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시 : 유럽의 운명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114
앙리에트 아세오 지음, 김주경 옮김 / 시공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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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시, 보헤미안, 롬, 치가니... 유럽의 한 유랑민족을 부르는 이름들이다. '집시'에 대해서 이름은 많이 들어봤지만 그들이 어디서 왔고, 어떤 문화를 가지고 있으며 지금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듯 하다. 집시, 보헤미안 이란 단어를 들으면 뭔가 시적인 느낌이 들고, 자유분방한 모습이 상상된다. 나는 그들이 2차대전 당시 유대인과 더불어 대량학살의 피해자였다는 사실 또한 어렴풋이 알고 있다. 유대인은 워낙 잘 알려졌으니까. 그런데 집시는 왜 죽였지? 얘넨 정체가 도대체 뭐여? 궁금한 생각이 들어 사보게 된 책이다.

집시들은 중세 말에 갑자기 등장하여 유럽 전역으로 퍼져 갔다. 그들이 유럽에 처음 등장했을 때, 당시 유럽인들 사이에서도 그들의 출신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그들은 스스로 순례자라 칭했으며, 小이집트라는 곳에서 왔다고 했다. 어찌 됐든 크리스트교의 순례자라고 하니, 유럽인은 처음에 좋은 대접을 해주었으나, 차차 집시들의 "'부랑배, 사기꾼, 도둑'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집시들의 그런 부정적인 이미지는 어느 정도 실제와 근접했던 모양이다. 그들은 손금 봐주기를 좋아했으며(당시 손금 봐주는 일은 불법이었다) 구걸로 연명하는 한편 도적질을 자행하기도 했다. 국가들 입장에서도 - 국적도 없이 맨날 떠돌아다니는 - 집시들이 세금도 잘 안내면서 치안만 어지럽히는 골칫덩어리들로 보였을 것이다. 고민 끝에 어떤 국가들은 집시를 용병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마차를 끌며 유랑생활을 하고, 플라멩코를 추며 고슴도치 고기를 먹는 그들. 정부들의 온갖 정착화 노력에도 수백 년간 자신들의 생활방식을 고수한 그들은 2차대전 때도 옛날 그대로 였다. 옛날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야영할 때 천막을 치고 자던 것이 아예 캠핑카 같이 설계한 마차에서 자게 되었다는 정도였다. 나치는 집시의 순수혈통은 훌륭하다고 칭찬했다. 하지만 지금의 집시들은 죄다 '잡종'이며, 청소해 버려야 할 존재들이라고 했다. 집시들은 그렇게 50만 명 정도가 학살 당했다.  

세월이 흐르고 세상이 변해도, 고집스런 집시들은 좀체 변하려 하지 않았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지금 양립되기 어려운 두 가지 상반된 소망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각 국가 안에서 시민권을 인정받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유럽 전역에서 소수 민족 집단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일치될 수 없는 이 상반된 소망이, 서구라는 약속의 땅을 찾아 동구에서 온 '새로운 이민자 집시들'과 대부분 17세기부터 서구 사회에 완전히 동화되어 자리를 잡게 된 집시들 사이에 점점 커가고 있는 잠재적인 갈등 속에서 표현되고 있다.」

즉 일부 정착한 집시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집시들은 아직도 유랑생활을 고수하려 하고 있다.

앞 서 집시들이 스스로를 이집트에서 왔다고 했다 했는데, 오랜 연구 끝에 학자들이 내린 결론은 그와 다르다. 그렇다고 그들이 보헤미아 사람인 것도 아니었다. 집시들은 유럽 전역, 심지어 아메리카에도 퍼져 살지만 모두 '로마니어'라는 특유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 언어의 기원을 따져 올라가 보면, 집시의 조상은 인도인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들의 외모나 풍습을 봐도 이는 타당한 이야기다. 집시들은 피임을 하지 않으며, 보통 십여 명의 아이를 낳는다. 조혼을 하는 데다 여성 인권도 형편없다. 다음은 그들의 결혼 풍습에 관한 내용이다.

「그 의식 중에는 나이 든 한 여성이 신부의 처녀성을 검사한 후, 그 증거로 얼룩이 묻은 손수건을 손님들을 향해 세 번 혹은 다섯 번 높이 들어 보이는 게 있다. ...손수건이 공개되는 동안 <알보레아> 혹은 <옐리옐리>라고 하는 집시들의 전통적인 결혼 축가가 연주되고, 하객들은 신랑을 헹가래치며 축하해 준다.」

그렇게 결혼한 신부는 시부모를 모시고 살면서 온갖 고생을 하게 된다. 또한 집시들은 여전히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한 채 일생을 마감하고 있다.

