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눅스*그냥 재미로 - 우연한 혁명에 대한 이야기
리누스 토발즈 & 데이비드 다이아몬드 지음, 안진환 옮김 / 한겨레출판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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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모든 것은 공유되어야 한다는 '낡고' '위험한' 사상이 있다. 사적소유에 대한 철폐, 자본 및 토지의 공유. 신성한 노동의 해방 그리고…. 지금 감히 '공산주의'를 말하는 이는 거의 없다.(있다해도 별 씨알이 먹히지 않는다. 맑스는 여전히 유효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세상 한구석에서 아니 도처에서 '모든 것에 대한 공유'를 외치는 소리들이 부쩍 소리 높다. 그러나 차이는 있다. 과거의 것이 유형의 가치에 대한 소유의 철폐에 목소리를 높였다면 지금의 거센 목소리 들은 무형의 가치에 대한 소유의 철폐에 대한 것이다. 그 거대한 흐름 중에 하나가 바로 'open source'이다. 그리고 이 전세계적인 '지식정보 공유'에 대한 흐름의 한가운데에는 'Linux'가 있다.

리눅스라는 이름은 더 이상 생경하지 않다. IT관련 신문을 물론이고 어지간한 대중지(심지어는 대한민국 스포즈지에도) 한, 두번 쯤은 언급이 되었으니 말이다. <리눅스 그냥 재미로>는 이젠 유명해진 그리고 전세계 인구의 상당부분이 이용하는 운영체계(사실 자신들이 리눅스 서버에 접속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이지만)인 리눅스의 창시자인 '리누즈 토발즈'라는 핀란드 출신 젊은이의 자서전이다.

자고 일어나보니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는 바이런의 경구는 리누즈에게도 적용된다. 그의 말마따나 '그냥 재미로' 만든 것이 2001년 현재 빌 게이츠의 아성을 위협할 정도로 거대하게 성장해버렸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냥 재미로' 만든 것이기만 한 걸까? 결코 심각하지 않은 다소 무책임하고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그냥 재미로'는 이 책을 관통하는 그리고 그의 생각과 행위들을 파악할 수 있는 가장 핵심적인 키워드이다.

리누즈 토발즈는 역사와 사회의 발전이 크게 3가지 요소에 의해서 좌우된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다. 첫번째는 '생존'이고 두번째는 '사회적 관계' 세번째가 바로 '오락(재미)'이다. 그의 이러한 견해가 체계적이고 학술적인 용어로 정리되고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활동한 (지극히 개인사적일 수도 있는)자신의 영역에 대해서 얘기하고자 하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자신의 영역밖으로 넘어간 '리눅스'와 '오픈소스'에 대한 의견을 말하는 것일 뿐이니까 말이다.

먹고 사는 방편 때문에 컴퓨터라고 하는 물건과 밀접한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해야 하는 입장인 나로서는 그의 주장이나 살아가는 과정이 그렇게 낯설지만은 않다. 흔히 해커라고 일컬어지는 '괴짜 집단'의 속성이 그에게서도 여실히 드러난다는 점이 흥미롭기도 하거니와 극도로 개인주의적일 수도 있는 그의 사상이 어떻게 다른 이들과 관계를 맺고 조화를 이루며 발전되었는지를 본다는 것은 그런데로 재미있는 일이 분명하니까 말이다.

모두가 리차드 스톨만 일수는 없고 모두가 그의 사상에 동조할 수는 없다. 더더군다나 경제적인 이유로 부침을 겪을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인 마당에서 오픈소스라고 하는 것은 어쩌면 말만 상찬인 허당일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상찬 뿐일수도 있는 허당을 실재하는 현실로 만들어낸 주역의 목소리를 한 번 들어보자. '그냥 재미로' 말이다. Just for F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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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콧 니어링 자서전 역사 인물 찾기 11
스콧 니어링 지음, 김라합 옮김 / 실천문학사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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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잘난거야 어쩔 수 없겠지만, 난 이러이러한 착한 일을 했고, 저러저러한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어라고 자기 입으로 말하는 건 심히 쪽팔릴 것도 같은데.

