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빌라
백수린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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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빌라』

 

백수린 소설

문학동네

 


 

늘 똑같은 일상 속 느슨한 시간 사이를 비집고 과거 어떤 순간으로 돌아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인물들이 자주 등장한 것 같다. 후회보다는 그 시간들로 성장한 인물, 보이지 않지만 분명한 계급차이들을 이겨내 보고자 하는 인물, 흔들림은 있었지만 곧게 뻗어나가는 인물 등 포기하고 좌절하기 보다 다짐하고 용기내고자하는 마음들이 보였다.

 

📚시간의 궤적

 

미술사를 공부하고 싶었던 나는 서른 살 나이 직장을 그만두고 파리 어학원에서 대기업 주재원으로 파견나온 언니와 친해진다.

 

외부의 시선 따위 신경쓰지말라고 말해주는 주인공의 말에 위안을 받는다. 나름 단단해지고 있다 생각해도 이런 말랑한 말한마디에 그냥 말랑해져 버린다. 타지에서 낯선 그들에게서 오는 거리감, 내가 느끼는 외로움이 한데 섞이며 그리움이 더 커진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외로움도 흔적이 된다는 것.

 

그날 언니와 나눈 대화는 오랜 시간 잊고 지냈던 사실을 나에게 일깨워주었다. 그러니까, 어떤 이와 주고받는 말들은 아름다운 음악처럼 사람의 감정을 건드리고, 대화를 나누는 존재들을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낯선 세계로 인도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P12

 

“괜찮아요, 언니. 사람에겐 어쩔 수 없는 일도 있으니까요.” 어떤 기억들이 난폭한 침입자처럼 찾아와 ‘나’의 외벽응 부술 듯 두드릴 때마다, 이러다가는 내가 한순간 와르르 무너져내리는 것은 아닐까 두려우면서도 어쩌지 못하는 마음을 나는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P17



 

📚여름의 빌라

 

독일 정치사를 전공한 남편 지호와 일문학 전공한 나(주아)‘는 한스의 초대로 시엠레아프 여름의 빌라에 간다. 시간강사로 쫓기듯 사는 두 부부에게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없었으므로 아이를 잃은 슬픔보다 어쩌면 잘된 일이라 여기며 살았지만 여행에서 말못했던 감정이 터져버린다.

단순하게 관광객의 시선으로 그 사람들을, 역사를 바라보는 주아와 달리 지호는 캄보디아 아이들이 상대적 빈곤을 느끼지 않아도 될 일을 관광객들 때문이라 말한다. 이런 경계들을 어린 레오니가 캄보디아 소년을 대하는 방법을 보면서 다양한 계층들의 차이를 주아는 안다.

지호는 자신이 시간강사로 안정되지 못했기 때문에 모든 바라보는 것들이 불안정하고 고통 속에 놓여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지.

 

무無. 당신의 집 거실에 적혀 있던 글자처럼, 사실은 우리 사이에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음을 그저 받아들였으면 좋았을 텐데. 사람은 어째서 이토록 미욱해서 타인과 나 사이에 무언가가 존재하기를 번번이 기대하고 또 기대하는 걸까요. P56

 


 

📚고요한 사건

 

서울에 처음 올라와 소금고개 동네 살 때 만난 해지와 무호.

재개발 말들이 돌고 고양이 밥을 주던 아저씨가 폭력을 당하는 것을 아버지에게 말했지만 아버지 역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돕지 않는다.

죽은 고양이를 묻어주러 문을 나서다 유리창 밖 떨어지는 눈송이를 보며 감탄한다. 동네 멀리 보이던 아파트를 보면서 우리집도 저렇게 될 거라는 기대로 가득찼던 부모님은 자신들은 소금동네 사람들과 다르다는 선을 긋는다. 시간이 지나 나 역시 부모님이 바라던 희망이 아닌 그저 창밖을 기웃거리며 살고 있음을 눈을 보며 풍경을 황홀하게 바라보던 그때를 떠올리는 건 아닌지.

 

해가 지고 나면 대기에 남아 있던 온기도 노인의 마지막 숨결처럼 느리게 흩어져갔다. 몸에 한기가 깃들어 더이상 앉아 있기가 힘들어지면 그제야 나는 쭈그렸던 다리를 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초라한 골목이 어째서 해가 지기 직전의 그 잠시 동안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워지는지, 그때 나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다만 그 풍경을 말없이 바라보는 동안 내 안에 깃드는 적요가, 영문을 알 수 없는 고독이 달콤하고 또 괴로워 울고 싶었을 뿐. P94

 

앞으로 나는 평생 이렇게, 나가지 못하고 그저 문고리를 붙잡은 채 창밖을 기웃거리는 보잘것없는 삶을 살게 되리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었으니까. P104

 

📚폭설

 

엄마와 아빠가 이혼을 하고 나는 아빠와 함께 살며 2차성징이 시작되어도 물어볼 사람 없이 외롭고 당황해 하며 자란다. 미국에 케빈과 재혼한 엄마는 행복한 얼굴이다. 딸보다 자신의 인생을 더 우선시한 엄마.

