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 - 일본인이 밝히는 한국 호랑이 멸종의 진실
엔도 키미오 지음, 이은옥 옮김 / 이담북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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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에서 개최된 두 번의 올림픽 - 각 행사들의 마스코트였던 호돌이, 수호랑 등을 보면 한국인의 호랑이 사랑은 남달라 보인다. 하지만 돌연변이 백호인 수호랑, 앞발가락이 세 개인 호돌이를 보며, 무언가 결핍된 불완전한 감정이 연상되고 - 종국엔 그들이 호랑이에게 느끼는 감정이 과연 사랑일까 하는 의구심이 들고는 한다. 왜냐, 정작 한국인이 사는 한반도에는 호랑이가 없다. 이.율.배.반.

 

 한국인은 범을 지키지 못했다. 아니, 지키기는커녕 철저히 말살하는 데에 몰두 내지는 동참했다. 아무르호랑이는 본디 만주와 연해주, 한반도에 걸쳐 분포하였는데, 유독 좁은 한반도에 많은 개체가 서식하였고 표범 또한 마찬가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무래도 범들은 지나치게 높지도 않고, 그렇다고 구릉이라기엔 애매하게 높은, 그런 산들이 끝없이 연결되어있는 한반도를 매우 사랑했던 것 같다. 호모 사피엔스는 자신의 영역을 확보하고 지키는 일에 그 어떤 동물보다도 민감하며, 무리생활을 하면서 무기를 사용한다. 한반도에는 매우 많은 인간과 범이 공존하고 있었으며, 두 종이 사육 혹은 수렵하는 대상 역시 겹치는 부분이 많았다. 이에 虎患이라 부르는 일들이 심심치 않게 일어났으며 영역을 침범 당한 인간은 범을 경외하면서도 수시로 잡아 가죽과 고기를 취했다. 중국 속담에 "조선인은 1년의 반을 호랑이를 쫓느라 보내고 나머지 반은 호랑이에게 잡아먹힌 사람의 문상을 가느라 보낸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이 책의 번역출판을 기획한 서울대 이항 교수 왈,

 

「...조선 초기에 이루어진 체계적인 호랑이 포획 정책이 조선시대 내내 지속되었다. 그 결과 호랑이 개체수는 15세기 말과 16세기 초에 급감하였고, 조선 말기까지 낮은 개체수를 유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여기에 결정타를 가한 것은 일제의 해수구제 정책이었다. 그렇지만 그 당시 해수구제 정책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은 한국인 사냥꾼이었다. 또 설사 한반도가 일제의 식민지가 되지 않았다 가정하더라도 우리는 이 땅에서 호랑이가 살도록 그냥 내버려 두었을 것으로 생각이 들지 않는다...」

 

 심지어 이 책의 저자는 일본인이다. 글쓴이의 성품은 대단히 겸손하고 양심적이며, 왜국의 제국주의적 만행에 대해 매우 부끄러워하고 있다. 그야말로 개념이 꽉 찬 일본사람인데, 일본인 특유의 덕후性을 가지고 있어 한국 호랑이의 흔적을 찾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한다. 1980년 한국에 야생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오보 기사를 접하고서 즉각 한국으로 넘어와 일단 창경원에 가보고, 그곳의 호랑이가 벵골호랑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실망하고, 신문사니 국립중앙도서관이니 온갖 곳을 뒤지기도 하고, 한국에 아는 인맥을 총동원하여 남한 지역의 마지막 호랑이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야말로 인간승리라 아니할 수 없다. 이 양반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목포 유달국민학교의 호랑이 박제, 경주 대덕산의 호랑이 - 그리고 그 호랑이에게 습격 당했다가 살아남은 할아버지 등등 이 모든 것들은 저자의 집요한 취재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저자가 들쑤시고 다니지 않았으면 호랑이 박제니 호랑이한테 먹힐 뻔한 생존자니 모두 역사에 기록되지 못하고 잊혀졌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저자가 한국에 왔던 80년대에만 해도 왜정 시절 초등교육 이상을 이수했던 어르신들이 많아서 일본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많았다는 거다. 저자가 생면부지 노인네를 만나 말을 걸어도, 시골 깡촌 슈퍼 주인한테 말을 걸어도 한국에는 어디에든 한일 2개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이 있었다. 취재 도중 이런 사람들의 도움을 받는 장면이 상당히 많이 나온다.

 정작 한국인들은 버려두고 있었던 온갖 귀한 증언과 증거, 사진들을 수집하면서도 저자는 만족할 줄을 몰랐으며, 종국에는 끝판왕격인 자료들까지 찾아내고 만다.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총독부 통계연보』, 『조선휘보』, 기타 왜인 공무원이 쓴 논문 등등...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왜정 때 해수구제 현황은 모두 이 사람이 찾은 자료를 기초로 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1915년과 1916년 사이에 호랑이 24마리, 표범 136마리, 곰 429마리, 늑대 228마리 등을 잡아죽였고, 1919년부터 1924년 사이에는 호랑이 65마리와 표범 385마리를 사냥했다. 이어 1933년부터 1942년까지 10년간 호랑이 8마리, 표범 103마리, 곰 610마리, 늑대 1141마리를 도륙했다. 인류에게 자연보호와 종의 보존에 대한 의식이 조금이라도 일찍 생겼더라면 이러한 피의 살육은 벌어지지 않았을 테다.

