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량 평전
여명협 지음, 신원봉 옮김 / 지훈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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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처음 책의 분량에 조금 놀랐다. 제갈량에 대한 기록이 이렇게 많았나? 제갈량의 전기가 600여 쪽에 달할 수 있을 정도로 남아 있는 자료가 충분한가? 게다가 저자는 완벽하게 사료에만 의거해 평전을 썼다. 연의의 내용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으며, 심지어 사료의 내용조차 의심의 여지가 있는 경우 가차없이 배제해 버리곤 했다. 그야말로 머리말에 쓴 것처럼 '엄밀한 실사구시의 관점에서' 책을 써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우람한 두께를 자랑할 수 있었던 것은 저자가 책의 구성을 절묘하게 설계했기 때문이다. 책은 크게 1, 2부로 나뉜다. 각각 제갈량의 생애, 그리고 사상에 관하여 거의 비등한 분량으로 읊어 놓았다. 사실 사상 부분에서 어느 정도는 구색 맞추기 식의 내용도 있었으나 확실히 버릴 말보단 쓸만 한 말이 훨씬 많았다. 특히 마지막 장인 '제갈량의 철학, 윤리사상'의 경우 논의가 거의 전무한 상태에서 저자가 최초로 연구를 시도해 보았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는데, 꽤 가치 있는 일로 보인다. 상당히 성실한 책이었다.

 저자는 삼국시대의 정치상황, 제갈량의 고향 등에 대한 분석부터 시작해 제갈량의 주변인물들까지 자세하게 살펴보고 있다. 한편 제갈량이 못생긴 황씨 부인과 결혼한 이야기는 이미 유명한데, 당시에 '공명처럼 아내를 택하지 말게, 겨우 황영감 추녀나 얻을 테니.'와 같은 농담이 생기기도 했다. 키가 8척이었다던 훈남 제갈량이 대체 왜 오크녀 황부인과 결혼했을까? 저자는 이 결혼의 배경에 대해 자세한 분석을 해놓았다.

「그러나 황승언은 형주 양양 지역에서 대단히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양양의 호족인 채풍이 무엇 때문에 장녀를 그에게 시집보냈겠는가? 채풍은 작은 딸을 유표에게 시집보냈으며, 그 아들 채모 역시 유표의 수하에서 실권을 장악한 인물이다. 그러므로 제갈량이 황승언의 딸을 처로 삼음으로써 황씨 · 채씨 · 유씨 가문과 직접적인 인척관계가 맺어졌으며, 이 관계는 그가 그 지역의 상류사회에 합류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저자는 제갈량의 이러한 정략적인 선택이 전혀 욕먹을 일이 아니며, 당시 사회 분위기상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고 변호하고 있다. 한편 이윤의 고사를 삼고초려와 비교한 내용도 눈에 띄었다.

「상나라 탕왕의 어진 재상 이윤은 "탕이 사람을 시켜 초빙하니, 다섯 번 거절한 뒤에야 탕을 따르기로 했다"고 한다. 이것은 전설에 가까운 이야기로 사실이라 하더라도 탕은 사람을 시켜 초빙한 것이니, 어찌 유현덕이 수고로움을 마다 않고 세 번이나 오두막을 찾은 것과 같겠는가?」

 때문에 27살 청년 제갈량은 유비를 따라 나서 평생 동안 충성을 다했다. 제갈량이 '융중대'에서 논한 천하삼분지계는 가히 그 내용이 구체적이며 당시 중국의 상황을 마치 손바닥 보듯이 한, 그야말로 제갈공명다운 논의였다.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인지라 제갈량은 유비 진영에 합류한 지 얼마 못되어 조조에게 장판에서 패해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만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유비가 왜 당하고만 있었는지 의아해 하는 의견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난 그저 조조의 대군이 쳐내려오고, 유비는 백성들을 비롯한 10만 여 무리를 이끌고 천천히 행군 중이었으므로 5천 기병에게 당한 것에 대하여 그저 자연스러운 일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나라 사람 왕발과 저자는 의문을 품고 있었다.

