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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미국에서 꽤나 유명한 정치철학자인 마이클 샌델의 책이다 

이 책이 베스트 셀러가 될 줄은 몰랐다; 

이 책의 최대 장점은 구체적인 사례를 많이 들어 정의에 대한 여러 이론들을 비교적 쉽게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하겠다.

하지만 이 책은 개인주의적 사고가 팽배한 미국을 배경으로 한 정치철학이기 때문에 저자가 염두에 두고 있는 현실이 우리와 꽤 다를 수 있다는 점은 조심해야 할 것이다. 주로 이 책에서는 칸트, 롤즈를 비판하고 아리스토텔레스에 가까운 입장을 펴는데, 저자의 결론은 우리가 보기에는 어쩌면 너무 당연한 얘기일 수도 있다. 정의를 사고하는 데 있어 당연히 가치문제가 개입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러나 미국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 지배적이기 때문에 저자의 주장은 미국 내에서는 꽤 반향이 클 것이다.  

어쨌든 정치철학을 다룬 책이 베스트 셀러가 됐다는 사실은 기쁘지만, 이 책이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지는 잘은 모르겠다.. 다만 한국에서는 이런 강의가 많이 개설되면 좋겠다는 생각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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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 재미있었음..!  

써둔 게 있어서 올려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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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트가 만들어낸 새로운 생명체?