「롬들의 평균 수명은 주변 국가의 국민들보다 훨씬 짧다. 어떤 연구 자료에 따르면, 약 46세에서 50세 사이다. 유고슬라비아나 루마니아에는 집시들의 평균 수명이 29세에서 31세에 불과한 지역도 있다고 한다.」

집시들의 이런 생활을 가드조(집시들이 타 민족을 경멸 섞어 부르는 말)의 입장에서 보면 꼭 구제해 줘야만 할 것 같고 정착을 시켜야 할 것 같지만, 그들의 입장은 그게 아닌 모양이다. 이런 집시들의 특성은 그야말로 '집시' 자체가 시적인 이유를 말해준다. 21세기 다문화 사회에, 집시들이란 정말 다문화의 의미와 적용에 대하여 고민하게 만드는 매력있는 민족이라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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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로마 신화 - 포켓북 세계명작 베스트
토마스 불핀치 지음, 오영숙 옮김 / 일송포켓북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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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지성인이라면 그리스 로마 신화 정도는 읽어봐야 하지 않을까? 나는 예전부터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살면서 그리스 로마 신화 접할 일은 은근히 많았다. 동화책, 만화, 테레비 방송 기타 등등... 이건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고집스럽게 책을 밝히는(?) 사람이라, 내 손에 쥐고 그 놈의 미쏠로지를 활자로 들여다 봐야 했다. 그런 고로 가장 많이 읽히는 토마스 불핀치의 책을 사보게 되었다.
읽어 보니 책이 무슨 입문서 같기도 하고 요약본 같기도 했다. 불핀치는 책의 마지막 장에서 그리스나 로마의 옛 시인들 - 호메로스, 베르질리우스, 오비디우스 - 의 작품들에서 이야기를 취했다고 밝히고 있다. 대중을 위해 정수만 뽑아낸 것이다. 구스타프 슈바브의 책은 총 6권에 달한다고 한다. 반면 이 책은 1권 짜리 어린이 삼국지와도 같다. 방대한 내용을 요약해 전달하려다 보니 스토리 진행이나 문장 호흡이 급한 경우가 더러 있었다. 하지만 그게 큰 불만은 아니었다. 우리나라 구비문학도 잘 모르는데 구라파 쪽 신화 정보는 이 정도면 족하다.

특기할 만한 내용들을 우선 정리해 보자면,

「야누스, 하늘의 문지기로 그가 새해를 열기 때문에 일 년 중 첫 달을 그의 이름을 따서 '야누아리우스(January)'라 부른다. ...로마에는 그의 사원이 굉장히 많았다. 전쟁이 있을 때에는 제일 큰 사원의 문을 열었고 평화 시에는 닫아놓았다. 그런데 누마와 아우구스투스가 통치하던 시절에는 단 한 번 문이 닫힌 적이 있었다.」

「프로메테우스는 아테네의 도움을 얻어 하늘로 올라가 태양의 수레로부터 횃불을 옮겨 붙였다. 땅으로 내려온 프로메테우스는 이 불을 사람에게 넘겨주었다.」 

인류 최초의 여자 '판도라'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대강의 내용보다는, 어떤 이야기에서는 제우스가 인간 엿먹이려고 판도라를 만들었다고 하고, 다른 이야기에서는 남자를 축복하려고 내려준 것이라고 하는 - 모순된 상황이 재미있었다. 왜 같은 소재를 가지고 전혀 반대되는 얘기가 나왔을 지 의문이다. 그러고 보면 서양 쪽 창세 신화는 꼭 남자가 먼저 만들어지고, 여자는 신이 추후에 별도 제작(?)해 내려보낸다는 특징이 있는 것 같다. 어찌 보면 나중에 성경을 쓴 중동쪽에서 그리스 로마의 이 판도라 이야기를 차용했을 수도 있겠다.
'황금시대' - '은시대' - '놋시대' 이야기도 있는데, 구석기 - 신석기 - 청동 및 철기 시대 순으로 비유를 한 모양이었다. 내용이 거의 맞아 떨어졌다. 그런 걸 보면 그 옛날 그리스 로마 애들은 과거 구석기 및 신석기 시대에 대하여 어렴풋이나마 기억을 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놋시대 때 사람들이 타락하고, 제우스가 벌을 내리는 장면은 뭐 거의 성경이랑 유사하다. 

「화를 부르는 쇠가 만들어지고, 더욱 큰 재앙을 부르는 금이 생산되었다. 이 두 가지를 원하는 전쟁이 계속 일어났다. ...이른 상속 때문에 아들은 아버지 죽음을 바라고, 가족 간 사랑은 땅에 떨어졌다. ...제우스는 땅에서 벌어지는 사람들의 행악을 보고 더할 수 없는 노여움에 떨었다...」

책 초반에는 어느 신이 어느 신 - 혹은 님프 - 혹은 사람 - 과 성관계를 해서 애 누구를 낳았고 그 애는 무얼 잘했고 그 애가 길 가다 누구의 아들(딸)인 누구를 발견해 사랑에 빠져서 쫓아다녔고 그러다 성공 - 혹은 실패 - 를 해서 자살을 했다, 저주를 받았다, 살해 당했다, 그래서 그 애가 변한 것이 이것이다, 하는 유의 내용이 주구장창 전개되었다. 해피엔딩은 거의 없었고, 대부분이 죽거나 장애인이 되는 걸로 이야기가 마무리됐다. 또한 애들 이름이 -스, -우스 천지라 누가 누군지도 헷갈리고 참 읽는 게 고역이었다.
한편 에로스와 프시케의 이야기에서 에로스의 일갈이 눈여겨 볼 만 했다.

