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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로마 신화 - 포켓북 세계명작 베스트
토마스 불핀치 지음, 오영숙 옮김 / 일송포켓북 / 2007년 3월
평점 :
품절
현대 지성인이라면 그리스 로마 신화 정도는 읽어봐야 하지 않을까? 나는 예전부터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살면서 그리스 로마 신화 접할 일은 은근히 많았다. 동화책, 만화, 테레비 방송 기타 등등... 이건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고집스럽게 책을 밝히는(?) 사람이라, 내 손에 쥐고 그 놈의 미쏠로지를 활자로 들여다 봐야 했다. 그런 고로 가장 많이 읽히는 토마스 불핀치의 책을 사보게 되었다.
읽어 보니 책이 무슨 입문서 같기도 하고 요약본 같기도 했다. 불핀치는 책의 마지막 장에서 그리스나 로마의 옛 시인들 - 호메로스, 베르질리우스, 오비디우스 - 의 작품들에서 이야기를 취했다고 밝히고 있다. 대중을 위해 정수만 뽑아낸 것이다. 구스타프 슈바브의 책은 총 6권에 달한다고 한다. 반면 이 책은 1권 짜리 어린이 삼국지와도 같다. 방대한 내용을 요약해 전달하려다 보니 스토리 진행이나 문장 호흡이 급한 경우가 더러 있었다. 하지만 그게 큰 불만은 아니었다. 우리나라 구비문학도 잘 모르는데 구라파 쪽 신화 정보는 이 정도면 족하다.
특기할 만한 내용들을 우선 정리해 보자면,
「야누스, 하늘의 문지기로 그가 새해를 열기 때문에 일 년 중 첫 달을 그의 이름을 따서 '야누아리우스(January)'라 부른다. ...로마에는 그의 사원이 굉장히 많았다. 전쟁이 있을 때에는 제일 큰 사원의 문을 열었고 평화 시에는 닫아놓았다. 그런데 누마와 아우구스투스가 통치하던 시절에는 단 한 번 문이 닫힌 적이 있었다.」
「프로메테우스는 아테네의 도움을 얻어 하늘로 올라가 태양의 수레로부터 횃불을 옮겨 붙였다. 땅으로 내려온 프로메테우스는 이 불을 사람에게 넘겨주었다.」
인류 최초의 여자 '판도라'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대강의 내용보다는, 어떤 이야기에서는 제우스가 인간 엿먹이려고 판도라를 만들었다고 하고, 다른 이야기에서는 남자를 축복하려고 내려준 것이라고 하는 - 모순된 상황이 재미있었다. 왜 같은 소재를 가지고 전혀 반대되는 얘기가 나왔을 지 의문이다. 그러고 보면 서양 쪽 창세 신화는 꼭 남자가 먼저 만들어지고, 여자는 신이 추후에 별도 제작(?)해 내려보낸다는 특징이 있는 것 같다. 어찌 보면 나중에 성경을 쓴 중동쪽에서 그리스 로마의 이 판도라 이야기를 차용했을 수도 있겠다.
'황금시대' - '은시대' - '놋시대' 이야기도 있는데, 구석기 - 신석기 - 청동 및 철기 시대 순으로 비유를 한 모양이었다. 내용이 거의 맞아 떨어졌다. 그런 걸 보면 그 옛날 그리스 로마 애들은 과거 구석기 및 신석기 시대에 대하여 어렴풋이나마 기억을 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놋시대 때 사람들이 타락하고, 제우스가 벌을 내리는 장면은 뭐 거의 성경이랑 유사하다.
「화를 부르는 쇠가 만들어지고, 더욱 큰 재앙을 부르는 금이 생산되었다. 이 두 가지를 원하는 전쟁이 계속 일어났다. ...이른 상속 때문에 아들은 아버지 죽음을 바라고, 가족 간 사랑은 땅에 떨어졌다. ...제우스는 땅에서 벌어지는 사람들의 행악을 보고 더할 수 없는 노여움에 떨었다...」
책 초반에는 어느 신이 어느 신 - 혹은 님프 - 혹은 사람 - 과 성관계를 해서 애 누구를 낳았고 그 애는 무얼 잘했고 그 애가 길 가다 누구의 아들(딸)인 누구를 발견해 사랑에 빠져서 쫓아다녔고 그러다 성공 - 혹은 실패 - 를 해서 자살을 했다, 저주를 받았다, 살해 당했다, 그래서 그 애가 변한 것이 이것이다, 하는 유의 내용이 주구장창 전개되었다. 해피엔딩은 거의 없었고, 대부분이 죽거나 장애인이 되는 걸로 이야기가 마무리됐다. 또한 애들 이름이 -스, -우스 천지라 누가 누군지도 헷갈리고 참 읽는 게 고역이었다.
한편 에로스와 프시케의 이야기에서 에로스의 일갈이 눈여겨 볼 만 했다.