영화 <공각기동대>가 보여주는 존재론은 기본적으로 데카르트 식의 이분법에 기초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고스트로 대변되는 정신 혹은 주체의 영역과 전뇌/의체로 대변되는 신체 혹은 객체의 영역이라는 두 부분이다. 여기서는 근본적으로 전뇌/의체에 대한 고스트의 우위가 상정된다. 전뇌나 의체는 공장에서 대량생산이 가능하고 언제라도 수리/교체가 가능한 것이다. 이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의미할 수 없으며, 고스트가 들어가야 그 사이보그는 비로소 하나의 인격이 될 수 있다.
이 전제 하에서는 고스트가 해킹당할 경우 필연적으로 인격 자체가 부정된다. “의사체험”을 하고 “모의 인격”이 되어버린 사이보그는 그 자신을 어떤 방식으로도 인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쿠사나기는 질문한다. “만약 전뇌 그 자체가 고스트를 만들어내고 혼을 깃들인다고 하면, 그때는 뭘 근거로 자신을 믿어야 한다고 생각해?”
그런데 쿠사나기가 자신의 존재를 탐구하면서 던지는 질문들은, 오히려 이 영화의 전제 자체를 뒤흔드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이 자신이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은 “타인과 구별하기 위한 얼굴, 그리고 의식하지 않는 목소리, 눈 뜰 때 응시하는 손, 어렸을 때의 기억, 미래의 예감”을 포함한다. 이 모든 것들은 신체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 아닌가? 이처럼 쿠사나기는 신체에 각인된 습관이나 기억을 자신을 구성하는 요소로 파악한다.
그녀(라고 부를 수 있을까?)는 이를 넘어 더 나아간다. “내 전뇌가 액세스할 수 있는 방대한 정보와 네트의 넓이, 그것들 전부가 내 일부이고 나란 의식 그 자체를 만들어내고 그리고 동시에 나를 어떤 한계로 계속 제약”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다른 어떤 것과 접속하여 주고받는 영향들 및 그 결과로서의 변이 양상 전부를 자신의 것으로 간주한다. 이는 단순히 물리적인 접촉뿐만 아니라 네트에서의 모든 정보교환행위를 포괄한다.
그런데 그녀가 자신의 존재를 이런 방식으로 규정한다면, 이것은 이미 신체를 단순히 정신의 ‘대상’으로 파악하는 것을 넘어서는 것이 아닌가? 이런 점에서 쿠사나기의 혼란은 자신의 생각과 동시대의 기술력 사이의 괴리, 혹은 그 기술력이 전제하고 있는 이분법과의 괴리에서 나오는 것 같다. 영화에서 전뇌와 의체는 기술적으로 언제나 교환 가능한 것으로 묘사된다. 그러기에 쿠사나기가 얼마 동안 지녔던 신체(의체)가 가진 습관과 적응성을 자신의 것으로 간주한다면, 자신의 전뇌나 의체가 바뀌어버릴 경우 그녀는 자신(혹은 자신의 일부)을 잃는 셈이다.
이처럼 신체를 대체가능한 것으로 만들어버린 기술적 성취 위에서, 쿠사나기의 의문에 대해 답하는 것은 ‘생명’ 자체에 대한 새로운 정의 없이는 불가능해 보인다. “대사의 제어, 지각의 예민화, 운동 능력계 반사의 비약적인 현상, 정보처리의 고속화와 확대…전뇌와 의체를 통해 더욱 고도의 능력 획득을 추구”할 수 있게 된 새로운 신체(전뇌/의체)는 이전의 유기체적 인간의 신체 능력을 훨씬 뛰어넘고 있다. 그러기에 이제는 이전의 유기체적 생명 개념으로 돌아갈 수 없다. 오히려 유기체적 혹은 기계적 신체라는 개념을 벗어난 존재로서 생명을 정의해야 한다.
‘인형사’라는 존재가 제시하는 생명관이 이에 부합하는 듯 보인다. 그는 자신을 “정보의 바다에서 발생한 생명체”라고 규정하고, “생명이란 정보의 흐름 속에서 태어난 결접점과 같은 것”이라 말한다. 인형사는 신체라는 규격, 틀을 벗어난 새로운 생명이며, 정보의 바다에서 자유롭게 흘러다니며 끊임없이 변모해 나가는 존재이다. 마치 태초의 생명체가 바다에서 태어나 진화하며 지구의 곳곳에 퍼져나가는 것처럼, 네트라는 바다에서도 마찬가지로 유기체가 아닌 디지털화된 생명체가 탄생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영화의 막바지에 이르러 어쩌면 당혹스럽다고도 볼 수 있는 부분이 나온다. 인형사는 쿠사나기에게 접근하여 쿠사나기와의 합일을 원한다. 쿠사나기의 신체 없이는 “자손을 남기고 죽음을 얻는 생명으로서의 기본과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형사는 개성이나 다양성을 얻기 위해서는 이 기본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기본적으로 개성이나 다양성은 유성생식의 특징이자 장점이다. 정자와 난자가 만나 다양한 형질을 가진 자손을 만들어냄으로써 환경에 대한 적응성을 높이고 개체의 생존률을 높이는 것이다. 인형사가 '생식‘이라는 생물학적인(말하자면 신체에 관련된) 과정을 필요로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쿠사나기의 의체는 이런 생식이 가능한 구조인가? 오히려 이 목적을 위해서라면 순도 높은 오리지널 인간의 신체를 택해야 하는 게 아닐까?
인형사가 보여주는 새로운 생명은 오히려 그 자체로 네트 상에서 생성·변이하는 존재로 상정되는 게 더 타당해 보인다. 영화의 마지막에 던져지는 한마디, “네트는 광대해”라는 말이 더 무게를 가지려면, 네트 안에서 수많은 변종을 만들어내며 번식해가는 인형사의 변종들이 그 자체로 긍정될 수 있어야 할 것 같다. 흐름으로써만 존재하는 비신체적 생명. 어쩌면 (영화의 전제를 따른다면) 의체는 시시각각 변해가는 이 생명들이 단지 순간순간 자신을 표현해내는 ’수단‘에 그친다고 보는 게 옳지 않을까?
이 영화는 기술의 발전에 따라 유기체 생명을 뛰어 넘은 고도의 능력을 갖춘 기계-생명이 출현하고, 이어 그보다 더 진화된 네트-생명이 출현하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다. 기술의 발전이 만들어낼 수 있는 미래의 모습에서 ‘생명’개념이 변화해 나가는 양상에 대해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는 셈이다. 그러나 그 문제의식에 비해서는 애초의 출발점인 유기체 생명에 대한 철학적 통찰이 좀 부족하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인형사라는 ‘애매한’ 존재는 데카르트의 이분법이 가진 난점을 해결하지 않은 채 기술적 한계만을 극한으로 밀어붙인 결과 맞닥뜨린 아포리아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기술의 고도 발전과 확장된 네트의 영역에 힘입은 새로운 생명체에 대한 상상을 가능하게 해준다는 점에도 불구하고, 조금은 미흡한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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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iberal Tradition in America (Paperback, 2)
Hartz, Louis / Mariner Books / 199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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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로 본 건 아니고... 

