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 재미있었음..!  

써둔 게 있어서 올려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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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트가 만들어낸 새로운 생명체?


영화 <공각기동대>가 보여주는 존재론은 기본적으로 데카르트 식의 이분법에 기초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고스트로 대변되는 정신 혹은 주체의 영역과 전뇌/의체로 대변되는 신체 혹은 객체의 영역이라는 두 부분이다. 여기서는 근본적으로 전뇌/의체에 대한 고스트의 우위가 상정된다. 전뇌나 의체는 공장에서 대량생산이 가능하고 언제라도 수리/교체가 가능한 것이다. 이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의미할 수 없으며, 고스트가 들어가야 그 사이보그는 비로소 하나의 인격이 될 수 있다.
이 전제 하에서는 고스트가 해킹당할 경우 필연적으로 인격 자체가 부정된다. “의사체험”을 하고 “모의 인격”이 되어버린 사이보그는 그 자신을 어떤 방식으로도 인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쿠사나기는 질문한다. “만약 전뇌 그 자체가 고스트를 만들어내고 혼을 깃들인다고 하면, 그때는 뭘 근거로 자신을 믿어야 한다고 생각해?”
그런데 쿠사나기가 자신의 존재를 탐구하면서 던지는 질문들은, 오히려 이 영화의 전제 자체를 뒤흔드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이 자신이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은 “타인과 구별하기 위한 얼굴, 그리고 의식하지 않는 목소리, 눈 뜰 때 응시하는 손, 어렸을 때의 기억, 미래의 예감”을 포함한다. 이 모든 것들은 신체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 아닌가? 이처럼 쿠사나기는 신체에 각인된 습관이나 기억을 자신을 구성하는 요소로 파악한다.
그녀(라고 부를 수 있을까?)는 이를 넘어 더 나아간다. “내 전뇌가 액세스할 수 있는 방대한 정보와 네트의 넓이, 그것들 전부가 내 일부이고 나란 의식 그 자체를 만들어내고 그리고 동시에 나를 어떤 한계로 계속 제약”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다른 어떤 것과 접속하여 주고받는 영향들 및 그 결과로서의 변이 양상 전부를 자신의 것으로 간주한다. 이는 단순히 물리적인 접촉뿐만 아니라 네트에서의 모든 정보교환행위를 포괄한다.
그런데 그녀가 자신의 존재를 이런 방식으로 규정한다면, 이것은 이미 신체를 단순히 정신의 ‘대상’으로 파악하는 것을 넘어서는 것이 아닌가? 이런 점에서 쿠사나기의 혼란은 자신의 생각과 동시대의 기술력 사이의 괴리, 혹은 그 기술력이 전제하고 있는 이분법과의 괴리에서 나오는 것 같다. 영화에서 전뇌와 의체는 기술적으로 언제나 교환 가능한 것으로 묘사된다. 그러기에 쿠사나기가 얼마 동안 지녔던 신체(의체)가 가진 습관과 적응성을 자신의 것으로 간주한다면, 자신의 전뇌나 의체가 바뀌어버릴 경우 그녀는 자신(혹은 자신의 일부)을 잃는 셈이다.
이처럼 신체를 대체가능한 것으로 만들어버린 기술적 성취 위에서, 쿠사나기의 의문에 대해 답하는 것은 ‘생명’ 자체에 대한 새로운 정의 없이는 불가능해 보인다. “대사의 제어, 지각의 예민화, 운동 능력계 반사의 비약적인 현상, 정보처리의 고속화와 확대…전뇌와 의체를 통해 더욱 고도의 능력 획득을 추구”할 수 있게 된 새로운 신체(전뇌/의체)는 이전의 유기체적 인간의 신체 능력을 훨씬 뛰어넘고 있다. 그러기에 이제는 이전의 유기체적 생명 개념으로 돌아갈 수 없다. 오히려 유기체적 혹은 기계적 신체라는 개념을 벗어난 존재로서 생명을 정의해야 한다.
‘인형사’라는 존재가 제시하는 생명관이 이에 부합하는 듯 보인다. 그는 자신을 “정보의 바다에서 발생한 생명체”라고 규정하고, “생명이란 정보의 흐름 속에서 태어난 결접점과 같은 것”이라 말한다. 인형사는 신체라는 규격, 틀을 벗어난 새로운 생명이며, 정보의 바다에서 자유롭게 흘러다니며 끊임없이 변모해 나가는 존재이다. 마치 태초의 생명체가 바다에서 태어나 진화하며 지구의 곳곳에 퍼져나가는 것처럼, 네트라는 바다에서도 마찬가지로 유기체가 아닌 디지털화된 생명체가 탄생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영화의 막바지에 이르러 어쩌면 당혹스럽다고도 볼 수 있는 부분이 나온다. 인형사는 쿠사나기에게 접근하여 쿠사나기와의 합일을 원한다. 쿠사나기의 신체 없이는 “자손을 남기고 죽음을 얻는 생명으로서의 기본과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형사는 개성이나 다양성을 얻기 위해서는 이 기본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기본적으로 개성이나 다양성은 유성생식의 특징이자 장점이다. 정자와 난자가 만나 다양한 형질을 가진 자손을 만들어냄으로써 환경에 대한 적응성을 높이고 개체의 생존률을 높이는 것이다. 인형사가 '생식‘이라는 생물학적인(말하자면 신체에 관련된) 과정을 필요로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쿠사나기의 의체는 이런 생식이 가능한 구조인가? 오히려 이 목적을 위해서라면 순도 높은 오리지널 인간의 신체를 택해야 하는 게 아닐까?
인형사가 보여주는 새로운 생명은 오히려 그 자체로 네트 상에서 생성·변이하는 존재로 상정되는 게 더 타당해 보인다. 영화의 마지막에 던져지는 한마디, “네트는 광대해”라는 말이 더 무게를 가지려면, 네트 안에서 수많은 변종을 만들어내며 번식해가는 인형사의 변종들이 그 자체로 긍정될 수 있어야 할 것 같다. 흐름으로써만 존재하는 비신체적 생명. 어쩌면 (영화의 전제를 따른다면) 의체는 시시각각 변해가는 이 생명들이 단지 순간순간 자신을 표현해내는 ’수단‘에 그친다고 보는 게 옳지 않을까?
이 영화는 기술의 발전에 따라 유기체 생명을 뛰어 넘은 고도의 능력을 갖춘 기계-생명이 출현하고, 이어 그보다 더 진화된 네트-생명이 출현하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다. 기술의 발전이 만들어낼 수 있는 미래의 모습에서 ‘생명’개념이 변화해 나가는 양상에 대해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는 셈이다. 그러나 그 문제의식에 비해서는 애초의 출발점인 유기체 생명에 대한 철학적 통찰이 좀 부족하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인형사라는 ‘애매한’ 존재는 데카르트의 이분법이 가진 난점을 해결하지 않은 채 기술적 한계만을 극한으로 밀어붙인 결과 맞닥뜨린 아포리아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기술의 고도 발전과 확장된 네트의 영역에 힘입은 새로운 생명체에 대한 상상을 가능하게 해준다는 점에도 불구하고, 조금은 미흡한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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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그손에서 강도와 차이의 철학 -들뢰즈와의 비교를 중심으로





김재희








1. 들어가며


 들뢰즈 철학에서 들뢰즈가 베르그손에게 진 빚은 니체와 스피노자에게 그가 진 빚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큰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들뢰즈가 주창하는 잠재성 개념, 또는 차이의 개념 등, 무엇보다 들뢰즈의 존재론은 그가 명시적으로 또는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있듯이 베르그손의 유산이다.1)그런데 강도 개념은 어떠한가? 베르그손이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에 관한 시론』 1장에서 강도 개념을 비판할 때, 그리고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에서 베르그손의 이 비판을 비판할 때, 두 사람이 쓰는 강도 개념은 같은 의미가 아니다. 본고는 베르그손과 들뢰즈가 벌이는 강도 개념에 대한 논쟁에서 양자의 차이를 추출하고 정리하려 한다. 물론 들뢰즈는 그 자신이 탁월한 철학자임과 동시에 베르그손의 탁월한 해석가이기도 하다. 이 두 사람의 철학에서 강도라는 개념과 차이 개념에는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걸려있는데, 이는 지금까지 비교적 많이 이야기되었던 베르그손과 들뢰즈의 유사성보다는 차이를 더욱 분명하게 해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들뢰즈가 사용하는 본성상 차이와 정도상 차이라는 분류가 갖는 문제, 이원론과 일원론의 문제를 다루게 될 것이다. 이를 통해서 이들이 사용하는 강도 개념은 사실상 동일하지 않으며, 들뢰즈의 독특한 해석(무엇보다 칸트적인 해석)이 가해진 것임이 드러날 것이다. 들뢰즈에서 양과 질 자체를 만들어내는 초월론적인 강도 개념과 달리, 베르그손의 강도 개념은 어떤 복합물로서 현실적인 경험 자체이고 물질과 정신, 질과 양이 관계맺는 하나의 지점이다. 아마 들뢰즈가 베르그손의 차이 개념을 자신의 강도 개념으로 계승한다면, 이는 베르그손의 이원론과 일원론을 조화시키기 위한 노력, 본성상 차이와 정도상 차이라는 두 가지 차이 개념을 극복하는 ‘차이의 정도들’를 나타내기 위한 노력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는 베르그손의 본래 맥락과는 다른 의도로 쓰이고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들뢰즈가 정초하려는 일의성의 존재론과는 달리, 베르그손의 존재론은 시종일관 이원론적 구별을 잃지 않는 그러한 존재론이기 때문이다. 또한 베르그손 철학에는, 들뢰즈가 분류하는 본성상 차이와 정도상 차이로 포괄하기 힘든 차이들이 자리하고 있다. 그러므로 들뢰즈가 베르그손에게 상속한 몫을 잘 따지기 위해서는 이러한 특수한 강도 개념과 베르그손이 도입한 차이 개념을 잘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본고는 베르그손의 차이 개념과 강도 개념에 대한 들뢰즈의 해석을 살펴보고, 양자의 차이와 이것이 가질 수 있는 함의들을 밝힐 것이다.








