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 재미있었음..!  

써둔 게 있어서 올려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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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트가 만들어낸 새로운 생명체?


영화 <공각기동대>가 보여주는 존재론은 기본적으로 데카르트 식의 이분법에 기초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고스트로 대변되는 정신 혹은 주체의 영역과 전뇌/의체로 대변되는 신체 혹은 객체의 영역이라는 두 부분이다. 여기서는 근본적으로 전뇌/의체에 대한 고스트의 우위가 상정된다. 전뇌나 의체는 공장에서 대량생산이 가능하고 언제라도 수리/교체가 가능한 것이다. 이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의미할 수 없으며, 고스트가 들어가야 그 사이보그는 비로소 하나의 인격이 될 수 있다.
이 전제 하에서는 고스트가 해킹당할 경우 필연적으로 인격 자체가 부정된다. “의사체험”을 하고 “모의 인격”이 되어버린 사이보그는 그 자신을 어떤 방식으로도 인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쿠사나기는 질문한다. “만약 전뇌 그 자체가 고스트를 만들어내고 혼을 깃들인다고 하면, 그때는 뭘 근거로 자신을 믿어야 한다고 생각해?”
그런데 쿠사나기가 자신의 존재를 탐구하면서 던지는 질문들은, 오히려 이 영화의 전제 자체를 뒤흔드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이 자신이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은 “타인과 구별하기 위한 얼굴, 그리고 의식하지 않는 목소리, 눈 뜰 때 응시하는 손, 어렸을 때의 기억, 미래의 예감”을 포함한다. 이 모든 것들은 신체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 아닌가? 이처럼 쿠사나기는 신체에 각인된 습관이나 기억을 자신을 구성하는 요소로 파악한다.
그녀(라고 부를 수 있을까?)는 이를 넘어 더 나아간다. “내 전뇌가 액세스할 수 있는 방대한 정보와 네트의 넓이, 그것들 전부가 내 일부이고 나란 의식 그 자체를 만들어내고 그리고 동시에 나를 어떤 한계로 계속 제약”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다른 어떤 것과 접속하여 주고받는 영향들 및 그 결과로서의 변이 양상 전부를 자신의 것으로 간주한다. 이는 단순히 물리적인 접촉뿐만 아니라 네트에서의 모든 정보교환행위를 포괄한다.
그런데 그녀가 자신의 존재를 이런 방식으로 규정한다면, 이것은 이미 신체를 단순히 정신의 ‘대상’으로 파악하는 것을 넘어서는 것이 아닌가? 이런 점에서 쿠사나기의 혼란은 자신의 생각과 동시대의 기술력 사이의 괴리, 혹은 그 기술력이 전제하고 있는 이분법과의 괴리에서 나오는 것 같다. 영화에서 전뇌와 의체는 기술적으로 언제나 교환 가능한 것으로 묘사된다. 그러기에 쿠사나기가 얼마 동안 지녔던 신체(의체)가 가진 습관과 적응성을 자신의 것으로 간주한다면, 자신의 전뇌나 의체가 바뀌어버릴 경우 그녀는 자신(혹은 자신의 일부)을 잃는 셈이다.
이처럼 신체를 대체가능한 것으로 만들어버린 기술적 성취 위에서, 쿠사나기의 의문에 대해 답하는 것은 ‘생명’ 자체에 대한 새로운 정의 없이는 불가능해 보인다. “대사의 제어, 지각의 예민화, 운동 능력계 반사의 비약적인 현상, 정보처리의 고속화와 확대…전뇌와 의체를 통해 더욱 고도의 능력 획득을 추구”할 수 있게 된 새로운 신체(전뇌/의체)는 이전의 유기체적 인간의 신체 능력을 훨씬 뛰어넘고 있다. 그러기에 이제는 이전의 유기체적 생명 개념으로 돌아갈 수 없다. 오히려 유기체적 혹은 기계적 신체라는 개념을 벗어난 존재로서 생명을 정의해야 한다.
‘인형사’라는 존재가 제시하는 생명관이 이에 부합하는 듯 보인다. 그는 자신을 “정보의 바다에서 발생한 생명체”라고 규정하고, “생명이란 정보의 흐름 속에서 태어난 결접점과 같은 것”이라 말한다. 인형사는 신체라는 규격, 틀을 벗어난 새로운 생명이며, 정보의 바다에서 자유롭게 흘러다니며 끊임없이 변모해 나가는 존재이다. 마치 태초의 생명체가 바다에서 태어나 진화하며 지구의 곳곳에 퍼져나가는 것처럼, 네트라는 바다에서도 마찬가지로 유기체가 아닌 디지털화된 생명체가 탄생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영화의 막바지에 이르러 어쩌면 당혹스럽다고도 볼 수 있는 부분이 나온다. 인형사는 쿠사나기에게 접근하여 쿠사나기와의 합일을 원한다. 쿠사나기의 신체 없이는 “자손을 남기고 죽음을 얻는 생명으로서의 기본과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형사는 개성이나 다양성을 얻기 위해서는 이 기본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기본적으로 개성이나 다양성은 유성생식의 특징이자 장점이다. 정자와 난자가 만나 다양한 형질을 가진 자손을 만들어냄으로써 환경에 대한 적응성을 높이고 개체의 생존률을 높이는 것이다. 인형사가 '생식‘이라는 생물학적인(말하자면 신체에 관련된) 과정을 필요로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쿠사나기의 의체는 이런 생식이 가능한 구조인가? 오히려 이 목적을 위해서라면 순도 높은 오리지널 인간의 신체를 택해야 하는 게 아닐까?
인형사가 보여주는 새로운 생명은 오히려 그 자체로 네트 상에서 생성·변이하는 존재로 상정되는 게 더 타당해 보인다. 영화의 마지막에 던져지는 한마디, “네트는 광대해”라는 말이 더 무게를 가지려면, 네트 안에서 수많은 변종을 만들어내며 번식해가는 인형사의 변종들이 그 자체로 긍정될 수 있어야 할 것 같다. 흐름으로써만 존재하는 비신체적 생명. 어쩌면 (영화의 전제를 따른다면) 의체는 시시각각 변해가는 이 생명들이 단지 순간순간 자신을 표현해내는 ’수단‘에 그친다고 보는 게 옳지 않을까?
이 영화는 기술의 발전에 따라 유기체 생명을 뛰어 넘은 고도의 능력을 갖춘 기계-생명이 출현하고, 이어 그보다 더 진화된 네트-생명이 출현하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다. 기술의 발전이 만들어낼 수 있는 미래의 모습에서 ‘생명’개념이 변화해 나가는 양상에 대해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는 셈이다. 그러나 그 문제의식에 비해서는 애초의 출발점인 유기체 생명에 대한 철학적 통찰이 좀 부족하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인형사라는 ‘애매한’ 존재는 데카르트의 이분법이 가진 난점을 해결하지 않은 채 기술적 한계만을 극한으로 밀어붙인 결과 맞닥뜨린 아포리아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기술의 고도 발전과 확장된 네트의 영역에 힘입은 새로운 생명체에 대한 상상을 가능하게 해준다는 점에도 불구하고, 조금은 미흡한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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