「"아! 어리석은 프시케여, 그 꼴이 내 사랑에 보답하는 길이던가? 어머니 명령을 거스르면서까지 그대를 아내로 삼았는데! 그대는 나를 괴물로 생각하고 목을 자르려 하다니. 이제 어쩔 수 없으니 그대가 내 말보다 더 소중히 여긴 언니들에게로 돌아가라. 나는 그대와 영원히 이별하는 것 이외의 다른 벌을 그대에게 주고 싶지는 않도다. 사랑은 의심과 함께 있을 수 없는 것이니라."」 

프시케는 뒤늦게 후회하고 에로스의 어미 아프로디테를 찾아가 시험을 받기도 하고, 온갖 고초를 겪은 후 에로스와 다시 맺어진다. 에로스는 그 과정에서 묵묵히 프시케를 후원한다. 이것이야말로 정말 보기 드문 해피엔딩 이야기다. 이 전설은 2세기에 처음 등장했다고 하는데, 이 책의 다른 전설들에 비해 상당히 후대의 것이라고 한다. 다른 전설은 대부분 죽고, 죽이고 난리도 아니다. 단순히 질투 좀 나면 상대를 장애인 만들거나 죽인다. 보는 내내 정말 잔인하고 야만적이라고 생각했는데, 2세기 쯤 되니까 그리스 로마인 스스로도 조금이나마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걸까? 뭐, 알 수 없는 일이다.
전술한 야만적인 이야기 중 하나를 보면,

「...다이달로스는 세상에 자신과 맞설 이가 없다고 여겼다. 그의 누이가 아들 탈로스를 맡겨 삼촌의 기술을 전수받도록 했다. 탈로스는...바닷가를 거닐다 물고기 등뼈를 하나 얻었다. 그것을 모방해 쇳조각을 가지고 가장자리 날을 고르게 깎아 톱을 발명했다. 또한 쇳조각 두 개를 합쳐 한 끝에 못을 박아 서로 연결한 뒤 다른 끝들은 뾰족하게 갈았다. 바로 컴퍼스를 만든 것이다. 다이달로스는 조카가 남다른 재능을 발휘하는 것을 시기했다. 어느 날 함께 높은 탑 꼭대기에 올라갔을 때에 틈을 타서 그를 밀어 떨어뜨렸다...」 

미드 스파르타쿠스가 잔인하다고들 하는데, 거기서도 저런 어이없는 질투심으로 혈육을 죽이는 장면은 안 나온다. 이건 차라리 - 억지로 꼬아본다면 - 밥그릇 싸움일 수도 있겠다 싶기라도 하지, 그냥 나보다 이뻐서 장애인 만들고 나한테 까불어서 죽이고, 아니면 그냥 맘에 안들어서 죽이는 등 별의별 경우가 다 있다. 아귀로 변해 자기 팔다리까지 뜯어먹고 죽은 에리시크톤 이야기라든지 아폴론에게 산 채로 껍질이 벗겨진 마르시아스 이야기 등 잔인한 신화는 셀 수도 없었다.

20장부터는 트로야 전쟁 이야기였다. 나는 10여 년간이나 이어진 이 전쟁이 고작 여자 문제 때문에 일어났다는 사실이 좀 어이없었다. 여자 문제가 같잖다는 게 아니라, 멀쩡한 스파르타의 왕비를 트로이 왕자가 아프로디테의 도움으로 꼬셔가 버려서 전쟁이 났다고 하니까... 스파르타 왕은 당연히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 상황이고. 물론 신화이긴 하지만 너무 억지스러운 것 같았다. 나중에는 그리스인들끼리 전리품 분배 중 여자(전리품임) 문제로 서로 다투기도 한다.
한편 아이네이아스의 모험 중 고대인들의 사후세계관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가 있었다. 

「창조주는 맨 처음 영혼을 구성하는 원료로 불, 공기, 흙, 물 네 원소를 써서 만들었다. 그것을 모두 합치면 가장 우월한 원소인 불의 모습으로 나타나 불꽃이 된다. ...그때 흙을 여러 비율로 섞어서 그 순수성이 낮아졌다. 어떤 합성물에 흙이 많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그만큼 그 개체 순수성이 줄어드는 것이다. ...이 불순성은 죽은 뒤에 깨끗이 씻어 버려야 한다. 이 일은 영혼을 바람 부는 곳에 내놓고 공기를 통하게 하거나 물에 잠기게 하거나, 불로써 태워버리는 방법으로 행해진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은 흙의 불순성이 깨끗이 사라진 뒤에 레테 강의 물로 전생 기억을 완전히 씻어 버리고 새로운 몸이 부여돼 이승으로 다시 돌려보내지는 것이다. ...옛 사람들이 이른바 메템프시코우시스, 즉 '영혼의 전생'이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베르질리우스의 견해였다. 호메로스는 낙원을 "죽은 자의 나라 일부로 보지 않았다." 호메로스는 현세에 지상낙원이 존재하며, 그곳은 서쪽에 있다고 했다. 이가 곧 '아틀란티스' 전설로 발전했는데, 불핀치는 이것이 상상의 산물이지만 혹여나 표류한 선원들이 아메리카 해안을 얼핏 보고 전한 이야기가 낳은 전설일 수도 있다고 추측하고 있다. 

