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스, 30년 만의 휴가
앨리스 스타인바흐 지음, 공경희 옮김 / 21세기북스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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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물처럼 흘러가는 것은 어제의 일상과 내일의 삶이 정확히 같은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매일매일의 나는 보이지 않을 만큼 조금씩 변해가지만, 앞만 보고 가는 경우 흔히 그렇듯 시간이 지나고 보면 예전에 생각했던 자신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시 하루를 살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일탈을 꿈꾸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나를 내가 되게 하는 모든 것으로 부터의 잠깐의 탈출, 여행을 감행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일탈을 꿈꾸지 않을까. 하지만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여행정보책자 식의 여행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발 디딜 틈 없는 인파와 앞 사람의 뒷모습 뿐이다. 물론 새로운 것을 가능한 한 많이 보고 일상으로 복귀하는 것이 여행의 한 가지 목적일 수 있다. 문제는 여행의 피로가 사색을 앞설 수 있다는 것이다. 지친 몸을 이끌고 겨우 호텔방으로 돌아와서 씻지도 못하고 잠에 드는 여행이라면, 집으로 돌아온 내가 공항으로 떠나기 전의 나와 다를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다. 앨리스의 여행이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앨리스는 스스로 달라지는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욕심내지 않기, 계획이 모험의 즐거움을 무시하지 않기. 앨리스의 여행은 느슨하다. 대신에 앨리스의 여행이 갖는 틈을 매우는 것은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과, 과거의 자신에 대한 회고, 모험이 주는 유쾌함이다. 앨리스의 여행을 아름답게 만드는 부분은 근사한 건물들이 아니라, 여행의 틈이 여행지와 어우러져 내는 근사한 향기이다. 그녀의 책이 다른 여행책과 다른 것은 명소에 대한 이야기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대신에 책의 대부분은 그 안에서 만난 사람과, 자신에 대한 생각, 우연히 만난 작은 광장과 풍경으로 채워져 있다. 앨리스의 휴가는 일상으로부터의 휴가이기도 하지만 자신으로부터의 휴가일 지도 모르겠다. 결국은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는 과정이기도 했지만.  

앨리스의 여행법은 실제로도 매력적이다. 집으로 돌아와 여행지를 추억할 때, 가이드의 얼굴과 쇼핑센터가 아니라 역의 계단에 앉아 손바닥에 쓴 통하지도 않는 한자로 이런저런 말도안되는 이야기를 나눈 중국인 청소부와 기차간에 앉아 창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먹은 석류를 기억하는 것은 여행지에서 구태여 한가하게 보낸 시간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 된다. 다른 사람들의 삶을 보고, 그것을 이해하고자 고민하는 것, 그 안에서 자신을 생각하는 것. 내가 꿈꾸는 삶의 방향을 생각하고 고민하다가 돌아오면 지금의 내가 여행을 떠나기 전의 나와 미묘하지만 차이를 갖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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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자와 죽은 자 1
제라르 모르디야 지음, 정혜용 옮김 / 현대문학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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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을 사고 팔면서 더이상 그 안에 있는 노동자들의 생산력이 목적이 아니라 기업이 갖고 있는 기술력이나 차액이 목적이 되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국가간의 장벽이 높아 생산한 물건을 모두 자국 내에서 팔아치워야 했던 시대에는 드물었던 일이지만, 국가 간 자본의 이동이 용이해지고 "투자"라는 어휘의 의미가 생산을 통한 이윤이라기 보다는 금융 이윤 쪽을 의미하게 된 이후에는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몇 년간 이런 일들이 많아졌다. 언론들은 그들의 "투자"행위로 인한 국가적 손실에만 주목했지만, 오히려 더 주의깊게 바라보아야 하는 부분은 그들이 투자의 대상으로 삼은 대상이 수백, 수천명의 사람들의 삶의 기반이 되는 기업, 혹은 공장이라는데 있어야 하지 않나 싶다. 