엄마는 딸에게 취업보다 연애가 더 중요하다 말한다. 어릴 때 결혼해서 몰랐던 것일까. 사랑을 찾아간 엄마는.

 

그녀는 가끔 생각했다. 그녀가 엿봤던, 그날 밤의 그녀보다 겨우 네댓 살 더 많았을 뿐이었던 엄마의 얼굴, 사랑에 빠져버린 그 여자의 얼굴이 실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에 대해서 말했더라면. 하지만 그 밤 그녀는 끝내 그런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P138

 

📚아직 집에는 가지 않을래요

 

둘째를 키우기 위해 퇴사 후 한나의 레스토랑 오픈에 초대된다. 아이만 보다가 오랜만의 외출이라 어색하기도 하고 설렘도 있다. 동네 빨간지붕을 부수어 골격만 남고 그 공사현장에서 앳되보이는 근육질 남자에게 한나 레스토랑에서 만난 남자 무용수를 떠올리며 알 수 없는 욕망에 휩싸인다. 아이 둘을 낳고 예전과 다른 몸, 일상 속 잠깐씩의 내적 욕구들과 부딪히는 우울함에 대한 이야기.

 

어떤 상처는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사라지지 않고 잠복해 있다가 작은 자극에도 고무공처럼 튀어올랐다. P148

 


 

일찍 철이 든 척했지만 그녀의 삶은 그저 거대한 체념에 불과했음을. P165

 

📚흑설탕 캔디

 

할머니와 동생과 프랑스에서 지냈던 시간들. 돌아가신 난실 할머니 일기장 속 내용.

언어가 통하지 않고 손자들도 아들도 자신들의 삶을 찾느라 바쁜 프랑스에서 브뤼니에 씨를 만나 피아노를 치고 차를 마시며 소소한 일상의 즐거움을 느끼고 있던 할머니는 브뤼니에 할아버지가 각설탕을 높이 쌓아 올리며 박수치고 무너진 각설탕을 집어 먹고 아주 오래 전 처음 느꼈던 달콤한 흑설탕 캔디를 떠올린다. 손바닥에 내리쬔 햇빛만큼의 행복은 할머니도 갖고 싶었을 꺼라고. 나이가 들어도 마음은 그대로인데 육체는 따라주지 않음에 대한 슬픔이 느껴졌던 소설.

 

말하자면,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섬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 사이에 존재할 법한 달콤하고 아늑한 유대감 같은 것. 하지만 시간은 흘렀고, 일 년쯤이 지나면 나와 동생은 낯선 환경을 거부하는 단계를 넘어, 새로운 생활에 어떻게든 적응하기 위해 애쓰는 단계로 접어들어버린다. P181

 

퇴화하는 것은 육체뿐이라는 사실을. 그런 생각을 할 때면 어김없이 인간이 평생 지은 죄를 벌하기 위해 신이 인간을 늙게 만든 건 아닐 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마음은 펄떡펄떡 뛰는 욕망으로 가득차 있는데 육신이 따라 주지 않는 것만큼 무서운 형벌이 또 있을까? 꼼짝도 못하는 육체에 수감되는 형벌이라니. P198

 

누군가와 함께 있어도 낯선 섬에 홀로 표착한 것 같았던 할머니의 일생이나, 하루가 너무 길 때마다 차라리 빨리 죽여달라고 신에게 간구하지만, 막상 죽름 이후를 상상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극심한 공포에 대해서 결코 말할 수 없을 것이듯. P201

 

📚 아주 잠깐 동안에

 

