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포스터 영적훈련과 성장 -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
리처드 포스터 지음, 권달천.황을호 옮김 / 생명의말씀사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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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에게 훈련은 생명과도 같습니다. 훈련 중에 흘리는 땀은 전쟁 중에 흘리는 피와 같습니다. 훈련의 목표가 분명합니다. 생존이며 승리입니다. 마찬가지로 영적 군사인 우리들이 감당할 훈련의 목표도 분명합니다. 진정한 회복입니다.
영적 군사훈련의 목표가 생존과 승리가 아니고 회복인 이유는 간단합니다. 잃어버렸던 우리들의 성품을 회복하기 위한 훈련이기 때문입니다.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훈련이 아니라 창조 당시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인데 죄로 말미암아 왜곡되고 변질되고 타락해서 잃어버렸기 때문에 다시 되찾아야할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영어로 된 이 책의 제목은 'Celebration of Discipline: The Path to Spiritual Growth'입니다. 영적 성장을 위한 지름길로서 훈련은 다분히 축제입니다. 왜냐하면 잃어버린 것에 대한 철저한 회복이기 때문입니다.

'훈련은 어렵다'는 편견은 늘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영적 훈련은 그 자체가 긴장 속의 화려한 기쁨입니다. "학습은 기쁨을 낳는다. 초보자들이 늘 그러하듯이 우리도 시초에는 학습이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숙달되면 될수록 우리의 기쁨은 늘어난다"(133쪽)

이처럼 저자 리차드 포스터는 훈련의 어려움에 초점을 맞추지 아니하고 훈련을 통해 성취될 삶의 변화를 더 강조하였습니다.

"종이 되기를 선택할 때에는 결정권을 포기하게 된다. 여기에 큰 자유가 있다."(214쪽)
"사도 바울은 그가 그리스도의 노예가 된 것을 자주 자랑했다. 바울은 '사랑의 노예'에 대한 1세기의 개념을 많이 사용했다. 사랑의 노예는 사랑하는 마음에서 노예로 계속 머물기를 선택한 노예이다."(215쪽)

저자는 영적 훈련을 '자유에 들어가는 문'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자유는 바울이 언급한 것처럼 스스로 종이 되는 자유입니다. 그리스도의 종이 될 때, 성령의 인도하심에 스스로 종이 될 때 누리는 자유 곧 회복의 기쁨입니다. 그동안 빌려입은 모든 것들은 벗어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을 때 회복의 기쁨은 세상을 향하여 선포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십시오. 죄의 본성이 바라는 정욕을 만족시키는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롬 13:14) 예수로 옷을 입을 때 죄로부터 자유된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입니다(갈 3:27).