백창재 선생님께서 초벌번역하신 것을 보고 서평을 써둔 게 있어 올려본다 

미국의 자유주의를 이해함에 있어 큰 도움이 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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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주의, 타자(他者)와 소통하기 위하여
-루이스 하츠의 『미국의 자유주의 전통』을 읽고



1. 들어가며

저자인 루이스 하츠는 이 책 『미국의 자유주의 전통』에서, 독립혁명 이후 미국의 역사를 자유주의라는 키워드로 읽어내고 있다. 그에게 미국의 자유주의 전통은 미국에서 유일한 이데올로기였던 자유주의가 비합리적 자유주의인 미국주의로 변모해 가는 과정이다. 미국주의는 자유주의의 탈을 썼으나 타인의 자유를 빼앗고 자신의 자유도 억압하고 있는 이상한 자유주의이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명확하게도 이 미국주의를 극복하는 것이다. 미국주의는 세계 속에 개입해야만 하는 상황에 이른 미국을 세계와 소통할 수 없도록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결론에 이르러 저자는 미국주의가 위협하는 자유세계에 대한 희망을 다시 자유주의에서 찾으려 하고 있다. 이에 나는 이 글에서 결론적으로 저자의 해법이 타당하지 않다는 것을 밝히려고 한다. 이를 위해 미국 자유주의의 사상적 원류인 로크의 사상을 검토하여 미국주의의 문제는 곧 자유주의 그 자체의 문제라는 점을 지적하고, 그 예로서 저자가 미국 자유주의의 역사에서 예외로 치부하는 남부의 봉건적 계몽주의를 보다 자세히 분석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 작업을 통해 저자가 가정하는 미국 내의 자유주의적 합의는 허구적이라는 점을 밝혀낼 것이다.

2. 미국주의의 탄생과 위기

(1) 미국주의의 탄생

저자는 독립 혁명 이후의 미국 역사를 ‘자유주의의 끊임없는 자기 변모 과정’으로 그리고 있다. 그가 보기에 미국의 역사는 자유주의의 역사 그 자체이다. 미국에서는 자유주의만이 유일한 이데올로기였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남부의 반동적 계몽주의, 사회주의, 혁신주의 등의 사상이 출현하여 자유주의에 도전하기도 했으나, 자유주의는 이들을 때로는 집어삼키고 때로는 무참히 짓밟으면서 스스로의 역사를 구성해 왔다. 그 과정에서 자유주의의 내용과 성격이 조금씩 달라졌을 뿐이다.
저자는 자유주의가 미국에서 만개할 수 있었던 이유를 ‘봉건주의의 부재’에서 찾는다. “서구 역사에서 미국 사회를 두드러지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이러한 억압들의 부재이며, 이 억압들에 대한 반발은 넓게 해석하면 곧 자유주의를 의미하므로, 미국 사회가 자유주의적 공동체라는 점이다.”(8) 억압이 부재하다는 것은 혁명이 필요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럽은 프랑스 혁명과 같이 치열한 투쟁을 통해 자유를 쟁취했다. 하지만 미국은 이 비싼 자유를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다.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난’ 것이다. 게다가, 미국은 진정한 의미의 반동 또한 가지고 있지 않았다. 유럽에서는 프랑스 혁명을 부정하는 반동적 움직임이 존재했지만, 미국에서는 돌아가야 할 봉건구조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776년의 미국 헌법은 미국인들에게는 ‘자명한’ 진리가 되었다. 유럽의 자유주의자들이 “원칙들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토록 많을 때 어떻게 원칙들이 자명하다는 것을 설명할 수 있는지 하는 문제를 언제나 지니고 있”(49)었던 데 반해, 미국인들은 자연법적인 도덕적 진리로서 이를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저자는 미국인들의 자유주의 정신을 루소의 일반의지에 상응하는 것이라 평가한다.
모두에 의해 동의된 자유주의는 역설적이게도 진보적인 동시에 보수적이다. 유럽의 봉건적 과거와 단절한다는 의미에서 자유주의는 진보적일 수 있지만, 혁명적 사상을 가지고 태어난 미국인들에게는 혁명이 그 자체로 전통이 되기 때문에 자유주의가 보수적인 것으로 바뀌어 버리기 때문이다. 미국의 자유주의는 돌아가야 할 과거가 없기 때문에, 스스로 진보하지만 그 자체로 보수가 되는 역설에 놓여 있다.
이처럼 스스로 진보와 보수 모두를 감싸 안은 자유주의는 쉽게 미국에서 ‘절대적인’ 자유주의로 나아갈 수 있었다. 역사적으로는, 연방파인 해밀턴주의와 반연방파인 제퍼슨주의가 합쳐지게 되면서,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미국 자유주의 공동체의 두 가지 거대한 전통들의 통일”(87)을 통해 절대적인 자유주의로의 변모가 이루어졌다.
미국 내에서 하나의 절대적인 이념이 되어버린 자유주의, 자유주의적이지 않은 것은 용납하지 않는 기괴한 자유주의, 이것이 바로 “미국주의(Americanism)"(143)이다.