「"...조조의 수천 군대가 밤낮으로 300리를 달려 보급품도 공급되지 않고 연락도 끊어진 상태니 한번 싸워 사로잡을 만하지 않았는가? 10만의 무리가 활 한 번 쏘아보지 못하고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으니, 표범이나 호랑이에 먹히는 개나 양의 무리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과연 당시 기병의 전투력이 월등했다고 해도 유비 진영의 머릿수를 보면 의문을 가질 만한 일이다. 혹시 나관중도 - 극적인 효과도 물론이거니와 - 이 점을 고려해 5천을 100만으로 뻥튀기했던 건 아닐까? 아무튼 상당히 참신한 의견이었다.
 한편 적벽대전에 대해 분석을 하면서 저자는 '동풍'에 관하여 우연의 일치일 뿐이라고 단정 짓고 있다. 내가 알기로 일설에서는 제갈량이 동풍을 부르진 않았지만 동풍이 불 타이밍을 경험으로써 알고 있었다고 하는데, 저자는 당시 화공이 동풍을 전제로 한 것도 아니었으며, 당시의 기상예측 수준으로는 동풍 예측이 아예 불가능했다고 못 박고 있다. 나야 그쪽 방면은 잘 모르니 그런가 보다 했다.
 적벽대전 승리 후 주유는 유비를 치려고 했고, 노숙은 유비와 연합하려 했다. 연의에서는 노숙이 거의 정신박약아 수준으로 나오지만, 기실 노숙의 정치적 안목은 대단한 것이었다. 저자도 주유보다는 노숙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주유가 파촉 정벌에 나서기 직전에 병으로 죽은 것은 유비에게나 제갈량에게나 천운이었다. 주유는 '왜 나를 낳고 공명을 낳았느냐'보다는 '왜 나를 낳아놓고 일찍 데려가느냐'고 외쳤을 가능성이 크다.
 책 중간중간에는 재미있는 사료들도 많이 인용되어 있었다. 내가 고등학교 때 유비에 대해 평론을 늘어놓은 적이 있지만, 유비는 인의의 화신이면서도 계산이 치밀한 사람이었다. 다음은 유비를 경시하고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장유라는 인물에 대해 제갈량이 처분을 묻자 유비가 한 말이다. 

「유비는...아주 간결하고 직설적으로 대답했다. "향기로운 난초라도 문 앞에 자란다면 호미질을 하지 않을 수 없지요."」

 한편 저자는 조조가 한중을 차지한 직후 사마의와 유엽의 건의를 물리치고 촉으로 들어가지 않은 것에 대해 법정의 견해를 수용하고 있다.

「사실 여기에 대해서는 법정의 관점, 즉 "이는 조조의 지혜가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힘이 부족했기 때문"이며, 그 후방에 반드시 근심거리가 있기 때문"이란 진단이 정확했다.」

 하지만 나는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조조가 이때 익주를 집어삼키지 않은 대가로 이후 40년간 그 후손들이 전쟁에 시달리게 되었다고 본다.
 그밖에 유비가 붕어하면서 제갈량에게 남긴 유언에 대해서도 갑론을박이 많았던 모양이다. 나는 고등학교 때 평론을 쓰면서 그저 군신유의의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찬양을 했을 뿐이었는데, 중국의 학자들은 지공설이니 난명설이나 수현설이니 통달설이니 전일설이니 휼사설이니 온갖 썰을 펼쳐 놓았다. 저자는 제갈량의 팬인 것 같았다. 저자는 여기서는 나와 의견이 같았다.
 제갈량이 남정 갔을 때 맹획을 칠종칠금한 이야기도 썰이 분분했다. 어떤 자는 제갈량이 만족의 불순분자들을 깨끗이 섬멸하기 위해 맹획을 일곱 번이나 풀어주어 잔당들을 쥐어짜내도록 했다는 설을 제기하기도 했다. 마치 조조가 서량을 정벌할 때 강족의 무리가 모이자 오히려 기뻐하던 것과 같은 상황이란 이야기다. 저자는 여기에 대해 "아주 새롭다"고 평하면서도 '하지만 착한 제갈량이 그랬을 리가 없다'는 논의를 펼치고 있다.
 제갈량의 '출사표'가 진수가 편집한 '제갈씨집'에서는 '북출편'이라 불리다가 남조 양나라 소명태자가 '문선'에서 처음으로 '출사표'라 이름 붙였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후출사표'는 배송지 주에 실려 있는데, 저자는 이에 대해 위작이라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너무도 자명하다. 후출사표가 씌어진 시기는 건흥 6년이라고 하는데, 조자룡은 건흥 7년에 죽었다. 그런데 후출사표에서는 조자룡의 상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고 한다. 이건 뭐 거의 코미디다. 내가 봐도 후출사표는 그럴 듯한 위작인 것 같다.
 제갈량은 북벌에 계속 실패했으나, 멋진 모습도 많이 보였다. 몇 차례 전공과 더불어 4차 북벌에서는 사마의와의 진검 승부에서 대승을 거두기도 했다. 특히 5차 북벌시에는 위나라 땅에서 둔전을 했는데, "농사를 짓는 군인이 위수 물가의 다른 농민과 섞여 있는데도 백성들이 불안해 하지 않았으며, 군인들도 사사로운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 시절 제갈량의 군대가 얼마나 기합이 들고 엄정했으면 이럴 수 있었겠는가! 진짜 제갈량은 대단한 지휘자였다. 또한 제갈량은 사마의가 허장성세를 벌이자, 단박에 간파해 내기도 했다.
 