회복된 자신을 상상해 보십시오. 창조의 원형인 아들로서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누리는 기쁨을 상상해 보십시오. 우리는 집으로 돌아가는 탕자와 같습니다. 마음대로 사는 것이 너무나 익숙해서 마치 원래 나의 것인양 살았던 자들입니다. 그러나 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제 선택만이 남았습니다. 훈련은 회복의 지름길입니다. 내 마음대로 살았던 삶에서 일어나 주님의 발자국에 조심스럽게 그러나 환희에 가득한 얼굴로 나의 발을 얹을 차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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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속의 그리스도
이근호 지음 / 대장간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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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속의 그리스도'를 쓴 이근호 목사님은 은혜를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픔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이 덮친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성도의 위대성은 자신의 완벽함이 아니라 그 안에 고통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그분의 자비와 사랑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예수님의 관점에서 잠언을 관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잠언에서 보여주는 지혜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철저한 자기비움이 지혜입니다. 그러나 '자기비움'은 자발적인 행위라기 보다는 말씀과 지혜의 책망에 의한 죄성의 폭로입니다. 그러니까 지혜는 우리를 책망하여 스스로 지혜이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지혜를 찾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죽음을 통하여 이 지혜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죽음보다 강한 사랑으로 우리를 품으셔서 주신 것이 지혜입니다. 그러므로 참지혜는 피가 흐릅니다. 여기에서 저자는 색다른 의견을 제시합니다. 신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피'주제가 구약에서는 '가난'이라는 주제로 나타난다고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 경외'를 실패하는 이유는 가난을 겁내는데 있다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나를 가난하게 만드는 예수를 나는 믿을 수 있는가?'
저자가 던지는 화두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라는 측면에서 보면 두 가지 주제가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스바냐에서 '남은 자'는 심령이 가난한 자라기 보다는 경제적으로 박해받는 가난한 자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피는 전인적인 구원이기 때문에 '가난'이라는 부분에 국한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저자가 이 부분에서 좀더 세밀한 언급이 필요하다고 여겨집니다.
저자는 잠언을 예수님과 동행의 구조로 보았기 때문에 더욱 가난의 논리가 비약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내가 인생의 주인공에서 내려와 주님의 구조 속에 들어가 함께하는 것이 잠언이라면 거기에는 가난한 자만이 갈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남편이란 결혼했다고 남편이 아니라 지혜와 말씀이 남편을 그때그때 만들어 낸다는 저자의 표현이 너무 멋있습니다. 이웃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과 지혜가 만든 구조 속에서 보면 '사랑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여건에 있는 사람이 이웃'입니다. 말씀이 이웃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말씀의 구조 속에서 구원은 역설입니다. 구원되고자 하는 자는 구원받지 못하고, 구원될 자격이 없음을 자인하는 자에게는 오히려 구원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말씀과 지혜는 권리를 포기하는 자에게 주시는 권리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었던 것이 모두 허상임을 고백할 때 진정한 믿음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어쩌면 순서는 다를 수 있습니다. 진정한 하나님을 만남으로 우리의 허상들을 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십자가'는 철저한 포기이면서 동시에 철저한 죽음입니다. 진정한 기도는 포기입니다. 가난한 자도 부한 자도 모두 자기포기를 통해, 즉 십자가를 통해 진정한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인간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은 무엇일까요?
저자는 하나님과 교제하며 사는 것이라고 거침없이 말합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이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될 때 진정한 행복이 있습니다. 행복을 쫓다보면 불행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 앞에서 늘 하나님의 질점(質點)으로 살아야 한다는 저자의 지적은 멋진 피날레입니다.

'잠언 속의 그리스도'는 주님의 지혜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어리석은 자들인가를 고백하게 합니다. 정말 지혜의 배고픔을 느끼는 자들은 복있는 자들입니다. 우리들이 폭식하는 이유는 어쩌면 지혜의 허기를 식탐으로 알고 음식으로 채우려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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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대사 - 성령을 따라 담대하게 사는 삶 하나님의 대사 1
김하중 / 규장(규장문화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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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종 이런 종류의 책을 읽을 때면 '특별한 은사'를 특별한 분에게 주셨구나라는 생각으로 자신을 위로하며 도망치는 분들을 보곤 합니다. 저 자신도 그런 경험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출판된 책의 제목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은사가 아닙니다. 이 책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대한 일종의 실천편이나 워크북(workbook)처럼 느껴집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몇 가지 놀란 점들이 있었습니다. 우선 저자의 꼼꼼한 기록입니다. 전에 이보다 더 충격적인 책들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등장인물이 무명이거나 가명 혹은 막연한 기억에 의존한 기록들로 가득했습니다. 아마도 저자는 등장인물보다는 신비한 체험에 더 집중하며 조명하는 듯했습니다. 그렇지만 사실관계 여부나 추후 일어나는 일들에 관해서는 함구함으로 감동을 감소시켰습니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지나칠 정도로 자세하게 등장인물의 이름과 지금 맡고 있는 직위 등을 섬세하게 적어 놓았습니다. 따라서 저자의 단순한 느낌에 의존하지 않았음을 드러냄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둘째, 저자의 신앙 성숙과 성장속도입니다. 신앙의 햇수보다는 하나님을 향한 마음과 자세가 훨씬 중요함을 새삼 느꼈습니다. 형들보다 어린 다윗을 부르신 하나님이 오늘도 햇수가 아닌 신앙의 태도를 보고 계십니다. 무명의 기도용사들이 곳곳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음을 통해 하나님의 일하심을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책을 통해 그들이 유명인이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여전히 나라 곳곳에서 무명의 기도용사들의 무릎을 보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면 힘이 솟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기독교인들은 없습니다. 다만 올바르게 구하는 기도를 드리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짧은 바른 기도가 오랜 시간 붙들고 있는 그릇된 기도보다 더 중요합니다. 특별히 최근 해외강의에서 들려주신 성령의 음성은 너무나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기도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말의 선포를 통하여 일하고 계셨습니다.  

