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든 것들을 이해할 수 있다고 자부했던 적이 있었다. 세상 어디에도 장애물은 없는 것 같았고, 내가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조금만 더 노력을 기울이면 어떤 무엇이라도 나에게 명증한 의미로 와 닿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무모하리만큼 자신 있게 세상과 맞부딪치려 했었다. 누구를 만나도 기죽지 않고, 누구와 대화해도 겁먹지 않으려고 했다. 상대가 의아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볼 때에도, 내가 그를 이해하지 못해 그런 것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그랬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돌이켜보건대, 내가 자신 있게 부딪쳤던 세상은 내가 감각할 수 있는 범위 내의 세상에 불과했다. 내 망막에 맺혔지만 볼 수 없었던 것, 내 고막을 진동시켰지만 소음에 불과했던 것들이 있었다. 그런 것들을 삭제한 채, 나는 내가 알 수 있는 좁디좁은 영역 내에서만 절대자로 군림했던 것이다. 그것이 마치 전부인 것처럼, 나의 감각능력은 세상의 모든 사물들의 본질에 가닿을 수 있었던 것처럼. 이런 깨달음 후에, 내 감각의 사각지대를 찾기 위해 걷잡을 수 없이 치달아보기도 했다. 사람이든 책이든 무엇이든 부여잡고 나의 한계를 넘어서려고 했다.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다. 답답하고 오만한 자신을 버리고, 세계로 무한히 개방된 열린 신체가 되고 싶었다. 문득문득 그런 순간이 도래하는 것도 같았다. 내 몸이 한순간에 비약하는 것도 같았다.  

 

 그런 순간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 경험을 통해 나는 오히려 다른 깨달음을 얻었다. 자기 식대로 자기 세계를 구성하는 것, 이것이 인간의 인식능력이 가진 실존적 조건이라는 것을. 누구도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완전히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인간은 누구나 자기 식대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을 말이다. 내가 나의 감각능력의 한계라고 느꼈던 것은 사실 나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누구나 그렇다. 누구나 자기 식대로 세상을 바라보고, 자신의 경험과 감각에 의존하여 판단하고 행동한다. 자기 자신을 만들어온 수많은 경험과 기억을 통해 지금의 감각방식이 정해질 따름이다. 사람마다 자신이 그려온 궤적이 다르기 때문에, 보고, 듣고, 느끼고, 말하는 방식은 누구나 다르다. 각자 고유한 방식을 가질 뿐이다. 이를 두고 인간이 덜 됐느니 한탄하는 것은, 자아성찰의 계기는 될 수 있을지언정 초인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진 않는다.  

 

 이 깨달음은 망각하고 있었던 다른 경험을 떠올리게 했다. 무의식중에 내가 기억하고 있던 어떤 사실들, 어떤 이야기들, 어떤 장면들이, 그 자체로 전혀 이해되지 않은 채로 내 기억 속에서 잠복하고 있다가 어느 순간에 명증한 사실로 내 앞에 나타났던 적이 있다. 말하자면 이전의 감각 방식으로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이 타자(他者)로만 존재하던 것이, 어떤 계기를 통해 나에게 주어짐으로써 내 감각 방식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았던 것이다. 나의 인식 능력 밖에 있던 것, 내가 세상을 구성하는 방식과 다른 방식이었던 것, - 그러므로 타자일 수밖에 없는 것 - 이 나에게 기입됨으로써 나의 인식능력은 침입받고 어그러졌으며 혼란에 빠졌다. 이 경험은 당혹스러우면서도 달콤했다. 나는 위태로운 지경에 내몰리면서도 또 다른 세계로 한걸음 내딛었던 것이다. 나는 더 이상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세상과 소통하던 내가 아니게 되었다.  

 

 성급하고 섣부르게도, 나는 그제서야 타자가 무엇인지, 타자와 조우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타자는 근본적으로 위협적이다. 타자는 나만의 고유한 세계를 헝클어뜨리며 침범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두 가지 방법으로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는 타자를 내치는 것이다. 내 세계에 불법침입한 이방인을 다시 미지의 세계로 돌려보내는 것. 이를 통해 나는 다시금 나의 안전한 세계에 안주할 수 있겠지만, 안전함은 머무름에 불과하며, 성장의 가능성을 삭제하고 나서야 겨우 얻어질 뿐이다. 두 번째로 타자를 환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무조건적인 환대.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나 자신이 스스로 으깨질 수 있음을 감수하고서라도, 타자를 향해 자신을 개방하는 것이다. 위험한 외줄타기는 온 몸의 감각 방식을 뒤흔들어놓지만, 줄 위의 자신을 여유롭게 가눌 수 있을 때가 되면, 나는 한 차례 성장해 있을 것이다. 적어도 이전보다 더 많은 소통가능성을 지닌 내가 될 것이다.  

 

 나는 후자의 방식을 통해 스스로 성장한다는 느낌을 가지고 싶다. 그 느낌은 무섭도록 매혹적이다. 물론 이는 사회의 지배적 가치가 어떠하냐에 따라 전혀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누군가의 말을 빌리자면 (그 누군가의 용법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약한 의미겠지만) 몰락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의 인식능력에 대한 절절한 통찰과 타자론에 대한 성찰없이, 우리는 도대체 누구와 제대로 소통할 수 있단 말인가. 자유주의적 테이블은 스스로 경계가 뚜렷한, 완결된 공간이 아니다. 매끄러운 경계는 무수히 많은 타자들을 배제함으로써만 가능할 뿐이다. 늘 언제나 타자(단지 사람만이 아닌)가 존재할 수 있음을 자각하는 것, 그리고 언제나 특정한 방식으로만 감각하는 자신을 타자에게 개방하고 타자를 환대하는 것, 이 타자론은 겸손하고 소박하다. 하지만 이는 다른 어떤 방식보다도 의미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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