아내 여주와 행복한 신혼생활. 아내는 모든 것을 이해해 줄 것 같이 너그러웠고, 그도 착실하게 돈을 모아 안전하고 보기 좋은 집을 얻고자 노력했다. 그 모든 노력은 불안함에서 시작된 것이였기에. 그는 편의점에서 맥주를 사고 집으로 가는 중 리어카를 끄는 노인을 만났고 술안주를 만들어놓고 미드를 함께 볼 생각에 지나칠 까 생각했지만 그는 노인을 돕기로 한다. 경사 진 비탈길에서 노인의 리어카를 끌다 실려져 있던 냉장고가 미끄러지며 노인을 덮쳤고 괜찮다며 노인은 돌아갔지만, 그 이후 노인의 집을 찾아갔을 때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후 노인을 돕던 순간으로 돌아간다면 노인의 상태를 확인했다면 돌아가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두려움으로 가득한 삶 속에서 그 남자의 두려움은 늘어나는 느낌이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그 누구에게도, 심지어 여주에게도, 사실은 그날 밤, 달빛이 아름답고 모든 것이 그저 좋았던 그 밤, 아주 잠깐 동안, 그러니까 세탁기를 들어올리고 쓰러져 있던 노인을 일으켜세우던 그 짧은 순간에, 그가 그 모든 상황을 귀찮다고 생각했다는 것을 말할 수 없었다. P233

 

📚 아카시아 숲, 첫 입맞춤

 

엄격했던 엄마. 쉽게 주눅 들 수 밖에 없었던 나.

모범적인 나와 선주. 우리와 반대인 남자아이들과 어울리는 다미와 호기심을 공유하며 둘만의 친밀함을 나눈다. 우연히 다미의 친구를 만나고 좋아하는 마음도 없지만 분위기로 나에게 관심이 있다는 어떤 남자아이에게 첫 입맞춤을 한다.

나도 마음만 먹으면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학원을 빠지고 남자아이들을 만나는 하루의 일탈을 주인공 '나'를 통해 가마득한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의 이야기를 떠올려본다.

 

갑작스럽게 변해버린 신체가 낯설고, 넘치는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하며, 이제 어른에 한층 더 가까워졌다는 희열감에 과하게 들떠 있던 아이들. P241

 

문득 나는 내가 교복을 입고 그 교실 창가 자리에 앉아 있던 날들로부터 그리 많이 멀어지지 않은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P265

 

나는 무엇이든 선택을 할 때면 그 대가로 미래를 지불해야 하는 줄 몰랐던 날들이 이미 가마득히 멀어졌음을 안다. P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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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無. 당신의 집 거실에 적혀 있던 글자처럼, 사실은 우리 사이에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음을 그저 받아들였으면 좋았을 텐데. 사람은 어째서 이토록 미욱해서 타인과 나 사이에 무언가가 존재하기를 번번이 기대하고 또 기대하는 걸까요. -여름의빌라 - P56

어떤 상처는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사라지지 않고 잠복해 있다가 작은 자극에도 고무공처럼 튀어올랐다.-아직 집에는 가지 않을래요 - P148

문득 나는 내가 교복을 입고 그 교실 창가 자리에 앉아 있던 날들로부터 그리 많이 멀어지지 않은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아카시아 숲, 첫 입맞춤 - P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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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하지 않는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장편소설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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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장편소설

문학동네 출판


 

영화제작을 하다가 중단하고는 목공 작업 중 손가락이 잘려 수술한 인선과 더운 여름 유서를 썼다 찢었다 반복하는 화자 경하의 이야기로 소설은 시작한다. 인선은 병원에 입원 중이라 제주 집에 있는 새를 돌봐달라며 경하에게 부탁한다. 눈보라를 보며 인선은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엄마 정심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인선이 아마 새에게 먹이를 주러 가는 길은 눈보라로 앞이 보이지 않아 건천에 빠졌지만 자신은 이미 눈으로 추워 감각이 없는데도 새를 떠올리며 밥을 주기 위해 한줄기 빛을 찾아 인선의 집으로 가기위해 힘을 낸다. 가는 길의 눈보라, 혹독한 추위 표현이 어찌나 생생한지 한편의 시처럼 느껴졌다.

인선의 입에서 듣는 엄마이야기는 끔찍했다.

슬픈 내용은 많았지만 유독 기억에 남는 대목은 죽은 시체 위로 떨어지는 눈을 몇 살 더 먹었다고 사촌언니가 손수건으로 치우면 동생은 얼굴을 확인하는 장면이었다. 추운 겨울임에도 소녀 둘이 손을 꼭 붙잡고 발발 떨며 다니는 게 생생해서 너무 슬펐다.

지나간 자리는 모두 덮어버리는 눈처럼 제주의 기억들도 눈처럼 덮여버렸지만 죽음은 검게 나무로, 돌로, 새로 남아 그 자리에 맴도는 듯하다.

어린 여자 아이도 피해가지 못한 총알은 동생에게 꽂혀 언니들이 제 옷을 벗어 지혈하고 엄마가 손을 깨물어 피를 주는 모습은 동생이 살기만을 얼마나 바라고 다급한 상황에서도 생명이 붙어있는 상황에 가족들은 감사하고 행복해 해야 한다는 것을, 살아있다는 것에 행복을 느꼈다.