 대충 생각해봐도 20세기 초에 한반도에서 호랑이, 표범, 곰, 늑대 사냥을 하지 않았더라면 호랑이는 대략 100여 마리, 표범은 7~800마리, 곰은(불곰인지 반달곰인지는 구분이 되어 있지 않다) 1000여 마리, 늑대는 - 번식력을 고려해 - 2000마리 정도는 살아 있지 않았을까? 아주 이상적인 생태계다. 이외에 멧돼지나 고라니, 사슴 같은 경우도 셀 수 없이 많은 개체가 사냥을 당했더라. 사슴은 한반도에서 멸종됐고 노루도 거의 없는 걸로 안다. 고로 산에 먹을 게 없으니 식육목 동물들이 민가 쪽으로 내려올 수밖에 없고, 인간 눈에 쉬이 띄어 더욱 쉽게 잡히는 악순환이 계속 되지 않았나 싶다. 그야말로 재앙이다(우리 할머니 젊었을 적에는 뒷산에서 매일 밤 늑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고 한다).

 

「한반도 남부로, 2마리의 호랑이를 찾아서 드디어 여기까지 왔다. 몇 년을 찾고 찾은 결론이 바로 일본의 침략이 이 나라의 호랑이 멸종에 깊이깊이 관여했다는 것이었다. 호랑이를 산신으로서 숭배해 온 이 나라에 많은 일본인들이 신식의 연발총과 軍銃을 들고 밀어닥쳐 메이지 후반(1897~1912년)부터 다이쇼(1912~26년)에 걸쳐서 금세 호랑이를 멸종시켜 버렸다.」

 

 저자는 죄책감에 일본 탓만 하고 있지만 그건 아니라고 본다.

 내 눈에는 아무리 봐도 토끼 같이 생긴 한반도를 호랑이라 칭하고, 무서운 스승을 호랑이 선생님이라 부르고, 각종 캐릭터 상품도 호랑이를 본떠 만들곤 하는 한국인들. 그들이 전혀 손대지 않고 있던 작업을 한 양심적인 일본인이 해냈다. 정말 부끄럽기 짝이 없다. 이 책은 1986년에 출간되어 일본과 한국에서 큰 이슈가 되었다고 하는데, 정작 한국어 번역본은 2009년에야 나왔다. 그릇된 일이다.

 

 책 자체가 수기 형식이라서 소소하니 쉽게 읽히는 책이었다. 해장국이나 산낙지 같은 거 먹으러 간 것도 다 써놨다. 멘트도 일본인스러웠다. '음, 이것은…. 꽤 맛있지 않은가!' 등등... 번역은 다소 일본어를 번역한 티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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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야생 동물 대탐험 BBC 자연사 다큐멘터리 3
팀 헤인즈 지음, 김혜원 옮김, 대런 홀리 그림 / 사이언스북스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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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은 BBC에서 방영된 다큐와 연계되어 있었으며, 덕분에 다큐에 쓰인 각종 그래픽들이 올컬러 참고사진으로 실려 있었다. 예부터 도감 볼 때 그림보는 맛이 빠질 수 없다. 그 점은 썩 만족스러웠다.

 

 일단 고생물학이야말로 진정 간학문적 연구가 필요한 학문이 아닐 수 없다. 현재 지구온난화가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데, 기실 지구는 여전히 추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 공룡 멸종 후 에오세 초기에는 지구 평균 기온이 28도에 달했다. 심지어 필자는 이렇게 적기도 한다. "우리는 이 냉랭한 세상을 지극히 정상적으로 여길지도 모르지만 이전에 지구상을 활보했던 대부분의 동물들에게는 우리가 대단히 불행해 보일 것이 틀림없다". 물론 현재의 온난화는 비자연적인 영향을 받아 진행되고 있으므로 문제이긴 하다.

 기후 변화에 따라 식물들도 진화했다. "공룡들이 만약 시간 여행을 한다면 이들을 정말로 혼란스럽게 할 것들은 바로 색깔과 냄새다. 정글은 화려한 꽃과 열매로 가득 차 있을 뿐만 아니라 아침의 열기 속에 향내까지 강렬하다. 양치류와 침엽수가 번성하던 초록과 갈색의 공룡 세계는 이제 영원히 사라졌다". 또한 '풀'이라는 존재가 예상 외로 지구상의 앗세이였다. 나는 풀이 나무보다도 먼저 생겼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정작 풀은 2천만 년 전쯤 올리고세에 이르러서야 처음 등장한 생물이었다. "초식동물에게 초원은 광범위한 면적에 걸친 먹이의 끊임없는 재생을 의미하므로 뜻밖의 횡재나 다름없었다. 여기서 끊임없이 재생된다는 말은 아무리 뜯어먹어도 뿌리에서 계속 다시 자라난다는 뜻이다". 풀이 번성하지 않았다면 인류의 신석기혁명도 없었을 것이다. 쌀밥은 커녕 피죽도 구경하지 못했을 거란 얘기다.