신문에서 이야기하는 수백 수천억의 수치에 의해 호도되는 것은 그들의 자유로운 경제행위가 상당부분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기반을 갉아먹는 것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각자의 의지와 생활, 감정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구조조정, 매각, 매입은 적색과 청색으로 표시된 장부 위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눈이 되는 중앙 언론이 상위 1%의 이익을 위한 시각으로 우리의 생각을 조형하고 있는 지금은 이미 우리 자신이 인간이 추상화되고 반대로 수치가 구체화된 이미지로 살아남는 세계를 강화해 나가고 있다. 예를 들어 파업이 일어난다고 해도 우리가 알 수 있는 정보의 대부분은 그들이 어떻게 불법적인 파업을 했고, 이것이 민생에 끼친 다소 과장된 영향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들이 어째서 거리로 나왔는지, 그들이 어째서 회사의 로비를 점거했는지, 그들이 어째서 폭력적인 행동을 취하게 되었는지, 아무도 우리에게 이야기해주지 않고 자신의 일이 아닌 이상 우리의 누구도 그에 대해 궁금해 하지 않는 것이다. 때문에 소설의 인물들은 오히려 아이러니 하다. 공장을 살리고자 하는 것은 오히려 노동자들 쪽이다. 그들은 폭력적인 파괴자가 아니라 공장과 기계를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그것이 그들의 삶의 기반이며, 생활 그 자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 경찰, 기업 등은 모두 다르게 반응한다. 통념적으로 공장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공장을 공중분해 시키고자 하고, 역시 통념 상 파괴자에 가까움 파업 세력이 공장을 지켜나가고자 하는 모습은 아주 아이러니 하면서도 동시에 굉장히 현실적이다. 추상적으로 인지되어 온 세상의 모습을 현실적으로 돌려놓는 이런 측면이 900페이지에 이르는 긴 소설의 긴장감을 팽팽하게 유지한다. 적어도 신자유주의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그리는 것에 있어서는 새로운 시대의 고전이 될 수 있을 만큼 생생하다. 역동적이고 치열하지만 동시에 나약한 그들의 모습이 조만간의 우리에게서도 보일 것 같아 두려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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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나의 도시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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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한 살의 독신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서른 한 살+ 독신+ 여성 이라는 한국 사회의 3대 질환을 다 갖고 있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하나 더하기 하나 더하기 하나가 애초에 셋이 아니라 다섯이라고 천연덕 스럽게 이야기하는 것 처럼, 세 가지 조건이 같이 있으면 당사자는 당장에 꽤 심각한 병리적 상황에 놓이고 만다.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인구센서스의 위험군(서른한살독신여성군)으로 분류되어 버린 여성들은 그래서 더욱 힘들어진다. 젊음을 강요하고(여성이라는 이유로) 그래서 결혼을 요구하고(여성이라는 이유로) 그래서 결혼과 동반된 사회적 은퇴를 요구하는(여성이라는 이유로) 사회라는 앞뒤 꽉 막힌 고용주에게 대항하면서 살기에는 서른 한 살의 정치력은 약하고, 경제력은 어정쩡하다. 직장이 있다면 결국은 두 눈 멀고, 두 귀 막고, 입조차 막은 채로 평범한 서른 한 살의 직장인 보다 더 비굴하게 사는 수 밖에 없다. 더욱 무서운 것은 주변에서 서른 한 살의 독신여성을 나병환자인 양 호들갑을 떨며 취급하는 것으로 인해 당사자 자신도 스스로를 위험상태로 분류한다는 것이다. 아직 음식이 있을 때 먹을 수 있는 것을 먹자 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젊은 시절의 자신과는 무관한 마지막 타협을 시도할 수 밖에 없고 딜이 성공한다면 천천히 여성을 잃고 "아줌마"가 되어갈것이다. 장님귀머거리벙어리인 비전문 정규직. 하지만 우리가 천덕꾸러기 취급하는 그들은 서른 하나라는 나이로 인해 너무나 많은 것이 설명되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하지만, 동시에 캐리 브레드쇼의 구두 상자 속에 숨겨진 카드 영수증도 생각할 수 있다. 적절히 타락하고 현실감을 갖기 시작하지만, 십 년 전의 젊음을 망각하지 않은 경계인으로서 그들은 꽤 좋은 소설적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왜곡된 방식으로 이야기되거나 혹은 무시되어 왔다는 것은 조금은 이상한 일이다.

