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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아버지는 늘 내게 거대한 존재였고,

어머니는 늘 나를 품어주시는 넉넉한 존재였기 때문에

아버지가 나이 60을 넘기셨어도,

어머니가 병원을 찾는 횟수가 잦아져도

당신들께서 늙으셨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깨달음은 순간이다.

몇 해 전 추석이었을 것이다.

누이는 결혼해서 출가했고, 형은 유학가서 집에 올 수 없었다.

나 혼자 있어 어머니 명절 음식 준비를 돕고 있었다.

해표식용유를 두르고 명태전이며 호박전이며 굴전을 뒤집고 있는데

나보고 간을 보라신다.

좀 짜다.

하지만 당신께서는 그 간을 잘 모르셨다.

어머니의 음식이 더 이상 간이 맞지 않을 때 자식은 슬프다.

아버지와 등나무가지를 치는데

10여 분도 채 되지 않았는데 피곤해하신다.

생각해보라.

곧 칠순을 바라보는 노인네가 사다리에 올라 전정가위로 가지를 치고 있고

이십대 후반의 펄펄한 자식놈은 밑에서 사다리를 잡고 있는 꼬라지를.

나는 그렇게 철이 없었다.

어느 시인이

'병든 노모와 마주앉은 밥상은 제삿상 같다'고 했던 그 서늘함.

금세 피곤해하시는 아버지의 모습과 간을 못맞추시는 어머니의 모습

이를 보고서야 이 놈의 자식은 철이 듭니다.

괴로운 깨달음의 순간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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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4-01-15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의 일상을 퍼가도 되는건지....모르겠네요~ 그치만...다른 사람의 일상이...내 일상 같이 느껴졌다면...이리 퍼가는 일을 감행하더라두 눈감아 주시겠죠?

두 꼬마 2004-01-15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허허.
그리 유쾌한 기분으로 적은 것은 아닌데, '내 일상 같이 느껴졌다'니요.
하긴 누구나 겪게되는 기분이긴 합니다만, 보다 행복한 일들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들국화 1집을 처음 듣던 그 순간의 충격을 잊을 수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그때는 몰랐으니까.

그로부터 15년도 더 지나 전역후 복학하고 나서였다.

친구들과 술을 한 잔 걸치고 노래방엘 갔다.

친구들이 마지막 노래를 불렀다. '우리'

나는 몰라서 가만 있었지만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다.

그래서 물어물어 들국화 3집을 샀고, 1집과 2집도 샀다.

좋았다.

그의 새로운 노래를 애타게 기다릴 무렵, 새 앨범이 나왔다.

한상원과 만든 앨범.

좋기는 했지만, 기대만치는 아니었다. 뭔지 모를 아쉬움.

그리고 2002년 겨울에 새앨범이 나온다고 했다.

종종 들르는 음반가게와 종종 들르는 알라딘에는 소식이 없었고,

결국 앨범은 해를 넘겨 2003년 늦겨울(2003년 2월)에 나왔다.

'운명'

몇몇 노래는 그 이전부터 들었고, 또 어떤 노래는 다시 부른 노래다.

하지만, 나는, 적어도 나에겐, 최고의 앨범이라 생각한다.

공연장에서 늘 '그것만이 내 세상'이라며 절규했던 그는

그렇게 다시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의 목소리에 담아 세상에 던졌다.

'툭' 하고.

마치 '나는 이래. 나머진 너희가 알아서 들어.'라고 중얼거리듯.

그가 처음 내뱉은 말은 '사람들은...'이다.

그 어눌한, 자연스럽지 못한, 부드럽지도 않은, 남들의 이해를 바라지 않는.

그리하여 저 깊은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그 목소리.

물론, 공연장에서 그를 보면 예전같지 않은 체력을 힘들어하는 내색이 많다.

그럴땐 안타깝기도 하지만, 그의 정신은 예전처럼 세상에 한 치 굽힘이 없다.

내가 그를 좋아하는 이유다. 내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까닭에 그는 절실하다. 그래서 노래는 절실한 절규다.

노래하는 게 좋아서, 노래하지 못하면 죽을 것 같이 부른다.

그래서 듣는 나는 때로는 힘이 솟고, 또 때로는 힘들기도 하다.

전인권.

전인권.

전인권.

나는 그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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