인류는 참 대단하다. 최근 학설에 따르면 호모 사피엔스는 20만 년 전에 처음 등장했는데, 7만 년쯤 전에야 아프리카를 벗어나 전세계로 퍼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발칸 등 지중해 북쪽으로 진출한 건 불과 4, 5만 년 전. 그리스 인들은 엄청난 속도로 문명을 발전시켰고, 그 세력이 갈수록 커져 무려 기원전 1250년경에 트로이 전쟁을 벌이기에 이르렀다. 호메로스가 일리아스를 쓴 때도 기원전 850년경이란다. 말이 쉽지 상상이 안 간다. 앞서 내가 그리스 로마 신화가 잔인하고 야만적이라고 했는데, 비록 내용은 야만적일 지언정 그 신화들이 내포하는 뜻과 그 밖의 유물들은 세련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런 위대한 문명에 대해 탐구하는 일은 질리지가 않는다. 좋은 독서경혐이었고, 이제는 일리아스를 읽어야 할 차례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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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 평전
여명협 지음, 신원봉 옮김 / 지훈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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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처음 책의 분량에 조금 놀랐다. 제갈량에 대한 기록이 이렇게 많았나? 제갈량의 전기가 600여 쪽에 달할 수 있을 정도로 남아 있는 자료가 충분한가? 게다가 저자는 완벽하게 사료에만 의거해 평전을 썼다. 연의의 내용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으며, 심지어 사료의 내용조차 의심의 여지가 있는 경우 가차없이 배제해 버리곤 했다. 그야말로 머리말에 쓴 것처럼 '엄밀한 실사구시의 관점에서' 책을 써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우람한 두께를 자랑할 수 있었던 것은 저자가 책의 구성을 절묘하게 설계했기 때문이다. 책은 크게 1, 2부로 나뉜다. 각각 제갈량의 생애, 그리고 사상에 관하여 거의 비등한 분량으로 읊어 놓았다. 사실 사상 부분에서 어느 정도는 구색 맞추기 식의 내용도 있었으나 확실히 버릴 말보단 쓸만 한 말이 훨씬 많았다. 특히 마지막 장인 '제갈량의 철학, 윤리사상'의 경우 논의가 거의 전무한 상태에서 저자가 최초로 연구를 시도해 보았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는데, 꽤 가치 있는 일로 보인다. 상당히 성실한 책이었다.

 저자는 삼국시대의 정치상황, 제갈량의 고향 등에 대한 분석부터 시작해 제갈량의 주변인물들까지 자세하게 살펴보고 있다. 한편 제갈량이 못생긴 황씨 부인과 결혼한 이야기는 이미 유명한데, 당시에 '공명처럼 아내를 택하지 말게, 겨우 황영감 추녀나 얻을 테니.'와 같은 농담이 생기기도 했다. 키가 8척이었다던 훈남 제갈량이 대체 왜 오크녀 황부인과 결혼했을까? 저자는 이 결혼의 배경에 대해 자세한 분석을 해놓았다.

「그러나 황승언은 형주 양양 지역에서 대단히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양양의 호족인 채풍이 무엇 때문에 장녀를 그에게 시집보냈겠는가? 채풍은 작은 딸을 유표에게 시집보냈으며, 그 아들 채모 역시 유표의 수하에서 실권을 장악한 인물이다. 그러므로 제갈량이 황승언의 딸을 처로 삼음으로써 황씨 · 채씨 · 유씨 가문과 직접적인 인척관계가 맺어졌으며, 이 관계는 그가 그 지역의 상류사회에 합류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저자는 제갈량의 이러한 정략적인 선택이 전혀 욕먹을 일이 아니며, 당시 사회 분위기상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고 변호하고 있다. 한편 이윤의 고사를 삼고초려와 비교한 내용도 눈에 띄었다.

「상나라 탕왕의 어진 재상 이윤은 "탕이 사람을 시켜 초빙하니, 다섯 번 거절한 뒤에야 탕을 따르기로 했다"고 한다. 이것은 전설에 가까운 이야기로 사실이라 하더라도 탕은 사람을 시켜 초빙한 것이니, 어찌 유현덕이 수고로움을 마다 않고 세 번이나 오두막을 찾은 것과 같겠는가?」

 때문에 27살 청년 제갈량은 유비를 따라 나서 평생 동안 충성을 다했다. 제갈량이 '융중대'에서 논한 천하삼분지계는 가히 그 내용이 구체적이며 당시 중국의 상황을 마치 손바닥 보듯이 한, 그야말로 제갈공명다운 논의였다.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인지라 제갈량은 유비 진영에 합류한 지 얼마 못되어 조조에게 장판에서 패해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만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유비가 왜 당하고만 있었는지 의아해 하는 의견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난 그저 조조의 대군이 쳐내려오고, 유비는 백성들을 비롯한 10만 여 무리를 이끌고 천천히 행군 중이었으므로 5천 기병에게 당한 것에 대하여 그저 자연스러운 일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나라 사람 왕발과 저자는 의문을 품고 있었다.