2. 베르그손의 강도 개념 비판


 들뢰즈는 베르그손의 방법론에 대해 논하면서, 거짓 문제를 비판하고 제대로 된 문제 제기가 필요함을 주장한다. 들뢰즈에 의하면 거짓 문제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없는 문제’, 즉 그 용어terme 자체가 더plus와 덜moins의 혼동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잘못 제기된 문제’인데 이는 그 용어가 잘못 분석된 복합물들을 표상하고 있다고 정의된다. 첫 번째 유형의 예로 베르그손이 드는 것은 비존재, 무질서, 가능성의 문제이며, 두 번째 유형의 예로는 자유와 강도의 문제가 있다2). 강도 개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잘못 복합된 혼합물인데, 사람들은 거기서 본성상의 차이가 나는 것, 예컨대 지속과 연장을 자의적으로 묶는다. 사람들은 본성상의 차이가 있는 곳에서 더와 덜이라는 정도상의 차이만을 본다는 것이다. 베르그손의 본질적인 비판은 전통 형이상학이 본성의 차이를 놓쳤다는 것에 있다.    


 베르그손의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에 관한 시론』 1장은 ‘심리 상태들의 강도에 관하여’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이 장의 요지는, 심리상태들은 비연장적이며 질적으로 달라서 그 강도를 연장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양적으로 측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를 양적으로 잴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질과 양의 차이를 혼동하기 때문이다. 강도는 한편으로 질적인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양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복합물이다. 즉 “강도라는 관념 그리고 심지어는 그것을 번역하는 단어 속에서도 현재의 응축, 따라서 장래의 이완이라는 이미지, 잠재적 연장성과 이를테면 압축된 공간이라는 이미지가 발견될 것이다”3)페히너 등의 정신물리학자들은 감각과 관련하여 강도 개념을 도입했지만, 감각은 질적인 것이며 양으로 환원될 수 없다. 예컨대 바늘에 찔렸을 때의 아픔과 망치로 맞았을 때의 아픔을 양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다. 또는 빛을 보는 시각 지각을 빛의 광도에 비례하는 것으로 분석할 수는 없다. 이처럼 강도 개념은 첫째로, 결과의 어떤 질에 의해 원인의 크기를 모종의 방식으로 평가하는데서 성립한다. 둘째로, 우리가 강도라고 부르는 것은 단순한 심리적 사실들의 더나 덜한 다수성에 관한 것인데, 이는 혼동된 지각이다(DI 94/54). 이 강도량 개념을 비판하기 위해서 베르그손은 깊은 감정들, 미적 감정, 도덕감, 근육의 힘씀, 주의, 격렬한 감정들, 정조적 감각들, 표상적 감각들, 정신물리학의 순서로 의식의 심리 상태들을 분석해나간다.


 그런데 우리는 베르그손의 다음 저작에서 질과 양의 이원론이 해소되는 것을 보게 된다. 예컨대 『물질과 기억』의 다음과 같은 구절, “무기 물질과 반성의 단계에 가장 높이 도달한 정신 사이에는 기억의 모든 가능한 강도들, 또는 같은 말이 되겠지만 자유의 모든 정도들이 있다.”4)이때 들뢰즈는 베르그손이 그가 무너뜨렸던 모든 것을 복위시키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질문한다. 그런데 들뢰즈는 여기서의 강도 개념은 더 이상 비판의 대상이 아니라 어떤 초월적인 차원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한다. 즉 이 대목에서 들뢰즈에 의해 재해석된 강도 개념은 본성의 차이와 정도의 차이들 사이의 차이, “모든 차이의 정도들”, “모든 차이의 본성”을 가리킨다. 이제 본성상 차이와 정도상 차이는 차이 자체의 정도들로서 강도 개념을 통해 하나로 통일된다. 그런데 이처럼 베르그손에서 이원론과 일원론의 계기를 강도의 일원론으로 통일시키려는 들뢰즈의 시도는 베르그손의 본의에 얼마나 적합한가? 들뢰즈는 더 나아가서 『시론』1장에서의 강도 비판이 꽤나 애매하다고 본다. “그 비판은 강도량이라는 개념 자체에 반대하고 있는가 아니면 심적 상태들의 강도라는 관념에만 반대하고 있는가?”5)강도 개념에 대한 들뢰즈의 이 의문은 앞으로 계속 간직되어야 할 물음이다.  








3. 베르그손의 차이 개념 - 이원론과 일원론


 먼저 들뢰즈가 해석하는 베르그손의 차이 개념을 살펴보자. 그가 보기에 베르그손의 철학은 근본적으로 차이의 철학이다. 베르그손과 들뢰즈에서 이야기되는 차이는 어떤 외적 차이가 아니다. 즉 A와 B의 차이가 아니라, 어떤 A가 자기 자신과 갖는 차이, 내적 차이가 문제이다. 베르그손에서는 일관되게, 상태나 순간이 아닌 변화, 운동, 생성으로서의 지속 안에서의 차이가 논의의 중심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이 차이는 부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가령 베르그손은 변증법적 방법에 대해 ‘헐렁한 옷’6)같은 것이라고 보며 변증법을 거짓 운동, 추상적 개념의 운동이라고 비판한다. 철학의 이상은 “그 대상에만 합당한 하나의 개념, 그러나 그 개념이 오로지 그 대상에만 적용되기 때문에 더 이상 개념이라고 말할 수 없는 그런 개념”(PM, 197)을 재단하는 것이다. 베르그손이 보기에 존재는 운동하는 실재, 지속이며, 차이, 뉘앙스, 실재의 마디articulation이다. 상태나 정지 등은 이 실재에 대해 취해진 관점에 불과하다. 따라서 사회적인 삶의 필요, 실용적인 행위의 필요에 의거한 유사성과 언어와 같은 범주들은 위조되고 조작된 범주로서 기각된다. 지속은 차이를 낳는 것, 본성을 바꾸면서 변화하는 것, 자기와의 차이를 낳는 운동이다.


 우선 『시론』 2장에서 지속 개념은 일종의 심리적 사실로 나타난다. 복합물의 분해는 두 유형의 다양성을 보여준다. 하나는 공간에 의해 표상되는데, 외부성, 동시성, 병치, 질서, 정도상의 차이, 불연속적이고 현실적인 수적 다양성이다. 다른 하나는 순수 지속 속에서 나타나는데, 바로 내부성, 연속성, 융합의, 유기적인, 다질성의, 질적 분별 및 본성상의 차이, 잠재적이고 연속적인 질적 다양성이다. 이 지속과 공간의 이원론 하에서 대상 또는 객관적인 것은 정도의 차이에 의해 나누어지는 것, 수와 단위가 문제가 되는 수적 다양성의 문제이다. 반면 주체 또는 주관적인 것은 일종의 멜로디와 같은 것, 임의대로 끊어낼 수 없는 것이지만, 또한 단순히 나누어지지 않는 것이라기보다는 나누어질 때마다 본성상의 변화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질적인 다양성, 시간적이고 잠재적인 다양성이다.  


 그런데 공간화된 사고를 멈추고, 시간 속에서 진정한 차이를 발견한다면 또한 기억의 잠재성을 볼 수가 있다. 지속은 곧 기억이다. 베르그손에 의하면 과거는 그 자체로 보존되며, 그것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단지 유용하기를 멈춘 것이다(PM, 80). 기억은 과거를 현재 속으로 연장하는데, 지속 또한 그러하다(PM, 200~201). 기억은 미래의 작용이고, 기억의 능력을 지닌 존재만이 기계적인 반복을 하지 않고 새로운 어떤 것을 할 수 있다. 과거가 자체로 보존되면서 현재 속으로 스스로를 연장한다는 것은, 수축의 기능을 보여준다. 심리적 상태에서 새롭게 무엇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은 수축을 통해 이전 순간이 사라지지 않고 다음 순간이 나타나면서 서로 융합되고 침투하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과거는 현재와 동시간적이다. “정신은 수축을 시키며 또 자신 스스로를 수축하는 것”7)이다. 기억 속에서 정신적인 정도들은 수축의 잠재적인 정도들, 긴장의 수준들인 원뿔들의 단면들이다. 지속은 이제 연속이 아닌 공존에 의해 설명되며, 이원론은 더 이상 지속과 물질 사이에 있지 않다. 공간과 달리 물질에도 역시 지속이 존재하는 것으로 파악되며, 모든 것들이 원뿔 도식의 각 단면으로 설명된다. 운동은 사물 자체에도 귀속되며, 물질은 지속의 극한적 경우가 되면서 지속에 참여한다. 운동은 나의 의식뿐만 아니라 밖에도 존재하며, 지속은 근본적으로 여럿이다. 『물질과 기억』에서 지속은 단순한 심리적 사실을 넘어서 우주 전체의 사실로 확대되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우주는 긴장과 에너지의 변형, 동요 등으로 이루어진 다양한 지속의 리듬들이다. 그리고 이 지속 또는 기억이 생의 약동élan vital로 나타나서 생물 전체의 진화 과정을 그리는 것이 『창조적 진화』의 근본 주제가 된다.