꿈인 듯 현실인 듯 죽고 전쟁 같았던 그 자리에서 시간만 다를 뿐.

제주에서 경산. 그들이 죽이고 육신마저 없애버렸지만 남은 이들은 그 기억을 흔적을 찾기 위해 처절했다. 기억은 영원하다.

눈 내리는 겨울, 육신을 찾을 수도 없게 썰물 때 해변에서 총살했다는 이야기. 차가운 바다 속에 뜯겨져간 육신 때문에 엄마는 바닷고기를 안 먹는다고.

경하는 추위 속에 포기하지 않고 고통 속에 있으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꿈을 꾸듯 떠올린다. 인선이 만들고 찾고자하는 것은 이미 죽고 없는 그들이 놓아주지 않는 것일 수도 있지만 죄 없이 죽은 그 자리에서 발 묶인 자들에게 새장 속 갇힌 아미 새가 자유롭게 날아다니듯 자유를 주고 세상에 나오게 해주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지.

나도 경하처럼 꿈속에서 이야기를 듣고 나온 듯했다.



🔖 책 속 밑줄 긋기


그렇게 죽음이 나를 비껴갔다. 충돌할 줄 알았던 소행성이 미세한 각도의 오차로 지구를 비껴 날아가듯이. 반성도, 주저도 없는 맹렬한 속력으로. P15

 


 

 

어떤 사람들은 떠날 때 자신이 가진 가장 예리한 칼을 꺼내든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안다. 가까웠기에 정확히 알고 있는, 상대의 가장 연한 부분을 베기 위해. P17

 


 

 

자신의 삶을 스스로 바꿔나가는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다른 사람들은 쉽게 생각해내기 어려운 선택들을 척척 저지르고는 최선을 다해 그 결과를 책임지는 이들. 그래서 나중에는 어떤 행로를 밟아간다 해도 더이상 주변에서 놀라게 되지 않는 사람들. P33

 

어떤 기쁨과 상대의 호의에도 마음을 놓지 않으며, 다음 순간 끔찍한 불운이 닥친다 해도 감당할 각오가 몸에 밴 듯한, 오래 고통에 단련된 사람들이 특유하게 갖는 침통한 침착성으로. P99

 

무엇을 생각하면 견딜 수 있나.

가슴에 활활 일어나는 불이 없다면.

기어이 돌아가 껴안을 네가 없다면. P134

 

흰빛이 스러지며 물이 되어 살갗에 맺혔다. 마치 내 피부가 그 흰빛을 빨아들여 물의 입자만 남겨놓은 것처럼.

어떤 것과도 닮지 않았다고 나는 생각했다. 이렇게 섬세한

조직을 가진 건 어디에도 없다. 이렇게 차갑고 가벼운 것은. 녹아 자신을 잃는 순간까지 부드러운 것은. P186

 

내려가고 있다.

수면에서 굴절된 빛이 닿지 않는 곳으로.

중력이 물의 부력을 이기는 임계 아래로. P267


 

#작별하지않는다 #한강 #장편소설 #프랑스메디치외국문학상 #제주43 #독파챌린지 #독파 #앰버서더 #앰버서더3기 #추천도서 #소설추천 #독서 #읽을만한책 #문학동네 #북클럽문학동네 #내돈내산 #책추천 #추천도서 #서평


그렇게 죽음이 나를 비껴갔다. 충돌할 줄 알았던 소행성이 미세한 각도의 오차로 지구를 비껴 날아가듯이. 반성도, 주저도 없는 맹렬한 속력으로. - P15

어떤 사람들은 떠날 때 자신이 가진 가장 예리한 칼을 꺼내든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안다. 가까웠기에 정확히 알고 있는, 상대의 가장 연한 부분을 베기 위해. - P17

자신의 삶을 스스로 바꿔나가는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다른 사람들은 쉽게 생각해내기 어려운 선택들을 척척 저지르고는 최선을 다해 그 결과를 책임지는 이들. 그래서 나중에는 어떤 행로를 밟아간다 해도 더이상 주변에서 놀라게 되지 않는 사람들 - P33

어떤 기쁨과 상대의 호의에도 마음을 놓지 않으며, 다음 순간 끔찍한 불운이 닥친다 해도 감당할 각오가 몸에 밴 듯한, 오래 고통에 단련된 사람들이 특유하게 갖는 침통한 침착성으로 - P99

무엇을 생각하면 견딜 수 있나.

가슴에 활활 일어나는 불이 없다면.