「"...조조의 수천 군대가 밤낮으로 300리를 달려 보급품도 공급되지 않고 연락도 끊어진 상태니 한번 싸워 사로잡을 만하지 않았는가? 10만의 무리가 활 한 번 쏘아보지 못하고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으니, 표범이나 호랑이에 먹히는 개나 양의 무리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과연 당시 기병의 전투력이 월등했다고 해도 유비 진영의 머릿수를 보면 의문을 가질 만한 일이다. 혹시 나관중도 - 극적인 효과도 물론이거니와 - 이 점을 고려해 5천을 100만으로 뻥튀기했던 건 아닐까? 아무튼 상당히 참신한 의견이었다.
 한편 적벽대전에 대해 분석을 하면서 저자는 '동풍'에 관하여 우연의 일치일 뿐이라고 단정 짓고 있다. 내가 알기로 일설에서는 제갈량이 동풍을 부르진 않았지만 동풍이 불 타이밍을 경험으로써 알고 있었다고 하는데, 저자는 당시 화공이 동풍을 전제로 한 것도 아니었으며, 당시의 기상예측 수준으로는 동풍 예측이 아예 불가능했다고 못 박고 있다. 나야 그쪽 방면은 잘 모르니 그런가 보다 했다.
 적벽대전 승리 후 주유는 유비를 치려고 했고, 노숙은 유비와 연합하려 했다. 연의에서는 노숙이 거의 정신박약아 수준으로 나오지만, 기실 노숙의 정치적 안목은 대단한 것이었다. 저자도 주유보다는 노숙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주유가 파촉 정벌에 나서기 직전에 병으로 죽은 것은 유비에게나 제갈량에게나 천운이었다. 주유는 '왜 나를 낳고 공명을 낳았느냐'보다는 '왜 나를 낳아놓고 일찍 데려가느냐'고 외쳤을 가능성이 크다.
 책 중간중간에는 재미있는 사료들도 많이 인용되어 있었다. 내가 고등학교 때 유비에 대해 평론을 늘어놓은 적이 있지만, 유비는 인의의 화신이면서도 계산이 치밀한 사람이었다. 다음은 유비를 경시하고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장유라는 인물에 대해 제갈량이 처분을 묻자 유비가 한 말이다. 

「유비는...아주 간결하고 직설적으로 대답했다. "향기로운 난초라도 문 앞에 자란다면 호미질을 하지 않을 수 없지요."」

 한편 저자는 조조가 한중을 차지한 직후 사마의와 유엽의 건의를 물리치고 촉으로 들어가지 않은 것에 대해 법정의 견해를 수용하고 있다.

「사실 여기에 대해서는 법정의 관점, 즉 "이는 조조의 지혜가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힘이 부족했기 때문"이며, 그 후방에 반드시 근심거리가 있기 때문"이란 진단이 정확했다.」

 하지만 나는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조조가 이때 익주를 집어삼키지 않은 대가로 이후 40년간 그 후손들이 전쟁에 시달리게 되었다고 본다.
 그밖에 유비가 붕어하면서 제갈량에게 남긴 유언에 대해서도 갑론을박이 많았던 모양이다. 나는 고등학교 때 평론을 쓰면서 그저 군신유의의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찬양을 했을 뿐이었는데, 중국의 학자들은 지공설이니 난명설이나 수현설이니 통달설이니 전일설이니 휼사설이니 온갖 썰을 펼쳐 놓았다. 저자는 제갈량의 팬인 것 같았다. 저자는 여기서는 나와 의견이 같았다.
 제갈량이 남정 갔을 때 맹획을 칠종칠금한 이야기도 썰이 분분했다. 어떤 자는 제갈량이 만족의 불순분자들을 깨끗이 섬멸하기 위해 맹획을 일곱 번이나 풀어주어 잔당들을 쥐어짜내도록 했다는 설을 제기하기도 했다. 마치 조조가 서량을 정벌할 때 강족의 무리가 모이자 오히려 기뻐하던 것과 같은 상황이란 이야기다. 저자는 여기에 대해 "아주 새롭다"고 평하면서도 '하지만 착한 제갈량이 그랬을 리가 없다'는 논의를 펼치고 있다.
 제갈량의 '출사표'가 진수가 편집한 '제갈씨집'에서는 '북출편'이라 불리다가 남조 양나라 소명태자가 '문선'에서 처음으로 '출사표'라 이름 붙였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후출사표'는 배송지 주에 실려 있는데, 저자는 이에 대해 위작이라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너무도 자명하다. 후출사표가 씌어진 시기는 건흥 6년이라고 하는데, 조자룡은 건흥 7년에 죽었다. 그런데 후출사표에서는 조자룡의 상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고 한다. 이건 뭐 거의 코미디다. 내가 봐도 후출사표는 그럴 듯한 위작인 것 같다.
 제갈량은 북벌에 계속 실패했으나, 멋진 모습도 많이 보였다. 몇 차례 전공과 더불어 4차 북벌에서는 사마의와의 진검 승부에서 대승을 거두기도 했다. 특히 5차 북벌시에는 위나라 땅에서 둔전을 했는데, "농사를 짓는 군인이 위수 물가의 다른 농민과 섞여 있는데도 백성들이 불안해 하지 않았으며, 군인들도 사사로운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 시절 제갈량의 군대가 얼마나 기합이 들고 엄정했으면 이럴 수 있었겠는가! 진짜 제갈량은 대단한 지휘자였다. 또한 제갈량은 사마의가 허장성세를 벌이자, 단박에 간파해 내기도 했다.
 