 들뢰즈는 베르그손에서 직관의 방법을 논하면서, 실재의 분절을 발견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존재는 자연적 마디를 따라서 분절되어 있지만, 거짓 문제는 이 차이를 무시한다. 베르그손은 철학자를 자연적 분절을 따라 구분하는 훌륭한 요리사에 비유하면서 플라톤의 텍스트를 인용한다. 철학자가 진정으로 내재적인 차이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실재의 마디들을 잘 분별해내야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직관은 차이 또는 나눔의 방법이다. 반면 기존의 과학과 형이상학은 본성의 차이를 찾아야 할 곳에서 정도의 차이만을 취하고, 잘못 분석된 복합물mixte로부터 출발하였다. 베르그손의 강도 비판도 이와 같은 맥락에 있다. 본성에 있어 차이를 낳는 것은 결코 사물이 아니며, 경향이다. 사물은 언제나 갈라놓아야 할 복합물이며, 오직 경향만이 순수하다. 이 점에서 직관은 복합물을 본성에 있어 차이가 나는 두 경향으로 분리시키는 역할을 한다. 복합물은 두 경향으로 나누어지는데, 하나의 경향은 단순하고 분리 불가능한 지속이다. 지속은 또한 두 방향으로 자기와 차이를 낳는데, 그 중 하나의 방향은 물질이다. 즉 우주는 물질과 지속으로 나뉘지만, 동시에 지속은 수축과 이완으로 자기의 차이를 낳으며, 이완은 물질의 원리를 이룬다. 베르그손에서 양과 질 등의 이원론은 결국 물질과 지속의 재발견되는 구분으로 귀착된다. 물질과 지속은 두 운동, 두 경향으로, 이완과 수축으로 구분된다. 이때 들뢰즈는 베르그손 철학에서 “순수성의 논제, 순수성의 관념”8)이 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두 경향 중 한 경향만 순수하거나 단순하고, 나머지 한 경향은 순수한 다른 한 경향을 해치거나 혼탁하게 하는 비순수성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본성상 차이를 보이는 것만이 순수하다고 얘기될 수 있지만, 경향들만이 본성상 차이를 보인다. 즉 지속은 물질과 다르지만, 지속은 먼저 자신 속에서 자신과 다르기 때문에 물질 또한 지속으로부터 오는 것이 된다. 따라서 각각의 사물은 물질 자체까지 포함하여 온전히 지속 속에서 정의된다. 물질과 지속, 이 두 경향 사이의 본성의 차이보다 더 근원적인 사실은, 본성의 차이가 이미 하나의 경향이라는 것이다. 지속은 자기 자신과 다른 것이고 물질은 스스로를 반복하는 것이다. 이원론의 관점에서 지속과 물질은 하나는 본성 상의 차이를, 다른 하나는 정도 상의 차이를 갖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보다 심오하게 본다면, 지속으로부터 비롯되는 “차이 자체의 정도들”만이 있으며, 이 경우 물질은 단지 가장 낮은 한 점, 즉 그곳에서는 이제 차이가 하나의 정도의 차이일 뿐인 그런 가장 낮은 한 점 자체에 불과한 것이 된다. 순수 과거와 순수 현재, 회상과 지각이 지속 자체 속에서 이완과 수축의 두 극단적 수준을 이루듯이, 물질과 지속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물질은 더 이상 장애물이나 비순수성이 아니다. 물질적인 차이와 정신적인 차이는 수축의 공존하는 정도들 속에서만 서로 결합될 수 있다.


 베르그손에서 이원론이 일원론으로 극복되었다면, 이 일원론은 다시 “새로운 이원론”을 도입한다. 이원론은 하나의 계기일 뿐이며, 그 계기는 일원론의 재형성을 요구한다. 차이는 두 경향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본성의 차이 자체가 유일하게 진정한 차이, 내재적인 차이가 된다. “차이의 순수한 개념에 도달하는 것, 차이를 절대적인 것으로 끌어올리는 것, 이것이 바로 베르그손의 노력이 갖는 의미”9)이다. 차이는 자신과 우선 다르다는 점에서 잠재적인 것이고, 모순이나 부정보다 훨씬 심오한 것이다. 요컨대, 들뢰즈는 두 경향 사이의 차이가 있고, 그 중 특권적인 한 경향으로서의 차이(지속)가 있으며, 특권적인 한 경향은 자신과의 차이를 낳고, 특권적인 한 경향은 자신 속에 정도들을 지닌다고 주장한다. 즉 차이의 네 가지 상태가 있다. 본성의 차이, 내재적인 차이, 차이화, 차이의 정도들. 들뢰즈는 “차이는 여전히 하나의 반복이며, 반복은 이미 그 자체가 하나의 차이”10)라고 한다. 반복은 일종의 차이(물질적인 반복, 이완)이고, 차이 역시 일종의 반복(정신적인 반복, 수축)이라는 것이다. 생명과 물질, 정신과 신체, 시간과 공간 등의 이분법을 차이와 반복이라는 중립적인 개념들로 대체하면서, 들뢰즈는 이미 여기서 자신의 철학의 근본 아이디어를 베르그손의 존재론에서 얻어오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살펴 본 것처럼, 들뢰즈는 베르그손에서 차이 개념을 정리하면서, 장래의 철학을 위한 참된 출발점, 참된 시작으로서 순수성이라는 관념에 집착한다. 그는 복합물이 분해되는 것과 단순한 것이 분해되는 것을 구분한다. 똑같은 나눔이지만, 전자는 외적 차이의 차원이고 후자는 내적 차이의 차원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들뢰즈는 지속과 물질 중 전자를 특권적인 차이, 순수한 차이로 보면서, 지속으로부터 여타의 것, 가령 물질이 유래한다고 본다. 진정한 차이는 내재적인 차이이고 자기 자신과 차이를 낳는 차이라는 것이다. 그는 지속을 불가분한 것이 아니라, 나누어지면서 그 본성을 바꾸는 것이라고 보면서, 생명은 차이의 과정 자체라고 본다. 기계론에 맞서 생기적 차이는 내재적 차이이고, 예측불가능한 비결정성이다. 베르그손 철학은 결국 실재의 비결정성, 예측불가능성, 우연, 자유 등을 증명하려는 시도로 요약된다. 베르그손은 언제나 실재는 실재 자체의 원인에 앞서서 온다는 것을, 그리고 가능적인 것들은 실재 이후에 오는 것이기에 언제나 지속은 비결정성이고 차이이고 예측불가능한 새로움이다. 베르그손주의는 차이가 그 자체로 있음을, 차이는 새로움으로 실현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철학이다.


 이제까지 살펴본 것처럼 베르그손은 강도를 비판했지만, 결국 이완과 수축을 근본적인 설명 원리로 내세운다. 이는 비일관적인가? 그렇지 않은 까닭은 베르그손이 정도들, 강도들로 돌아오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정도의 차이들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차이의 정도들’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하나의 극단과 다른 극단을 오가는 이중의 흐름은 ‘매개적인 정도들’을 발견하는데, 이는 복합물들의 원리를 구성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정도의 차이를 믿게 한다. 그러나 매개적인 정도들을 그 자체로 고려해보면 그것들은 차이 자체의 정도들이다. 차이의 강도들은 이완과 수축, 물질과 지속이다. 들뢰즈가 뽑아낸 베르그손의 핵심 개념들의 관계를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지속은 잠재적 다양성(본성상의 차이가 나는 것)이고, 기억은 잠재성 안에서 차이의 정도들의 잠재적인 공존이고, 생의 약동은 그 정도들에 상응하는 잠재성의 현실화이다. 이제 들뢰즈의 해석에 대해 물어볼 것은 잠재성이라는 개념, 본성상의 차이라는 개념이다. 이는 과연 타당한가? 이에 대해 따져묻기 전에 우선 들뢰즈가 강도 개념을 어떻게 자신의 철학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4. 들뢰즈의 ‘강도적 차이’    


 지금까지 살펴본 베르그손의 차이 개념을 토대로 들뢰즈는 이 차이의 정도들 또는 강도를 자신의 적극적인 개념으로 변용시킨다. 과연 들뢰즈 철학에서 강도 개념이 차지하는 위치는 특별하다. 그는 ‘초월론적 경험론’이라는 용어로 자신의 철학을 정의하는데, 그는 칸트와 마찬가지로 경험의 가능조건을 찾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런데 이 경험의 ‘실재적’ 가능 조건을 들뢰즈는 그가 차이 그 자체, 차이의 차이, 내재적 차이, 비개념적 차이, 강도적 차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찾는다. 그는 칸트와 달리 경험의 가능 조건을 지성이 아니라 순수 감성적인 차원에서 찾는 것이다. 또한 들뢰즈는 칸트의 사물 자체와 현상의 간극을 매개하는 도식론을, 강도를 통한 이념의 현실화 운동으로 대체한다. 즉 들뢰즈에서 이념은 미분비들로 이루어진 ‘문제’들이고, 이런 이념의 미분적 차이들은 강도를 통해서 시간 속에서 놓인다. 들뢰즈는 일어나는 모든 것, 나타나는 모든 것들은 어떤 차이들의 질서들 가령 고도차, 온도차, 압력차, 강도차 등의 상관항이라고 본다.11)이때 강도의 차이라는 표현은 동어반복이라고 들뢰즈는 쓴다. 강도는 감성적인 것의 이유인 차이의 형식이고, 차이 그 자체이다. 강도는 외연량처럼 분할가능한 것도, 질처럼 분할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어떤 온도는 다수의 온도로 이루어져 있지 않으며 각 온도는 이미 자체가 차이이다. 동질적 양이라는 허구는 강도 안에서 사라지고, “강도량은 분할되지만 본성을 바꾸지 않고서는 분할되지 않는다(DR, 477)” 이는 들뢰즈가 베르그손의 지속 개념을 해석할 때의 규정과 완전히 동일한데, 외연량과는 달리 강도량은 봉인하는 차이에 의해, 즉자적 비동등에 의해 정의된다. 이때 강도는 “감각 불가능한 것인 동시에 오로지 감각밖에 될 수 없는 것이다(DR, 494).” 왜냐하면 그것은 언제나 자신을 소외시키거나 자신과 상반되는 어떤 질에 뒤덮이고, 자신을 말소하는 어떤 연장 안에서 분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볼 때 강도는 오로지 감각 밖에 될 수 없는 것, 감성의 초월적 실행을 정의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강도는 감각을 낳고, 이를 통해 기억을 일깨우고, 사유를 강요하기 때문이다. 강도를 연장과 질에 앞서 파악하는 이 같은 경험은 질화되지도, 연장화되지도 않는 원천적인 국면의 즉자적 강도, 즉자적 차이, 즉자적 깊이 그 자체를 보여준다(DR, 506).  


 그런데 왜 들뢰즈는 강도를 현상의 근거를 이루는 초월론적인 차원에 두는가? 『차이와 반복』의 본문에서는 잠시 언급될 뿐이지만, 들뢰즈의 강도 개념은 베르그손의 강도 개념과 강도에 대한 칸트적 해석을 결부시킨 결과물로 보인다. 칸트에 따르면 직관의 공리 원칙에서는 “모든 현상은 직관의 관점에서 연장적 크기”이고, 지각의 예취 원칙에서는 “모든 현상에서 감각의 대상인 실재적인 것은 강도적 크기intensive Größ 즉 도Grad를 갖”는다. 즉 지각의 내용, 현상의 질료는 감각내용이며, 이는 질Qualität을 가리킨다. 이 강도적 크기는 한 단위에서 질적 정도Gradus를 가리키고, 이 질적 정도는 ~이다(1)라는 적극적 규정으로부터 그 규정의 부정인 ~아니다(0)에 이르는 것이다.12)즉 칸트에서 강도적 크기는 질을 양화하는 개념이고, 시간의 내용을 채우는 감각의 강약 정도를 가리키는 개념이다. 물론 이는 베르그손에 의해서 ‘질적인 의식 내용의 양화’로 비판되는 부분이다. 감각의 강도량은 엄밀하게 수학적으로 측정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들뢰즈는 칸트의 오류가 질의 양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공간에 대해서 어떤 기하학적 외연을 유지하고, 강도적 크기를 이러저러한 정도에서 연장을 채우고 있는 어떤 질료에 대해서만 인정한 것이라고 본다(DR, 495). 들뢰즈가 보기에 초월론적 원리에 해당하는 강도는 단순히 지각의 예취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앞서 언급한대로 외연, 연장, 물리학적 질, 감각적 질 모두의 원천이다. 같은 지면에서 그는 강도적 크기 개념을 특권화하는 헤르만 코헨의 칸트 해석을 지지하고 있다.  


