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 교육은 없다 - 왜 교육이 우리를 미치게 하는가?
이득재 지음 / 철수와영희 / 2008년 3월
평점 :
품절


학교는 교사가 학생을 대등한 인격체로 존중한다. 대화와 토론으로 수업이 진행된다. 학생의 의견이 존중된다. 선생은 학습동기를 부여해주는 존재다. 주인공이 학생이다. 양방향 교육이다. 학생들은 교사가 전달해주는 지식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창의력을 자극받는다.

서당은 훈장 혼자 떠든다. 주인공이 훈장이다. 훈장이 묻는 것만 대답한다. 스승을 위로 우러러봐야하는 존재로 그린다. 훈장은 훈계하고 지시하는 능동적 존재가 되지만, 학동들은 훈계든 지식이든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는 존재가 된다. 일방향 교육이다.

위에서 학생을 굽어보는 이땅의 학교는 모양은 학교일 지 모르나 그 학교를 굴려가는 기본정신은 ‘서당’이다. 아직도 서당처럼 교권침해 타령을 하고 있는 학교들을 봐라. 스승의 날은 있어도 학생의 날은 없는 걸 봐라. 오늘날의 학생들은 무늬만 학교인 서당(정확히 말하면 서당+군대)에 다니고 있는 것이다. 이땅의 학교들은 학교라는 그릇은 어떻게 끌어왔지만 그 그릇에 담을 내용물, 그 그릇에 담을 혼까지는 끌어오지 못한 거다. 오늘날 기독교가 무속신앙을 극복하지 못한 것처럼 학교도 서당을 극복하지 못한 거다. 논술의 등장만 봐도 그렇다. 에세이쓰기, 토론하기를 밥먹듯이 하는 수업에선 학생들이 글쓰기 교육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만, 선생은 독백하고 학생은 구겨넣는 교육환경에서 글이 나오나? 학생을 고문해도 이렇게 무모하게 고문을 한다. 논술이라는 형식만 가져와서 뭘 어쩌자는 건 지... 황새가 뱁새를 따라가듯 서당이 학교 흉내를 내려니 오죽 힘들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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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그마치 한달에 걸쳐 이 책을 읽었다. 교육에 관한 책이라면 열책 제치고 읽어대는 내가, 그것도 저자가 다름 아닌 이득재 씨였기에 얼른 구입한 책이었는데, 이렇게 오랜 시간을 끌며 읽었던 건 나의 게으름도 작용했겠지만 “끌어당김”, “이끌림”이 약했던 때문인 듯하다. 대학현실과 교수 사회를 고발한 내용은 생생한 현장고발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내용이었으나 나에겐 역시나였던 책이다.

교육에 관해 쏟아지는 책들을 읽다보니 하나의 코드를 발견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책이 현재 한국의 교육현실은 ‘이러이러하다’를 말하고 있었다. 아무도 한국의 교육은 ‘왜 이러한가?’는 말하지 않았다. ‘왜 이런가’를 진단과정이 한국의 교육이 거듭나는 과정일 건데도 말이다. 한국의 교육현실이 왜 이모양 이꼴인지를 알아야 교육개혁 방향이 보일 거 아닌가. 이건 한국사회를 진단하는 총체적인 시각이고, 어려운 일이라 아무도 엄두를 못내는 것 같다.

교육현실이 ‘왜 이런지’ 현실좌표를 읽어내는 눈이 없다보니까 교육개혁정책이 전체적인 판은 건드리지도 못하고, 허구헌 날 이것도 뜯어서 바꿔보고 저것도 뜯어서 바꿔보기만 할 뿐 우왕좌왕하기만 한다. 교육을 주무르는 사람들이 철학이 없고, 안목이 없으니 뜯어고치기는 열심히 뜯어고치는데 소득은 없고, 학생들만 죽어난다.

