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콧 니어링 자서전 역사 인물 찾기 11
스콧 니어링 지음, 김라합 옮김 / 실천문학사 / 200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흠..잘난거야 어쩔 수 없겠지만, 난 이러이러한 착한 일을 했고, 저러저러한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어라고 자기 입으로 말하는 건 심히 쪽팔릴 것도 같은데.

 스스로의 위대함을 다른 사람의 말, 기사 등을 빌어 사용한 것은 자신감에서 오는걸까 (나는 굳이 자만이라고 우기고 싶다, 혹은 잘난 체),  그저 객관적으로 자기의 훌륭함을 증명하고팠던걸까.

 글쎄. 난 겸손을 최고의 미덕이라고 세뇌하는 동양사상에 이미 절을대로 절은 탓인지 자기 입으로 자기가 참 훌륭한 일들을 해냈다고 말하는 이 할아버지가 딱히 마음에 들진 않는다. (무엇보다 늙은이들이 자기의 지난 시절을 무용담으로 들려주는 것이 나는 싫다. 지루하고, 짜증난다. 그 잘난 체가, 그 계몽적인 의도와 강제된 교훈들이.)

 이따위 자서전이 아니었어도, 스콧 니어링은 그의 학문적 저서와 타인들의 기억만으로도 이미 훌륭한 사람일 수 있었다. 그렇게 써야할 책이 많다면 이따위 자서전보다 학문적 저서 한권을 늘리는 것이 그의 위대함을 더욱 빛나게 했을텐데.

 그러나 역시 달변가답게, 정확히 맥락을 짚고 이야기를 풀어가는 그의 능력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스승으로서의 그의 사상과 삶에 대해서만큼은 경의를 표하며.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정서방 2005-01-31 1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연애를 시작하기 몇달전 이책을 읽고 있는 '나'를 당신이 '발견'했다고 했지요?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ㅣ 클라리사 P. 에스테스 ㅣ 고려원

 

 텍스트의 즐거움 - 여자와 함께 읽고 싶은 책 (심상대)

 나는 귀여운 아이나 친한 친구를 부를 때, 그 성명보다는 ‘짐승’이라는 대명사로 지칭하기를 좋아한다. 오해를 불러 서로 어색할 때도 더러 있긴 하지만 나로서는 그 본질에 대한 절실한 애정의 표현이다. ‘짐승!’ 하고 부르면, 그가 가진 본연의 덕성은 거추장스럽게 뒤집어쓰고 있던 가식과 인위의 꺼풀을 훌떡 벗어버리고 아름다운 모습 그대로 내 앞에 턱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나는 여자라는 대상에 대해서는 허심탄회한 애칭을 마련치 못하고 있다. 내 애정을 표현해 무언가 꼬집어 부르고는 싶지만 늘 조심스러워 그러지를 못한다. 여자는 실로 경이의 대상일 뿐이다. 내가 가지지 못한 절반의 우주를 지니고 있음으로 하여, 내게 있어서 여자는 언제나 경이와 찬탄, 존경과 탐욕의 상대로 가슴을 울렁이게 하는 존재다.

    근래 내가 만난 좋은 책 가운데에는, 이러한 여자라는 존재의 원형에 관하여 말하는 흥미로운 책 한 권이 있다. 절판된 지 오래되어 지금 서점에 가면 구하기 쉽지 않겠지만, 그 책은 1994년 ‘고려원’에서 초판 발행한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이란 책이다. 금세기 최고의 심리학 베스트셀러라고 하지만 심리학이라기보다는 인류학이나 신화학, 여성학에 관계한 재미있는 논문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융 심리학 전문가인 클라리사 핑콜라 에스테스 박사이며, 역자는 영문학 박사 손영미씨이다. 이 책의 제2장에 나오는 한 흥미로운 삽화를 요약해 옮기면 아래와 같다.