 스스로의 위대함을 다른 사람의 말, 기사 등을 빌어 사용한 것은 자신감에서 오는걸까 (나는 굳이 자만이라고 우기고 싶다, 혹은 잘난 체),  그저 객관적으로 자기의 훌륭함을 증명하고팠던걸까.

 글쎄. 난 겸손을 최고의 미덕이라고 세뇌하는 동양사상에 이미 절을대로 절은 탓인지 자기 입으로 자기가 참 훌륭한 일들을 해냈다고 말하는 이 할아버지가 딱히 마음에 들진 않는다. (무엇보다 늙은이들이 자기의 지난 시절을 무용담으로 들려주는 것이 나는 싫다. 지루하고, 짜증난다. 그 잘난 체가, 그 계몽적인 의도와 강제된 교훈들이.)

 이따위 자서전이 아니었어도, 스콧 니어링은 그의 학문적 저서와 타인들의 기억만으로도 이미 훌륭한 사람일 수 있었다. 그렇게 써야할 책이 많다면 이따위 자서전보다 학문적 저서 한권을 늘리는 것이 그의 위대함을 더욱 빛나게 했을텐데.

 그러나 역시 달변가답게, 정확히 맥락을 짚고 이야기를 풀어가는 그의 능력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스승으로서의 그의 사상과 삶에 대해서만큼은 경의를 표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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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서방 2005-01-31 1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연애를 시작하기 몇달전 이책을 읽고 있는 '나'를 당신이 '발견'했다고 했지요?
 
장정일의 독서일기 5 범우 한국 문예 신서 55
장정일 지음 / 범우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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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의 독후감을 읽는게 뭐 대단한게 있을까만은. 장정일의 그것은 책에 대한 감상이라기보다

책을 빌미로 한 세상 씹어대기, 혹은 자기 생각 토해내기에 더 가깝겠다.

물론 그의 코드와 취향이 내게 맞기때문에 그의 독설에 내가 낄낄거릴 수 있는거겠지.

 이를테면, 복거일에 대한 '사족2)'가 나를 뒤집어지게 한다.

 사족2): 이 독후감을 읽은 독자 가운데, 복거일을 '병약한 지식인'으로 행여 오해할지도 모를 독자를 위해 한 마디 더 보탠다. 복거일은 '병약한 지식인'이 아니다. 영어가 강대국의 언어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우리 나라의 고용어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이나, 독도 분쟁으로 손해를 볼 나라는 일본보다 약소국인 한국이기 때문에 극한 상황에서는 양보할 수도 있다는 주장은 복거일이 '힘과 정복'이라는 맹목적 가치의 신봉자라는 것을 보여주다. 사람들은 그를 '자유주의 지식인'부류에 넣지만, 나는 몇 권이나 되는 그의 에세이를 읽으며 한 번도 그렇게 느껴본 적이 없다. 민족주의를 비난하는 대신 그가 편든 것은 다민족간의 공존모색이 아니라, 제국주의다. 이 점이 그의 사상 부재를 증거하는 한편 모순을 나타낸다. '자유주의'는 그의 독단과 기능적 제국주의를 눈가림하는 위장술이다. 어떤 독자가 말했다:

"복거일은 그 괴상한 이름 말고는, 한번도 나를 놀라게 한 적이 없다!"             (p.135)

 

그리고 나를 반성케 한, 그의 따가운 충고. 

