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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 평전
여명협 지음, 신원봉 옮김 / 지훈 / 2007년 4월
평점 :
품절
사실 처음 책의 분량에 조금 놀랐다. 제갈량에 대한 기록이 이렇게 많았나? 제갈량의 전기가 600여 쪽에 달할 수 있을 정도로 남아 있는 자료가 충분한가? 게다가 저자는 완벽하게 사료에만 의거해 평전을 썼다. 연의의 내용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으며, 심지어 사료의 내용조차 의심의 여지가 있는 경우 가차없이 배제해 버리곤 했다. 그야말로 머리말에 쓴 것처럼 '엄밀한 실사구시의 관점에서' 책을 써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우람한 두께를 자랑할 수 있었던 것은 저자가 책의 구성을 절묘하게 설계했기 때문이다. 책은 크게 1, 2부로 나뉜다. 각각 제갈량의 생애, 그리고 사상에 관하여 거의 비등한 분량으로 읊어 놓았다. 사실 사상 부분에서 어느 정도는 구색 맞추기 식의 내용도 있었으나 확실히 버릴 말보단 쓸만 한 말이 훨씬 많았다. 특히 마지막 장인 '제갈량의 철학, 윤리사상'의 경우 논의가 거의 전무한 상태에서 저자가 최초로 연구를 시도해 보았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는데, 꽤 가치 있는 일로 보인다. 상당히 성실한 책이었다.
저자는 삼국시대의 정치상황, 제갈량의 고향 등에 대한 분석부터 시작해 제갈량의 주변인물들까지 자세하게 살펴보고 있다. 한편 제갈량이 못생긴 황씨 부인과 결혼한 이야기는 이미 유명한데, 당시에 '공명처럼 아내를 택하지 말게, 겨우 황영감 추녀나 얻을 테니.'와 같은 농담이 생기기도 했다. 키가 8척이었다던 훈남 제갈량이 대체 왜 오크녀 황부인과 결혼했을까? 저자는 이 결혼의 배경에 대해 자세한 분석을 해놓았다.
「그러나 황승언은 형주 양양 지역에서 대단히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양양의 호족인 채풍이 무엇 때문에 장녀를 그에게 시집보냈겠는가? 채풍은 작은 딸을 유표에게 시집보냈으며, 그 아들 채모 역시 유표의 수하에서 실권을 장악한 인물이다. 그러므로 제갈량이 황승언의 딸을 처로 삼음으로써 황씨 · 채씨 · 유씨 가문과 직접적인 인척관계가 맺어졌으며, 이 관계는 그가 그 지역의 상류사회에 합류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저자는 제갈량의 이러한 정략적인 선택이 전혀 욕먹을 일이 아니며, 당시 사회 분위기상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고 변호하고 있다. 한편 이윤의 고사를 삼고초려와 비교한 내용도 눈에 띄었다.
「상나라 탕왕의 어진 재상 이윤은 "탕이 사람을 시켜 초빙하니, 다섯 번 거절한 뒤에야 탕을 따르기로 했다"고 한다. 이것은 전설에 가까운 이야기로 사실이라 하더라도 탕은 사람을 시켜 초빙한 것이니, 어찌 유현덕이 수고로움을 마다 않고 세 번이나 오두막을 찾은 것과 같겠는가?」
때문에 27살 청년 제갈량은 유비를 따라 나서 평생 동안 충성을 다했다. 제갈량이 '융중대'에서 논한 천하삼분지계는 가히 그 내용이 구체적이며 당시 중국의 상황을 마치 손바닥 보듯이 한, 그야말로 제갈공명다운 논의였다.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인지라 제갈량은 유비 진영에 합류한 지 얼마 못되어 조조에게 장판에서 패해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만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유비가 왜 당하고만 있었는지 의아해 하는 의견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난 그저 조조의 대군이 쳐내려오고, 유비는 백성들을 비롯한 10만 여 무리를 이끌고 천천히 행군 중이었으므로 5천 기병에게 당한 것에 대하여 그저 자연스러운 일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나라 사람 왕발과 저자는 의문을 품고 있었다.
「"...조조의 수천 군대가 밤낮으로 300리를 달려 보급품도 공급되지 않고 연락도 끊어진 상태니 한번 싸워 사로잡을 만하지 않았는가? 10만의 무리가 활 한 번 쏘아보지 못하고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으니, 표범이나 호랑이에 먹히는 개나 양의 무리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과연 당시 기병의 전투력이 월등했다고 해도 유비 진영의 머릿수를 보면 의문을 가질 만한 일이다. 혹시 나관중도 - 극적인 효과도 물론이거니와 - 이 점을 고려해 5천을 100만으로 뻥튀기했던 건 아닐까? 아무튼 상당히 참신한 의견이었다.
한편 적벽대전에 대해 분석을 하면서 저자는 '동풍'에 관하여 우연의 일치일 뿐이라고 단정 짓고 있다. 내가 알기로 일설에서는 제갈량이 동풍을 부르진 않았지만 동풍이 불 타이밍을 경험으로써 알고 있었다고 하는데, 저자는 당시 화공이 동풍을 전제로 한 것도 아니었으며, 당시의 기상예측 수준으로는 동풍 예측이 아예 불가능했다고 못 박고 있다. 나야 그쪽 방면은 잘 모르니 그런가 보다 했다.