(2) 미국주의의 위기

미국주의는 ‘누구나 평등하기 때문에 자신이 노력만 한다면 성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전 국민에게 강박적으로 주입시킨다. 하지만 저자는 미국주의가 어느 정도 미국인들에게 꿈을 줄 수 있었으며, 효과적인 통치수단으로 기능했다고 여겼다. 미국주의는 “이질적인 결정들을 가로막기 보다는 그러한 결정들이 애초에 만들어지는 것을 막”(156)아줄 수 있었고, 그러기에 “미국은 오래된 주관주의만으로도 잘 지낼 수 있었다”(174)는 것이다. 저자가 보기에 미국은 “상대적 안락과 번영을 구가할 수 있었다”(174).
미국주의에 대한 저자의 시각이 부정적으로 변하는 것은 미국의 세계개입에 이르러서이다. 미국은 20세기에 이르러 세계의 각종 문제에 개입할 수밖에 없게 되는데, 이 상황에서 미국은 스스로가 가진 협소한 지형의 자유주의로 인해 난점에 부딪친다. 저자는 “생소한 것들을 이해할 수 없는 것들과 동일시함으로써 해외에서 창의적인 행동을 가로막으며,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유발하는 불안감을 증대시켜 국내에서는 히스테리를 퍼뜨리는”(192) 미국주의를 보았다. 그는 자유주의와 도저히 공존할 수 없는 매카시즘과 같은 적색공포가 미국을 휩쓴 이유를, 한번도 타자(他者)를 이해해본 적이 없는 미국주의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그에게 미국주의는 극복해야 할 자유주의 내부의 적이 된 셈이다. 그리고 그는 이를 극복할 수 있는 희망을 “미국 자유주의에 내재되어 있는 자신을 초월할 수 있는 능력”(207)에서 찾으려 한다.