 셋째, 자신보다는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구하는 저자의 마음입니다. 기도는 자신을 먼저 내려놓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들어도 선포할 수 없고 들어도 순종할 수 없습니다. 이론적인 기도가 아니라 성령 안에서 기도가 무엇인지를 삶 속에서 보여준 책입니다.  

우리는 너무 이론적인 기도에 매달려 온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오늘도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말하지만 정작 들으려고 하지 않았고 그것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비정상적인 것을 정상처럼 생각했던 것입니다. 지식의 오류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성령님께서는 새로운 준비를 하고 계셨습니다. 바로 '감동'입니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벧후 1:21). 성령이 주시는 감동을 느껴보십시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베푸시는 성령의 감동이 오늘도 우리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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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리앗 세상에서 다윗으로 살기
오대식 지음 / 생명의말씀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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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에 부제처럼 쓰여진 말이 있습니다. '세상을 따를 것인가? 하나님을 좇을 것인가?' 일반적으로 앞에 '하나님'을 두고 질문하는데 저자는 세상을 먼저 두고 묻습니다. 마치 우리의 정답을 비웃기라도 말입니다. 정답은 뻔한데 막상 답을 쓰기에는 양심이 찔리는 문제가 사실 제일 어려운 문제입니다.

 전에 학교에서 '도덕'을 가르치는 아버지학교 형제님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저에게 고민을 털어놓으셨는데... 고민인즉, '시험지 채점을 하다보면 문제의 정답을 100%맞춘 백점짜리 학생과  60점 맞은 학생 중에 후자가 더 헌신적이고 희생적으로 남을 배려하고 성실할 때 도대체 점수를 어떻게 주어야하는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점수와 삶은 전혀 무관할까요. 아는 것하고 실재로 그렇게 사는 것하고는 차이가 많습니다. 성경은 정답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정답을 향한 우리의 자세와 태도 그리고 마음을 요구합니다. 성경박사가 신앙생활의 박사는 아닙니다. 어쩌면 너무 많이 알기 때문에 법을 교묘히 피하가는 법학자처럼 우리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저자는 이러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경건의 모양'이라는 신앙의 가면들을 적나라하게 파헤치고 있습니다. '비행기 조종사가 낙하산 생각하듯 한다'라는 말이 던지는 단도에 아직도 가슴이 저밉니다. 비행기 조종사는 위기의 순간에 낙하산이 자신을 죽음에서 구해 줄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또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한 번도 그 낙하산을 사용하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 우리들의 무기력한 믿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자는 우리가 잘못알고 사용하는 용어들에 대해서도 자세한 설명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경건이라는 말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한자적 의미보다는 원어적 의미로 설명하면서 경건의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과 사람 그리고 저신 앞에서 진실'임을 밝힙니다. 이런 우리들의 교회는 어느 덧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칼과 투구를 찾느라 헤매이며 나약해져서 세상사람들에게 조차 밟히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상대적으로 우리 시대에 바알과 사주팔자는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러한 무기력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이 책을 통하여 동시에 회개와 회복을 외칩니다. 어디가 아픈지를 알아야 치료가 가능합니다. 정확한 진단은 완전한 치료를 위해서 필수적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자의 검맥은 탁월합니다.  