「...고의로 병사 이천여 명을 위나라 진영 동남쪽으로 보내 큰소리로 '만세'를 부르게 하니, 일시에 메아리가 되어 한군의 진영을 진동시켰다. 제갈량이 사람을 보내 적의 정황을 살피게 하니 위나라 병사가 말했다. "'오나라 조정'이 사람을 보내 투항하니 이 때문에 사람들이 흥분해 환호작약하는 것이오." 공명이 웃으며 말했다. "오나라 조정이 항복할 리도 없거니와 혹 투항했다 하더라도 어찌 사자를 위수 물가로 보냈겠는가? 사마의는 이미 '육십이나 된 노인넨데 어찌 계략이라고 쓰는 것이 이리도 번거로운가!'"」

 하지만 제갈량은 너무 과로했다. 사마의가 촉의 사자에게 제갈량의 먹고 자는 일에 대해 묻고는 제갈량의 죽음을 예견한 일은 이미 유명하다. 제갈량은 죽었고, 천하의 기재였던 그는 사후의 일까지 거의 완벽하게 준비했으며 때문에 死孔明走生仲達 하게 만들 수 있었다. 죽으면서도 입던 옷으로 염하며 부장품을 넣지 말라 하고, 북벌의 출구인 한중의 정군산에 묻어달라 했으니, 이렇듯 철저하게 검소하면서도 죽어서까지 나라 걱정을 하는 모습을 보면 도저히 깔래야 깔 데가 없는 사람이다.

 저자는 제갈량의 사상에 대해 정치, 군사, 경제, 법제, 철학으로 나누어 살펴보고 있다. 제갈량은 정말 못하는 게 없었다. 정치 쪽으로는  철저하게 능력 본위의 인사를 행했으며, "문벌에 구애받지 않고, 개인의 은원을 따지지 않으며, 서열에 상관없이 인재를 선발했기 때문에, "서쪽 지역 사람은 제갈량이 당시인의 재주를 모두 활용한 점에 감복했다."" 또한 확실한 것은 제갈량은 권력욕이나 물욕 따위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제갈량 검소한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고, 이엄이 제갈량 보고 왕을 칭하라고 했을 때도 곧바로 물리쳤다. 내가 닉네임으로 삼고 있는 사마의가 조상을 제거하고 나서 식읍을 4만 호인가 받았던 것에 비하면 그 인격이 천양지차다. 다만 제갈량도 첩이 있었다는 사실은 새로웠다. 제갈량은 '여이엄서(이엄에게 주는 글)'에서 "첩도 부복이 없다"고 하여 자기 입으로 첩의 존재를 언급하고 있다. 부인은 한 명이었던 것 같고 첩은 몇 명이었을 지 모를 일이다. 내가 알기로 사마의는 부인만 따져도 세 명이었던 걸로 안다(삼국지 IP시절 자료가 다 날아가서 확실치가 않다).
 제갈량은 형주와 익주를 차지한 후 양쪽에서 동시에 위나라를 공격할 계획을 세워 놓았었다. 하지만 관우가 통한의 패배를 당하고 유비마저 이릉에서 대패하는 바람에 그 계획은 뿌리부터 흔들리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남만을 정벌하고 꾸준히 북벌을 행했으니 그야말로 의지의 사나이다. 그런데 북벌 당시 위연의 자오곡 계책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저자는 촉한의 전력을 다한 전쟁인지라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며 제갈량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이는 IP 헌제님이 주장하던 바이기도 하다. 저자는 북벌이 '공격으로써 수비를 하는' 방책이었다고도 하는데, 이 역시 IP 헌제님의 주장과 일치한다. 하지만 결과론적으로 북벌은 실패했다. 사마의는 제갈량을 두고 "군사적 전략을 말하기는 좋아하지만, 상황에 따라 수시로 변화하지 못한다"고 평했다 한다. 저자는 이 의견을 인정하고 있다.
 촉한의 경제 역시 제갈량의 지휘 아래 발전했다. 제갈량은 국가에서 소금을 전매하게 했는데, 이는 옛국가들이 많이들 하던 수법이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촉은 내륙지방인 만큼 산이나 지하수에서 소금을 얻었다는 점이며, 이미 서한 시대에 火井이라 불리는 천연가스 매장지를 발견해 소금물 끓이는 데 이용하고 있었다고 한다. 거 참 중국놈들 땅덩어리 넓으니까 옛날부터 별 걸 다 하고 살았다.
 제갈량이 법치주의자였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제갈량은 단순한 상앙의 후계자가 아니었으며, 상앙에 대해 "법 이론이 뛰어났으나, 교화로써 따르게 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형벌로 윽박만 지를 게 아니라 교화를 우선적으로 행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 역시 실천으로 드러나 제갈량에게 형을 받은 요립과 이엄이 정작 제갈량의 죽음을 원통해 하기에 이르렀다.