 들뢰즈는 강도 개념의 특징을 세 가지로 정리한다(DR, 496~507). 첫 번째로 강도량은 즉자적으로 비동등한 것을 포괄한다. 강도량은 양 안의 차이, 양적 차이 안에 말소 불가능한 것, 양에 고유한 질을 나타낸다. 그런데 강도는 양적 차이 안에 있는 말소 불가능한 것이지만, 양적 차이는 외연 안에서 소멸된다. 첫 번째 특성에서 비롯하는 두 번째 특성에서 즉자적 비동등을 포괄하고 이미 즉자적 차이 그 자체인 강도는 차이를 긍정한다. 강도는 이미 차이이며 그 배후에는 일련의 다른 차이들이 있는데, 강도는 자신을 긍정하면서 그 다른 차이들도 긍정한다. 차이는 부정이 아니며 강도를 특징짓는 차이가 부정적인 형태(제한, 대립)를 띠는 것은 질 아래에서, 연장 안에서이다. 연장과 질은 차이를 소멸시키는 경향을 갖는다. 감성적인 것의 존재를 구성하는 것은 강도 안의 차이이다. 강도의 세 번째 측면은 앞의 두 가지 특성을 집약하는데, 이 세 번째 특성에 따르면 강도는 어떤 함축되고 봉인된 양, 배아를 품고 있는 양이다. 그러나 이는 질 속에 함축된 양은 아닌데, 강도는 이차적으로만 질 속으로 함축될 뿐 일차적으로 강도는 그 자체 안에 함축된다. 즉 “강도는 그 자체 안에 함축되는 것, 즉 함축하면서 함축되는 것(DR, 507)”이다. 이러한 강도의 이중 운동은 강도가 자기 자신에 의해 우선 봉인되는 것이라는 규정에서 따라나오는 것이다. 강도가 자기 스스로를 봉인하고 봉인할 때 강도들 사이에 봉인되고 봉인하는 관계가 가능하다. 이 동시적인 작용은 특히 강도의 존재론이 하나의 일원론이 될 수 있도록 이끄는 것이다. 강도intensité는 밀도, 내포적 크기 등의 또다른 번역어가 나타내주는 것처럼, 외부에 무엇과의 관계 이전에 자신 안에 자기를 쌓아가는 운동, 힘을 가리킨다. 강도는 자기를 봉인하고, 자기로 회귀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자기와의 차이와 불일치를 만들어내는 한에서 그러하다. 이는 들뢰즈가 지속을 우선 ‘자기 자신과의 차이’를 갖는 것이라고 규정할 때와 비교 가능하다. 자신과의 차이를 갖지만 모종의 자기동일성을 확보하는 것으로서의 강도의 존재론에서는, 차이나는 것들이 하나의 목소리를 낸다는 일의성의 존재론이 나타난다. 존재의 일의성은 차이나는 존재자들이 어떤 일자에 귀속된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차이나는 존재자들이 모두 동등하게 존재한다는 뜻이다. 즉 “크든 작든, 열등하든 우월하든 그 어떤 것도 존재에 더나 덜 참여하는 것이 아니(DR, 106)”라는 것이다.    


 들뢰즈는 베르그손의 강도 개념 비판을 염두해두면서, 그가 모든 본성상의 차이를 강도에 귀속시키고 원래는 질에 귀속되어야 할 모든 것을 강도에 돌렸다는 비난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반론한다. “차이는 오로지 자신이 외연 안에서 스스로 소멸되는 과정 안에서만 질적인 것이 된다. 그 본성 자체 안에서 보면, 차이는 외연적인 것도, 질적인 것도 아니다. 우선 질들은 종종 언급되는 것보다는 훨씬 더 많은 안정성, 부동성, 일반성 등을 지닌다는 점에 주목하자. 이것들은 어떤 유사성들의 질서들이다(DR, 509).” 즉 “사실 질에 부여되고 있는 지속이란 것도, 강도가 그것을 팽팽하게 만들고 떠받치고 다시 취하지 않는다면, 무덤으로 향하는 줄달음”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요컨대 양적 차이나 정도상의 차이들이 있고 마찬가지로 질적 차이나 본성상의 차이들이 있다면, 이를 위해서는 먼저 그것들을 구성할 수 있는 강도가 있어야 한다(DR, 510).” 그는 우리가 알 수 있는 강도는 이미 어떤 연장 안에 개봉되어 있고 이미 어떤 질들에 의해 뒤덮여 있다고 본다. 이러한 제약 때문에 강도량을 어떤 경험적인 개념, 잘못 정초된 개념으로 간주하거나 물리학적 질과 외연량을 혼합한 불순한 개념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생긴다는 것이다. 강도는 차이이지만, 이 차이는 연장 안에서 질 아래에서 스스로 부정하고 소멸된다. 그러나 이 연장과 질을 창조하는 것은 스스로 자신의 주름을 펼치는 강도의 차이이다. 깊이는 존재의 강도이고, 강도는 존재의 깊이로서 이 강도적 깊이에서 외연extensio과 연장extensum, 물리학적 질과 감각적 질이 모두 나온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강도에 대한 베르그손의 비판이 거의 설득력이 없다고 들뢰즈는 말한다(DR, 478). 베르그손의 비판은 전적으로 이미 생산된 질과 구성된 연장들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이 비판에서 차이는 질 안에서의 본성적 차이들과 연장 안의 정도적 차이들로 할당되고, 이러한 관점 하에서 강도는 어쩔 수 없는 불순한 혼합물로 나타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베르그손은 강도량에 귀속되는 모든 것을 질 안에 가져다 놓게 되었다. 하지만 베르그손이 질과 본성상의 차이를 보는 곳에서 들뢰즈는 그것의 가능 근거인 강도량의 깊이를 본다. 들뢰즈에 따르면, 베르그손은 질적인 지속을 결코 분할 불가능한 것으로 정의하지 않았다. 오히려 질적인 지속은 분할되면서 본성을 바꾸는 것, 본성을 바꾸면서 끊임없이 분할되는 어떤 것이다. 이것이 잠재적 다양체이고, 이는 정도상의 차이만을 지니는 수와 연장의 현실적 다양체와 대립한다. 그런데 들뢰즈는 베르그손주의가 대변하는 차이의 철학에서 질과 연장의 이중적 발생에 대해 질문하는 순간이 출현한다고 본다. 들뢰즈가 염두해두고 있는 것은 『물질과 기억』인데, 질과 연장의 근본적인 분화는 오로지 기억의 거대한 종합 안에서만 자신의 이유를 발견한다. 기억의 종합을 통해 이완과 수축의 정도들에 해당하는 차이의 모든 등급들이 서로 공존하게 되고, 외부적이고 잠정적으로만 지목되던 그 강도의 함축적 질서가 지속의 한복판에서 재발견된다. 지속과 연장 사이에는 단지 어떤 본성상의 차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지속은 차이의 본성과 구별되지 않고, 또 그런 면에서 차이의 정도들을 모두 포괄한다. 내부적 강도들은 지속 안으로 재도입되고, 지속 안에는 이완과 수축의 모든 등급들이 공존하게 된다. 이것이 들뢰즈가 보는 『물질과 기억』과 『사유와 운동자』의 본질적인 테제이다(DR, 511).  


 들뢰즈의 관점에서는 모든 것을 정도상의 차이로 보는 기계론이나 모든 것을 본성상의 차이로 보는 목적론 모두 공범 관계에 있는 거짓이다. 정도상의 차이와 본성상의 차이 사이에는 본성상의 차이가 있는가, 아니면 정도상의 차이만 있는가? 하지만 거기에는 이것도 저것도 없다는 것이 들뢰즈의 대답이다. “차이는 오로지 자신이 밖-주름운동에 놓이는 연장 안에서만 정도상의 차이다. 차이는 오로지 이런 연장 안에서 자신을 뒤덮는 질 아래에서만 본성상의 차이다. 차이의 모든 등급이나 정도들은 이 둘 사이에 있고, 그 둘 아래에는 차이의 본성 전체가 있으며, 그 본성은 강도적인 것이라는 데 있다. 정도상의 차이들은 다만 가장 낮은 정도의 차이에 불과하고, 본성상의 차이는 다만 가장 높은 본성의 차이일 뿐이다. (...) 베르그손이 도달한 극단적 결론에 따르면, 차이의 본성과 정도들은 서로 동일한 사태이고, 여기서 성립하는 이 ‘같음’이야말로 아마 반복(존재론적 반복)일 것이다(DR, 512)” 베르그손이 마주했던 것처럼, 강도량들과 연관된 어떤 가상이 있다. 그러나 그 가상은 강도 자체가 아니라 강도의 차이가 소멸되는 운동이다. 감성의 경험적 실행의 관점에서 이 가상을 모면할 수는 없는데, 이 관점에서는 오로지 질과 연장의 질서 안에서만 강도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직 초월론적 연구만이 강도를 온전히 발견해낼 수 있다. 이것은 들뢰즈가 베르그손의 철학에서 직관 개념을 온전한 실재를 발견하는 방법으로서 중시하는 것과도 관련된다. “강도의 차이는 영역을 창조하고 그 영역을 경험적 원리에 제공하며, 이 원리에 따라 그 영역 안에서 소멸된다. 초월론적 원리인 강도의 차이는 경험적 원리의 범위 바깥에서자기 자신 안에 보존된다(DR, 514, 강조는 인용자의 것).” 이 대목에서 베르그손과 달리 들뢰즈는 강도적 차원을 본래의 베르그손의 맥락을 넘어서 칸트 식의 사물 자체의 차원으로까지 승화시키는 것 같다. 또한 들뢰즈는 니체의 영원회귀와 힘의 의지 역시, 질적이지도, 외연적이지도 않고 순수하게 강도적인 것이라고 본다(DR, 518). 이로써 들뢰즈는 둔스 스코투스, 스피노자, 니체로 이어지는 일의적인 존재론의 계보를 베르그손을 끝으로 마무리짓는다.