 

 신생대의 각종 말 조상, 코끼리 조상, 고래 조상, 심지어 돼지 조상들도 흥미있었지만 아무래도 가장 관심을 갖게 되는 건 호모 사피엔스의 조상일 것이다. 그런데 화석만 가지고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생활습성을 파악하기엔 힘든 노릇이다. 때문에 과학자들은 유인원 및 원숭이의 행태들을 보고 그들의 삶을 유추하곤 했는데, 책에는 가부장적인 침팬지와 모계사회인 개코원숭이를 비교해놓고 유추가 힘들다고 해놓았다. 젠더 관련 논란을 피하고자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택한 방법으로 보이는데, 내 생각에 인간은 유인원과 비교해야지 원숭이를 비할 건 아니라고 본다. 현대에 이르러서야 생긴 성 역할 논쟁이 과거의 생물학적 사실 연구에 영향을 끼쳐서야 되겠는가. 아마도 이전 조상들은 철저하게 남성적인 사회였다가 호모사피엔스에 이르러 약간 다양화가 되지 않았을까? 침팬지의 예를 봐도 그렇고, 아무래도 야생에서는 힘과 경험이야말로 우수한 능력이니 말이다.

 책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이후로 즉각 호모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을 조명하고 있다. 북경인이나 자바인 따위는 나오지 않았다. 동시대를 살았음에도, 인간과 네안데르탈렌시스는 상당히 다른 미래를 맞이하게 된다. 너무나도 유사한 두 인종이 서로 맞닥뜨렸을 때 어떠한 일들이 벌어졌을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7만 년 전 인간이 막 네안데르탈인의 거주지역으로 진입했을 즈음 인간은 아직 흑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을 것이고 네안데르탈인은 등빨 좋은 코주부의 모습을 하고 있었을 테다. 이종교배는 전혀 없었을까? 인간이 네안데르탈인을 모조리 잡아다 카니발을 벌였을까? 언젠간 확실한 단서가 나오리라 믿는다.

 

 각종 조상 중에 나무늘보 조상이야말로 인상적인 동물이 아닐 수 없다. 이름도 짜세다. 메가테리움. 아메리카 대륙에서 번성했으며 나무늘보가 아니라 '땅'늘보였다. 길이 6미터에 몸무게 4톤에 달하는 괴물이었다. 이 놈은 불과 8천 년 전만 해도 존재했으며, 인간의 남획에 의해 멸종되었으리라 추정된다.

 그리고 매머드. 잘 알려져 있다시피 매머드도 1만 년 전쯤 멸종됐다. 환경변화도 환경변화지만 좋은 가죽과 뼈를 가지고 있으면 인간 앞에 얄짤없다. '메갈로케로스'라는 녹용이 3미터나 자라는 사슴도 있었는데, 역시 1만 년 전에 절멸하고 말았다.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시베리아에는 지금도 수많은 털코뿔소, 매머드 사체가 냉동된 채 묻혀 있다고 한다. 이런 시체들이 워낙 많이 발견되지만, 시베리아 자체가 또 워낙 넓어서 대부분의 냉동고기는 금수들의 먹이가 되거나 설령 인간에게 발견되어도 신고를 하지 않아 연구 목적으로 활용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고 한다. 여러 세대에 걸쳐 수많은 냉동사체를 목격한 시베리아인들은 '땅 두더지'란 뜻으로 '매머드'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다고 하며, "지하에 살고 있으며 빛을 보면 죽는다는 동물이 있다고 믿었는데 이것은 이 동물들이 왜 산채로 발견되지 않았는지 설명해 준다".

 

 빙하기가 간빙기로 변하는 데엔 수십 년 밖에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그 반대도 비슷할 것이다. 멸종된 동물들을 보며, 지금 있는 동물들이라도 잘 지켜야 하지 않는가 하는 인도주의적인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책은 이를 넘어서 우리 종 자체의 생존에 대한 경고를 하며 끝을 맺고 있다.

 

「우리 인간의 조상들로 말하면 빙하기에는 그저 냉혹한 세상에서 살아남은 또 다른 동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의 도구 사용은 독창적이었고 지구의 온난화가 우리 인류를 도왔던 것 같다. 그 뒤 세대를 거듭하면서 경험도 축적되었고 환경을 통제하거나 생존의 고역을 모면하는 능력 또한 개선되었다. 그 결과 우리 인류는 결국 오늘날과 같은 '비자연적인' 존재가 되는 과정에 들어서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마냥 자아도취에 빠져 있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또 다른 빙하기가 도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20여 년 뒤에 빙하기가 찾아온다면 만년설이 런던 북부까지 완전히 뒤덮을 뿐만 아니라 세계의 농업이 혼란에 빠지고 말 것이다. 우리가 과연 이런 변화에 적응할 수 있을까? 우리 역시 고도로 진화된 동물이며 결국 그저 또 하나의 커다란 포유동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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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한지 세트 - 전10권
이문열 지음 / 민음사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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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지 때에도 그랬지만, 이문열은 원전을 중시하기 보다는 - 수정을 가하고 자신을 드러내는 데에 거리낌이 없는 스타일이다. 이 초한지 역시 그랬다. 특히나 서두 부분과 10(번째)권 전체 같은 경우는 『서한연의』가 아닌 『사기』의 이문열판 번역본에 다름 아니었다. 그밖에도 구리산 십면매복, 장량의 은거와 같은 - 초한지의 재미에 "心腹" 같은 역할을 하는 장면들도 사서와 내용이 다를 경우 가차없이 편집해 버렸다. 가히 七實三虛를 넘어 九實一虛라 할 만했다. 이렇듯 正史에 대한 이문열의 집착이 심하긴 했지만 전혀 예상을 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라 적당히 넘어갈 수 있었다.