 제갈공명은 그야말로 만세를 뛰어넘는 기재다. 내가 비록 어렸을 적 이문열 삼국지를 읽으며 제갈량에 대한 반감으로 사마의를 동경하게 되었지만, 머리가 굵어진 지금은 삼국지 등장인물 중 제갈량보다 존경받을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책을 보고 나니 그 생각은 더욱 확고해졌다. 이제 책을 덮으면서, 제갈량에게서 교우 관계에 대한 교훈 한 조각 들어보자.

「세력과 이익을 위한 사귐은 오래가기 어렵다. 선비의 사귐은 따뜻하다고 꽃을 피우거나 춥다고 잎을 떨어뜨리지 않아, 사철이 한결 같으며, 어려움을 겪을수록 더욱 견고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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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망디 1944 -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사상 최대의 연합군 상륙작전 세계의 전쟁 2
스티븐 배시 지음, 김홍래 옮김, 한국국방안보포럼 감수 / 플래닛미디어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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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나는 국민학교 고학년 때 비비탄 총 가지고 놀게 되면서부터 무기, 전쟁 등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중학교 때를 정점으로 그 정도는 줄어들었으나 아직도 어느 정도의 흥미는 가지고 있다. 특히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경우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전쟁에서 승부의 분수령이 되었으므로 누구나 흥미를 가질 만한 주제이고, 나 스스로가 상륙전을 목적으로 하는 해병대를 갔다 왔기 때문에 더더욱 그 내막이 궁금해졌다.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해 구해 본 이 책은 비교적 무난한 책이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연합군의 기만 전술에 독일군이 철저하게 말려들었기 때문에 수행될 수 있었다. 내가 고등학교 때 아마도 외국어영역 모의고사 지문에서 2차대전 때 미군의 암호는 아메리카 원주민 나바호 족의 언어를 활용하여 만들었다고 본 것 같은데, 그 암호는 독일군이 해독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독일군의 암호는 - 무선으로 송출되는 신호의 경우 연합군 측에서 모조리 잡아내어 해독을 하였다고 한다. 또한 연합군은 노르망디가 아닌 다른 해안을 칠 것처럼, 그리고 그 예정일 또한 다른 날인 것처럼 독일군을 속이고 있다가 노르망디를 급습했다. 이는 마치 조조의 허허실실 전략을 보는 것 같은데, 어찌 되었든 정보전에서부터 이미 독일군은 밀렸던 것이다.
 또한 독일군의 경우 히틀러 일인 독재 치하에서 개념없고 경직된 지휘를 받을 수밖에 없었던 반면 연합군은 전장에 있는 사령관이 직접 모든 권한을 행사함으로써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 이 역시 중국의 격언에 있듯이 전장에 나가 있는 장수는 왕의 명령도 듣지 아니할 수 있다는 말의 진정성을 실감케 했다. 

「그러나 그(히틀러)는 자기 구역 내에 있는 부대에 대한 통제권과 필요할 경우 후퇴를 명령할 수 있는 권한을 달라는 그들(롬멜, 폰 룬트슈테트)의 요청을 거부했다. 그 뒤에 그는 곧바로 다시 600마일(950킬로미터)을 비행해 라스텐부르크로 돌아와서는, 노르망디 전장은 단 한 차례도 방문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자신의 본부에 있는 지도만 보고 전쟁을 지휘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아이젠하워 장군은 노르망디 전투 기간 동안 몽고메리와 브래들리, 뎀프시의 사령부로 여러 차례 그들을 방문했지만, 그들의 전투 수행에 대해 결코 간섭하려 들지 않았다.」 

 독일군이 이렇듯 정보전에서나 지휘 계통의 유연성 면에서 연합군에 비해 상당히 뒤쳐지는 입장이었지만 그래도 그들이 강하게 느껴지는 건 역시 그들의 기갑군단 때문이었다. 