3. 미국주의의 극복

자유주의의 미국적 귀결인 미국주의를 넘어서기 위해, 저자는 또다시 자유주의를 불러들인다. 하지만 그가 밝혀온 자유주의의 역사 안에서 미국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미국이 맞닥뜨린 문제는 미국주의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자유주의 자체의 문제라고도 지적되어야 한다. 저자는 미국에서 한 발 떨어져서 객관적으로 자유주의를 조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도 그가 주장한 미국의 자유주의적 합의 안에 존재하고 있다. 저자가 미국의 역사를 읽어내는 방식은 자유주의가 가진 문제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처음부터 자유주의가 가진 자유와 평등을 향유할 자격이 없는 존재들에 대한 배제가 그것이다.
미국 자유주의의 사상적 기반이라고 평가받고 있는 로크주의는 이미 이러한 문제점들을 지니고 있는데, 이는 두 가지 측면에서 지적될 수 있다. 첫째, 로크의 사회계약에서 정치사회의 구성원이 될 자격이 있는 인간은 ‘이성을 갖춘’ 인간들뿐이다. 로크에게서 일정 정도의 ‘이해력’을 갖추지 못한 어린이와 광인, 백치들은 이성을 지닌 후견인을 통해서 대리되어야 하는 존재들이다. 둘째, 로크의 정치사회는 사람들의 재산(property)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런데 이 재산에 생명(life), 자유(liberty)와 함께 자산(estate)이 포함된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스스로가 지켜야 할 부(富)가 없는 무산자의 경우에, 로크식의 사회계약을 맺어 자기 자신의 재산 보존을 꾀할 필요가 있을까?
이렇게 볼 때, 로크의 자유주의를 구성할 수 있는 인간은 이성을 지닌 유산자들밖에 없다. 자유주의는 마치 아무런 제약 없이 모든 인간들에게 무한한 자유를 보장할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처럼 협소한 지평 안에서 자유를 보장할 뿐이다. 로크에게서 자유는 특정집단에게만 적용되는 제한적인 것이었다.
남부의 노예제를 둘러싼 문제는 이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낸다. 저자는 노예제가 미국 내에서 어떠한 정치 사상으로도 정당화할 수 없었기 때문에 스스로 소멸해버릴 수밖에 없었다고 기술한다. 하지만, 흑인 노예들은 애초부터 로크가 상정한 인간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로크주의와의 아무런 모순 없이 자본주의적 이윤을 창출하기 위한 토대로서 미국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 북부의 ‘자유 토지론’이 노예제 폐지를 지지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 서부의 땅은 백인들만의 것이었기에 노예들을 미국 땅에서 쫓아내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서부의 개척지들에 노동을 투여하고 그것을 소유물로 만들 수 있는 권리는 백인에게만 적용되는 것이다. 이것은 로크주의와 아무런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다.
저자는 미국의 자유주의적 합의가 노예제를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남부의 사상은 패배할 수밖에 없었고 역사 속에서 망각되어 버렸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시기에 미국에서 노예제가 사라진 것은 미국만의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 전 세계적인 노예제 반대 운동의 일부였을 뿐이다. 그는 단지 무한한 자유의 공간이었던 미국에서 노예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없었던 것으로 치부해버리고 싶어 할 뿐이다. 보수주의자로써 아직도 유럽에서는 버크의 사상이 유효하지만, 남부의 사상가인 피츠휴는 지금 미국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123)라는 그의 말은 이를 잘 보여준다. 유럽에서 버크가 아직도 읽힐 수 있는 것은 프랑스 대혁명이 유럽사회에 남긴 폭넓은 사상적 지평 덕분이지만, 피츠휴의 노예제는 단지 자유주의의 오점일 뿐이다. 미국사회에서 피츠휴가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가 그렇게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노예제를 설명할 수 있는 ‘자유주의적 이론’이 없었기 때문에, 피츠휴는 예외로 치부하고 망각해 버려야 할 대상이다. 그렇지만 남부의 문제는 미국 자유주의의 역사의 예외라기보다는 처음부터 자유주의의 안에 내재해 있던 본질적인 문제라고 지적되어야 한다.
저자는 미국의 역사를 바라봄에 있어 지나치게 많은 합의만을 관찰 하고 있다. 일반의지라고까지 표현되는 통일된 미국의 자유주의적 정신은 이에 맞지 않는 수많은 것들을 배격한다. 그는 어째서 미국의 세계개입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미국주의의 난점을 발견하게 되는 것일까? 미국주의의 문제는 반드시 외부와의 만남을 통해서만 드러날 수 있었던 것인가? 혁명전통을 결여한 미국이라는 과도한 통일성,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지배에 대한 과도한 믿음이 아니었다면, 그는 미국 내부에서도 이 문제를 충분히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미국 내에 존재한다고 가정되는 ‘합의’는 전제되는 것이 아니라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다. 합의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가지치기를 통해서만 가능했던 합의이다.
저자가 자유주의에 근거해 미국 역사를 재구성하는 과정은 자유주의의 질서 안으로 포섭될 수 없는 이질적 흐름들과의 끊임없는 투쟁이다. 때로는 비미국적인 것으로 매도하고, 때로는 미국주의의 한계를 넘지 못한 것으로 치부하여 자유주의 안에 포섭시켜버리는 과정을 통해, 그는 그의 이론 속에서 국내적으로는 어느 정도 미국주의를 지켜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목도했던 세계 속에서 미국주의의 무능력은 더 이상 지켜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그렇지만 미국주의를 구원하기 위해 자유주의로 다시 돌아가는 것도 더 이상의 해결책이 되지 않는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미국주의의 문제는 자유주의 자체에 내재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유럽사회와 미국사회의 사회사상에 대한 비교분석에서 미국이 어떤 점에서 유럽사회에 다른지에 대해 탁월하게 밝히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유럽의 언어가 아닌 미국의 언어로 미국을 설명해낼 수 있었고, 미국만의 문제점을 찾아낼 수 있었다. “우리는 유럽의 사회문제를 이해하기 쉽지 않고, 따라서 유럽의 사회민주주의조차 우리 자신의 반급진주의 기호에서 해석하려 든다. 우리는 아시아에서 벌어지는 심층적인 사회투쟁에 익숙지 않으며 따라서 심지어 반동적 체제까지도 민주주의적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 비합리적 로크주의(미국주의)를 초월하고 자신에 대한 이해와 타자에 대한 이해를 같이 해야 한다”(205)라는 저자의 서술은 미국주의의 문제에 대한 뛰어난 분석이다. 그렇지만 미국주의가 이해하지 못하는 타자는 어느 곳에나 존재한다. 그것은 미국의 내부와 외부를 가리지 않는다. 계속해서 등장하는 이질적 흐름을 국내적으로 봉합하려는 자유주의적 시도 아래에서 국외적인 미국주의의 대안이 찾아질 리 없다. 더 이상 자유주의적이지 않은 비합리주의 자유주의(미국주의)는, 더 이상 자유주의적이지 않은 새로운 철학에 의해 치유되어야 한다.