물론 아쉬운 부분도 있습니다. 문제를 지적하다 보니 교회의 건강한 부분들은 간과된 측면이 있습니다. 어쩌면 아직 건강하기에 수술도 가능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몸 안의 병균도 중요하지만 이겨낼 수 있는 몸의 건강은 더 중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우리의 영적 건강체크에 매우 유용합니다.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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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두막
윌리엄 폴 영 지음, 한은경 옮김 / 세계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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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두막(The Shack) / 윌리엄 폴 영 / 세계사

매켄지(Mackenzie), 오랜만이군요. 보고 싶었어요.

 다음 주말에 오두막에 갈 예정이니까 같이 있고 싶으면

 찾아와요.” – 파파

 긴박한 사건이 이 소설의 핵심은 아니다. 단지 정교한 대화와 예상을 뛰어넘는 등장인물(?)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한다. 어쩌면 이 부분이 이 소설의 매력이기도 하다. 
소설 오두막(The Shack)에서 하나님은 기다리시는 하나님으로 등장한다. 불행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중에도 미리 막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침묵하시는 하나님은 아이를 괴한으로부터 지켜주지 못한 무기력한 아버지와 다를 것이 없다.

오두막은 외로움의 장소이다. 혼자 있기 때문에 외로운 것이 아니라 같이 있으되 같이 있어서는 안 되는 관계가 주는 잔인함 때문이다. 함께 있어서는 안 되는 관계가 있다는 것이 우리를 더욱 외롭게 한다
 

함께 있기에는 너무나 잔인한 그 곳 오두막’. 그 곳에서 하나님은 매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또 다시 함께해서는 안 되는 관계가 연출된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복수심으로 가득한 한 사람을 초대한다. 그의 저주와 분노가 폭발한 그 곳에서 하나님은 이제 침묵을 깨고 말씀하신다. 책 안에만 들어 있는 하나님이 아니었다

소설 속의 하나님은 오늘도 여전히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다. 그것도 강요나 협박을 통해 답을 얻어내는 하나님이 아니라 죄 많은 인간이 그 말씀의 의미를 깊이 깨닫게 하기 위해 그리고 진정한 의미에서 수용할 때까지 끊임없는 인내로 설득하여 순종하게 하시는 하나님이다. 그야말로 설복의(說服) 하나님이다

신학적으로도 어려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하여 고민어린 저자의 날카로운 영성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관계에 대한 깊은 통찰도 돋보이는 장면이었다.
그러나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내가 여자로 나타나서 당신에게 파파라고 부르라고 제안한 건 단순히 상징들을 뒤섞이게 하고, 또 당신이 종교적인 조건화에 쉽게 빠지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죠

위의 글은 하나님을 남성으로 생각하는 일반적인 견해에 대해 성()을 초월한 하나님을 저자는 말하고 싶은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성()을 초월하신 하나님을 다분히 인간화시킨 것이다

또한 사람들이 죄를 지었다고 해서 내가 벌줄 필요는 없어요. 죄는 그 자체가 벌이기 때문에 안에서부터 당신을 집어삼키죠. 내 목적은 죄를 벌주는 것이 아니에요. 오히려 그걸 치유하는 것이 나의 기쁨이죠라는 저자의 글은 읽는 이로 하여금 안도와 함께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외면하도록 만든다. 사랑과 공의는 하나님의 분명한 속성이다. 인간은 사랑하시지만 죄를 미워하여 반드시 벌하셔야만 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 그 절박함이 이 소설에는 많이 무뎌져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사랑받도록 창조되었어요. 그러니 당신이 사랑받지 않는 것처럼 산다면 그게 바로 당신 삶을 제한하는 것이라며 하나님의 사랑을 감격적으로 표현하였다.

저자가 말하는 교회는 너무도 아름답다. 저자의 말처럼 교회란 주님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의 살아 숨 쉬는 공동체이지 어떤 건물이나 프로그램이 아니다.
하나님은 동사다. 그러나 그 하나님은 우리의 일상을 통하여 드러내어 지지를 원하신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침묵하시는 이유이다

이 소설은 침묵 속에 분명히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전하고 있다. 오늘도 나의 작은 삶을 통해 놀랍도록 위대한 하나님을 드러내는 영광을 주심에 감사의 날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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