「...고의로 병사 이천여 명을 위나라 진영 동남쪽으로 보내 큰소리로 '만세'를 부르게 하니, 일시에 메아리가 되어 한군의 진영을 진동시켰다. 제갈량이 사람을 보내 적의 정황을 살피게 하니 위나라 병사가 말했다. "'오나라 조정'이 사람을 보내 투항하니 이 때문에 사람들이 흥분해 환호작약하는 것이오." 공명이 웃으며 말했다. "오나라 조정이 항복할 리도 없거니와 혹 투항했다 하더라도 어찌 사자를 위수 물가로 보냈겠는가? 사마의는 이미 '육십이나 된 노인넨데 어찌 계략이라고 쓰는 것이 이리도 번거로운가!'"」

 하지만 제갈량은 너무 과로했다. 사마의가 촉의 사자에게 제갈량의 먹고 자는 일에 대해 묻고는 제갈량의 죽음을 예견한 일은 이미 유명하다. 제갈량은 죽었고, 천하의 기재였던 그는 사후의 일까지 거의 완벽하게 준비했으며 때문에 死孔明走生仲達 하게 만들 수 있었다. 죽으면서도 입던 옷으로 염하며 부장품을 넣지 말라 하고, 북벌의 출구인 한중의 정군산에 묻어달라 했으니, 이렇듯 철저하게 검소하면서도 죽어서까지 나라 걱정을 하는 모습을 보면 도저히 깔래야 깔 데가 없는 사람이다.

 저자는 제갈량의 사상에 대해 정치, 군사, 경제, 법제, 철학으로 나누어 살펴보고 있다. 제갈량은 정말 못하는 게 없었다. 정치 쪽으로는  철저하게 능력 본위의 인사를 행했으며, "문벌에 구애받지 않고, 개인의 은원을 따지지 않으며, 서열에 상관없이 인재를 선발했기 때문에, "서쪽 지역 사람은 제갈량이 당시인의 재주를 모두 활용한 점에 감복했다."" 또한 확실한 것은 제갈량은 권력욕이나 물욕 따위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제갈량 검소한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고, 이엄이 제갈량 보고 왕을 칭하라고 했을 때도 곧바로 물리쳤다. 내가 닉네임으로 삼고 있는 사마의가 조상을 제거하고 나서 식읍을 4만 호인가 받았던 것에 비하면 그 인격이 천양지차다. 다만 제갈량도 첩이 있었다는 사실은 새로웠다. 제갈량은 '여이엄서(이엄에게 주는 글)'에서 "첩도 부복이 없다"고 하여 자기 입으로 첩의 존재를 언급하고 있다. 부인은 한 명이었던 것 같고 첩은 몇 명이었을 지 모를 일이다. 내가 알기로 사마의는 부인만 따져도 세 명이었던 걸로 안다(삼국지 IP시절 자료가 다 날아가서 확실치가 않다).
 제갈량은 형주와 익주를 차지한 후 양쪽에서 동시에 위나라를 공격할 계획을 세워 놓았었다. 하지만 관우가 통한의 패배를 당하고 유비마저 이릉에서 대패하는 바람에 그 계획은 뿌리부터 흔들리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남만을 정벌하고 꾸준히 북벌을 행했으니 그야말로 의지의 사나이다. 그런데 북벌 당시 위연의 자오곡 계책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저자는 촉한의 전력을 다한 전쟁인지라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며 제갈량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이는 IP 헌제님이 주장하던 바이기도 하다. 저자는 북벌이 '공격으로써 수비를 하는' 방책이었다고도 하는데, 이 역시 IP 헌제님의 주장과 일치한다. 하지만 결과론적으로 북벌은 실패했다. 사마의는 제갈량을 두고 "군사적 전략을 말하기는 좋아하지만, 상황에 따라 수시로 변화하지 못한다"고 평했다 한다. 저자는 이 의견을 인정하고 있다.
 촉한의 경제 역시 제갈량의 지휘 아래 발전했다. 제갈량은 국가에서 소금을 전매하게 했는데, 이는 옛국가들이 많이들 하던 수법이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촉은 내륙지방인 만큼 산이나 지하수에서 소금을 얻었다는 점이며, 이미 서한 시대에 火井이라 불리는 천연가스 매장지를 발견해 소금물 끓이는 데 이용하고 있었다고 한다. 거 참 중국놈들 땅덩어리 넓으니까 옛날부터 별 걸 다 하고 살았다.
 제갈량이 법치주의자였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제갈량은 단순한 상앙의 후계자가 아니었으며, 상앙에 대해 "법 이론이 뛰어났으나, 교화로써 따르게 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형벌로 윽박만 지를 게 아니라 교화를 우선적으로 행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 역시 실천으로 드러나 제갈량에게 형을 받은 요립과 이엄이 정작 제갈량의 죽음을 원통해 하기에 이르렀다.