    





5. 들뢰즈의 베르그손 해석에서 주의할 점13)


 물론 들뢰즈가 베르그손을 해석한 다른 문헌들과 자신의 철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는 『차이와 반복』에서 나타나는 강도 개념을 동일시할 수는 없다. 문제는 들뢰즈가 이미 『베르그손주의』에서 베르그손의 강도 개념 비판을 의문시하면서, “만일 강도가 순수 경험 속에서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참이라면, 우리의 경험을 만드는 모든 질은 강도가 제공하는 것이 아닐까?”14)라고 묻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여기에 바로 비약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분명 들뢰즈는 베르그손의 강도 개념을 칸트와 결부시켜서 자신의 초월론적 경험론으로 이르는 주요한 자양분으로 삼았지만, 강도 자체가 경험을 만들어내는 어떤 것은 아니다. 물론 베르그손에서 강도는 전적으로 폐기되어야 할 허구적인 관념만은 아니지만, 불순한 혼합물로서 일단 비판되고 있는 개념이다. 강도는 우선 질과 양이 만나는 지점을 나타낸다. “강도의 관념은 따라서 두 흐름의 접합점에 위치하고 있는데, 그 하나는 밖으로부터 우리에게 외연적 크기의 관념을 가져오며, 다른 하나는 의식의 심연에서 내적인 다수성의 상을 찾으러 가서 표면으로 가지고 나오게 한다.(DI 94/54)” 베르그손에 따르면, 강도는 순수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질과 양, 지속과 연장이 만나는 우리의 경험, 복합물이자 불순물로서 경험이 바로 강도적인 것이다. 들뢰즈는 질과 양이라는 이분법적 계기 이전에 양과 질을 정초하는 강도라는 초월론적인 사태가 있다고 보는 것이고, 베르그손은 질과 양의 복합물로서 우리의 경험 자체가 강도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들뢰즈는 직관의 방법이 ‘사실상’ 주어지는 혼합물의 경험을 ‘권리상’ 순수한 경향으로 나누어야 하는 것이라고 쓴 적이 있다. 그런데 들뢰즈가 선호하는 사실상en fait과 권리상en droit라는 구분 역시 본래 칸트의 것이었음에 주목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베르그손에서 순수한 본성상의 차이는 권리상으로만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구별되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순수지속은 혼합된 경험을 분해하기 위한 조건인 동시에 실재적 경험 그 자체이기도 하지 않는가? 다시 말해 들뢰즈가 초월적 의미를 부여하는 직관과 지속의 경험 자체가 구분되기 힘든 것이 아닌가?15)따라서 들뢰즈가 자신의 철학을 초월론적 경험론으로 정의하면서, 강도 개념을 특권화시킬 때는 베르그손과의 유사성 못지 않게 그 거리를 제대로 측량해야 한다. 들뢰즈가 자신의 철학을 원전을 비틀어 괴물 같은 아기를 낳는 비역질로, 또 화자를 숨기는 ‘자유간접화법’style indirect libre으로 정의할 때, 그 자신의 철학과 그가 끌어들이는 철학 사이의 생성 속에서 정작 원래의 베르그손의 본의는 잊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베르그손의 철학이 이원론에서 완화된 이원론, 완화된 이원론에서 일원론으로 이행해간다고 보는데, 위에서 언급한 질과 양의 이분법은 또한 본성의 차이와 정도의 차이라는 이분법과 연관된다. 이때 질은 본성상의 차이를 갖는 것이고, 양은 정도상의 차이를 갖는 것이다. 들뢰즈는 『물질과 기억』의 근본적인 테제를 지속을 본성상의 차이를 갖고, 공간은 정도상의 차이를 갖는 것으로 해석한다(DR, 511). 그런데 이 대목에서 들뢰즈가 끌어들이는 본성상의 차이와 정도상의 차이라는 구분이 베르그손을 해석하기에 충분히 유효한가? 들뢰즈가 베르그손의 철학을 본성상의 차이와 정도상의 차이로 구분하는 것은 『베르그손주의』를 떠받치는 근본적인 구별이지만, 근본적인 대립은 오히려 본성상의 차이 또는 강도의 차이와 공통의 척도로 재어지는 양의 차이 사이에 있다.16)여기서 본성상의 차이는 지속에서 직접 이끌어내진 규정이라기보다는 일종의 관점의존적인 성격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즉 본성상 차이는 실재에 대한 절대적인 어떤 규정이라기보다는 어떤 관점에서 접근하느냐에 달려있는 상대적인 것이다. 가령 인간의 뇌를 그것의 생산물 속에서 고려하느냐 또는 그의 경향 속에서 고려하느냐에 따라, 인간의 뇌는 동물의 뇌와 정도의 차이를 가질 수도, 본성의 차이를 가질 수도 있다. 베르그손에 의하면 어떤 관점을 갖느냐에 따라서 본성의 차이는 나타날 수도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가령 들뢰즈가 정도상의 차이는 차이의 가장 낮은 정도이고, 본성상의 차이는 차이의 가장 높은 본성일 뿐이라고 할 때, 가장 높고 가장 낮다라는 말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인가? 정도상의 차이가 너무 클 경우 우리는 그것을 본성상의 차이라고 보는 것이지, 본성상의 차이와 정도상의 차이가 애초부터 정해져있는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17)


 또한 들뢰즈 식으로 본성상의 차이와 지속 내부의 변화를 동일시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의심스러운 것은 지속이 본성을 바꾸면서만 분할된다는 들뢰즈의 테제, 그리고 이 본성을 바꾸면서만 분할되는 지속을 강도와 등치시키는 들뢰즈의 테제이다. 그러나 『사유와 운동자』안에서도 지속은 주로 불가분성으로 서술되고 있다. 적어도 의식은 잠재적이든 현실적이든 간에 분할할 수 없는 것이며, 확실한 것은 베르그손의 이론 내에서 공간은 무한히 분할가능하지만 지속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다. “공간이 문제되는 한, 사람들은 분할을 원하는 만큼 멀리 밀고 나갈 수 있다. 이렇게 한다고 해도 분할되는 것의 본성에는 아무 것도 변화하는 것이 없다.(MM 344/231)” 들뢰즈의 언어적 비약과는 달리, 베르그손은 불가분성을 지속의 본성으로 간주하며, 나누어질 경우 본성이 변화한다는 것은 지속의 불가분성을 나타내는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 베르그손이 “한 멜로디의 지속을 그 성질을 바꾸지 않고 짧게 할 수 있는가? 내적 삶이란 바로 그러한 멜로디(PM, 11)”라고 쓸 때, 핵심은 지속의 분할에서 본성이 바뀐다는 것이 아니라, 지속은 불가분적이라는 사실이다. 가령 아킬레스의 운동에서 그것을 분할하면 그 지속은 다른 리듬을 가진 두 가지 운동으로 변하는 것이지, 그 운동 자체가 유지된 채로 분할되면서 본성을 바꾼다고 보기는 어렵다. A에서 B로 가는 운동을 A에서 C로 가는 운동과 C에서 B로 가는 운동으로 분할할 때 이것은 하나의 지속이 본성을 변화하면서 분할된다기보다는 두 가지 다른 지속, 다른 운동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더욱이 지속은 공간처럼 원하는 만큼 무한히 분할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가령 우리의 지속은 어떤 한계 내에서 분할이 가능한 것으로 보이지만, 어떤 한계를 넘어설 수는 없다. 즉 지속을 분할하는 행위 자체가 우리 의식의 지속을 구성하는 것이다. 예컨대 우리가 의식하는 텅 빈 시간의 가장 짧은 간격이 2/1000초라면(MM 344/231), 그 이하의 시간까지 쪼개는 것이 가능할까? 만약 우리의 지속을 어떤 한계 이하로 분할하려 할 때 만나는 것은 분할되면서 그 본성을 바꾼 우리의 지속이 아니라, 우리와 다른 어떤 지속이다. 지속을 가리켜 단지 그것이 분할될 때 본성을 바꾸는 것이라고 표현하면 우주 전체에는 오로지 하나의 지속, 하나의 우주적 원뿔만이, 또는 들뢰즈가 말하는 일원적인 강도적 세계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한 지속을 분할불가능한 것으로 보면, 우리의 지속 외에도 다수의 지속이 존재한다는 것을 곧바로 볼 수 있다. 강조되어야 할 것은 지속에는 공간과 달리 분할의 한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의 지속, 물질의 지속 등 여러 층위의 지속이 존재하는 것이다. “지속의 강도는 다른 지속들의 강도이지 하나의 ‘동일한’ 강도의 변형이 아니다.”18)그러므로 들뢰즈가 지속을 분할될 때 그 본성을 바꾸는 것이라고 이야기할 때, 그 분할의 정도에 있어서는 일정한 유보를 가지고 받아들여야 한다. 지속이라는 말에서 드러나듯이, 이질성과 차이의 계기와 더불어 연속성이라는 계기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본성상의 차이라는 것을 논할 수 있다면, 그것은 지속 자체에 적용되기보다는 우선적으로는 지속과 공간에 적용되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의 지속이 갖는 변화들을 본성상의 차이로 본다고 하더라도, 그 본성상 차이들은 한계를 가진다. 이러한 이유로 본성상 차이와 정도상의 차이의 구분 이외에도 여러 가지 차이를 구분해야 한다. 하나의 지속 내의 변화들, 다수의 지속들 사이의 차이, 지속과 공간 사이의 차이. 이 다양한 차이들은 단순히 본성상의 차이나 정도상의 차이라는 들뢰즈 식의 이분법으로는 분간되기 힘들다. 물론 공간에 비하면 지속 내의 차이가 본성상의 차이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다수 지속들 사이의 차이에 비하면 지속 내의 차이들은 정도상의 차이처럼 보일 것이며, 다수 지속들 사이의 차이도 지속과 공간의 차이에 비하면 정도상 차이처럼 보일 것이다. 이때 베르그손은 본성상 차이와 정도상의 차이를 상당히 느슨하게 사용하며, 양자는 관점에 의존적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