 

 1권 마지막 즈음에는 부록으로 '史記로 본 초한지 이전의 세계'가 실려 있었다. 잊고 있거나 모르고 있던 중국 고대사 이야기들을 볼 수 있었는데, 여기서 강자아를 얻은 周武王이 牧野싸움을 앞두고 후세에 남녀싸움의 단초가 될 명언을 남기기도 한다.

 

「"옛말에 '암탉은 새벽에 울지 않으니, 암탉이 새벽에 울면 집이 망한다.'고 하였소. 그런데 지금 殷王 紂는 오직 계집[妲己]의 말만 듣고..."」

 

 또한 周厲王 당시 14년간 공화정이 들어섰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나는 범증을 좋아한다. 몇 해 전 나온 중국 영화 초한지에서는 범증이 장량보다 한 수 위인 것으로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비운의 천재 범증의 출사는 시작부터 삐걱거렸다.

 

「...이번에는 蓍草로 항량과 항우의 身數를 보았다. 항량에게는 아예 군왕의 운세가 없고, 항우에게는 있어도 굵고 짧았다. 오래 주인으로 섬길 만한 신수들이 아니었다.」

 

 그 끝은 너무도 잘 알려져 있다. 이러한 범증의 헤아림과 비극은 현대의 취준생들이 필히 보고 얻어가는 바가 있어야 한다. 사족을 붙이자면 범증은 하야 후 노상에서 죽었는데, 왜 하필 하야 직후에 죽었는지 의심해 볼 필요도 있다고 생각한다. 항우가 의리남, 순수남 이미지가 있어 대부분의 논자들이 말 꺼내기를 두려워 한 것 같은데, 내가 보기에는 항우가 부러 죽였을 수도 있지 않나 싶다. 물론 가능성은 크지 않지만 말이다.

 

 한편 성양에서의 승전 이후 포로들의 처리 과정에서 유방과 항우는 처음으로 극명한 대비를 보인다.

 

「'우리가 말하는 천하는 결국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사람도 그를 죽이면 슬퍼하고 성낼 사람이 백 명은 넘는다. 그런데 사람의 목숨을 저리 하찮게 여겨 앞으로 사게 될 그 많은 원한은 어찌할 것인가...'(유방)

...'부수어야 새로 세울 수 있고, 죽여서 더 많이 살리는 수도 있다. 바로 지금이 그러한 때다. 나에게 맞서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여기서 똑똑히 보여 주지 않는다면, 앞으로 함양에 이를 때까지 내가 아끼는 초나라의 병사와 장수들이 얼마나 많이 죽어야 할지 모른다....'(항우)」

 

 이러한 대비가 『삼국지연의』에서의 유비와 조조같은 선악의 대비까지는 아닐 지라도 후세인들이 초한쟁패사를 즐기는 이유는 충분히 되고도 남는다. 심지어 유방과 항우는 계집질에 있어서도 서로 달랐다. 유방은 건달 출신답게 호색이 극에 달했으나, 항우는 명문가 출신으로서 우직한 상남자답게 고결하기 짝이 없었다.

 

「역이기가 객사로 찾아온 것은 마침 패공이 여자들에게 발을 씻기고 있을 때였다. 당시의 습속 탓도 있지만, 여자와 관련된 패공의 행실은 그리 단정하지 못했다... ...목이 잘릴 죄가 되지 않는다면 노소미추를 가리지 않고 여자를 마다하는 법이 없었다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 뒤 다시 3년 고달픈 전장을 헤매는 동안 이번에는 항우 스스로 하룻밤 잠자리 시중드는 여자조차 마다해 왔다... ...'저 아이는 바로 내가 마음속으로 그리며 만나기를 기다려 온 그 아이다... ...이제 저 아이(우희)를 내 여자로 거두겠다.'」

 

 그러면서도 둘은 범인들이 가지지 못한 패기와 야망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기에 천하쟁패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그 둘이 시황제의 순수 행렬을 보면서 내뱉은 말들은 놀랍도록 비슷하다.

 "저것이라면 빼앗아 대신 차지해 볼 만하구나[彼可取而代也]!"(항우)

 "아아, 대장부란 마땅히 저래야 하는데!"(유방)

 나는 영웅이 되어 나와 친족들이 아울러 고통받고 대도 끊기느니 필부로서 가정을 보존하는 일이 더 소중하다. 초한지에 등장하는 수많은 영웅 및 권세가들이 대부분 끔찍한 최후를 맞는 모습들을 보면 노장사상이 절로 떠오른다. 예를 들어 이사 같은 경우,

 

「...죽기 전에 오형을 받았는데, 먼저 얼굴에 먹물로 글자를 새겨넣고[黥], 다음에 코를 베어 내고[劓], 이어 다리를 잘라 내고[剕], 다시 생식기를 도려낸[宮] 뒤, 마지막으로 머리를 쪼개는[大辟] 순서였다. 그런 다음 허리를 베고 목을 잘라 저잣거리에 내거니 보는 사람이 모두 끔찍하게 여겼다.」

 

 유방의 애첩 척 부인의 최후는 그보다도 고약했다. "손과 발을 자르고, 눈알을 뽑고, 고막을 연기로 그을어 태우고, 벙어리가 되는 약[瘖藥]을 먹여 돼지우리에 던져 넣었다". 천하통일 후 유방의 토사구팽은 여후의 대살육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래봤자 여씨들 또한 10년도 못 가 청소 당했다. 여후 동생 여수(번쾌 와이프)도 언니가 죽자마자 맞아 죽었으니,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그 짓거리들을 하는가. 나는 유방이 공신들 다 죽여도 번쾌 노관은 끝까지 간 줄 알았는데, 노관도 번쾌도 아주 무사하진 않았더라. 아무 의미 없다.