난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교육제도만 가지고는 이런 교육현실을 이해할 수 없다. ‘왜 이런가’를 알려면 어차피 제도를 움직이는 주체인 사람을 들여다봐야하는데, 왜 맨날 제도만 갖고 씨름하는지 모르겠다. 한국인의 정신세계를 건드리지 않고는 풀리지 않는 문제인데 말이다(한국의 심리학자들 정신분석가들은 도대체 뭐하는 지 모르겠다.). 그러자면, 한국인의 정신이 담긴 한국말도 들여다 보아야 하는데 말이다. 난 교육뿐 아니라 한국에 산재한 모든 사회문제들은 언어를 들여다보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디가서 이런 얘기 하면 정신 돈 사람으로 보긴 한다.

한국인을 움직이는 코드는 열등감(남들과 비교해 우위에 있어야 안전을 느끼는 우월감도 열등감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불안, 속물근성, 수치심... 이런 것들이다. 내 욕구, 내 생각, 자부심, 내 행복... 이런 게 아니다. 이 기저에는 ‘남의 눈’이 있다. 내 행동과 말은 내 의지대로, 내 욕구대로가 아니라 남들 눈을 의식해서 계산해서 움직이고 말한다. ‘하고 싶은 것’, ‘하고 싶은 말’보다 ‘해야만 하는 것’, ‘해야만 하는 말’을 하며 사는 어른들이 사는 나라가 한국이다. 이런 어른과 사는 아이가 내가 하고 싶은 공부, 내가 하고 싶은 일보다 (부모가, 선생이 하라니까)해야만 하는 공부, 해야만 하는 일을 하며 사는 사람이 되는 건 당연한 결과이다.

나를 보는 존재가 내가 아닌 타인이기에 ‘보는 나’가 아닌 ‘보이는 나’에 유난히 신경을 쓰고, ‘남들 보기에 무난난 삶’을 지향하다 보니 그 모양새를 유지하려면 ‘하고 싶은 것’, ‘하고 싶은 말’을 하며 살기 보다 ‘해야만 하는 것’, ‘해야만 하는 말’을 하며 살게 된다. 내가 하고 싶은 공부보다 부모가 원하는 공부, 출세에 도움이 되는 공부를 하는 사람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고, 행복하기만 하다면 그깟 서울대가 무슨 대수이겠는가. 서울대라는 간판을 달았다고 목에 힘주는 사람을 덜떨어진 사람으로 보지 못하고, 그 앞에서 기가 죽는 건 열등감, 속물근성의 발로일 뿐이다. 서울대에 가느냐 못 가느냐는 ‘부산물’, 혹은 ‘결과’의 문제인데도 그 자체를 ‘목표’로 삼는 사회다. 서울대가 없어져야 한다고 외쳐야할만큼 미운 학교라면 그 대학에 가지 않으면 된다. 그런데, 그걸 못한다. 스스로 서울대에 의미를 부여해놓고 자신을 들들 볶는다. 서울대가 미운가? 그럼 서울대를 우러러 보는 시각부터 접을 일이다. 독일에서 파시즘이 성공할 수 있었던 건 독일 국민이 파시즘을 원했기 때문이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서울대가 일류대라는 의미를 갖는 건 서울대를 우러러보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왜 서울대 간판에 압도되는 걸까? 관심의 촉수를 나에게 돌리지 않고, 남을 찍어누르는 데서 희열을 느끼고, 남을 우러러보거나 내려다 보는 데서, 남에게 인정받는 데서 존재 의의를 찾는 사회, ‘나’가 마비된 사회이기 때문이다.

회사에서도 그렇다. 딴짓하다가도 사장이든 부장이든 누군가 윗사람이 지켜보면 열심히 일하는 척 하지만, 지켜보는 사람이 없다는 걸 알면 행동이 달라진다. 누가 보느냐 안 보느냐에 따라 근무 자세가 달라진다. 나를 움직이는 사람이 내가 아닌 남이라는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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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생각 할 틈도 주지 않고, 오로지 책만 붙들고 있게 만드는 환경에서 서울대에 합격한다한들 그게 과연 제대로 된 합격이긴 한가? 공부에는 동기부여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할 머리와 가슴도 없고, 동기부여를 해 줄 능력도 없는 부모들, 선생들이니 자식들, 학생들이 서울대를 ‘수단, 도구’로 보지 못하고, ‘목표’로 보게 만드는 거 아닌가. 뭐 부모들, 선생들부터 목표로 바라보는 데 뭔 할 말이 있겠는가.