 

정이현씨의 소설의 강점은 여기에 있다. 스토리도, 문장도 "특별히"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음에도 사람들을 사로잡는 것은 서른 한 살의 미혼 직장여성을 그려내는 리얼함이다. 사실상 도서 시장을 주도한다고 보아도 좋은 2-30대 여성의 구매력에도 불구하고 출판계는 그들의 현실은 상당히 간과해오지 않았나 싶다. 잡지는 그들에게 늘씬하고 쿨한 소비를 강요했고, 소설은 그들에게 동화를 선사했지만, 여전히 서른의 그녀들은 소비될 뿐 주체의 자리에 서지는 못했다. 하지만 정이현씨는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의 중간에 놓인 그들의 욕망을 소소한 일상 속에서 적절히 잡아내고 있다. 온통 욕망으로 가득찬 볼거리로 전락한 여성도 아니고, 공주가 되는 꿈에 사로잡힌 여성도 아닌, 월요일이면 자전이 멈추기를 바라며 출근시간대의 만원 지하철에서 불편한 자세로 까만 창 밖을 바라보며 녹초가 되는 세 명의 여성은 이 소설의 주된 독자층 자신의 모습이다. 이 소설이  몇 없는 한국현대문학의 베스트셀러 중 하나라는 것은 2006년을 살아가는 여성이 얼마나 자신의 이야기를 갈망하는가를 이야기하는 증거라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서른 한 살의 여성은 사실 패배자 라기 보다는 경계인으로 정의되어야 옳다. 경제활동인구에 편입된다는 꿈에 사로잡힌 사회초년생에서 벗어나 본격가치생산계층의 가장 낮은 곳에 임하는 사람들. 사실상 군대나 다름없는, 민주주의는 개뿔도 없는 타락한 세상을 자신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으나 동시에 그곳에서 본격적으로 살아가기를 소망하는 사람들. 그들은 반드시 가치를 생산해야만 하는 사회에 수혈되는 젊은 피 여야만 한다. 하지만 세상은 그들을 어떻게 정의하는가. 소설 속의 누군가처럼 파릇파릇하지 못하고 칙칙한 나이든 "여자"로 정의되거나  도매금으로 넘겨야 할 "여동생"으로 취급된다. 같이 아득바득 살고자 하는데도 단순히 여성이라는 이유 만으로 패배자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더군다나 자신의 노력으로 쌓아가는 커리어와는 상관이, 오로지 자연의 노화과정에 의해 불가항력으로 패배할 수 밖에 없다. 동안이니, 나이보다 젊으니 하는 말로도 그들의 패배는 가려지지 않는다. 아직도 세상의 절반은 유전자의 아주 일부가 다르다는 이유로 전혀 다른 인종 취급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냥 소설일 뿐인 이 소설은 그냥 소설이지만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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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어 사전
남경태 지음 / 들녘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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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를 보자. 일단 사전인 만큼 목차의 각 항목은 가나다 순으로 나열 된 단어 만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각의 단어는 철학과 사회과학, 경제학 심지어는 자연과학 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에 걸쳐 있다. 하지만 각 단어의 간격이 너무 멀다. "노동"항목과 "달력"항목 사이에 어떠한 중요한 어휘도 없다고 생각하기는 힘들다. 분야별로 어휘의 목록이 충실하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목차만 보아도 그렇다. 사전은 사전이되 사전답지 않은 사전이다.