기어이 돌아가 껴안을 네가 없다면 - P134

흰빛이 스러지며 물이 되어 살갗에 맺혔다. 마치 내 피부가 그 흰빛을 빨아들여 물의 입자만 남겨놓은 것처럼.

어떤 것과도 닮지 않았다고 나는 생각했다. 이렇게 섬세한

조직을 가진 건 어디에도 없다. 이렇게 차갑고 가벼운 것은. 녹아 자신을 잃는 순간까지 부드러운 것은 - P186

내려가고 있다.

수면에서 굴절된 빛이 닿지 않는 곳으로.

중력이 물의 부력을 이기는 임계 아래로. - P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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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이르는 병
샤센도 유키 지음, 부윤아 옮김 / 시옷북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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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이르는 병』

 

샤센도 유키 장편소설

부윤아 옮김

시옷북스 출판




 

 

🏷 줄거리


전학을 자주 다닌 5학년 마야미네는 이번 전학 간 학교에서 만난 케이가 친근하게 인사해 주어 학교 적응을 어렵지 않게 잘 하게 된다. 어느 날 케이가 연을 가지러 수리 중인 미끄럼틀에 올라갔다 떨어지며 얼굴에 상처를 입게 되고 마야미네는 케이에게 앞으로 케이의 히어로가 될 것을 약속한다. 그리고 교외 학습에서 네즈하라 아키라의 괴롭힘이 시작된다. 이후 네즈하라가 마야미네를 폭행할 때마다 손을 찍었고 ‘나비 도감‘ 블로그에 올린다. 채집한 전리품을 표본 상자에 넣어 전시하듯이. 자신의 행동에 벌을 받기라도 하듯 네즈하라는 볼펜으로 눈을 찔린 채 옥상에서 떨어져 죽고 자살이라는 수사는 종결된다. 마야미네는 이런 네즈하라의 죽음이 케이가 저지른 것으로 생각하고 자신을 위해 살인을 저지른 케이를 안타깝게 생각하며 더욱 가까워진다.

 

중학생이 되어 학생회와 연주 지휘를 하며 바쁜 케이는 마야미네에게 자신이 좋아한다는 것을 증명한다며 공원에서 자살하는 학생의 현장을 함께 보게 한다. 그리고 자신이 수십 명의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간 블루모르포 게임의 마스터라고 고백한다. 케이의 잘못된 행동을 알면서 경찰에 말하지 않고 혼자만 알고 있는 마야미네는 저울이 미친 듯이 움직이는 것처럼 윤리와 도덕, 애정 사이에서 혼자 그 무게를 감당한다. 그 무게가 케이를 상처로 부터 지키고, 세상의 불합리에서 구하는 히어로라고 착각하며. (현실은 케이의 살인을 긍정하는 일뿐인데)

자신이 케이를 저렇게 변하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으로 지내던 마야미네는 조금씩 케이의 가면 속 모습을 알게 되면서 케이의 잘못을 경찰에 알림으로 더 이상의 살인은 하지 않도록 하려고 한다. 하지만 마야미네의 뜻대로 되지 않는데…

 

 

📝 책을 읽고

 

제목과 표지만 보았을 때 달달한 십 대들의 첫사랑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학교폭력, 가스라이팅 등의 무거운 내용이었다. 학교폭력과 그에 맞서는 방법으로 가해자를 자살로 몰아가게 만든 살인자 케이.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 우등생 케이가 살인을 조종한다는 것을 마야미네도 알면서도 자신이 피해자였던 사실을 말할 용기도 없고 케이를 좋아하는 마음 때문에 선뜻 막아서지 못한다. 자신이 맞을 때 방관했던 반 친구들이나 자살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는 마야미네는 죄가 없다고 할 수 있을까.

 

게임에 참여자들은 목숨을 대신해 누군가의 온기, 이해를 받고 생을 마감할 수 있다는 얼토당토 않은 논리로 말하는 케이를 보며 사이코패스가 사람을 어떻게 이용하고 삶을 송두리째 빼앗아가는지 잘 보여준다. 마지막 반전은 설마 했던 마음까지, 손톱만큼의 희망적이었길 바라는 마음마저 깡그리 날려버렸다.

 

케이는 마야미네를 보며 어떤 기분이었을까. 사랑에 이르는 병에 걸리게 만든 감정까지도 거짓으로 가득한 계획의 일부였을 거라 생각하면 진짜.. 살면서 절대 만나면 안되는 사람이라 생각들만큼 최악이다. 현실에서도 강도가 약할 뿐이지 내가 얼마나 흔들리는지 보면서 쾌락을 느끼는 가스라이팅을 하는 사람은 주변에 많다.