    오래 전 한 여자가 미국 중서부에 살았는데, 그녀는 처녀 시절 기분이 내키면 커다란 모자를 쓰고서 기차를 타고 시카고에 가곤 했다. 시의 중심부를 관통하는 화려한 거리인 미시간 애비뉴에 나가서는 상점들을 기웃거리며 멋진 귀부인처럼 거니는 게 취미였다. 그러던 그녀가 농사꾼과 결혼해 밀밭으로 둘러싸인 동네로 이사를 가더니 고만고만한 집, 아이들, 남편에 둘러싸여 점점 삭아들어가는 것이었다. 아이들에게 시달리고 살림에 바쁘다 보니 시카고까지 여행 다닐 여유가 없어진 것이다. 그런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그녀는 부엌과 거실 바닥을 말끔히 닦아놓고, 제일 좋은 비단 블라우스에 긴 치마를 입고 큰 모자를 갖춰 쓰고는 남편의 소총을 입에 물고 방아쇠를 당긴다. 여성이라면 누구나 그녀가 죽기 전에 바닥 청소를 한 사연을 이해할 것이다.

    이 책은 단순한 임상 보고서도 아니고 관념적 수사로 이루어진 논술문집도 아니다. 동서양의 다양한 신화와 설화를 예로 들며, 우리에게 익숙한 고금의 동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통해 억압당하고 왜곡된 여성상을 제시하고, 아울러 건강하고 자유로운 여성성의 원형을 추적한다. 저자는 단호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방울 달린 말을 타고 끝없이 넓고 푸른 숲으로 달려가고 싶지 않은 여성이 어디 있는가?”

    구구절절 옳은 말씀이다. 저자는 야성을 원하는 여자라는 존재가 어떤 이유로 지금껏 그런 욕망을 수치스럽게 여겨 긴 머리카락으로 감추며 살아왔는지를 사례를 들면서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서, 어쨌건 여걸의 그림자는 모든 여자들의 뒤를 어슬렁거리고 있으며, 그 그림자는 분명히 네발 달린 늑대라고 규정한다. 건강한 늑대와 여성은 심리적으로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들은 둘 다 예민하고 장난스러우며, 강한 희생 정신을 지니고 있고 호기심이 강하며, 엄청난 지구력을 가지고 있다. 또한 아주 직관적이고 자식과 배우자, 가족을 끔찍이 아끼며, 끊임없이 변하는 환경에 잘 적응하고 씩씩하며 용감하다. 이들은 이제껏 이리저리 내몰리고 학살당해오면서 열등한 존재라는 오해를 받아왔다. 그들은 미개지를 파괴하는 이들뿐만 아니라 여성의 본능을 말살하여 인간 정신 속의 황무지를 없애고자 하는 이들의 표적이 되어왔다는 것이다.

    물론 그 대안도 이 책의 내용에 포함돼 있다. 제8장에서 저자는 이렇게 정의한다.

    “야성적 자아에 가장 치명적인 것은 얌전하게 행동하면 상을 주겠다는 약속이다. 창조적 삶의 핵심은 얌전함이 아니라 즐거움이고, 즐거운 일을 하려는 충동이 바로 본능이다.”

    그러면서 제9장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고독은 에너지가 없거나 활동이 중단된 상태가 아니라, 영혼에게서 야성을 선물받은 상태다.”

    야성의 본능이 추구하는 바가 결코 쾌락과 자유만이 아니라 고독까지도 포함하고 있음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빌려 고독에 대하여 이렇게 덧붙인다.

    “내게 있어서 고독은 접어서 들고 다닐 수 있는 숲과 같아서 필요할 때마다 펼쳐놓으면 된다.”

   그러므로 이 책의 주된 메시지는 본능의 회복이라 할 수 있다. 배반당하고 무시당하는 여성들에 대한 애정에서부터 비롯한 호소이지만, 여성해방이 단순히 여성이라는 절반의 존재만을 위한 혁명이 아니듯이, 이 책의 참된 메시지는 ‘인간 회복’에 그 목적을 두고 있음이 틀림없다.

    ‘여걸’ 원형에 대한 이야기를 모아놓은 이 책은, 이야기를 일종의 치료약이라고 여기는 저자의 ‘신들린 이야기’로 꾸며져 있다. 내가 이 책을 감동만이 아니라 흥미를 가지고 읽었고, 또 누군가에게 자신 있게 권하는 이유는 그 점에 있다. 이 책이 주대상으로 하는 여성 독자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리라 믿는다. 앞에서 언급한 늑대의 야성을 고스란히 되돌려받는 한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건강하지 못한 여성성을 남루하게 걸치고서, 그 자신만이 아니라 자신의 상대인 남성까지도 병들게 하는 여자가 있다면 필히 숙독완미해야 할 책이라 여긴다. 그 질병이 어디로부터 연유하였든, 어쨌든 이 책은 읽는 이, 혹은 듣는 이의 영혼을 성숙하게 하면서, 잃어버린 야성의 본능을 회복하도록 이끌어줄 것이다.