적벽대전 승리 후 주유는 유비를 치려고 했고, 노숙은 유비와 연합하려 했다. 연의에서는 노숙이 거의 정신박약아 수준으로 나오지만, 기실 노숙의 정치적 안목은 대단한 것이었다. 저자도 주유보다는 노숙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주유가 파촉 정벌에 나서기 직전에 병으로 죽은 것은 유비에게나 제갈량에게나 천운이었다. 주유는 '왜 나를 낳고 공명을 낳았느냐'보다는 '왜 나를 낳아놓고 일찍 데려가느냐'고 외쳤을 가능성이 크다.
책 중간중간에는 재미있는 사료들도 많이 인용되어 있었다. 내가 고등학교 때 유비에 대해 평론을 늘어놓은 적이 있지만, 유비는 인의의 화신이면서도 계산이 치밀한 사람이었다. 다음은 유비를 경시하고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장유라는 인물에 대해 제갈량이 처분을 묻자 유비가 한 말이다.
「유비는...아주 간결하고 직설적으로 대답했다. "향기로운 난초라도 문 앞에 자란다면 호미질을 하지 않을 수 없지요."」
한편 저자는 조조가 한중을 차지한 직후 사마의와 유엽의 건의를 물리치고 촉으로 들어가지 않은 것에 대해 법정의 견해를 수용하고 있다.
「사실 여기에 대해서는 법정의 관점, 즉 "이는 조조의 지혜가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힘이 부족했기 때문"이며, 그 후방에 반드시 근심거리가 있기 때문"이란 진단이 정확했다.」
하지만 나는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조조가 이때 익주를 집어삼키지 않은 대가로 이후 40년간 그 후손들이 전쟁에 시달리게 되었다고 본다.
그밖에 유비가 붕어하면서 제갈량에게 남긴 유언에 대해서도 갑론을박이 많았던 모양이다. 나는 고등학교 때 평론을 쓰면서 그저 군신유의의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찬양을 했을 뿐이었는데, 중국의 학자들은 지공설이니 난명설이나 수현설이니 통달설이니 전일설이니 휼사설이니 온갖 썰을 펼쳐 놓았다. 저자는 제갈량의 팬인 것 같았다. 저자는 여기서는 나와 의견이 같았다.
제갈량이 남정 갔을 때 맹획을 칠종칠금한 이야기도 썰이 분분했다. 어떤 자는 제갈량이 만족의 불순분자들을 깨끗이 섬멸하기 위해 맹획을 일곱 번이나 풀어주어 잔당들을 쥐어짜내도록 했다는 설을 제기하기도 했다. 마치 조조가 서량을 정벌할 때 강족의 무리가 모이자 오히려 기뻐하던 것과 같은 상황이란 이야기다. 저자는 여기에 대해 "아주 새롭다"고 평하면서도 '하지만 착한 제갈량이 그랬을 리가 없다'는 논의를 펼치고 있다.
제갈량의 '출사표'가 진수가 편집한 '제갈씨집'에서는 '북출편'이라 불리다가 남조 양나라 소명태자가 '문선'에서 처음으로 '출사표'라 이름 붙였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후출사표'는 배송지 주에 실려 있는데, 저자는 이에 대해 위작이라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너무도 자명하다. 후출사표가 씌어진 시기는 건흥 6년이라고 하는데, 조자룡은 건흥 7년에 죽었다. 그런데 후출사표에서는 조자룡의 상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고 한다. 이건 뭐 거의 코미디다. 내가 봐도 후출사표는 그럴 듯한 위작인 것 같다.
제갈량은 북벌에 계속 실패했으나, 멋진 모습도 많이 보였다. 몇 차례 전공과 더불어 4차 북벌에서는 사마의와의 진검 승부에서 대승을 거두기도 했다. 특히 5차 북벌시에는 위나라 땅에서 둔전을 했는데, "농사를 짓는 군인이 위수 물가의 다른 농민과 섞여 있는데도 백성들이 불안해 하지 않았으며, 군인들도 사사로운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 시절 제갈량의 군대가 얼마나 기합이 들고 엄정했으면 이럴 수 있었겠는가! 진짜 제갈량은 대단한 지휘자였다. 또한 제갈량은 사마의가 허장성세를 벌이자, 단박에 간파해 내기도 했다.