 

 또한 옛 중국인들 계책내는 데엔 꽤 독한 면이 있다. 동주열국기까지 가지 않더라도 진평의 毒手는 실로 끔찍한 경우가 많았다.

 

「진평이 그중에서도 가장 장이와 비슷한 자를 골라 놓고 보니 漢軍 步卒이었다. 진평은 그를 데리고 자신의 장막으로 가 술과 고기를 대접한 뒤 말했다.

"한왕께서는 자네 머리를 빌려 큰일을 이루시려 하네. 부모와 처자는 한왕께서 돌봐 주실 것이니 아무 걱정 말고 죽어 주게..."

그러고는 보졸의 목을 벤 뒤 그 머리를 조나라로 보냈다.」

 

 항우의 전투력은 신의 경지에 올랐다. 거록에서의 9전9승을 비롯해 유방에게 빼앗긴 팽성을 되찾을 때의 모습은 말 그대로 鬪神 그 자체였다.

 

「...패왕이 제나라 성양을 떠난 지 열흘 남짓 만의 일이었다. 3만 정병으로 출발한 패왕은 그사이 천 리길을 에돌며 56만 대군을 상대로 싸워, 다섯 장수의 진채를 짓밟고 세 개의 성을 떨어뜨린 뒤에 주머니에서 물건 꺼내듯 팽성을 되찾았다.」

 

 무슨 타임머신 타고서 기관총을 들고 가 싸우는 것도 아니고 똑같은 무기를 가지고 저런 전과를 낼 수 있는가. 말이 안되는 인물이다. 하지만 사람 귀한 줄 모르는 항우는 유방을 이길 수가 없었다. 인간은 무리생활을 하는 동물이다. 게다가 두 사람의 '사람 귀한 줄' 아는지 모르는지는 제 스스로의 목숨에 대한 태도에서도 나타났다. 유방은 팽성에서 가루가 나고서 초나라에 쫓기던 도중 아들 딸을 구출하게 되는데, 초군의 추격이 급해지자 아들 딸을 여러 번 수레 밑으로 걷어차고, 집어던진다. 제가 살아야 무리를 다시 모을 수 있지 않느냐는 이론이다. 반면 항우는 자신의 목숨을 초개처럼 여기고 매번 싸움에 앞장 섰다. 군왕 신분으로서 누가 더 옳았는지는 결과가 말해준다.

 특히 유방도 기재는 기재였다. 아무리 그가 무위자연 군주 이미지가 강하다 해도 그저 멍청해서는 무려 漢祖를 세울 수 있었겠는가. 그의 임기응변은 실로 신묘한 데가 있다. 예를 들어 인질협박범(?)을 대하는 태도에서는,

 

「"...죽은 무신군 앞에서도 또한 형제 되기를 맹세한 적이 있다. 따라서 나의 어버이가 곧 너의 어버이니, 네가 꼭 네 아비를 삶아야겠다면 난들 어쩌겠느냐? 그래도 너와 나는 형제의 의리가 있으니, 국이 다 끓거든 나에게도 한 그릇을 나눠 주기 바란다."」

 

 이와 같이 상식과 틀을 깨 최상의 결과를 내었다. 이밖에 항우에게 가슴을 저격 당했을 때("저 종놈이 내 발가락을 맞추었구나[虜中吾指]!")도 그렇고 유방의 현명함은 유비의 그것을 뛰어넘는다. 물론 그럼에도 유방에게 항우는 항상 두려운 존재였다. 관중을 나온 이래 승승장구하던 유방은 팽성에서 깨박살이 나고, 내리 수십 차례를 지다가 광무산 대치 이후에는 항우 뒤통수를 치고도 쳐발린다. 그러다 보니 사면초가를 들은 항우가 도망갈 때조차 유방은 "스무 배가 넘는 대군으로 패왕의 진채를 에워싸고도 이틀이나 결판을 미"뤘다.

 결국 전술한 두 왕의 사람 다루는 차이 때문에 대세는 기울고, 오강에서의 추격전에서 항우가 보여준 모습들은 그야말로 레전드 영상이다. 사람 한 명이 얼마나 용맹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용맹함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 인류 역사상 최고의 명장면이라 아니할 수 없다.

 

「"...몸소 나가 싸우기를 일흔 번이 넘었으나 한 번도 진 적이 없어 마침내는 천하의 패권을 움켜잡게 되었다. 그런데도 지금 갑자기 이처럼 고단한 지경에 빠진 것은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해서이지 싸움을 못한 죄가 아니다[此天之亡我 非戰之罪也]. ...첫째 반드시 적의 에움을 흩어 버리고, 둘째 적의 장수를 베어 죽이며, 셋째 적의 깃발을 찍어 쓰러뜨리겠다. 그리하여 그대들에게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한 것이지 내가 싸움을 잘못한 죄가 아님을 알려 주고자 한다."」

 

 28:5000 싸움을 앞둔 대장이 한 말이다. 그리고 그는 그대로 행했다. 그렇게 지치고 지친 몸으로 26명만 이끌게 된 상태에서, 오강 정장의 호의를 느닷없이 거절하는 항우였다. 이는 전술했던 '제 스스로의 목숨에 대한 태도'를 보여준다. 그러고는 말에서 내려 병사들과 26:5000 육탄전을 벌이는데, 걸어다니면서 혼자 최소 백여 명을 죽인다. 이렇듯 절륜한 무공 때문에 이 책에 없는 구리산 십면매복에서는 한꺼번에 한나라 장수 60명인가랑 혼자서 뜨는 걸로 나오기도 했던 모양이다. 여포 무력이 100이면 항우 무력은 1000이다.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나서 과거 부하장수에게 인심을 베푼 항우의 시체에게 돌아온 건 사지절단이었다. 이문열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한다.