「"아! 어리석은 프시케여, 그 꼴이 내 사랑에 보답하는 길이던가? 어머니 명령을 거스르면서까지 그대를 아내로 삼았는데! 그대는 나를 괴물로 생각하고 목을 자르려 하다니. 이제 어쩔 수 없으니 그대가 내 말보다 더 소중히 여긴 언니들에게로 돌아가라. 나는 그대와 영원히 이별하는 것 이외의 다른 벌을 그대에게 주고 싶지는 않도다. 사랑은 의심과 함께 있을 수 없는 것이니라."」
프시케는 뒤늦게 후회하고 에로스의 어미 아프로디테를 찾아가 시험을 받기도 하고, 온갖 고초를 겪은 후 에로스와 다시 맺어진다. 에로스는 그 과정에서 묵묵히 프시케를 후원한다. 이것이야말로 정말 보기 드문 해피엔딩 이야기다. 이 전설은 2세기에 처음 등장했다고 하는데, 이 책의 다른 전설들에 비해 상당히 후대의 것이라고 한다. 다른 전설은 대부분 죽고, 죽이고 난리도 아니다. 단순히 질투 좀 나면 상대를 장애인 만들거나 죽인다. 보는 내내 정말 잔인하고 야만적이라고 생각했는데, 2세기 쯤 되니까 그리스 로마인 스스로도 조금이나마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걸까? 뭐, 알 수 없는 일이다.
전술한 야만적인 이야기 중 하나를 보면,
「...다이달로스는 세상에 자신과 맞설 이가 없다고 여겼다. 그의 누이가 아들 탈로스를 맡겨 삼촌의 기술을 전수받도록 했다. 탈로스는...바닷가를 거닐다 물고기 등뼈를 하나 얻었다. 그것을 모방해 쇳조각을 가지고 가장자리 날을 고르게 깎아 톱을 발명했다. 또한 쇳조각 두 개를 합쳐 한 끝에 못을 박아 서로 연결한 뒤 다른 끝들은 뾰족하게 갈았다. 바로 컴퍼스를 만든 것이다. 다이달로스는 조카가 남다른 재능을 발휘하는 것을 시기했다. 어느 날 함께 높은 탑 꼭대기에 올라갔을 때에 틈을 타서 그를 밀어 떨어뜨렸다...」
미드 스파르타쿠스가 잔인하다고들 하는데, 거기서도 저런 어이없는 질투심으로 혈육을 죽이는 장면은 안 나온다. 이건 차라리 - 억지로 꼬아본다면 - 밥그릇 싸움일 수도 있겠다 싶기라도 하지, 그냥 나보다 이뻐서 장애인 만들고 나한테 까불어서 죽이고, 아니면 그냥 맘에 안들어서 죽이는 등 별의별 경우가 다 있다. 아귀로 변해 자기 팔다리까지 뜯어먹고 죽은 에리시크톤 이야기라든지 아폴론에게 산 채로 껍질이 벗겨진 마르시아스 이야기 등 잔인한 신화는 셀 수도 없었다.
20장부터는 트로야 전쟁 이야기였다. 나는 10여 년간이나 이어진 이 전쟁이 고작 여자 문제 때문에 일어났다는 사실이 좀 어이없었다. 여자 문제가 같잖다는 게 아니라, 멀쩡한 스파르타의 왕비를 트로이 왕자가 아프로디테의 도움으로 꼬셔가 버려서 전쟁이 났다고 하니까... 스파르타 왕은 당연히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 상황이고. 물론 신화이긴 하지만 너무 억지스러운 것 같았다. 나중에는 그리스인들끼리 전리품 분배 중 여자(전리품임) 문제로 서로 다투기도 한다.
한편 아이네이아스의 모험 중 고대인들의 사후세계관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가 있었다.
「창조주는 맨 처음 영혼을 구성하는 원료로 불, 공기, 흙, 물 네 원소를 써서 만들었다. 그것을 모두 합치면 가장 우월한 원소인 불의 모습으로 나타나 불꽃이 된다. ...그때 흙을 여러 비율로 섞어서 그 순수성이 낮아졌다. 어떤 합성물에 흙이 많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그만큼 그 개체 순수성이 줄어드는 것이다. ...이 불순성은 죽은 뒤에 깨끗이 씻어 버려야 한다. 이 일은 영혼을 바람 부는 곳에 내놓고 공기를 통하게 하거나 물에 잠기게 하거나, 불로써 태워버리는 방법으로 행해진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은 흙의 불순성이 깨끗이 사라진 뒤에 레테 강의 물로 전생 기억을 완전히 씻어 버리고 새로운 몸이 부여돼 이승으로 다시 돌려보내지는 것이다. ...옛 사람들이 이른바 메템프시코우시스, 즉 '영혼의 전생'이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베르질리우스의 견해였다. 호메로스는 낙원을 "죽은 자의 나라 일부로 보지 않았다." 호메로스는 현세에 지상낙원이 존재하며, 그곳은 서쪽에 있다고 했다. 이가 곧 '아틀란티스' 전설로 발전했는데, 불핀치는 이것이 상상의 산물이지만 혹여나 표류한 선원들이 아메리카 해안을 얼핏 보고 전한 이야기가 낳은 전설일 수도 있다고 추측하고 있다.
인류는 참 대단하다. 최근 학설에 따르면 호모 사피엔스는 20만 년 전에 처음 등장했는데, 7만 년쯤 전에야 아프리카를 벗어나 전세계로 퍼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발칸 등 지중해 북쪽으로 진출한 건 불과 4, 5만 년 전. 그리스 인들은 엄청난 속도로 문명을 발전시켰고, 그 세력이 갈수록 커져 무려 기원전 1250년경에 트로이 전쟁을 벌이기에 이르렀다. 호메로스가 일리아스를 쓴 때도 기원전 850년경이란다. 말이 쉽지 상상이 안 간다. 앞서 내가 그리스 로마 신화가 잔인하고 야만적이라고 했는데, 비록 내용은 야만적일 지언정 그 신화들이 내포하는 뜻과 그 밖의 유물들은 세련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런 위대한 문명에 대해 탐구하는 일은 질리지가 않는다. 좋은 독서경혐이었고, 이제는 일리아스를 읽어야 할 차례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