 

게임으로 자살한 사람들의 몸에 있던 나비 모양, 마야미네가 괴롭힘으로 폭행당할 때 찍힌 손을 담은 블로그 나비 도감, 케이라는 불을 향해 날아가는 나비 같았던 마야미네. 결국은 케이도 마야미네를 사랑했기 때문에 벌인 일은 아니었을지.

 

(소설 속 나비 효과처럼 절망적인 상황이 아님에도 우울한 감정을 따라 하는 비극이 발생할 수도 있으므로 지금 삶의 비관에 빠져있는 사람이라면 정상적인 컨디션에서 읽기 바랍니다 ㅎㅎ😅)

 

 

🔖 책 속 밑줄 긋기

 

이 사진은 청소 시간에 물을 뒤집어썼을 때 내 손. 저 사진은 볼펜으로 허벅지를 찔렀을 때 내 손. 또 다른 사진은 옷이 전부 벗겨진 채로 체육관 창고에 갇혔을 때 내 손. 저건 등을 밟힌 상태에서 필사적으로 위를 향해 뻗고 있는 내 손. P45

 

차분히 가라앉은 체육관 안에 케이의 목소리만 울려 퍼졌다. 그 광경을 이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네즈하라 아키라의 장례식 때다. 그때도 조용히 가라앉은 분위기에서 케이의 목소리만이 존재했다. 삶과 죽음이 상반된 두 모임을 케이라는 존재가 이어주고 있었다.

케이가 저지른 죄도, 케이가 구한 생명도 나는 모두 알고 있었다. P 107

 

케이가 키스한 순간 문득 아르투어 슈니츨러가 쓴 소설이 떠올랐다. 그 소설에서는 신뢰를 증명하고자 주인공이 형에게 병원 소개장을 건넨다. “내가 미친 건지 아닌지 형이 판단해 줬으면 해.”라고 말하며, 자신의 모든 걸 맡긴다. P147

 

상처투성이인 현세보다도 케이를 만날 수 있는 성역을 꿈꾼다. 흡사 꿀을 찾는 나비처럼. 혹은 불을 향해 날아가는 나방처럼. P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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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동네’로부터 도서지원 받았습니다.

이 사진은 청소 시간에 물을 뒤집어썼을 때 내 손. 저 사진은 볼펜으로 허벅지를 찔렀을 때 내 손. 또 다른 사진은 옷이 전부 벗겨진 채로 체육관 창고에 갇혔을 때 내 손. 저건 등을 밟힌 상태에서 필사적으로 위를 향해 뻗고 있는 내 손. - P45

차분히 가라앉은 체육관 안에 케이의 목소리만 울려 퍼졌다. 그 광경을 이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네즈하라 아키라의 장례식 때다. 그때도 조용히 가라앉은 분위기에서 케이의 목소리만이 존재했다. 삶과 죽음이 상반된 두 모임을 케이라는 존재가 이어주고 있었다.

케이가 저지른 죄도, 케이가 구한 생명도 나는 모두 알고 있었다. - P107

케이가 키스한 순간 문득 아르투어 슈니츨러가 쓴 소설이 떠올랐다. 그 소설에서는 신뢰를 증명하고자 주인공이 형에게 병원 소개장을 건넨다. "내가 미친 건지 아닌지 형이 판단해 줬으면 해."라고 말하며, 자신의 모든 걸 맡긴다. - P147

상처투성이인 현세보다도 케이를 만날 수 있는 성역을 꿈꾼다. 흡사 꿀을 찾는 나비처럼. 혹은 불을 향해 날아가는 나방처럼. - P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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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 설자은 시리즈 1
정세랑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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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

-설자은 시리즈1

 

정세랑 장편소설

문학동네 출판

 

"680년대 후반 통일신라를 배경으로 기록과 유물의 빈틈을 파고들어 완전히 꾸며낸 이야기이며, 없었던 사람들의 없었던 사건들"

 

 


 

 

지금의 경주, 신라의 서라벌. 수도 금성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이다.

주인공은 ‘설자은’ 셋째 아들 자은의 죽음을 대신해 다섯째 딸 미은이 집안을 조금이라도 도움주기 위해 자은을 대신하여 당나라 유학을 다녀오게 되고 자은의 이름으로 살게 된다.