 

「실로 비정하다 못해 처절하기까지 한 인간의 물욕이었다. 그리고 죽음을 맞이하는 패왕 항우가 보여준 기이한 정신적 고양에 견주면, 그 물욕은 끔찍한 자기 모독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 인간성의 추락이었다. 진정 이 세상의 무엇이 고귀하고 무엇이 下賤한가. 사람의 무엇이 위대하고 무엇이 卑小한가.」

 

 오추마가 한 번 갈렸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 항우가 오중을 떠날 때부터 타고 다니던 오추마는 진나라 평정 후 항우가 팽성으로 돌아가려하자 스스로 곡기를 끊고 죽은 것으로 나온다. 그리하여 항우는 함양에서 새로운 오추마로 갈아타고 팽성으로 가게 된다. 항우의 인생 2막과 함께 하게 된 All New-오추마는 Ex-오추마보다 더한 고생을 하게 된다. 또한 광무산 대치 때 유방이 貊族[北貊]을 용병으로 썼던 사실도 새로웠다.

 장량이 黃石公을 찾아뵙고서 張家界에 들기는 커녕 장안에 머물며 하비의 황석공을 캐와 모시고, 차후 권력 암투에 까지 가담했다는 사실 역시 충격적이었다. 토사구팽 피비린내 나는 한나라의 심장부에서 그렇게 버티고 사는 게 잠수를 타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신비롭진 않더라도 오히려 더 대단해 보였다. 반면 한신은 장량 못지 않은, 어찌 보면 장량보다 훨씬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인간관계에 있어 약삭빠르지가 못했다. 공은 공대로 세워놓고 매번 유방에게 당하고, 결국엔 여후에게 카운터를 맞는다. 실로 불쌍한 캐릭터다.

 말 나온 김에 한신이야말로 인류 역사상 가장 극적인 인생 역전을 한 사람이 아닌가 싶다. 칭기즈칸이나 유방 같은 사람도 인생 역전이긴 하지만 한신처럼 터무니없진 않았다. 한곳에 진드감치 충성을 다 한 것도 아니고, 집극랑하다가 뛰쳐 나오질 않나 치속도위하다가 도망가질 않나... 그러면서도 계속 자기가 최고라고 대장군을 해야 된다고 떠벌리고 다니는데, 누가 봐도 병신 취급을 면치 못할 처세였으나 하루 아침에 대장군을 맡게 되었으니 이런 사람이 고금을 통틀어 또 있을지 - 내가 아는 바로는 없다. 게다가 그렇게 급속 승진을 한 이후에 실제로 최고의 전략가임을 증명하였다. 어찌 보면 위나라 등애가 연상되기도 한다. 허풍선이에 모두가 무시했으나 까보니 천하의 기재였던 한신과 등애. 참, 한신이 파촉으로 가는 길에 탈영해서 약탈을 일삼다가 죽을 뻔했다는 건 처음 알았다. 또한 '다다익선' 고사가 통일 한참 이후에 있었던 일이란 것도 새로웠다.

 그밖에 괜찮은 경구들도 있었다. 이를 테면 "새는 나무를 가려 둥지를 틀고 어진 선비는 주인을 살펴 섬긴다"든가 "물이 너무 맑으면 사는 물고기가 없고 사람이 너무 따져 살피면 따르는 무리가 없다[水淸則無魚 人察則無徒]", "아무리 사나운 범이라도 머뭇거리고만 있으면 벌이나 전갈이 쏘는 것만 못하고, 아무리 준마라도 닫지 않으면 늙고 느린 말이 천천히 가는 것만 못하다. 孟賁과 같은 용사도 쓸데없는 의심으로 망설이기만 한다면 어린아이가 일을 내는 것보다 이룸이 적고, 순임금이나 우임금 같은 지혜가 있어도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으면 벙어리나 귀머거리가 손짓 발짓으로 말하는 것보다 못하다" 같은 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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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29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이대우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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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두 권 짜리 책이 1400쪽이 넘는 건 보다 처음봤다. 책 표지는 좀 지나치게 현대적인데, 얼핏 봐서는 제정 러시아의 분위기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때문에 표지만 보고 느낀 인상과 책 안의 활자를 보면서 느낀 인상은 상당히 괴리감이 있었다.