 들뢰즈가 베르그손을 본성상의 차이와 정도상의 차이라는 도식으로 해석하고, 양자를 강도라는 개념으로 극복하려 했다면 이는 그 자신의 철학을 일의성의 존재론으로 정초하려했기 때문이다. 들뢰즈에 의하면 세계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봉인하고 봉인되는 강도, 강도적 차이, 차이 그 자체를 통해서 충분히 설명된다. 즉 이 차이는 타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 그 자체로 충만하고 내재적인 차이이다. 강도적 차이는 자신을 분열시켜 다수화시키고 그 차이들을 긍정한다. 그런데 들뢰즈가 보고싶어하는 것처럼, 베르그손에서 온전한 의미의 일원론 같은 것을 찾기는 쉽지 않다.19)가령 베르그손에 의하면 절대는 두 측면을 갖는데, 하나는 형이상학에 의해 꿰뚫어진 정신이고, 다른 하나는 과학에 의해 인식된 물질이다(PM, 43). 또는 절대는 차이이지만, “차이는 정도상의 차이와 본성상의 차이라는 두 표정을 갖는다”20)우주 전체의 실재가 지속이라고 하더라도, 양과 질의 차이, 물질과 생명의 차이, 지각과 기억의 차이, 본능과 지성의 차이 등은 결코 말소되지 않은 채로 그의 저작 전체에서 지속된다. 정신의 가장 낮은 단계, 또는 기억없는 정신으로서 순수 지각은 물질의 일부가 될 수도 있지만, 과거를 끊임없이 반복하고 기억하지 못하는 물질의 과거는 현재 속에 곧바로 주어진다. 반면 다소간 자유롭게 전개되는 존재는 매순간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물질과 같지 않다. 베르그손은 “사람들은 물질과 충분히 전개된 정신 사이에서 무한한 단계들을 생각할 수 있다. (...) 삶의 점증하는 강도의 척도가 되는 이 잇따르는 단계들의 각각은 지속의 더 높은 긴장에 상응하며 (...) 무기 물질과 반성의 단계에 가장 높이 도달한 정신 사이에는 기억의 모든 가능한 강도들, 또는 같은 말이 되겠지만 자유의 모든 단계들이 있다. (...) 엄밀한 의미의 물질과 자유 또는 기억의 가장 저급한 단계 사이에서 구별은 분명하며, 환원할 수 없는 대립이 있는 것은 아닐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구별은 존속하지만, 통일은 가능하다.(MM 369~370/249~250, 강조는 인용자의 것)”라고 쓴다. 베르그손이 원뿔 도식을 통해서 어떤 일원론을 도입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이는 물질과 기억, 수축과 이완의 사이의 근본적인 이원적 구별을 여전히 가진 상태에서인 것이다. 여전히 긴장과 확장의 이원적 구별이 사라지지 않은 베르그손의 역동적 ‘일원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구절도 참고해볼만 하다. “우리의 표상들 속에서 고찰된 감각적 성질들과 계산가능한 변화들처럼 다루어진 이 같은 성질들 사이에는 단지 지속의 리듬의 차이만이, 내적인 긴장의 차이만이 존재한다. 이처럼 우리는 확장extension이라는 관념에 의해서 비연장적인 것과 연장적인 것의 대립을 제거했듯이, 긴장tension이라는 관념에 의해서 질과 양의 대립을 제거하려 했다. 확장과 긴장은 무수한 단계들, 그러나 항상 결정된 단계들을 인정한다.(MM,406/278)”


 그런데 이 이원론의 양자는 끊임없이 타자를 필요로 하고, 타자와 만나야만 한다. 통속적 이원론의 난점은 두 항이 구별된다는 사실이 아니라, 두 항 중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와 어떻게 접목되는지 알 수 없다는데서 비롯한다. 물질은 순수 공간일 정도로, 어떤 수축도 갖지 않을 정도로 충분히 팽창되어 있지 않다. 역으로 지속은 물질이나 연장과 독립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수축되어 있지 않다.21)따라서 중요한 것은 잠재성으로서 강도가 개체화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이 현실화되기 위한 조건으로서 생명과 물질의 만남이다. 지속이 가장 탁월한 실재 또는 경향으로 보이는 순간에도, 그것은 물질이라는 나머지 실재와의 만남과 교차없이는 그 자신을 실현할 수 없다. 지속 또는 순수기억으로서의 생명은 물질과의 만남 속에서 자신을 실현할 수밖에 없다. 물질이 지속 안으로 팽창되는 것과 동시에 지성은 물질 안으로 수축된다. 지속에는 연장이 있고, 물질에는 지속이 있다. 감각은 연장을 갖고, 질은 물질에도 귀속된다. 이원적인 것은 끊임없이 만나고 교차하면서도, 결코 온전한 하나가 되지 않는다. 예컨대 “우리의 지속의 감정, 즉 우리 자아가 자아 자신과 일치하는가의 여부는 정도차를 받아들인다.”22)라든지 “질에 대한 우리의 구분 뒤에는 종종 수들이 존재”(PM, 61)한다는 구절 등을 보라. 들뢰즈가 끊임없이 베르그손을 부정과 제한 개념과 대결시키고 있을 때도, 대립은 사라지지 않는다. 가령 물질은 운동의 제한인 동시에 운동의 역전, 간섭이며, “생명은 요소들의 연합과 축적에 의해서가 아니라 분리dissociation와 이분dédoublement에 의해 진행된다.(EC, 90/146)” 주어진 환경 하에서 생명은 물질의 문제 제기를 해결해야만 한다. 실패의 위험은 항존하며, 운동 자체인 생명은 그 분화 과정에서 물질 속에서 소외된다. 각 개체 안에는 생명의 산출적 힘과 물질의 해체적 힘이 공존한다. 그러나 생명은 물질없이 결코 자신을 실현할 수 없다는 것은 바로 『창조적 진화』의 근본적인 주제 중 하나이다.23)마찬가지로 시간은 인간의 실용적 요구에 의해 끊임없이 ‘공간화된 시간’이라는 사생아적 개념으로 나타나며, 그 자체로 상징화될 수 없는 직관은 지성 또는 언어의 도움없이는 자신을 온전하게 보일 수 없다. 베르그손 철학에서 순수성의 관념을 중시하는 들뢰즈의 관점과는 반대로, 이를 베르그손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일종의 대체 보충의 논리(데리다)라고 부를 수도 있으리라.


 마지막으로 들뢰즈의 잠재성이 베르그손에서 온 것이라는 규정도, 위에서 살펴본 강도 개념에 대한 차이 속에서 재고되어야 한다. 사실 들뢰즈의 잠재성-현실성, 가능성-실재성의 구분과는 달리, 베르그손에서 잠재성과 가능성은 별다른 엄밀한 구분없이 쓰인다(PM의 「가능적인 것과 실재적인 것」참조). 가능성과 잠재성은 어떻게 구별되는가? 들뢰즈는 가능성은 현실성을 가질 순 있어도 실재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유사성과 제한이라는 규칙에 의해 실현réalise되는 것이라고 한다. 반면 잠재성은 실재성을 가지며, 차이와 분화, 창조 등의 규칙을 통해 현실화actualise되는 것이다. 즉 실재는 그것이 실현시키는 가능성의 이미지나 유사성에 존재하는 반면, 현실성은 그것이 구체화시키는 잠재성과 유사하지 않으며, 현실화에서 일차적인 것은 차이이다.24)양자의 차이는 원뿔 모형의 해석에서도 드러난다. 들뢰즈의 존재론적 원뿔은 그 전체가 순수 잠재성의 차원에 있고 꼭지점에서 현실화되는 것이다. 반면 베르그손에서 원뿔의 각 단면은 자아가 끊임없이 왕래하는 심리적 삶의 수준, ‘삶에 대한 주의’에 따라 달라지는 생명의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다. 기억은 그 자체로 보존되지만, 언제나 행동의 요구에 의해 선택적으로 현실화된다. 즉 베르그손이 사용하는 원뿔 전체는 순수 과거와 순수 현재로서 원뿔의 밑면과 꼭지점이 결합하는 현실적인 차원의 것이다. 들뢰즈가 이원론과 일원론을 조화시키기 위해서 제안한 해석은 베르그손에서 잠재적인 차원에서는 강도의 일원론이, 현실적인 차원에서는 수축과 이완, 양과 질이라는 이원론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는 일정 부분 권리상 구분과 사실상 구분이라는 칸트와 들뢰즈의 용법과 관련된다. 하지만 베르그손에서는 “권리상 존재하는 지속이 사실상 기억으로 현실화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일 뿐인 순수기억이 현재적 이미지로 현실화되는 것”25)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리고 들뢰즈가 종종 등치시키는 생명의 분화와 기억의 현실화도 구별되어야 한다.


 물론 잠재성이라는 범주가 아리스토텔레스나 라이프니츠의 전통적 가능성 개념과 구분시켜주는 의의를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정이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다면, 굳이 베르그손에서는 주제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잠재성 같은 범주를 도입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 든다.26)가능성-실재성 도식이든, 잠재성-현실성 도식이든, 가장 중요한 것은 베르그손의 철학에서 ‘시간’이 차지하는 결정적인 역할이다. 거대한 잠재성의 차원, 강도적 차원이 있고 그것이 현실화되고 분화되고 개체화된다는 식의 시각적인 은유는 오도적일 수 있기 때문에, 잠재성은 실재성을 갖는다고 말하는 것에 그치지 말고, 공존하는 전체로서 거대한 기억의 원뿔이 ‘시간’ 속에서 실현됨을 이야기해야 한다. 시간은 모든 것이 한꺼번에 주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고, 예측불가능하고 결정불가능한 것, 새로운 것, 자유가 나타나도록 하는 것이다. 하나이고 보편적이되 다양성 그 자체인 시간. 순수 과거와 그것의 수축으로서 현재, 그리고 끊임없는 시간의 생성, 이런 것들은 진정한 창조를 위한 충분한 조건이다. ‘가능한 것’은 오히려 이 새로운 것이 시간에 의해 나타난 후 ‘사후적으로’ 정립되는 것 일뿐이다. 가능성을 닮은 것이 실재가 아니라, 실재를 닮은 것이 바로 가능성이다. 음악가의 작곡 이전에 그것이 가능했을지 묻는 일은 무의미하다. 우리는 언제나 모든 주장들을 소급적인 결과를 부여하며, 일종의 진리의 역행운동을 행한다. 이러한 회고의 논리가, 진정한 창조적 진화로서 지속을 보지 못하도록 막아왔다. 그리고 베르그손이 가능성 개념을 비판한 것은 이 사후적인 논리를 비판하기 위한 것이었지, 잠재성 개념을 적극적으로 내세우기 위함이 아니었다. 한마디로 들뢰즈가 말하는 가능성은 유사성과 제한 법칙에 의해서 실현되는 것이기에 얼마간의 실재성을 갖기는 하지만, 베르그손이 말하는 가능성은 실재성과 대립되는 거짓 개념,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다.  