 ◈ 문학동네 1999 년 여름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폐쇄자 the Closer 1
유시진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00년 7월
평점 :
절판


그 엄청난 명성 덕분에 동네 만화방을 다 뒤졌다. 간신히 찾아내어 설렘 속에서 책장을 넘겼다. 그리고...별 느낌 없었다. 내가 너무 기대한걸까a

 빛과 어둠, 흑과 백, 동전의 앞면과 뒷면, 열림과 닫힘. (1,2권을 <뒤의 앞><앞의 뒤>라고 이름 지은 것은 분명 재치있는 발상. 그러나) 이 복잡다난하고도 어려운 철학적 명제는 읽는 이의 지적 허영을 채울만큼만 언급되는 소재로 소진된다. 사실, 이 소재가 이 만화의 중심으로 떠오를만한 것은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

 2권의 만화로 더구나 저렇게 복잡한 이야길 풀어나가려는 자체가 욕심일지도 모르겠다. 작가는 여러가지 레이어들을 모아 이루었다고 하지만, 그만큼 중심 주제나 소재에 대한 집중도는 떨어지는 셈.

 하지만 거미줄로 표현된 권력과 규율(이었나? 기억 안남 -_-;;)의 구조, 그 중심의 無, 일상과 일탈에 대한 작가의 주절거림 등에서 꽤나 머리 아팠겠구나하는 생각이 들기도.

 너무 기대를 한 탓인지 그냥 그저 읽혀버린 것이 아쉬을 정도였지만, 이 나라에서 이 정도의 만화를 만날 수 있다는 건 사실 흔치 않은 일이지 싶다.

 ps. 히이사는 매력적인 캐릭터다. 야오이든 일반 순정이든, 전지전능한데다 매력적이고 무조건적인, 모든 사람들의 사랑에 대한 판타지를 충족시켜주는, 흔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장정일의 독서일기 5 범우 한국 문예 신서 55
장정일 지음 / 범우사 / 2002년 1월
평점 :
절판


다른 사람의 독후감을 읽는게 뭐 대단한게 있을까만은. 장정일의 그것은 책에 대한 감상이라기보다

책을 빌미로 한 세상 씹어대기, 혹은 자기 생각 토해내기에 더 가깝겠다.

물론 그의 코드와 취향이 내게 맞기때문에 그의 독설에 내가 낄낄거릴 수 있는거겠지.

 이를테면, 복거일에 대한 '사족2)'가 나를 뒤집어지게 한다.

 사족2): 이 독후감을 읽은 독자 가운데, 복거일을 '병약한 지식인'으로 행여 오해할지도 모를 독자를 위해 한 마디 더 보탠다. 복거일은 '병약한 지식인'이 아니다. 영어가 강대국의 언어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우리 나라의 고용어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이나, 독도 분쟁으로 손해를 볼 나라는 일본보다 약소국인 한국이기 때문에 극한 상황에서는 양보할 수도 있다는 주장은 복거일이 '힘과 정복'이라는 맹목적 가치의 신봉자라는 것을 보여주다. 사람들은 그를 '자유주의 지식인'부류에 넣지만, 나는 몇 권이나 되는 그의 에세이를 읽으며 한 번도 그렇게 느껴본 적이 없다. 민족주의를 비난하는 대신 그가 편든 것은 다민족간의 공존모색이 아니라, 제국주의다. 이 점이 그의 사상 부재를 증거하는 한편 모순을 나타낸다. '자유주의'는 그의 독단과 기능적 제국주의를 눈가림하는 위장술이다. 어떤 독자가 말했다:

"복거일은 그 괴상한 이름 말고는, 한번도 나를 놀라게 한 적이 없다!"             (p.135)

 

그리고 나를 반성케 한, 그의 따가운 충고. 