4. 나가며

미국의 철학은 빈곤하다. 미국이 비난하듯이, 유럽은 파시즘이라는 아픈 과거를 겪었고, 사회주의 혁명 또한 겪은 혼란한 사회일수도 있다. 하지만 그 과정을 통해 유럽의 사상적 지평은 비교적 폭넓고 다양해졌다. 자유주의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다양하고 복잡한 사회 문제들을 사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저자가 잘 지적했듯이, “좌절은 사회적 열정을 낳지만 안락함은 그렇지 않다”(45). 물론 미국의 안락함은 그 자체만으로도 쉬운 것은 아니었다. 허구적으로 가정된 자유주의적 합의 안으로 매몰되면서 내부의 차이를 말소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은 미국의 철학은 점점 더 빈곤하게 만들었다.
미국적 평등에는 스승도, 제자도 없다. “너는 그 어느 누구 못지않다는 점을 명심해라. 또 어느 누구보다 잘나지 않았다는 점을 명심해라”(48)라는 식민지 시대 농부의 충고가 잘 드러내듯이, (물론 미국적 평등을 누리기 위한 전제조건을 충족시킬 때에만 가능한 경우겠지만) 이것은 누군가가 자신보다 못하다는 것을 인정 못하는 만큼 누군가가 자신보다 뛰어나다는 것 또한 인정할 수 없는 평등이다. 그러기에 미국의 평등은 타자에게서 아무것도 배울 수 없는 평등이다. 소자산가들의 자유로운 연합으로서의 공화정이라는 제퍼슨의 꿈이 깨짐과 동시에, 미국의 자유주의가 가지는 희망도 사라졌다. 그때부터 미국의 자유주의는 끊임없이 질적으로 변화하며 사회의 이질적인 흐름들과 함께 해야 했으나, 아무것도 배울 줄 모르는 미국적 평등은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모두의 가정된 합의하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은, 공통의 도덕적 합의에 기반을 두는 실용주의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자유롭게 태어난 사람이 그렇게 되어야 하는 다른 사람들을 이해할 수는 있을 것인가? 자기 자신을 이해할 수는 있을 것인가?”(207)
저자가 책의 처음과 끝에서 반복적으로 던지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저자가 회귀하려는 자유주의가 아닌 보다 폭넓고 다양한 철학에서만 찾아져야만 한다. 미국주의는 다시 한번 질적으로 변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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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rrida for Beginners (Paperback)
Jim Powell / For Beginners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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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에 대한 재미있는 만화책!  

로쟈님이 서재에서 추천해주신 것을 보고 구입해 보았는데,

만화책이라고 해서 결코 내용이 가볍지 않다 

그래서 나같은 진짜 'Beginners'에게는 특히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영어도 그리 어렵지 않아서, 고등학생 수준의 독해 실력이면 충분히 지하철 타고 가면서 읽도 괜찮을 것 같다

물론 데리다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저작을 직접 읽어야한다! 그것도 불어로!ㅠㅠ 

그래도 영어로 읽으면 한국말보다는 개념어를 이해하기가 조금 낫다...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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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코노믹스, 인간의 행복에 말을 거는 경제학 - 아마티아 센, 기아와 빈곤의 극복, 인간의 안전보장을 이야기하다
아마티아 센 지음, 원용찬 옮김 / 갈라파고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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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이라는 단어에 인색하고 매정한 느낌밖에 갖고 있지 않던 나에게 

아마티아 센은 경제학이 정말 "인간의 행복에 말을 거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책은 아마티아 센의 강연와 워크숍에 발표한 글들을 모아놓았다 

책 내용 자체도 물론 좋지만, 역자가 아마티아 센에 대해서 소개해놓은 내용도 좋다. 

한국에는 센에 대한 소개나 연구가 미흡한 실정이라 이 책의 내용만으로 부족함을 느낄터인데, 역자의 소개는 이를 나름 잘 메워준 것 같다. 

센이 많이 소개되고 연구되면 앞으로 한국의 경제학 패러다임도 바뀔 수 있을까?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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