 제갈공명은 그야말로 만세를 뛰어넘는 기재다. 내가 비록 어렸을 적 이문열 삼국지를 읽으며 제갈량에 대한 반감으로 사마의를 동경하게 되었지만, 머리가 굵어진 지금은 삼국지 등장인물 중 제갈량보다 존경받을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책을 보고 나니 그 생각은 더욱 확고해졌다. 이제 책을 덮으면서, 제갈량에게서 교우 관계에 대한 교훈 한 조각 들어보자.

「세력과 이익을 위한 사귐은 오래가기 어렵다. 선비의 사귐은 따뜻하다고 꽃을 피우거나 춥다고 잎을 떨어뜨리지 않아, 사철이 한결 같으며, 어려움을 겪을수록 더욱 견고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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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망디 1944 -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사상 최대의 연합군 상륙작전 세계의 전쟁 2
스티븐 배시 지음, 김홍래 옮김, 한국국방안보포럼 감수 / 플래닛미디어 / 2006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국민학교 고학년 때 비비탄 총 가지고 놀게 되면서부터 무기, 전쟁 등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중학교 때를 정점으로 그 정도는 줄어들었으나 아직도 어느 정도의 흥미는 가지고 있다. 특히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경우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전쟁에서 승부의 분수령이 되었으므로 누구나 흥미를 가질 만한 주제이고, 나 스스로가 상륙전을 목적으로 하는 해병대를 갔다 왔기 때문에 더더욱 그 내막이 궁금해졌다.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해 구해 본 이 책은 비교적 무난한 책이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연합군의 기만 전술에 독일군이 철저하게 말려들었기 때문에 수행될 수 있었다. 내가 고등학교 때 아마도 외국어영역 모의고사 지문에서 2차대전 때 미군의 암호는 아메리카 원주민 나바호 족의 언어를 활용하여 만들었다고 본 것 같은데, 그 암호는 독일군이 해독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독일군의 암호는 - 무선으로 송출되는 신호의 경우 연합군 측에서 모조리 잡아내어 해독을 하였다고 한다. 또한 연합군은 노르망디가 아닌 다른 해안을 칠 것처럼, 그리고 그 예정일 또한 다른 날인 것처럼 독일군을 속이고 있다가 노르망디를 급습했다. 이는 마치 조조의 허허실실 전략을 보는 것 같은데, 어찌 되었든 정보전에서부터 이미 독일군은 밀렸던 것이다.
 또한 독일군의 경우 히틀러 일인 독재 치하에서 개념없고 경직된 지휘를 받을 수밖에 없었던 반면 연합군은 전장에 있는 사령관이 직접 모든 권한을 행사함으로써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 이 역시 중국의 격언에 있듯이 전장에 나가 있는 장수는 왕의 명령도 듣지 아니할 수 있다는 말의 진정성을 실감케 했다. 

「그러나 그(히틀러)는 자기 구역 내에 있는 부대에 대한 통제권과 필요할 경우 후퇴를 명령할 수 있는 권한을 달라는 그들(롬멜, 폰 룬트슈테트)의 요청을 거부했다. 그 뒤에 그는 곧바로 다시 600마일(950킬로미터)을 비행해 라스텐부르크로 돌아와서는, 노르망디 전장은 단 한 차례도 방문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자신의 본부에 있는 지도만 보고 전쟁을 지휘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아이젠하워 장군은 노르망디 전투 기간 동안 몽고메리와 브래들리, 뎀프시의 사령부로 여러 차례 그들을 방문했지만, 그들의 전투 수행에 대해 결코 간섭하려 들지 않았다.」 

 독일군이 이렇듯 정보전에서나 지휘 계통의 유연성 면에서 연합군에 비해 상당히 뒤쳐지는 입장이었지만 그래도 그들이 강하게 느껴지는 건 역시 그들의 기갑군단 때문이었다. 