 

금성으로 돌아오는 배에서 만난 돌과 철을 이용해 누반박사가 되고 싶었던 손재주 있는 ‘목인곤’을 만난다. 배 안 상인의 죽음과 그의 짐에서 백제의 정교함이 담긴 장신구들이 발견되는데 이 죽음의 이유는 풀리지 않고 끝이 나고 다음 사건으로 넘어간다. (신라시대의 남자들이 반지를 여러 개 끼는 등 장신구를 좋아했다는 재미있는 사실도 있다)

집으로 돌아온 자은은 죽은 셋째 오빠 자은과 연이 있었던 귀부인 산아의 아버지가 쓰러지고 손바닥 붉은 글귀를 발견했다며 자은에게 도움을 청한다. 산아의 집으로 가서 식객으로 묵게 된 목인곤과 자은은 사혈택에서 독군 어른의 죽음을 파헤치는 약야 스님과 함께 범인을 잡게 되지만 산아의 기분이 좋았을지는 모르겠다.;;;

 

다음 사건. 베틀 짜는 일은 왕실의 일을 맡을 수 있고 노비처럼 노동만 해야 하는 궁노이지만 금전의 모로 뽑히면 상을 받기도 한다. 베틀 짜는 일로 진골 여자들은 길쌈 대회를 여는데, 말 그대로 베틀로 베틀을 하는 신라시대의 독특한 풍속과 남자 못지 않은 여자들의 열정이 보였다. 베틀이 부서진 일로 범인을 찾는 일을 맡게 된 자은은 상을 꼭 받아야 하는 간절함이 있는 여자를 찾는다. 범인은 엉뚱하게도 늙은 이에게 시집가는 친구를 돕기 위해 벌인 일!;

 

1권 마지막 사건으로 흰 매를 다루는 매잡이의 죽음을 해결해 가는 자은은 왕의 눈에 띄게 된다.

10권이 될 수도 있는 설자은 시리즈는 1권에서 자은이 왕의 사람이 되기까지의 과정들과 신라시대의 기록과 그 시대 사람들의 생활을 상상해 볼 수 있는 재미는 있었지만, 엎치락뒤치락 추리의 쫄깃함은 없었다. 정세랑 작가의 첫 미스터리 소설이고 먼 시간 여행을 하는 기분으로 읽는다면 좋겠다.

 

ㅡㅡㅡ

 

🔖 책 속 밑줄긋기

 

우리가 진짜 칼을 받았을 때 너는 나무칼을 쥔 채, 네가 쓰이지 않으면 신라가 잃는 것이라고 했지. 자, 내가 네게 쓰일 기회를 주겠다. 너는 이제 어쩔 것이냐? 

P29 <갑시다, 금성으로>

 

“며칠이었을 뿐인데 몇 년을 늙어버렸다는 옛날이야기의 주인공 같아졌어. 듣지 말아야 할 것들을 듣고 보지 말아야 할 것들을 봐버려서 겉의 나이와 속의 나이가 달라져버렸달까? 껍질과 안 사이가 벌어지며 찢어질까 두렵네.“ 

P170 <손바닥의 붉은 글씨>

 

여름처럼, 젊음처럼 끝이 난 줄 알았던 것이 한줄기 남아 계속되고 있었다. 담장 밖 버들이 흔들리는 것과 맞추어 자은의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저도 모르게 회소곡을 흥얼거리자, 도은이 목소리를 더해 자은이 틀리게 부른 부분을 고쳐주었다. 한 바퀴 돌고 끝날 줄 알았는데 인곤도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노래가 형체 없이 허공으로 사라진다는 것이 어쩐지 다행한 밤이었다. 

P226 <보름의 노래>

 

“내가 베라는 것을 베어라. 또 네가 베어야 할 것을 베어라. 보름마다 이곳으로 와 무엇을 베었는지 고하라.“ 

P284 <월지에 엎드린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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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진짜 칼을 받았을 때 너는 나무칼을 쥔 채, 네가 쓰이지 않으면 신라가 잃는 것이라고 했지. 자, 내가 네게 쓰일 기회를 주겠다. 너는 이제 어쩔 것이냐? - P29

"며칠이었을 뿐인데 몇 년을 늙어버렸다는 옛날이야기의 주인공 같아졌어. 듣지 말아야 할 것들을 듣고 보지 말아야 할 것들을 봐버려서 겉의 나이와 속의 나이가 달라져버렸달까? 껍질과 안 사이가 벌어지며 찢어질까 두렵네." - P170

여름처럼, 젊음처럼 끝이 난 줄 알았던 것이 한줄기 남아 계속되고 있었다. 담장 밖 버들이 흔들리는 것과 맞추어 자은의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저도 모르게 회소곡을 흥얼거리자, 도은이 목소리를 더해 자은이 틀리게 부른 부분을 고쳐주었다. 한 바퀴 돌고 끝날 줄 알았는데 인곤도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노래가 형체 없이 허공으로 사라진다는 것이 어쩐지 다행한 밤이었다. - P226