 까라마조프 家의 가장 표도르는 쓰레기 중의 쓰레기였다. 19세기까지의 - 특히 러시아의 - 고전소설들이 그렇듯 캐릭터들의 특징은 상당히 장황하게 묘사되고 있었으며, 표도르는 그 중에서도 가장 노골적인 악당이었다(도스또예프스끼의 이름도 표도르이다. 이건 뭔가 시사하는 바가 있다). 표도르의 세 아들은 모두 버려지다 시피 했고, 성장하면서 아버지의 도움은 거의 받지 못했다. 비평가들은 표도르가 드미뜨리와 이반에게 惡을 물려주었다고 하는데, 나는 그것도 그거지만 알렉세이에게는 조시마 장로라는 새아비가 있었다는 점을 주목하였다(물론 정식적인 아비는 아니다). 도스또예프스끼는 세 아들들의 성장과정에 대해 묘사하면서 알렉세이는 처음부터 성스럽고 정교적인 마인드를 타고 났던 것으로 표현했는데, 나는 그것보다는 '청소년기에 조시마라는 아버지와 다름없는 사람을 만나 성격이 변모하게 되었다' 식으로 갔으면 더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표도르는 악 중의 악인데, 그의 뱃속에서 나온 세 자식들 중 알렉세이만 타고난 성자 스타일이라는 설정은 개연성이 좀 떨어지는 것이다.
 내가 표도르를 두고 전형적인 악인이라는 듯 표현했지만 그렇다고 그가 아무 소설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하디 흔한 악당은 아니었다. 그는 '어릿광대'였으며 그 복잡한 성격은 소설을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비단 표도르 뿐만이 아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 아주 단순한 성격을, 그야말로 전형을 보여주는 인물은 조시마 한 명 뿐인 것 같다. 조시마는 그냥 무조건 잘난 사람이고, 선 중의 선이다. 그가 젊었을 적 악행을 저질렀던 사실 또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과거의 상처일 뿐이고, 그로 인해 성직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는 식의 뻔한 스토리다. 조시마가 죽은 후 시체 썩는 냄새를 두고 왈가왈부하는 사람들은 의혹에 빠진 악인들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톨스토이와 비견될 정도로 신앙이 깊은 도스또예프스끼에겐 배제할 수 없는 캐릭터였던 듯 하다. 실제로 도스또예프스끼가 하고 싶은 말은 '대심문관', '조시마 장로의 대화와 설교 중에서', 그리고 '검사의 논고'에 속하는 네 개의 장 속에 집중적으로 담겨 있다고 생각하는데, 즉 조시마는 '대화와 설교'를 통해 도스또예프스끼의 메신저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던 것이다.
 소설의 전체적인 내용이나 사건 전개 등은 굳이 늘어놓을 필요가 없을 것 같다. 확실한 것은 굉장히 장황한 문장과 중구난방식의 전개에도 불구하고 소설에 몰입하는 데에는 전혀 지장이 없더라는 사실이다. 명작은 명작이다.
 다만 스메르쟈꼬프의 혐의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석연치가 않았다. 무엇이 진실인지 나는 아직도 모르겠다. 범행장면이 끊겨 있는 것도 그렇고, 이반이 스메르쟈꼬프를 만나고 나서 곧장 50대 남자(환상의 인물, 망상증으로 인하여)와 만나는 것도 그렇고... 과연 스메르쟈꼬프도 환상이 아니었을까? 꿈이냐 생시냐? 거의 마지막 장인 '거짓이 순식간에 진실이 되다'도 그렇다. 까쩨리나가 돌발행동에 대해 후회를 하는 것이 - 거짓된 자가 진실되게 변했다는 것인지, 실제로는 거짓인 것을 진실로 믿게 되었다는 것인지 - 확실치가 않다. 무슨 莊周之夢 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론이 이미 나온 것으로 받아들이는 모양이던데 나는 내가 이상한 건지 아직도 자신있게 판단이 서질 않는다. 참 의문이다.

 고전은 거의 항상 만족감을 준다. 오랜 세월을 거쳐 검증된 작품들이기 때문에 표지만 예쁜 소설들과는 격이 다르다. 때문에 얻는 바도 많다.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을 완독한 사람은 마지막에 꼬마들이 외치는 "까라마조프 만세!"를 보고 갖은 생각이 다 들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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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발명과 에디슨 옥스퍼드 위대한 과학자 시리즈 6
진 아데어 지음, 장석봉 옮김 / 바다출판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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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렸을 때 머리가 크고 털이 많아 고민이었다. 부모님은 내 고민을 덜어주기 위해 "털이 많아야 여자들이 좋아한다", "우리 땐 일부러 가슴털 나려고 발모제 발랐다" 등등의 말씀을 해주셨다. 하지만 아무리 어린 마음에도 저 말씀들은 전혀 신빙성이 없어보였고 위로가 되지 않았다. 반면 큰 머리에 대한 긍정의 말씀 - "머리가 커야 머리가 좋다" - 은 나름 효과가 있어, 나는 상당히 오랫동안 속아 지냈다. 그 이유는 大頭英才論에 대한 그럴듯한 근거가 뒷받침이 되었기 때문이고, 그 대표적인 근거가 바로 '에디슨'이었다.
내 최초의 장래희망은 '과학자'였던 것 같다. 유치원 당시에 그랬다. 하지만 7살 때쯤 에디슨 전기를 읽은 후, 난 꿈을 발명가로 바꾸었다. 그만큼 나는 에디슨을 좋아했고, 에디슨은 나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어느덧 대두소년이 어른이 되는 동안, 에디슨은 기억 한 켠으로 물러나 있었다. 그래도 내가 에디슨을 완전히 잊은 것은 아니었다. 과거 어린 나에게 꿈과 희망(!)을 주었던 에디슨!! 그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고 싶었는데, 시중에 나와 있는 에디슨 전기의 대부분이 어린이용이었다. 검색에 검색을 거듭한 끝에 찾은 책이 바로 이 책 - 그나마 청소년용 - 이다.