「이렇게 해서 독일군이 개발한 전차가 5호 전차 '판터(Panther)', 6호 전차 '티거(Tiger)'와 '킹 티거(King Tiger)'이다. 이것들은 사거리가 200미터 이상 떨어진 경우 대부분의 연합군 전차 포탄이 그대로 튕겨나갔고, 그보다 다섯 배나 먼 거리에서 연합군의 전차를 파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봤을 때 이 모든 사실들보다도 연합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제공권 장악에 있었던 것 같다. 이 책에 나와 있는 연합군의 대규모 공습에 관한 내용은 수도 셀 수 없이 많다. 아군 보병이나 기갑병이 땅에서 주춤하는 기세가 보이면, 어김없이 전폭기 수천 대가 날아가서 적 진영을 초토화 시켜 버렸다. 내가 전차대대 소속 대전차화기중대에 복무했었기 때문에 잘 알지만, 전차의 장갑 중에 가장 약한 부분이 바로 전차 윗부분, 뚜껑 부분이다. 하늘에서 떨어진 포탄은 전차 옆구리를 맞추기 보다는 윗부분을 박살내 버렸을 공산이 크다. 독일의 공군력은 연합군에 비하면 형편없었다고 한다. 그러니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군대에 있을 때 상륙작전을 수행할 경우 사상률인지 사망률인지가 90퍼센트에 달한다고 교육을 받았었다. 때문에 우리의 머리도 짧게 돌격머리를 치는 것이고 악과 깡을 중요시 여기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이 책을 보니 D-데이 당일 상륙작전을 수행한 15만6천 명의 병력 중에서 사상자는 1만 명으로 비교적 적은 피해를 받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사상률이 약 7퍼센트...? 역시 해병은 이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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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rano0523 2023-08-16 1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체적으로 잘 분석한 리뷰이지만 독일 공군이 형편없다는 것은 너무 결과론적인 이야기 같네요 노르망디 상륙 시점에 제트 전투기를 배치한 공군은 루프트바페 뿐이고 지금 현재까지도 이정도의 전과를 남긴 공군은 없습니다 영,미 연합군이 독일본토항공전에서 제공권을 장악하는데까지 2년이 넘게 걸렸고 심각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게임 체인저와 같은 머스탱의 등장등 여러 요인으로 결국 제공권을 빼앗기지만 앞뒤 설명없이 형편없다는 말은 동의하기 어렵네요.
 
마야 : 잃어버린 도시들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6
클로드 보데 지음 / 시공사 / 199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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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읽어 보고 조금 어이가 없었다. 명색이 마야에 관한 책이면 마야의 역사나 유물, 신화 등에 대해 집중 조명을 하는 게 당연한 일일진대, 저자는 순전히 서양인의 관점에서 미개 내지는 신비한 문명 - 마야의 유적을 발견해 나가는 과정들을 이야기하는 데에 지면의 대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이는 마치 『한국; 동방의 횃불』 식으로 제목을 단 책이 정작 한국의 역사나 풍습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만(?) 하고 대부분의 내용을 19세기 말에 조선에 가서 생활했던 서양인들의 수기에서 인용해 채우는 것과 마찬가지다. 마야에 대해 알고 싶어서 사 본 책이었는데, 아무래도 다시 다른 책을 구해봐야 될 것 같다. 