잠언에 밑줄을 치는 한, 우리 나라의 소설 독자들은 아직 소설을 취급할 줄 모른다고 말해야 한다. 확실히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잠언에 밑줄을 치는 소설 독자는 소설 속에서 교훈을 발견하도록 편향된 질낮은 문학 교육의 희생자들일지도 모른다. 나아가 잠언에 밑줄을 치는 독자는 소설나부랭이를 읽는 일에 긍지를 느끼지 못하고 부끄러워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소설 가운데서 잠언을 발견하고자 하는 안쓰러운 노력은 소설나부랭이를 읽는 소모적인 일을 뜻있게 만들자는 보상심리에서 나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렇듯 잠언의 발견으로 요약되는 그럴듯한 교훈이나 주제 찾기에 편향된 독서는 소설의 내적 구성과 미적 장치에 대해 무지한 독자를 쏟아내 놓는다.                 (p.162)

 폭풍처럼 읽어야 한다. '나는 그 책을 밤새도록 읽었다'라든가 '나는 이 책을 들자마자 손에 놓지를 못했다'는 경험은 그래서 소중한 것이다. 우리 인생은, 특히나 청춘은 그렇게 응축된 몇 개의 경험만을 나열할 수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어떤 책을 들고 3일 이상 뭉그적거리면 그 책은 당신 손에서 죽은 거라고 봐야 한다. '피로 쓰여진 책은 게으른 독자를 거부한다'는 요지의 말을 했던 니체의 생각에 나는 동감하고 있다.

독서란 자신이 읽고 있는 책의 주제를 발견하거나 구성을 파악하는 작업이 아니다. 그런 방식의 독서는 삭막한 신체해부 작업과 다르지 않다. 진정한 독서는 책의 내용과 형식에 구속됨이 없이 곧바로 저자의 열정과 조우하는 것이다. 글쓰기에 있어 1급의주제와 최상의 형식이란 따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독자는 다만 저자의 금강석 같은 열정과 대면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p. 176)

 그의 이 매서운 질타에서, 나는 책에 대한 그의 열정과 대면했던 거겠지? ( ")a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주 작은 차이
알리스 슈바르처 지음, 김재희 옮김 / 이프(if) / 2001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1975년 출간된 이 책은 나와 나이가 같다. 몇몇 페미니스트 서적들이란 걸 읽어보면서 내가 늘 놀라는 것은, 그것들의 출간일이 대부분 나의 출생년도 근처라는 것이다. 그리고 경악할 일은 출간일로부터 30여년이 지난 21세기에 그것들을 읽으며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감한다는 사실이다. 끔찍하지 않은가. 30여년간 도대체 뭐가 변한걸까.

<아주 작은 차이> 역시 그렇다. 알리스 슈바르처가 interview한 이 책의 출연자(?)들은 바로 나이고, 내 어머니이고, 내 주변의 넘치고 넘치는 여성들이다. 책장을 넘길때마다 덮쳐오는 슬픔과 분노와 갑갑함 때문에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쪽팔려서 울었다고는 못하겠다. -_-;;; )

이래저래 어려운 말들만 주절거리는 대단한 이론서보다, 아주 구체적인 예시들을 보여주며 읽는 사람을 이해시켜주는 훌륭한 책이다.

그러나, 알리스 슈바르처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아니, 그녀도 그러길 바랄것이라 믿는다.) 나는 이 책이 그만 스테디셀러의 왕좌에서 내려와 이 우주에서 사라졌음한다. 언제쯤이될까. 몇 세대 후에야 이 책에 대해 터무니없는 이야기라고 웃어버릴 수 있을까.

 

ps. 내가 페미니즘에서 언제나 경계하는 것은, 페미니즘이 남성을 상대로 싸우는 전쟁으로 변질되어버릴 가능성이다. 물론 이제와 그런 뒷북을 칠 사람은 없으리라 믿고 싶지만, 여튼 이 책의 사례들을 훑다보면 위의 가능성이 더욱 농후해지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그러나 알리스 슈바르처가 본문에서 밝히고 있듯 (아..어딘지 도저히 못 찾겠음. -_-;; ) 그런 오해를 하지는 말았음 하는 작은 소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