실적위주로 사람을 닦달하는 직장분위기는 오로지 성적 위주로 학생을 닦달하는 학교의 복사판이다. 동기부여를 할 줄 모르니 실적타령이 나오는 거다. 유한킴벌리라는 기업은 4일 근무, 4일 휴무제를 실시했더니 직원들 스스로 품질에 신경 쓰더란다. 며칠 쉬고 온 사이에 일에 대한 감각이 무뎌져 혹시 품질이 하락되지 않을까 본인들 스스로 걱정을 하더란다. 서울대를 가고 못 가고, 명문대를 가고 못 가는 걸 고민하는 것 자체도 웃기지만 거기에 왜 부모와 선생들이 극성인지 그게 더 코미디다. 자식/학생이 스스로 고민해야할 문제 아닌가. 부모 인생이 자식 인생이고, 자식 인생이 부모 인생인 부모인생과 자식인생이 따로 없는 사회, 우린 왜 이걸 고민하지 않을까? 부모가 자신들의 인생과 자식의 인생을 분리시키지 않는 건 아직 정신 상태가 유아기에 머물러 있다는 증거이다. 아기는 엄마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자식에 대한 집착을 자식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덮고, 자식 사랑(집착)에 눈멀었다 보니 국가가 등록금 부담을 부모한테 떠넘기고 있는데도 어떤 의문도 던지지 못한다. 하여튼 교육이고, 정치고, 경제고, 가정이고 간에 이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오늘의 현실은 부모고, 선생이고 어른이 어른이 되지 못해서 빚어지는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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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는 학교나 직장이나 잠시라도 사람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못하고, 끊임없이 바쁘게 정신없이 살면서 딴생각 못하게 만드는 식민지 근성으로 돌아간다. 퇴근 시간이 따로 있었나 싶을 정도로 직장에서 밤늦게까지 일하는 직장인들이 괜히 탄생하는 게 아니다. 학교에서 수업이 끝나도 집에 돌려보내지 않고 늦은 시간까지 야간자율학습이라는 이름으로 강제로 붙들고 있던 학교 현장의 연장일 뿐이다.

기업이 가정을 담보잡고 있는 오늘 한국의 현실은 입시라는 이름으로 학생의 인생을 착취하는 학교 현장과 다를 게 없다. 우리네 엄마들, 퇴근 시간이 지났는데도 남편을 가정에 돌려주지 않는 기업을 상대로 싸우기보다 오히려 내 남편 잘리지 않아야 된다는 불굴의 정신을 발휘해 찍소리 못하고 기업에 협조(?)적이다. 한국의 엄마들이 수업이 끝났는데 왜 아이를 붙들어 두냐고 항의하는 거 봤나? 뭐 학원 가야되는데 왜 하교 안 시키냐고 항의하는 엄마들은 많이 봤다. 부모나 선생이나 학생들이 집에 가서 알바해서 용돈을 벌건, 읽고 싶은 책을 읽건, 컴퓨터를 하건... 학생 개인개인이 하고 싶은 것들을 할 수 있는 개인의 시간까지 학교가 좀 먹고 있다는 사실에 별 개념이 없다. 도대체 학생의 인생을 어른이라는 이유로 착취할 수 있는 그 용기?가 어디에서 나오는 지 궁금해 죽겠다.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서라고? 이건 너무 식상하고 뻔한 답이다. 난 그저 “무지는 불안을 낳고, 불안은 자식을/학생을 들들 볶는다.” 머리에서 이 말만 뱅뱅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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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을 암기에서 토론으로 바꿔야 한다는 얘기는 교육을 얘기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한번씩 언급하지만 정작 이 토론을 가능하게 하려면 뭘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 왜 한국의 학교에서 토론이 안 되는지는 얘기하지 않는다. 왜? 그들도 왜 토론이 안 되는지 모르니까. 단지, 토론식 수업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당위’만 생각하니까. ‘해야만 하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은 다르다. 교육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하는 실수가 이 해야만 하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거 아닐까?