 무엇보다도 문제는 시간이다. 기존의 철학은 시간을 공간과 같은 것으로 간주해왔다. 베르그손의 말처럼, 기존의 철학자들 중 어느 누구도 진정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한 컵의 설탕물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설탕이 녹을 때까지 기다려야만 한다(PM, 12). 이 시간의 고유한 역할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잠재성과 현실성의 구분은 종종 모호한 것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순수 기억, 그리고 끊임없이 변화하고 과거를 현재 안으로 밀어넣는 시간, 순수 과거가 현실화하는 수축과 이완의 두 운동 경향만으로도 베르그손의 철학은 충분히 유의미하게 이야기될 수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베르그손의 저작




Henry Bergson, Essai sur les données immédiates de la conscience. PUF, 1889(국역 : 앙리 베르그손,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에 관한 시론』, 최화 옮김, 아카넷, 2001).




Henry Bergson, Matière et Mémoir, PUF, 1896(국역 : 앙리 베르그손, 『물질과 기억』, 박종원 옮김, 아카넷, 2005).




Henry Bergson, L'Evolution créatrice, PUF, 1907(국역 : 앙리 베르그손, 『창조적 진화』, 황수영 옮김, 아카넷, 2005).




Henry Bergson, La pensée et Le mouvant, Paris : Quadrige/PUF, 1998(국역 : 앙리 베르그송, 『사유와 운동』, 이광래 옮김, 문예출판사, 1993).




앙리 베르그손,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 송영진 옮김, 서광사, 1998.








들뢰즈의 저작 및 2차 문헌




질 들뢰즈, 「베르그손, 1859~1941」,『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박정태 옮김, 이학사, 2007.




질 들뢰즈, 「베르그손에게 있어서의 차이의 개념」,『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박정태 옮김, 이학사, 2007.




질 들뢰즈, 『베르그송주의』, 김재인 옮김, 문학과 지성사, 1996.




질 들뢰즈, 『차이와 반복』, 김상환 옮김, 민음사, 2004.




알랭 바디우, 『들뢰즈 - 존재의 함성』, 박정태 옮김, 이학사, 2001.




John Mullarkey, Bergson and Philosophy, Edinburgh : Edinburgh University Press, 1999.




Frédéric Worms, Le vocabulaire de Bergson, Paris : Ellipses, 2000.




Frédéric Worms, “matter and memory on mind and body”, John Mullarkey ed. New Bergson, Manchester: Manchester University Press, 1999.




김재희, 『베르그송의 무의식 개념에 대한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05.




박홍규,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 강독』, 민음사, 2007.




황수영, 『근현대 프랑스철학』, 철학과 현실사, 2005.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1권, 백종현 옮김, 아카넷, 2006.




저자 미상, 「강도 개념 연구 노트」(http://veines.egloos.com/503963).









1) 가령 바디우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들뢰즈는 베르그송을 탁월하게 독해하고 있는 바, 내가 보기에는 베르그송이야말로 스피노자보다 더한, 그리고 아마도 니체보다 더한 그의 진정한 스승이다.” 알랭 바디우, 『들뢰즈 - 존재의 함성』, 박정태 옮김, 이학사, 2001, p. 103. 이외에도 베르그손과 들뢰즈의 연속성을 부각시키면서 들뢰즈의 철학을 잠재성의 철학으로 해석하려는 대표적인 시도로는 마누엘 데란다, 『강도의 과학과 잠재성의 철학』, 이정우 외 옮김, 그린비, 2009 등의 책을 참조할 수 있다. 그러나 이하의 내용에서 밝혀지겠지만, 벵상 데꽁브가 지적한 바와 같이, 들뢰즈는 어떤 의미에서 후기-칸트주의자에 훨씬 가깝다.  




2) 질 들뢰즈, 『베르그송주의』, 김재인 옮김, 문학과 지성사, 1996, p. 15. 그리고 PM, 20도 참조.




3) Henry Bergson, Essai sur les données immédiates de la conscience. PUF, 1889, p. 3, 앙리 베르그손,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에 관한 시론』, 최화 옮김, 아카넷, 2001, p. 20. 이하에서는 약호 DI와 함께 국역과 원본의 쪽수를 같이 표기.




4) Henry Bergson, Matière et Mémoir, PUF, 1896, p. 250, 앙리 베르그손, 『물질과 기억』, 박종원 옮김, 아카넷, 2005, p. 370. 이하에서는 약호 MM과 함께 국역과 원본의 쪽수를 같이 표기.




5) 질 들뢰즈, 『베르그송주의』, 김재인 옮김, 문학과 지성사, 1996, p. 127.




6) Henry Bergson, La pensée et Le mouvant, Paris : Quadrige/PUF, 1998, pp. 196~7. 이하의 인용에서 이 책은 괄호 안에 PM이라는 약호와 더불어 쪽수를 표기.




7) 질 들뢰즈, 「베르그손에게 있어서의 차이의 개념」,『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박정태 옮김, 이학사, 2007, p. 345.




8) 질 들뢰즈, 「베르그손, 1859~1941」,『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박정태 옮김, 이학사, 2007, p. 293.




9) 질 들뢰즈, 「베르그손에게 있어서의 차이의 개념」,『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박정태 옮김, 이학사, 2007, p. 326.




10) 질 들뢰즈, 「베르그손에게 있어서의 차이의 개념」,『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박정태 옮김, 이학사, 2007, p. 347.




11) 질 들뢰즈, 『차이와 반복』, 김상환 옮김, 민음사, 2004, pp. 476~477. 이하에서는 괄호 안에 DR이라는 약호와 쪽수만을 표기.




12)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1권, 백종현 옮김, 아카넷, 2006, pp. 405~406(B207~208).




13) 이 장의 몇몇 아이디어들, 이원론/일원론과 지속의 해석 등은 수업에서의 토론과 박홍규, 황수영 등의 2차 문헌 외에도 베르그손과 들뢰즈의 불연속성을 강조하는 저자 미상의 「강도 개념 연구 노트」에 크게 힘입었음을 밝혀둔다. http://veines.egloos.com/503963 참조.




14) 질 들뢰즈, 『베르그송주의』, 김재인 옮김, 문학과 지성사, 1996, p. 127.




15) 황수영, 『근현대 프랑스철학』, 철학과 현실사, 2005, p. 385.




16) Frédéric Worms, Le vocabulaire de Bergson, Paris : Ellipses, 2000, p. 36의 Intensité 항목 참조.  보름스는 강도를 가리켜 유연한 개념concept souple이라고 부른다.




17) "어떤 양이 다른 양보다 너무 커서 후자가 전자와의 관계에서 볼 때 무시될 수 있다면, 수학자들은 그 큰 양을 다른 차원의 것이라고 말한다. 사회적인 의무도 마찬가지이다. 이 의무의 압력을 다른 습관과 비교해 볼 때, 그 정도의 차이는 본성의 차이에 상당한다" 앙리 베르그손,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 송영진 옮김, 서광사, 1998, p. 17. 또한 John Mullarkey, Bergson and Philosophy, Edinburgh : Edinburgh University Press, 1999, p. 143.




18) Frédéric Worms, 위의 책, 같은 곳.




19) 게다가 베르그손의 입장을 데카르트 식의 고전적인 이원론, 텐느 식의 유물론, 버클리 식의 유심론 등과 등치시키는 것도 지지될 수 없는 주장이다. 베르그손의 철학은 어떤 일원론이나 이원론으로 단순히 치부될 수 없으며, ‘차이’의 철학인 동시에 ‘내재성’immanence의 철학이다. Frédéric Worms, “matter and memory on mind and body”, John Mullarkey ed. New Bergson, Manchester: Manchester University Press, 1999, pp. 96~97.  




20) 질 들뢰즈, 『베르그송주의』, 김재인 옮김, 문학과 지성사, 1996, p. 43.




21) 질 들뢰즈, 『베르그송주의』, 김재인 옮김, 문학과 지성사, 1996, p. 123.




22) Henry Bergson, L'Evolution créatrice, PUF, 1907, p. 201. 앙리 베르그손, 『창조적 진화』, 황수영 옮김, 아카넷, 2005, p. 302 이하에서는 약호 EC와 함께 국역과 원본의 쪽수를 표기.




23) 박홍규,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 강독』, 민음사, 2007, pp. 53~55. 이 대목에서 김진성에 의해 지적된 강도 개념의 애매성은 곧바로 베르그손의 철학을 이원론으로 볼 것이냐 또는 일원론으로 볼 것이냐 하는 질문을 야기한다. 그러나 박홍규에 의하면 베르그손의 철학은 결코 일원론으로 해석될 수 없다. 베르그손에서는 이원론적인 구별, 생물/무생물, 수동성/능동성의 구분이 결코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이원적인 것은 서로 접촉하지만, 수동성없는 능동성은 결코 없으며, 능동성은 항상 자신의 타자에 대한 능동성이 된다. 박홍규는 베르그손을 기능function의 철학, 정신이 물질이라는 타자와 항상 관계하는 철학이라고 설명한다.




24) 질 들뢰즈, 『베르그송주의』, 김재인 옮김, 문학과 지성사, 1996, p. 136.




25) 황수영, 위의 책, p. 398.