 서두부터 험담만 늘어놓았지만, 사실 책을 읽어보니 마야에 대해서 그렇게 자세하게 쓸만한 내용도 충분치는 않아 보였다. 왜냐하면 마야는 남긴 문헌이 극히 적으며, 그 후손들조차 저 유적은 신들이 살다가 버리고 떠난 것이라는 등의 전설 같은 이야기나 하고 앉았으니 영 단서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까, 비교적 최근까지 집적된 연구 성과도 마야 문명의 정체에 대해 썩 만족할만한 해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튼 책 내용의 대부분이 서양 정복자, 고고학자, 여행가의 모험담으로 점철되어 있어서 정작 마야의 풍습에 대해서는 단편적인 정보 밖에 얻지 못했는데, 그나마 내가 캐치한 바로 - 마야인들은 잔인한 성향을 지니고 있었으며, 자해 의식도 있었고, 생각보다 대단한 문명은 아니었다는 판단이 섰다. 유명한 계단식 피라미드는 그렇게 거대한 규모도 아니고(이집트랑은 비교 자체가 불가할 듯) 문자 체계는 - 보고 있자니 웃음 밖에 안나오는 수준이었다.
 말 나온 김에 여기서 마야의 문자를 보고 내가 느낀 바를 좀 적어보겠다. 마야의 문자는 상형문자다. 책을 보아하니 뜻글자인 것 같은데, 그 문자는 문자가 아니다. 그러니까, 문자가 널리 통용될 수 있는 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한 글자 한 글자가 대단히 복잡한(한마디로 그림) 구조로 되어 있다. 오늘날 우리가 쓰고 있는 문자는 대부분이 선으로 이루어져 있다(이를테면 한글이 그렇다). 글쎄, 아직도 그림으로 된 문자가 존재할는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메이저의 위치에 있는 문자들은 전부 다 선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마야 문자는 점, 선, 획이 아니라 그 자체가 매우 복잡한 그림이다. 만약 획으로 따진다면 간단한 글자라도 30획은 족히 넘을 것 같았다(복잡한 건 100획에 육박할 듯). 그걸 어느 천년에 쓰고 앉았나? 일견 신비로워 보이긴 하지만 실용성은 전혀 없는 문자였다.
 사실 내가 이 책에서 얻고자 한 바는 다음과 같은 류의 정보였다. 

「재미있는 것은 우리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호박씨나 호박을 마야인은 기가 막히게 맛있다고 여긴다는 점이다.
 마야인은 사랑의 슬픔에 대해서도 잘 간파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야일(yail)이라는 단어는 사랑과 고통을 동시에 의미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역으로 서양인들은 호박씨나 호박을 먹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번역도 그리 충실한 편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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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의 생애 에버그린북스 10
로맹 롤랑 지음, 이휘영 옮김 / 문예출판사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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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 역경을 딛고 일어난 사람들의 이야기는 항상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분명 베토벤은 역경을 딛고 일어난 사람인데, 겉으로 보기에는 항상 자기는 불행하다며 신세한탄을 하여 그가 과연 역경을 이겨낸 건지 역경에 빠져서 허우적댄 건지 헷갈릴 때가 있다. 글쎄, 내가 봤을 때는 허우적대다가 승화시키기도 하고 그러다가 또 허우적대고 그런 것 같다(?). 그만큼 베토벤은 감정의 굴곡이 많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
 질풍노도 베토벤의 인생에 전제로 깔려 있는 것은 '불행'이었다. 

「"그의...소리를 내어 웃는 웃음은 듣기 싫고 괄괄하고 얼굴까지 찡그리는 웃음이었으며, 더구나 늘 짧게 끊어져 버리는 웃음이었다" - 그것은 기쁨을 자주 가져 보지 못한 사람의 웃음이었다. 그가 습관적으로 띠던 표정은 멜랑콜리였다. "사라질 수 없는 슬픔"이었다.」 

 그가 불행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어릴 적부터 아버지의 돈벌이를 위하여 혹사 당하였으며, 모친을 일찍 여의었고, 연애를 하는 족족 실패하였던 것만 봐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거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귀까지 멀어버렸다. 명색이 작곡가인데 귀머거리가 된 그의 심정은 오죽했을까? 이는 마치 사격선수가 맹인이 된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베토벤은 많은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하였는데, 귀가 안 들리기 시작하자 그 사실을 들키기 싫어서 사람들 만나는 것을 회피하였다. 스트레스가 엄청났을 것이다.
 사람과 사교를 하지 못하게 된 베토벤은 자연과 친하게 지내게 되었으며, 자연에서 영감을 많이 얻었다고 한다. 또한 그는 천성적으로 남을 돕는 일을 좋아했다. 

「"타인을 위해서 일할 수 있다는 것은 어릴 때부터 나의 최대의 행복이며 즐거움이었다"(1824년)」 

 나는 베토벤의 이미지 - 괴테와의 일화, 영웅교향곡의 일화 등 - 를 고려했을 때 그가 남에게 베푸는 것을 좋아하는 선량한 사람이라기 보다는 고집불통이고 자존심이 센 난봉꾼인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완전히 잘못 짚은 것이었다. 알고 보면 베토벤은 항상 남에게 무언가를 베푸는 입장이었다. 어려서는 가족에게 그랬고, 젊어서는 애인에게 그랬고, 늙어서는 조카(양아들)에게 그랬다. 그는 또한 가난한 사람들에게 힘을 주기 위하여 작곡을 한다고 분명하게 밝히기도 하였다. 대단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할 자격이 있다. 