「이렇게 해서 독일군이 개발한 전차가 5호 전차 '판터(Panther)', 6호 전차 '티거(Tiger)'와 '킹 티거(King Tiger)'이다. 이것들은 사거리가 200미터 이상 떨어진 경우 대부분의 연합군 전차 포탄이 그대로 튕겨나갔고, 그보다 다섯 배나 먼 거리에서 연합군의 전차를 파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봤을 때 이 모든 사실들보다도 연합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제공권 장악에 있었던 것 같다. 이 책에 나와 있는 연합군의 대규모 공습에 관한 내용은 수도 셀 수 없이 많다. 아군 보병이나 기갑병이 땅에서 주춤하는 기세가 보이면, 어김없이 전폭기 수천 대가 날아가서 적 진영을 초토화 시켜 버렸다. 내가 전차대대 소속 대전차화기중대에 복무했었기 때문에 잘 알지만, 전차의 장갑 중에 가장 약한 부분이 바로 전차 윗부분, 뚜껑 부분이다. 하늘에서 떨어진 포탄은 전차 옆구리를 맞추기 보다는 윗부분을 박살내 버렸을 공산이 크다. 독일의 공군력은 연합군에 비하면 형편없었다고 한다. 그러니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군대에 있을 때 상륙작전을 수행할 경우 사상률인지 사망률인지가 90퍼센트에 달한다고 교육을 받았었다. 때문에 우리의 머리도 짧게 돌격머리를 치는 것이고 악과 깡을 중요시 여기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이 책을 보니 D-데이 당일 상륙작전을 수행한 15만6천 명의 병력 중에서 사상자는 1만 명으로 비교적 적은 피해를 받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사상률이 약 7퍼센트...? 역시 해병은 이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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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rano0523 2023-08-16 1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체적으로 잘 분석한 리뷰이지만 독일 공군이 형편없다는 것은 너무 결과론적인 이야기 같네요 노르망디 상륙 시점에 제트 전투기를 배치한 공군은 루프트바페 뿐이고 지금 현재까지도 이정도의 전과를 남긴 공군은 없습니다 영,미 연합군이 독일본토항공전에서 제공권을 장악하는데까지 2년이 넘게 걸렸고 심각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게임 체인저와 같은 머스탱의 등장등 여러 요인으로 결국 제공권을 빼앗기지만 앞뒤 설명없이 형편없다는 말은 동의하기 어렵네요.
 
마야 : 잃어버린 도시들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6
클로드 보데 지음 / 시공사 / 199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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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책을 읽어 보고 조금 어이가 없었다. 명색이 마야에 관한 책이면 마야의 역사나 유물, 신화 등에 대해 집중 조명을 하는 게 당연한 일일진대, 저자는 순전히 서양인의 관점에서 미개 내지는 신비한 문명 - 마야의 유적을 발견해 나가는 과정들을 이야기하는 데에 지면의 대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이는 마치 『한국; 동방의 횃불』 식으로 제목을 단 책이 정작 한국의 역사나 풍습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만(?) 하고 대부분의 내용을 19세기 말에 조선에 가서 생활했던 서양인들의 수기에서 인용해 채우는 것과 마찬가지다. 마야에 대해 알고 싶어서 사 본 책이었는데, 아무래도 다시 다른 책을 구해봐야 될 것 같다. 

 서두부터 험담만 늘어놓았지만, 사실 책을 읽어보니 마야에 대해서 그렇게 자세하게 쓸만한 내용도 충분치는 않아 보였다. 왜냐하면 마야는 남긴 문헌이 극히 적으며, 그 후손들조차 저 유적은 신들이 살다가 버리고 떠난 것이라는 등의 전설 같은 이야기나 하고 앉았으니 영 단서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까, 비교적 최근까지 집적된 연구 성과도 마야 문명의 정체에 대해 썩 만족할만한 해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튼 책 내용의 대부분이 서양 정복자, 고고학자, 여행가의 모험담으로 점철되어 있어서 정작 마야의 풍습에 대해서는 단편적인 정보 밖에 얻지 못했는데, 그나마 내가 캐치한 바로 - 마야인들은 잔인한 성향을 지니고 있었으며, 자해 의식도 있었고, 생각보다 대단한 문명은 아니었다는 판단이 섰다. 유명한 계단식 피라미드는 그렇게 거대한 규모도 아니고(이집트랑은 비교 자체가 불가할 듯) 문자 체계는 - 보고 있자니 웃음 밖에 안나오는 수준이었다.
 말 나온 김에 여기서 마야의 문자를 보고 내가 느낀 바를 좀 적어보겠다. 마야의 문자는 상형문자다. 책을 보아하니 뜻글자인 것 같은데, 그 문자는 문자가 아니다. 그러니까, 문자가 널리 통용될 수 있는 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한 글자 한 글자가 대단히 복잡한(한마디로 그림) 구조로 되어 있다. 오늘날 우리가 쓰고 있는 문자는 대부분이 선으로 이루어져 있다(이를테면 한글이 그렇다). 글쎄, 아직도 그림으로 된 문자가 존재할는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메이저의 위치에 있는 문자들은 전부 다 선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마야 문자는 점, 선, 획이 아니라 그 자체가 매우 복잡한 그림이다. 만약 획으로 따진다면 간단한 글자라도 30획은 족히 넘을 것 같았다(복잡한 건 100획에 육박할 듯). 그걸 어느 천년에 쓰고 앉았나? 일견 신비로워 보이긴 하지만 실용성은 전혀 없는 문자였다.
 사실 내가 이 책에서 얻고자 한 바는 다음과 같은 류의 정보였다. 

「재미있는 것은 우리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호박씨나 호박을 마야인은 기가 막히게 맛있다고 여긴다는 점이다.
 마야인은 사랑의 슬픔에 대해서도 잘 간파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야일(yail)이라는 단어는 사랑과 고통을 동시에 의미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역으로 서양인들은 호박씨나 호박을 먹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번역도 그리 충실한 편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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