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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와 함께 살 것인가 - 새로쓰는 가족이야기 ㅣ 또하나의 문화 17
또하나의문화 편집부 엮음 / 또하나의문화 / 2003년 11월
평점 :
대처 수상은 어린 시절, 엄마가 여성으로서의 삶 이외에는 가르쳐 준 게 없다는 데에 불만을 품고 성인이 되어 독립을 하고나서는 엄마를 평생 보지 않았다. 그런 대처 수상을 생각하며, 감히 가족을 어떻게 버릴 수 있냐는 내안의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나 역시 내용은 없고 관계만 남은 내 정서적 가족은 오래전에 포기했지만, 순전히 내 경제적 무능 때문에 혈연적 가족안에 안주하는 삶을 정의내리지 못하는 숙제를 안고 사는 사람으로서 이 책은 나에게 희망이 아니라 절망으로 다가왔다. 혼돈이었다. 가족의 정의를 어떻게 내리느냐는 점에서의 혼돈이 아니라 내 현실에서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사람으로서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하나 그런 혼돈. 50대분들의 글을 읽으며 “그래, 그들은 가진 사람들이니까.” 머리 속에서 이 한마디와 함께 낯설게 다가온 책이다. 막강한 이론도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이행할 수 없는 사람에겐 오히려 절망만 안겨 줄 뿐이다. 사실 내 한몸 건사하는 것도 버거운데 누구와 함께 살 것인가를 고민하는 건 기본적 생활마저 보장 안 된 사람에겐 남의 나라 얘기같기만하다. 그러나, 나의 실행할 수 있냐없냐의 고민은 어디까지나 내 개인의 문제이고, 이 책은 우리에게 가족의 정의를 다시금 생각해 보게 해주는 책이다.
‘혈연’이라는 이름으로만 묶기에는 가족의 범위가 너무나 다양해진 요즘이다. 이혼, 재혼, 입양, 맞벌이, 한부모 가족, 독신, 게이/레즈비언... 등의 형태가 늘어나고 있다. 결혼해서 자식이 있고 이혼하지 않은 가정만이 정상가족으로 취급받던 형태에서는 저런 다양한 형태의 삶은 주목받을 수 없었다. 사회적 인프라가 구축되어 있지 못하다 보니 모든 걸 가족 안에서 해결해야했고 그런 걸 의지하고 해결해 줄 수 있는 내가족을 끌어안다 보니 혈연이 중시되었다. 그러나 이제 먹고 살만큼 생활이 나아지면서 가족의 의미를 핏줄이 아닌 정서적, 철학적 의미에서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예전이라면, 부모라는 이유만으로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걸 감싸안고 운명처럼 떠안고 살아가야했지만 지금은 참는 게 미덕이 아닌 시대다. 자의식이 강한 사람일수록 내 가족을 객관적으로 보게 되고, 정서적, 철학적인 면에서 보게 된다. 그들은 소통이 없고, 핏줄이라는 껍데기만 남은 가족을 견뎌내지 못한다. 이 책에서 제시되고 있는 핏줄을 넘어선 새로운 가족의 출현(예정)은 이런 면에서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소통이라는 '내용'이 없고, 핏줄이라는 '관계'만 남은 가족은 더 이상 가족이 아니다. 가족=혈연집단이라는 가족 신화는 깨져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혈연에 의한 가족 정의에서 벗어나 다양한 각도에서 ‘가족’을 볼 수 있을만큼 자유로워졌으면 좋겠다. “내 가족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는 사람은 타인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한다.” 이제 이 말을 곱씹어 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