 
저자는 서론에서 이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 책의 원제는 "내 멋대로 순전히 개인적인 관점에서 쓴 개념어 사전" 이다. 때문에 그는 항목의 구성에 있어서, 그리고 분포 분야에 있어서 기존의 사전의 덕목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냥 자신이 설명하고 싶은, 혹은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개념들을 설명할 뿐이다. 이런 방식은 단순히 항목을 구성하는 것을 넘어 각 개념을 설명하는 방법에 까지 적용된다. 저자는 개념을 "사전적으로 설명하기 보다는 그것의 이미지를 드러내고자" 했다고 이야기한다. 이는 인문학의 개념들은 각각이 외로 떨어져 정의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각 개념들은 연쇄적이다. 한 개념이라고 해도 "전방위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면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이미지 적인 설명은 유용하다. 더군다나 일상어의 사용에서와는 달리 학문적인 어휘의 사용에 있어서는 각 화자 사이의 미묘한 의미의 차이가 전체 맥락에 있어 상당한 차이를 일으킬 수 있다. 같은 "자유"라는 어휘를 쓰는데 있어서도 경제학자와 정치학자는 상당히 다른 의미에서 어휘를 사용하는데다가 심지어 같은 정치학자들이라고 해도 각각의 사이에는 커다란/혹은 사소한 의미의 차이가 있다. 때문에 개념을 인문학적으로 설명하는데 있어 사전적 정의 방식을 사용하기란 힘들다. 그렇다고 현재까지 사용된 모든 용례를 설명하는 것이 이런 문제의 해결이 되는 것도 아니다. 개념은 지금도 사용되고 있으며,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 있어서도 그의 이미지 설명 방식은 어느 정도 유용하다. 실제로 본문을 보아도 각 항목의 설명은 사전이라기 보다는 개념의 에세이에 가깝다. 개념의 역사, 대략의 의미, 관련 사실 등이 스케치의 선 처럼 얽혀있다. 때문에 사전답지 않게 비교적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하지만 가볍지는 않다. 개념을 전방위 적으로 읽을 수 있는 기회란 그다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가 다양한 분과의 학문을 종횡무진하며 주관적인 이야기를 펼쳐 내고 있는 만큼, 얼마나 공부했느냐에 따라 얻는 것이 다를 것이다. 아주 어린 친구들에게는 사실 그다지 도움이 될 것이 없다. 이런 친구들에게는 차라리 책 마지막의 "참고도서목록"이 아주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주로 도움을 얻을 사람들이라면, 비교적 책을 꾸준히 읽어 온 아마추어 정도일 듯 하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좋은 에세이가 될 수도 있고, 앞으로의 좋은 길잡이가 될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프로급의 독서가라면 크게 도움이 될 것은 없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이런 대중적인 책은 대부분 별 도움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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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서른하나
야마모토 후미오 지음, 이선희 옮김 / 창해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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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 수록 한 해 한 해를 넘기는 일이 힘겹다. 연하장은 반갑지 않고, 제야의 종소리는 해를 거듭할 수록 구슬퍼진다. 뭣도 모르고 나이가 드는 것을 즐거워 할 수 있는 것은 스무살 뿐이다. 몇 년이 지나 졸업하고, 취업하다 보면 어느새 세상이 녹록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더군다나 서른이 되는 것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건너는 것과 같다. 이제 자신의 무게를 온전히 져야한다. 그래서 서른을 이야기하는 노래들은 서글프다. 더 이상 젊음 자체로 아름답지 않다고 육체가 이야기한다. 일에 점점 익숙해 지지만 설레임이나 긴장감은 없다. 일찍 결혼을 했다면, 적당히 살 수 있는 권태가 늘기 시작했을 것이고,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점점 초조해 질 수 있는 나이다. 자신의 일이 자신과 맞지 않는다고 해도 다른 일을 찾기에는 빠듯하다. 착실히 경제생활을 했다면 어린 시절에는 손에 넣을 수 없는 잔고에 가슴이 뿌듯할 수도 있다. 살아가는 방법과 미덕을 별개로 생각하며 살아간다. 삼십대의 초반, 서른 한살은 그런 나이다. 하지만 서른살을 살아가는 각자의 사람들은 백만 가지의 방식으로 서른살을 살아간다. 마찬가지로, 삼십대의 삶이 온통 서른의 구슬픈 종소리로 가득한 것은 아니다. 하루하루, 매일매일은 이십대와 마찬가지로 조금은 색다르다. 다만 그것을 맞이하는 감정과 방법이 다를 뿐이다.

 

이 책은 서른 한 살을 살아가는 여성들이 등장하는 아주 짧은 단편들의 모음이다. 누군가는 집을 마련하고, 누군가는 일을 그만둔다. 결혼을 포기하는 사람도 있고, 문득 자신을 깨닫고 새로운 길로 가는 사람도 있다. 서울과 제주 만큼이나 먼 그들이지만, 공통점이 있다면, 스스로를 바라보고 자신을 지켜간다는 점이 아닐까. 그래서 이 여성들에게는 분명히 "내일"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행복할 지, 만족스러울 지 그런 것은 잘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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