한국사회는 가정이고, 회사고, 학교고 토론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왜? 나이, 지위로 찍어누르면 되니까. 토론이란 나와 상대가 대등하다는 인식이 있어야 가능하다. 나보다 어린 사람, 나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 이런 의식이 작용하면 그 토론은 이미 토론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디 자식이 감히 부모한테...’, ‘어디 나이도 어린 게 감히 어른한테...’, ‘어디 감히 사장한테...’ 이런 의식이 뼛속 깊이 잠재되어 있으니 이게 안 된다. 일상은 이런데 학교에서 토론이 가능할 리 없다. 가정에서부터 나와 부모가 인간 대 인간으로서 대등한 존재라는 의식을 갖고 성장한다면 가정을 넘어선 공간에서도 그런 발상이 가능할 거다. 나는 한국 가정에서 이게 불가능한 이유를 두 가지로 본다. 첫째는 부모와 자식간에 경제 개념이 제대로 서 있지 않아서이고①, 둘째는 한국말이 비인간적인 언어이기 때문이다②.

① 내 용돈과 등록금이 부모한테서 나오는 이상 자식은 부모와 종속된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 물론, 용돈과 등록금을 부모가 지원하지만 자식과의 관계를 대등하게 이끌어가는 현명한 부모도 있겠다. 그러나 이 땅에 이런 부모가 얼마나 되겠는가. 자식의 정신적 독립을 고려하지 않는 부모라면 차라리 부모에게서 경제적 자립이라도 가능한 사회여야 이 종속된 부모자식관계를 벗고 주체적인 존재로 설 수 있지 않겠는가. 이때 토론이 되는 거다.

※ 한 인간의 인생에서 경제개념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인식하고 있다면 자식을/학생을 학교에/학원에 쳐박아둘까? 어렸을 때부터 스스로 용돈을 벌어서 자기 주관하에 예산을 짜고 시행해 보는 단계를 거치며 몸으로 체득하는 사람과 청춘을 학교에/학원에 담보잡힌 채 책으로 개념을 잡는 사람은 삶을 보는 눈이 분명 차이가 있게 마련이다.

② 가정, 직장, 학교, 그 외 여러 인간 관계에서 쏟아지는 언어들을 관찰해 보면 도대체 이게 대화인가 싶을 때가 많다. 지시형, 복종형, 통제형 언어만 난무하다 보니 인간 관계가 위에서 굽어보는 위치냐, 위로 굽히는 위치냐만 있을 뿐이다. 이런 인간관계에서 무슨 토론이 가능한가.

그런데, 우리는 왜 맨날 토론, 토론을 입에 달고 살까? 토론이 뭔지도 모르면서.


한국 역사와 언어를 보면 한국의 교육이 극복하지 못하는 문제들이 이해가 간다. 한국인이 취약한 부분이 ‘차이/다름’을 구분하지 못하고 ‘틀림’으로 간주해버리는 실수를 밥먹듯이 해도 전국민이 공식적으로 인정한듯 일상에서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고, ‘듣는 기술’이 영 꽝이라는 사실이다. 나와 다른 건 ‘틀린/옳지 못한’ 게 되어 배척해야 할 대상이 되어 버린다.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하려고 할 뿐 들으려고 하지 않는 자세 무섭더라. 이런 게 토론으로 훈련이 되어 있어야 하는데 대화와 토론이 생략된 서당식 학교 교육을 받은 우리는 교류와 소통하는 방법을 터득할 기회를 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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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가, 교수가 썩어 있고 부모가 썩어 있는데 거기서 학생이 제대로 된 교육을 받길 희망하는 건 그야말로 꿈도 야무진 일이다.

내가 보는 교육제도 개선은 이렇다. 학생의 눈높이를 담아 공부하기 싫은 사람은 안 해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 공부하고 싶은 사람이 대학가는 사회를 만드는 거 이 사실에서 출발해야 한다. 논술이 어떻고, 수행평가가 어떻고, 내신이 어떻고... 이런 얘기는 순 대학에 갈 학생들만 고려한 얘기 아닌가. 아, 잔인하다 정말. 그러면서 입시지옥이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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