「"괴로움을 뛰어넘어 기쁨으로!"(Durch Leiden Freude)」 

 오탈자가 좀 있었고 원서가 워낙 문장이 난해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래도 번역을 일부러 그렇게 했는지 아무튼 읽기가 좀 어려웠다. 원래부터 베토벤은 내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고전 음악가였는데, 이제 그 위치는 확고부동해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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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10,000일의 전쟁
마이클 매클리어 지음, 유경찬 옮김 / 을유문화사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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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캐나다 사는 기자가 쓴 책인데, 베트남전의 개전, 진행, 종료까지 - 가급적 시간순으로 하여 배경과 요소 등을 일일이 짚어내어 보여주고 있다. 꽤 성실한 책이었다.
 베트남전의 전체적인 양상 따위는 이미 알고 있던 바가 있으므로 그렇게 특별한 것은 없었다. 저자는 책의 많은 지면을 미국의 정치인들이 어떻게 전쟁에 개입하게 되었고, 그들이 이후 어떻게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하였는지에 대하여 서술하는 데에 할애하고 있다. 그러한 정치적 배경들에 대하여 꽤나 자세하게 알게 되었다는 것도 하나의 소득이다(물론 거의 다 금방 까먹었다).
 사실 미국에게 있어 베트남전은 처음부터 꼬인 전쟁이었다. 케네디는 암살 당하기 전 베트남에 정부 관료 두 명을 파견하여 그들에게 상황을 알아보고 미국이 취해야 할 적절한 입장을 제시해줄 것을 요구했는데, 이 에피소드는 마치 선조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보고 오게 한 두 조선 관리들의 이야기와 흡사했다. 

「크루랙 장군은 모든 일은 잘 진행되고 있다고 말했다...(중략)
 "디엠은 국민들에게 많은 지지를 얻고 있었으며 군인들의 사기도 높았다...(중략)"
 멘던홀은 상반된 내용을 보고했다.
 "디엠은 전혀 인기가 없었다. 정부가 아주 위험스러운 상태였다...(중략)"
 ...듣고 난 케네디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물었다.
 "당신 두 사람은 같은 나라를 다녀온 거죠?"」 

 저자는 멘던홀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미국은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한답시고 베트남전에 멋모르고 개입했다가 완전히 발렸다. 베트콩(Viet Cong; Vietnamese Communist의 경멸 섞인 약어)들은 엄청나게 강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단결력이 대단했다. 거기다가 - 나는 미처 몰랐던 사실인데 - 소련과 중국의 지원물자를 무한히 제공받고 있었다. 베트남전을 시작한 존슨 대통령은 이른바 '북폭'이라고 해서 북베트남 군사, 산업시설들을 수도 없이 폭격하여 쑥대밭을 만들어 놓았으나, 베트콩들은 자기들이 생산 안해도 얼마든지 소련과 중국이 물자를 주었다는 이야기다. 아무튼 베트콩이 호치민을 중심으로 단결이 매우 잘 되어 있었던 반면 남베트남은 완전 나가리 국가였다. 

「...해병대 위생병 잭 매클로스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한번은 다낭에 간 일이 있었다. 18~19세 정도의 남베트남 청소년들이 일제 혼다 오토바이를 멋지게 타고 다니는 것을 봤다. 산화해 버린 내 동료들이 생각이 났다. 도대체 여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단 말인가? 이 녀석들은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라고 우리를 이곳에 불러 놓고, 자기들은 혼다 오토바이나 타고 다닌단 말인가..."
 해답은 간단했다. 부패의 원인은 사회 전체적으로 '전쟁에서 이겨야만 된다'는 공감대와 동기 부여가 안 되어 있었던 탓이다.」 

 현실이 이러다보니 남베트남과 미국 사이도 여기저기서 금이 가곤 하였다. 이렇듯 워낙 부패하고 타락한 정부를 돕다보니 자연 미군도 기강이 해이해지는 모습을 많이 보이곤 하였다. 다음의 적군 전사자 부풀리기에 대한 이야기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종종 '전사자 숫자놀음'은 코미디나 다름없는 경우가 있었다. 필라델피아의 달동네에서 성장한 맷 마틴 상병은 해병대에 지원 입대하여...(중략)...이렇게 말했다.
 "육군이건 해병대건 오래 근무한 사람일수록 전사자 부풀리기에 능숙했다. 한번은 대령에게서 걸려온 무전을 옆에서 들은 적이 있다. 그는 무척 흥분한 상태였다. 우리는 일부러 포탄 소리가 무전기에 잘 들리도록 했기 때문에 그는 크게 소리쳤다. '전사자가 몇 명인가? 적군 전사자가 몇 명인가?' 우리는 대령과 같은 마을에서 전투를 하고 있었다. 대령은 많은 전사자를 원했다. 우리와 함께 있던 소위가 무전병에게 성큼성큼 다가서더니 '300명 이상이라고 해!'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무전병이 '딱 떨어지는 숫자는 안 됩니다'라고 말했다. 옆에 있던 중위가 '그러면 311명이라고 말해 줘!'라고 소리질렀다. 무전병은 그대로 불러줬다. 대령은 '좋아!'를 큰 소리로 외쳤다. 전사자가 311명으로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격전의 현장을 체험한 맷 마틴의 이야기를 계속 들어보자.
 "우리는 무차별 사격만 계속했었고, 실제로 우리에게 일어난 일은 지프가 전복하여 소위 1명이 죽은 것이 전부였다. 적은 1명도 사살하지 못하고 아군 초급장교 1명이 사고사했을 뿐이었다..."」