잠언에 밑줄을 치는 한, 우리 나라의 소설 독자들은 아직 소설을 취급할 줄 모른다고 말해야 한다. 확실히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잠언에 밑줄을 치는 소설 독자는 소설 속에서 교훈을 발견하도록 편향된 질낮은 문학 교육의 희생자들일지도 모른다. 나아가 잠언에 밑줄을 치는 독자는 소설나부랭이를 읽는 일에 긍지를 느끼지 못하고 부끄러워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소설 가운데서 잠언을 발견하고자 하는 안쓰러운 노력은 소설나부랭이를 읽는 소모적인 일을 뜻있게 만들자는 보상심리에서 나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렇듯 잠언의 발견으로 요약되는 그럴듯한 교훈이나 주제 찾기에 편향된 독서는 소설의 내적 구성과 미적 장치에 대해 무지한 독자를 쏟아내 놓는다.                 (p.162)

 폭풍처럼 읽어야 한다. '나는 그 책을 밤새도록 읽었다'라든가 '나는 이 책을 들자마자 손에 놓지를 못했다'는 경험은 그래서 소중한 것이다. 우리 인생은, 특히나 청춘은 그렇게 응축된 몇 개의 경험만을 나열할 수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어떤 책을 들고 3일 이상 뭉그적거리면 그 책은 당신 손에서 죽은 거라고 봐야 한다. '피로 쓰여진 책은 게으른 독자를 거부한다'는 요지의 말을 했던 니체의 생각에 나는 동감하고 있다.

독서란 자신이 읽고 있는 책의 주제를 발견하거나 구성을 파악하는 작업이 아니다. 그런 방식의 독서는 삭막한 신체해부 작업과 다르지 않다. 진정한 독서는 책의 내용과 형식에 구속됨이 없이 곧바로 저자의 열정과 조우하는 것이다. 글쓰기에 있어 1급의주제와 최상의 형식이란 따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독자는 다만 저자의 금강석 같은 열정과 대면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p. 176)

 그의 이 매서운 질타에서, 나는 책에 대한 그의 열정과 대면했던 거겠지? (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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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작은 차이
알리스 슈바르처 지음, 김재희 옮김 / 이프(if)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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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1975년 출간된 이 책은 나와 나이가 같다. 몇몇 페미니스트 서적들이란 걸 읽어보면서 내가 늘 놀라는 것은, 그것들의 출간일이 대부분 나의 출생년도 근처라는 것이다. 그리고 경악할 일은 출간일로부터 30여년이 지난 21세기에 그것들을 읽으며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감한다는 사실이다. 끔찍하지 않은가. 30여년간 도대체 뭐가 변한걸까.

<아주 작은 차이> 역시 그렇다. 알리스 슈바르처가 interview한 이 책의 출연자(?)들은 바로 나이고, 내 어머니이고, 내 주변의 넘치고 넘치는 여성들이다. 책장을 넘길때마다 덮쳐오는 슬픔과 분노와 갑갑함 때문에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쪽팔려서 울었다고는 못하겠다. -_-;;; )

이래저래 어려운 말들만 주절거리는 대단한 이론서보다, 아주 구체적인 예시들을 보여주며 읽는 사람을 이해시켜주는 훌륭한 책이다.

그러나, 알리스 슈바르처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아니, 그녀도 그러길 바랄것이라 믿는다.) 나는 이 책이 그만 스테디셀러의 왕좌에서 내려와 이 우주에서 사라졌음한다. 언제쯤이될까. 몇 세대 후에야 이 책에 대해 터무니없는 이야기라고 웃어버릴 수 있을까.

 

ps. 내가 페미니즘에서 언제나 경계하는 것은, 페미니즘이 남성을 상대로 싸우는 전쟁으로 변질되어버릴 가능성이다. 물론 이제와 그런 뒷북을 칠 사람은 없으리라 믿고 싶지만, 여튼 이 책의 사례들을 훑다보면 위의 가능성이 더욱 농후해지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그러나 알리스 슈바르처가 본문에서 밝히고 있듯 (아..어딘지 도저히 못 찾겠음. -_-;; ) 그런 오해를 하지는 말았음 하는 작은 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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