26) 바디우는 들뢰즈의 플라톤주의를 뒤집기가 오히려 잠재적인 것에 관한 플라톤주의로 귀착되지 않느냐고 질문한다. 즉 들뢰즈는 탈기초와 바닥없는 바닥, 시뮬라크르 등을 논하지만 결국 기초로서 잠재성이라는 범주를 요청하고, 이 잠재성은 “일종의 초월성”을 간직한다는 것이다. 알랭 바디우, 『들뢰즈 - 존재의 함성』, 박정태 옮김, 이학사, 2001, pp. 111~112. 바디우의 들뢰즈 해석 더 나아가 베르그손 해석의 전반적인 쟁점을 논하는 것은 이 글의 범위를 넘어선다. 하지만 잠재성 범주가 비실재성, 비결정성, 비객관성과 분간 불가능해지고, 결국 목적성과 마찬가지로 어떤 “무지의 도피처”(위의 책, p. 127)일 수 있다는 언급은 새겨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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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 모든 것들을 이해할 수 있다고 자부했던 적이 있었다. 세상 어디에도 장애물은 없는 것 같았고, 내가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조금만 더 노력을 기울이면 어떤 무엇이라도 나에게 명증한 의미로 와 닿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무모하리만큼 자신 있게 세상과 맞부딪치려 했었다. 누구를 만나도 기죽지 않고, 누구와 대화해도 겁먹지 않으려고 했다. 상대가 의아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볼 때에도, 내가 그를 이해하지 못해 그런 것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그랬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돌이켜보건대, 내가 자신 있게 부딪쳤던 세상은 내가 감각할 수 있는 범위 내의 세상에 불과했다. 내 망막에 맺혔지만 볼 수 없었던 것, 내 고막을 진동시켰지만 소음에 불과했던 것들이 있었다. 그런 것들을 삭제한 채, 나는 내가 알 수 있는 좁디좁은 영역 내에서만 절대자로 군림했던 것이다. 그것이 마치 전부인 것처럼, 나의 감각능력은 세상의 모든 사물들의 본질에 가닿을 수 있었던 것처럼. 이런 깨달음 후에, 내 감각의 사각지대를 찾기 위해 걷잡을 수 없이 치달아보기도 했다. 사람이든 책이든 무엇이든 부여잡고 나의 한계를 넘어서려고 했다.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다. 답답하고 오만한 자신을 버리고, 세계로 무한히 개방된 열린 신체가 되고 싶었다. 문득문득 그런 순간이 도래하는 것도 같았다. 내 몸이 한순간에 비약하는 것도 같았다.  

 

 그런 순간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 경험을 통해 나는 오히려 다른 깨달음을 얻었다. 자기 식대로 자기 세계를 구성하는 것, 이것이 인간의 인식능력이 가진 실존적 조건이라는 것을. 누구도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완전히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인간은 누구나 자기 식대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을 말이다. 내가 나의 감각능력의 한계라고 느꼈던 것은 사실 나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누구나 그렇다. 누구나 자기 식대로 세상을 바라보고, 자신의 경험과 감각에 의존하여 판단하고 행동한다. 자기 자신을 만들어온 수많은 경험과 기억을 통해 지금의 감각방식이 정해질 따름이다. 사람마다 자신이 그려온 궤적이 다르기 때문에, 보고, 듣고, 느끼고, 말하는 방식은 누구나 다르다. 각자 고유한 방식을 가질 뿐이다. 이를 두고 인간이 덜 됐느니 한탄하는 것은, 자아성찰의 계기는 될 수 있을지언정 초인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진 않는다.  

 

 이 깨달음은 망각하고 있었던 다른 경험을 떠올리게 했다. 무의식중에 내가 기억하고 있던 어떤 사실들, 어떤 이야기들, 어떤 장면들이, 그 자체로 전혀 이해되지 않은 채로 내 기억 속에서 잠복하고 있다가 어느 순간에 명증한 사실로 내 앞에 나타났던 적이 있다. 말하자면 이전의 감각 방식으로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이 타자(他者)로만 존재하던 것이, 어떤 계기를 통해 나에게 주어짐으로써 내 감각 방식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았던 것이다. 나의 인식 능력 밖에 있던 것, 내가 세상을 구성하는 방식과 다른 방식이었던 것, - 그러므로 타자일 수밖에 없는 것 - 이 나에게 기입됨으로써 나의 인식능력은 침입받고 어그러졌으며 혼란에 빠졌다. 이 경험은 당혹스러우면서도 달콤했다. 나는 위태로운 지경에 내몰리면서도 또 다른 세계로 한걸음 내딛었던 것이다. 나는 더 이상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세상과 소통하던 내가 아니게 되었다.  

 

 성급하고 섣부르게도, 나는 그제서야 타자가 무엇인지, 타자와 조우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타자는 근본적으로 위협적이다. 타자는 나만의 고유한 세계를 헝클어뜨리며 침범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두 가지 방법으로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는 타자를 내치는 것이다. 내 세계에 불법침입한 이방인을 다시 미지의 세계로 돌려보내는 것. 이를 통해 나는 다시금 나의 안전한 세계에 안주할 수 있겠지만, 안전함은 머무름에 불과하며, 성장의 가능성을 삭제하고 나서야 겨우 얻어질 뿐이다. 두 번째로 타자를 환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무조건적인 환대.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나 자신이 스스로 으깨질 수 있음을 감수하고서라도, 타자를 향해 자신을 개방하는 것이다. 위험한 외줄타기는 온 몸의 감각 방식을 뒤흔들어놓지만, 줄 위의 자신을 여유롭게 가눌 수 있을 때가 되면, 나는 한 차례 성장해 있을 것이다. 적어도 이전보다 더 많은 소통가능성을 지닌 내가 될 것이다.  

 

 나는 후자의 방식을 통해 스스로 성장한다는 느낌을 가지고 싶다. 그 느낌은 무섭도록 매혹적이다. 물론 이는 사회의 지배적 가치가 어떠하냐에 따라 전혀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누군가의 말을 빌리자면 (그 누군가의 용법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약한 의미겠지만) 몰락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의 인식능력에 대한 절절한 통찰과 타자론에 대한 성찰없이, 우리는 도대체 누구와 제대로 소통할 수 있단 말인가. 자유주의적 테이블은 스스로 경계가 뚜렷한, 완결된 공간이 아니다. 매끄러운 경계는 무수히 많은 타자들을 배제함으로써만 가능할 뿐이다. 늘 언제나 타자(단지 사람만이 아닌)가 존재할 수 있음을 자각하는 것, 그리고 언제나 특정한 방식으로만 감각하는 자신을 타자에게 개방하고 타자를 환대하는 것, 이 타자론은 겸손하고 소박하다. 하지만 이는 다른 어떤 방식보다도 의미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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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일 신문을 펴들 때마다 눈살이 찌뿌려지는 건 이제 습관이 될 것 같다. 언제는 안 그랬던 건 아니지만, 이제는 이 씁쓸함과 짜증에 너무 익숙하다. 너무 몸에 배어버려, 세상이 원래 이런거지..식의 타성에 젖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한나라당이 '국회선진화법안'을 입법하겠다고 나섰단다. 제목도 멋지다. 여기에는 '국회폭력방지법'과 '국회질서유지법'이 있는데, 이 안에 따르면 "국회 내에서 심의, 의결을 방해할 목적으로 폭행한 경우 1년 이상 ~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하는 '가중처벌' 조항이 포함"됐으며, "국회의장의 경찰공무원 지휘권을 신설해 회의장을 제외한 국회 내 모든 곳에 경찰력을 동원할 수 있도록 규정"했단다.  

 그래서 사실상 과반 의석을 차지한 정당이 마음만 먹으면 어떠한 법률이라도 통과시키게 됐다는 것. 한나라당의 속셈이 뭔지는 뻔히 보인다. 

 요즘 들어 유독 (국민이든 시민이든 대중이든 다중이든 뭐든..) 우리가 '정치'적 역량을 행사할 수 있는 '통로'가 전무하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투표'만이 유일하다. 거리정치만을 긍정하고 대의제를 무시하는 행태 속에서 우리는 거리정치와 대의정치간의 연결 고리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직접 민주주의는 늘 언제나 좋고 대의제는 항상 나쁜 것인가? 이 간극 속에서 우리가 거리 의외의 장소에서 정치에 개입하는 길은 거의 차단되어 버렸다. 이는 한국인의 특성이 냄비뚜껑이라 항상 타올랐다가 확 식어버리기 때문이 아니라, 확 타올랐을 때의 힘을 응고시키면서 제도적 형태으로 번역해 내는 능력이 일천하기 때문이다. [MB를 사람들이 직접 뽑았기 때문에 그가 하는 모든 것을 긍정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면, MB를 꾸준히 견제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 언제는 우리는 바른 선택을 하진 않는다. MB를 뽑은 것 자체를 두고 사람들이 미쳤다는 등 말을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문제는 우리가 영속적으로 우리 삶의 조건을 스스로 결정지을 수 있느냐의 문제, 제도적으로는 MB를 견제할 수 있느냐의 문제가 아닐까.]

 MB와 한나라당이 벌이는 작태들에 대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감각하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MB의 지지율이 50%가 넘는다고 해서 이따위 법안에 대해서 아무런 반응도 없진 않을 것이다. 이처럼 복수의 인간들을 일자로 포섭하려는 시도는 늘 미수에 그치고 만다는 점도 분명하다. 그렇지만 대규모 집회가 아니라 다른 경로를 통해서 이를 제어할 수 있는 길이 없는 한, 우리는 매일 되풀이되는 무료한 삶 속에서 푸념하듯 안주거리삼아 국회의원들을 씹을 뿐이다. [사실 어떤 경로가 있는지 확실히 모른다. 법, 제도를 공부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너무 법이나 제도에 집착한다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사실 다음 아고라 등의 인터넷 공간에서의 활발한 활동이나 시민단체들의 여러 활동이 있다는 점을 부정할 순 없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국가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국회나 행정부 등의 제도 등에서도 이런 통로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최근의 한국 정치 현실에는 그 통로나 틈새가 전혀 보이질 않는다. 내가 무지한 것이길 바랄 뿐이다.]  

 국회선진화법안으로 돌아와 보자. 이 입법은 다분히 모순적이다. 한나라당 국회의원들은 어쨌든(민주주의의 근간인)국민의 대표이지만, 국민의 대표를 경찰력으로 제어할 수 있는 제도를 스스로 도입하려 한다. 그들은 국민의 대표가 더 이상 국민의 대표가 아니라 국회 안에서 정치 자원들을 갈라먹는 이해관계의 조정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스스럼없이 시인하고 있다. 부끄럽지도 않은가. 이처럼 국민의 대표라고 불리는 이들마저 민주주의의 당연한 원리를 부정할 때, 우리는 민주주의적 정치의 가능성 자체를 잃는다. 특히나 이들을 제어할 제도적 장치가 없을 때는 더더욱 그렇다.  

 대의제를 통해서도 대중들의 역량이 발휘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렇게 될 수 없다면 우리에게 정치는 불가능하다. 정치의 근간을 뒤흔드는 MB와 한나라당의 공세에 대해 다시금 정치를 재발명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한국만큼 대중들의 정치적 자율성이 두드러지는 곳도 없지만, 한국만큼 탈정치화가 두드러지는 곳도 없는 것 같다. 이 간극을 줄일 수 있길 소망한다. 그리고 이 따위 악법은 사라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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