「...고의로 병사 이천여 명을 위나라 진영 동남쪽으로 보내 큰소리로 '만세'를 부르게 하니, 일시에 메아리가 되어 한군의 진영을 진동시켰다. 제갈량이 사람을 보내 적의 정황을 살피게 하니 위나라 병사가 말했다. "'오나라 조정'이 사람을 보내 투항하니 이 때문에 사람들이 흥분해 환호작약하는 것이오." 공명이 웃으며 말했다. "오나라 조정이 항복할 리도 없거니와 혹 투항했다 하더라도 어찌 사자를 위수 물가로 보냈겠는가? 사마의는 이미 '육십이나 된 노인넨데 어찌 계략이라고 쓰는 것이 이리도 번거로운가!'"」
하지만 제갈량은 너무 과로했다. 사마의가 촉의 사자에게 제갈량의 먹고 자는 일에 대해 묻고는 제갈량의 죽음을 예견한 일은 이미 유명하다. 제갈량은 죽었고, 천하의 기재였던 그는 사후의 일까지 거의 완벽하게 준비했으며 때문에 死孔明走生仲達 하게 만들 수 있었다. 죽으면서도 입던 옷으로 염하며 부장품을 넣지 말라 하고, 북벌의 출구인 한중의 정군산에 묻어달라 했으니, 이렇듯 철저하게 검소하면서도 죽어서까지 나라 걱정을 하는 모습을 보면 도저히 깔래야 깔 데가 없는 사람이다.
저자는 제갈량의 사상에 대해 정치, 군사, 경제, 법제, 철학으로 나누어 살펴보고 있다. 제갈량은 정말 못하는 게 없었다. 정치 쪽으로는 철저하게 능력 본위의 인사를 행했으며, "문벌에 구애받지 않고, 개인의 은원을 따지지 않으며, 서열에 상관없이 인재를 선발했기 때문에, "서쪽 지역 사람은 제갈량이 당시인의 재주를 모두 활용한 점에 감복했다."" 또한 확실한 것은 제갈량은 권력욕이나 물욕 따위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제갈량 검소한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고, 이엄이 제갈량 보고 왕을 칭하라고 했을 때도 곧바로 물리쳤다. 내가 닉네임으로 삼고 있는 사마의가 조상을 제거하고 나서 식읍을 4만 호인가 받았던 것에 비하면 그 인격이 천양지차다. 다만 제갈량도 첩이 있었다는 사실은 새로웠다. 제갈량은 '여이엄서(이엄에게 주는 글)'에서 "첩도 부복이 없다"고 하여 자기 입으로 첩의 존재를 언급하고 있다. 부인은 한 명이었던 것 같고 첩은 몇 명이었을 지 모를 일이다. 내가 알기로 사마의는 부인만 따져도 세 명이었던 걸로 안다(삼국지 IP시절 자료가 다 날아가서 확실치가 않다).
제갈량은 형주와 익주를 차지한 후 양쪽에서 동시에 위나라를 공격할 계획을 세워 놓았었다. 하지만 관우가 통한의 패배를 당하고 유비마저 이릉에서 대패하는 바람에 그 계획은 뿌리부터 흔들리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남만을 정벌하고 꾸준히 북벌을 행했으니 그야말로 의지의 사나이다. 그런데 북벌 당시 위연의 자오곡 계책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저자는 촉한의 전력을 다한 전쟁인지라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며 제갈량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이는 IP 헌제님이 주장하던 바이기도 하다. 저자는 북벌이 '공격으로써 수비를 하는' 방책이었다고도 하는데, 이 역시 IP 헌제님의 주장과 일치한다. 하지만 결과론적으로 북벌은 실패했다. 사마의는 제갈량을 두고 "군사적 전략을 말하기는 좋아하지만, 상황에 따라 수시로 변화하지 못한다"고 평했다 한다. 저자는 이 의견을 인정하고 있다.
촉한의 경제 역시 제갈량의 지휘 아래 발전했다. 제갈량은 국가에서 소금을 전매하게 했는데, 이는 옛국가들이 많이들 하던 수법이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촉은 내륙지방인 만큼 산이나 지하수에서 소금을 얻었다는 점이며, 이미 서한 시대에 火井이라 불리는 천연가스 매장지를 발견해 소금물 끓이는 데 이용하고 있었다고 한다. 거 참 중국놈들 땅덩어리 넓으니까 옛날부터 별 걸 다 하고 살았다.
제갈량이 법치주의자였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제갈량은 단순한 상앙의 후계자가 아니었으며, 상앙에 대해 "법 이론이 뛰어났으나, 교화로써 따르게 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형벌로 윽박만 지를 게 아니라 교화를 우선적으로 행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 역시 실천으로 드러나 제갈량에게 형을 받은 요립과 이엄이 정작 제갈량의 죽음을 원통해 하기에 이르렀다.
제갈공명은 그야말로 만세를 뛰어넘는 기재다. 내가 비록 어렸을 적 이문열 삼국지를 읽으며 제갈량에 대한 반감으로 사마의를 동경하게 되었지만, 머리가 굵어진 지금은 삼국지 등장인물 중 제갈량보다 존경받을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책을 보고 나니 그 생각은 더욱 확고해졌다. 이제 책을 덮으면서, 제갈량에게서 교우 관계에 대한 교훈 한 조각 들어보자.
「세력과 이익을 위한 사귐은 오래가기 어렵다. 선비의 사귐은 따뜻하다고 꽃을 피우거나 춥다고 잎을 떨어뜨리지 않아, 사철이 한결 같으며, 어려움을 겪을수록 더욱 견고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