 이 외에도 미군에는 많은 문제점들이 있었다. 일단 지휘하는 대통령과 그 보좌관들부터가 문제였고, 병사들도 복무기간이 1년밖에 되지 않아서 경험자가 부족했다. 거기다가 병사들 평균 연령이 19세였다고 하는데, 내가 군대 갔을 때가 딱 만 19세 되자마자 였으니까 그렇게 어리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는데 - 2차 대전 때 미군 평균 연령이 26세였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까 어린 것이 맞는 것 같다. 사실 저 나이면 정신적으로는 청소년이다. 사실 26세 정도는 돼야 전투력이 좀 살아날 듯도 하다. 또한 전술했던 전사자 부풀리기에 이어 더욱 심한 현상들도 일어났는데, 바로 극단적인 하극상이 그것이다.

「인기 없는 장교에게 종종 현상금을 거는 경우가 있었으며, 액수는 대개 50달러에서 1000달러 수준을 오르내렸다. 미군 병사들은 여러 명이 용돈을 모아 현상금을 마련했다...
 ...상원 자료에 따르면, 1969년부터 1970년 사이에 살해나 협박용까지 포함하여 미군 부대에서 수류탄 사고가 790회 발생하여 83명의 장교가 목숨을 잃었다. 이 숫자에는 사병들이 칼이나 총으로 살해한 장교들은 포함되지 않았다...
 ..."특무상사와 갈등을 겪고 있던 친구 몇 명이 있었다. 그 상사는 나이가 많은 만큼 경력도 다양했고 전투에서도 군인 정신이 투철했다. 그는 전쟁을 좋아했다. 심지어 전투 현장에서조차도 "해병대 복장은 이러해야 된다'는 등 꼼꼼하게 챙기는 성격이어서 청결 정돈을 항상 입버릇처럼 강조했다... ...살아남은 부대원들이 그 상사를 발견했을 때, 등 뒤에서 근접 사격을 한 듯 총구멍이 많이 나 있었다.적의 총에 맞은 것이 아니라 부대원들이 뒤에서 쏘았다고 생각했다."」 

 우리 중대원들도 항상 전쟁이 난다면 일단 간부들부터 쏴죽이겠다고 농담 삼아 이야기하곤 했었는데, 실제 전쟁이 나면 진짜로 그러는 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쟁은 몇 년을 끌었으나 답이 안 나왔고, 매스컴은 계속하여 전쟁의 참상을 보도했다. 반전데모는 미국 곳곳에서 벌어지고 시위대에게 발포하는 일도 발생했다. 결국 미군은 철수하게 되었다.
 미군의 철수는 평화협정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남북베트남이 휴전을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삼 년 후에 북베트남은 협정을 파기하고 전격 침공에 나섰다. 앞서 말했듯 남베트남은 나가리 국가였다. 베트콩이 남베트남을 유린했지만 미국은 더이상 간섭하지 않았(못했)다. 

 그야말로 인간 승리의 드라마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가장 대표적인 표본이 베트남전이다. 하지만 그들이 염원하는 통일을 이루었다고 해서 그 사이에 끼어 죽고 다친 수백만 명의 희생이 간과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베트남인이라면 차라리 조국 통일에 목숨을 바쳤느니 하면서 위안을 삼으면 되겠지만, 미국인이나 한국인 같은 경우는 완전히 개죽음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들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싸웠는가? 모든 전쟁이 그렇듯이, 베트남전의 교훈도 자명하다.
 전쟁은 '절대' 일어나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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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whairis 2010-06-08 0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와, 잘썼네요. 사 봐야 겠다는 마음이 일었으니깐.
[전쟁은 '절대' 일어나선 안 된다.] 공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