고 여기 있으라고 이든에게 말한다. 나도 순옥처럼 누군가를 섣불리 잃어버리지 않도록, 잃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지켜보겠다는 의지를 가져 보려 한다.
"어떤 사람은 삶에 대롱대롱 매달린 기분으로 평생을 살기도 한다"
"미쳐 정말. 언니는 우릴 버리고 간 그 여자가 왜 보고 싶은 거야?" 필성도 괴로웠다. 하지만 언니처럼 사라지고 싶단 생각이 들진 않았다. 오히려 오기가 생겼다. 보란 듯이 잘 살아야지, 그래서 그 여자가 우리를 찾으면 매몰차게 외면해야지, 그땐 내가 먼저 버려야지. 그렇게 마음먹는 과정에서 필성은 자신이 삶에 단단히 박음질 된 사람이란 걸 알았다. 실이 끊길 위기가 닥치면 다른 실을 구해 박음질할 힘이 있는 사람이란 것도. _134
나는 삶에 대롱대롱 매달린 사람일까. 삶에 단단히 박음질 된 사람일까. 그 중간 어디쯤에서 흔들리는 사람이다. 삶에 대롱대롱 매달린 기분도, 삶에 단단히 박음질 된 채로 살아가는 기분도 나는 잘 모르겠다. 누군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는 걸 알았을 때 박음질 해 주진 못해도 그 가느다란 실을 끊지는 말아야지.
"그래서 당신 마음은 어때?"
오른쪽 다리가 부러져 공장 밖으로 끌려 나오는 동안 정식은 재빨리 자신의 과거를 훑었다. 이 굴욕적인 상황의 원인을 자신에게 찾으려고 했다. 그게 가장 쉬운 길임을 알고 본능적으로. 하지만 억울함으로 흥건해진 가슴이 그런 식의 원인 규명에 거세게 저항했다. 난 잘못이 없어. 성실히 일했잖아. 갑자기 해고당했어. 당한 건 나라고. 그런데 내가 왜? 내가 뭘 잘못했어? 자식들 생각도 했다. 아빠가 경찰에 두들겨 맞다니! 애들한테 뭐라고 말해. 정식은 말 안 들으면 경찰 아저씨한테 잡아가라고 하겠다는 농담을 두 번 다시 할 수 없게 된 현실이 기가막혔다. _164~165
정식이 자꾸 마음을 물었던 건 똑같은 질문을 받고 싶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 질문은 결국 자기 자신을 향한 게 아니었을까? 다른 사람이 물어봐도 답하기 어렵고 스스로가 물어도 답하기 힘든 질문. 그래도 계속 물을 수밖에 없는 질문. 모든 믿음이 허물어진 세계에서 살아가는 기분도 나는 모른다. 적어도 최소한의 믿음은 지키면서 살 수 있는 사회이길 바랄 뿐.
"혜윤 씨 때문이 아니에요. 제 문제예요."
그러자 울컥 움을이 올라왔다. 찬영은 울음을 삼키며 젊었을 때 잡지에서 읽었던 시를 생각했다. 가장 깊은 울음은 자신을 위해서만 나온다는 구절로 끝나던 시, 그렇게 단정하는 것에 반감을 느꼈지만 잊히진 않던 시. _230-231
찬영은 늦었지만 깨달았다. 자기가 지키는 온실에 사는 건 자기 자신뿐이었다는 걸.
결국 자기를 지키고 싶어서 그랬다는 걸. 하지만 그게 부끄러워 해야 할 일은 아니다.
자기 자신을 지켜야 주변도 지킬 수 있으니까. 단, 나를 지키는 걸 남을 지키는 일이라고 착각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필희는 어디로 갔을까.
미확인 홀은 정말 블랙홀일까.
남겨진 것일까 남은 것일까.
왜 나는 사라지지 않고 살아가고 있을까.
가슴 속 미확인 홀을 죽기 전에 해결할 수 있을까.
이 소설을 읽고 여러 질문이 마음에 가득히 남았다.
답을 찾지 못하더라도 사라지지 않고 살아보고 싶어 졌다. 조금 더 아름답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