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대한민국에서 장남으로 살아가기
윤영무 지음 / 명진출판사 / 2004년 6월
평점 :
절판
책제목을 보고 구미가 당겼다. 장남을 어떻게 그려내고 있을까 무척 궁금했다. 서점에서 몇 장 넘겨보니 사고 싶은 책은 아니었다. 그래서 도서관에서 빌려보기로 마음먹고 도서관 싸이트에 들어가 검색을 해보니 집에서 가까운 도서관에는 비치가 되어 있지 않았고, 집에서 먼 도서관에는 한 권이 비치되어 있었지만 이미 대출중이라 거의 20일을 기다려 4시간만에 읽었다.
이 책을 관통하고 있는 전체적인 코드는 ‘나’라는 개인으로서의 주체적 자아가 아닌 ‘장남’이라는 객체적 자아다. 아직 멀긴 했지만 그래도 전보다는 집단, 조직의 개념이 점차 무너져가는 시대이고, 개인이 강조되는 시대다. 그런데, 저자는 장남정신 부재에서 현실을 거론한다. 두목/짱은 조폭사회에나 필요하다. 가정과 조직의 대명사, 회사는 개인과 개인이 만나는 장소일 뿐이므로 짱의 정신이 아닌 개인과 개인이 공존 가능한 공간이어야 한다.
저자의 머리에는 ‘여자’가 입력되어 있지 않은 것 같다. 이혼 여부를 부부 당사자가 머리를 맞대고 풀어가는 게 아닌 형제들의 의견을 수집해 형제들간의 이해득실을 따져 결정하는 것하며, 형제들한테 신경 쓰는 것처럼 처가에도 신경을 써야한다며 제시한 아내 몰래 아내의 부모님을 찾아가 용돈을 주면 아내가 나와 내 식구들에게 더 잘 할 거라는 얘기에서 인간에 대한 배신마저 들었다. 아내에게도 부모님이 있지만 아내의 부모를 두고 장남인 나한테 시집와서 내 부모를 모시는 거에 대한 감사 차원에서 처가를 챙기는 게 아니라 내가 아내의 부모한테 잘해야 아내가 나한테 잘할 거라는 계산이 담긴 보살핌이다.
결혼 할 때까지는 장남의 아내가 개입되지 않으니까 ‘장남’이라는 말에 시비를 걸 건덕지가 없다. 그런데, 결혼을 한 남자가 ‘장남’을 노래하는 순간 장남의 아내는 장남이 식구들에게 충성을 바치는 데 들러리 역할을 하는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여기서 ‘장남’이라는 말이 가지는 의미가 여성의 존재를 배제한 채 어떤 설득력을 가질까를 고민하게 된다. 결혼한 남자의 삶이 왜 ‘장남의 삶’으로만 그려져야 할까? 남편, 아빠, 사위의 삶도 있는데... 이 각각의 삶이 따로 국밥처럼 해체가능한 분리된 삶도 아닌데 말이다. ‘장녀’라는 말도 ‘장남’이라는 말만큼 무게를 가지며, ‘장녀의 삶’도 ‘장남의 삶’만큼 주목을 받는 삶이던가? 장남의 무게를 덜기위해 형제들이 장남의 부담을 나누어갖자는 얘기에도 ‘장남의 아내’, ‘장녀’는 고려되지 않았다.
부부간에 대화를 해서 문제를 해결할 생각을 하지 않고, 오히려 대화를 회피하고, 웬만하면 참고살자주의인 사람이 말하는 장남정신은 아슬아슬해보이기만 하다. 아내의 희생을 담보로 자신의 장남정신을 실현했으니 아내에 대한 얘기는 당연히 결혼, 이혼 얘기 정도밖에 할 얘기가 없지 않았을까... 저자는 부부, 가족간의 소통이 아닌 오로지 장남정신으로만 돌아가는 가정을 그려내고 있다. 저자가 형제들한테 신경을 쓴 것만큼 자신의 아내에게 신경을 쓴 부분은 보이지 않는다. 아내가 왜 편지를 써놓고 친정으로 갔었는지에 대한 고찰은 없고, 아내가 편지를 써놓고 친정으로 갔었다는 사실만 부각시킨다. 아내가 친정에서 돌아왔을 때의 어머니의 태도와 이혼 얘기가 나왔을 때 어머니가 취한 이중적 태도에 대한 고찰도 없다. 단지 상황 전달만이 있을 뿐.
이 책은 장남의 삶은 왜 달라야할까에 대한 원인을 찾고 처방을 내려 우리사회를 짓누르고 있는 장남신화를 깨뜨리자가 아니라 장남정신을 더 부각시키고 있다. 아직도 장남이라는 말에 무게를 실어 이 책을 읽고 장남이라는 말 앞에 숙연해질 사람들을 생각하니 씁쓸하다.
장남신화는 장남을 가르쳐 놓아야 줄줄이 딸린 동생들을 책임질 수 있었던 못먹고 살던 시대가 낳은 유산일지도 모른다. 20, 30대에게서도 이런 책이 나올 수 있었을까?
이 책을 읽고 내가 내린 결론은 ‘장남이라는 말은 사전에서 사라져야한다’다. 장남정신, 장남역할 이런 정신, 역할이 강조되는 삶은 주체적 삶을 마비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