에디슨의 부친은 솜씨 좋은 목수였다고 한다. 타고 난 손재주는 유전이었던 듯 하다. 에디슨은 7남매 중 막내였는데, 과연 태어났을 때부터 의사가 '뇌척수막염'을 의심했을 정도로 엄청난 대두였다. 또 그는 매우 심한 장난꾸러기였는데, 여섯 살 때 헛간에 불을 지른 적도 있다고 한다. 이유는 단지 무슨 일이 일어날 지 궁금해서였다고 하니, 부모님이 자주 매를 든 게 이해가 간다. 에디슨의 이 버릇은 어른이 되어도 고쳐지지가 않아서, 그가 전기충격 같은 장난질을 하도 많이 해서 직장동료들도 그를 피했다고 한다.
책에서 본 새로운 사실 중 하나는, 에디슨에게 청각장애가 생긴 원인이 차장에게 귀뺨 맞았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에디슨은 이 추측을 부정했다. ...어느 날, 플랫폼에서 신문을 팔고 있을 때였다. 열차가 떠나자 에디슨은 기차를 따라 달려갔고, 그를 발견한 차장 스티븐슨이 그의 귀를 잡고서 들어올렸다는 것이다. 그는 그때를 이렇게 회상한다.
"귀가 찢어지는 느낌을 받았고, 그때 이후로 소리가 잘 들리지 않기 시작했지요."
그러나 오히려 어릴 때부터 오랫 동안 앓아 온 성홍열이 진짜 원인일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또한 에디슨이 디트로이트의 도서관에서 모든 책을 다 읽었다는 일화가 허구였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내가 어렸을 때 위인전의 그 부분을 읽으며 대단히 감탄을 했고, 에디슨을 더욱 존경하게 되었었는데, 이제 와 속았다는 기분이 들었다.

「1905년에 그는 친구에게 "도서관의 모든 책을 읽고 싶어 했지만 아주 무미건조한 책 10여 권을 힘들게 읽고 난 후 포기해 버렸지"라고 고백했다.
이 책 중에는 근대 과학의 초석을 놓은 아이작 뉴턴의 『자연 철학의 수학적 원리』도 있었다. 수학을 싫어한 에디슨이 그 책에서 얻은 것이라고는 '결코 회복되지 못할 수학에 대한 환멸' 뿐이었다.」

에디슨은 장가를 두 번 갔는데, 두 번 다 연애할 때는 미친듯이 쫓아다니다가 결혼 후에는 냉담하게 굴었다. 아니, 냉담하다기 보단 겨를이 없었던 건지도 모른다. 에디슨은 여자보다 일을 더 사랑했다. 첫째 부인도 이혼한 건 아니고 사별한 거였다. 그런데 그 부인은 에디슨의 관심을 못받아서 스트레스 풀려고 과식을 해서 비만해 졌는데, 아무래도 그에 따른 합병증으로 죽은 것 같다. 그런 걸 보면 에디슨이 좀 너무했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이 수신제가를 해야 하는데 에디슨은 제가를 그냥 뛰어넘었다.

책은 일반적인 어린이용 위인전에 실리는 내용에 조금 더 살을 붙이고, 정치 경제적인 내용들을 추가한 형태였다. 그리고 책 중간중간 에디슨의 발명품과 관련해 그 원리와 비하인드 스토리 등을 따로 실어 놓고 있는데, 상당히 보기 좋았다. '에디슨은 필라멘트로 탄소를 사용했지만 현재의 전구는 텅스텐을 쓴다'든지 하는 이야기들로, 청소년들이 보면 많은 도움이 될 내용들이었다.
그밖에 어린이용에는 실을 수 없는 내용들 - 에디슨의 부정적인 모습에 대한 내용들도 꽤 많이 있었다. 에디슨은 경쟁사의 시스템을 깎아내리기 위해 동료와 함께 개, 고양이, 소, 말 등을 전기충격으로 죽이는 실험을 하기도 했으며, 경영자로서 사용인에 대한 의리도 별로 없었고 임금도 박하게 주었다고 한다. 이런 얘기들이 어린이 위인전에 실린다면 바로 컴플레인 들어올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남은 걸로는 에디슨의 부정적인 모습들에 대해 알게 된 것이 가장 컸다. 하지만 이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충격 때문에 머리에 좀 더 남았을 뿐이고, 기실 내 기억 속 영웅적인 에디슨의 모습을 지워 버릴 정도의 하자들은 아니었다. 에디슨 덕분에 20세기가 더 풍족해졌고, 각종 전기조명 및 음반산업이 번성할 수 있었던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현재 트랜스포머3를 볼 수 있는 것도 에디슨 덕분이다. 또한 GE社가 에디슨 작품이나 다름 없다는 사실 역시 주지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업적을 뛰어 넘어서, 나는 에디슨의 다음과 같은 삶의 태도가 너무나도 존경스럽다.

「엄청난 불길이 자신의 공장 건물들을 삼키는 것을 지켜보며, 그는 아들 찰스에게 말했다.
"어머니 어디 계시니? 어머니를 여기로 모셔 와라. 어머니 친구분들도. 이런 화재 장면은 절대로 다시는 구경하지 못하실 테니."
며칠 후 그는 건물을 다시 세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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