"내가 베라는 것을 베어라. 또 네가 베어야 할 것을 베어라. 보름마다 이곳으로 와 무엇을 베었는지 고하라." - P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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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은유가 찾아왔다 - 교유서가 소설
박이강 지음 / 교유서가 / 2023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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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은유가 찾아왔다』

박이강 소설
교유서가 출판

 


 

 

작가는 글로벌 기업을 다니다 소설이 좋아 소설가로 되었는데 그 과정들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 같다. 찐 사무직이 아니면 절대 알 수 없는 갑질도 아닌 감정을 소모하고 다치고 나를 붙잡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은 나날들의 내용들이 가득했으니. 누구에게도 쉽게 꺼낼 수 없는 내 비밀 일기장 내용 같은 소설이었다. 

 

공간에 대한 글이 많았는데 권위있고 독립된 장소이지만 반대로 자신의 어둠을 자꾸 들여다보게 만드는 외로움을 키우게 만드는 곳을 말하는 것 같았다. 직장에서 그런 단독 오피스 공간을 가지면 알 수 있는 감정들이 많이 드러났는데 자리를 붙들고 있기까지 능력을 쥐어짜고 자신을 소모하는 일에 지침이 많이 나와서 이 책은 직장인이 읽으면 많이 공감할 것 같다.  

 



 

 

📚 <흔들리는 것들>

 

부장의 듣기 싫은 말을 뒤로 발리로 왔다. 휴가지에서 부장의 딸같은 조카에게 조언을 해주라는 말도 안되는 전화를 받고, 마사지를 받으며 휴양을 즐기고 있다. 하스나 이름의 마사지사는 딸과 함께 출장을 오게되었고 그 상황에서 부모님을 떠올리게 된다. 

열심히 슈퍼를 하며 살았지만 다음에라는 말로 여유를 유보하며 살았던 부모님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더 회사를 벗어나고 싶어할지도. 왠지 작가 자신의 회사를 그만둬야하는 시기에 스트레스가 담겨있는 듯한 소설이다.


시든 채소 같은 꼴로 매사에 심드렁해진 지가 꽤 오래되었다는 자각에 이르자 더 꼼짝도 하고 싶지 않았다.P13

 

그들은 모든 것을 다음으로 유보하는 방식으로 그들 자신 역시 지금과는 다를 거라고 믿는 미래로 유보했다. 나는 부모님의 다음에를 불신했고 나중엔 혐오했다. 그러면서도 삶에 큰 불만이 없는 그들이 비겁하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그들과 비교하면 나는 영영 나태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게 싫었다. P29



📚 <오피스>

 

피 이사. 차장인 나(세영)보다 상사이지만 그녀의 오피스 공간이 부러웠고, 꽃을 배달시키고 지시하는 모습이 자신과 선이 그어진 모습이다. 피이사의 휴가에 결재를 대신하며 손에 쥐게 된 피아노 티켓으로 공연을 보러가서 어릴 적 의도와 반대로 작은 집으로 옮기며 피아노도 강제 종료되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피이사의 제대로 일을 하지 않으면 헛일이라는 말에 억눌린듯, 부모님 잘못으로 자신의 피아노가 빼앗긴 기억때문인지 다시 피아노를 배우며 자신을 찾으려한다. 복귀한 피이사가 꽃의 물을 갈아달라고 할 때 세영은 수국을 버리고 더이상 하지 않겠다며 피아노 뚜껑을 닫던, 피이사의 문을 닫던 쾅 을 자신이 한번 냄으로 자신감을 찾는 모습이다.


조금은 무거운. 직장 상사가 내 자리가 될 수도 있다는 짜릿한 상상. 권력욕인가..ㅎㅎ

 

사장의 소박한 꿈을 완성해주는 일부가 되고 싶진 않았다. 미래의 가능성을 그 조그만 회사의 초라한 사무실에 한정한다는 건 나 자신에게 비겁한 일 같았다. P43

 

그때부터 꽃병의 물을 가는 건 자연스럽게 내 일이 되었다.
기꺼이 시작한 일이었지만 돌이켜보면 비굴에 가까운 선의가 아니었나 싶다. P46



📚 <도시는 밤>

 

계약직으로 전전하는 나. 낯선 싱가포르에서 아무도 나를 모를 것 같은 사람과의 일탈과 아무도 그걸 모를 거라는 안도감에 고무된다. 도시의 야경을 보고 빌딩들이 묘비같다고 말하던 알래스카 남자와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는데 그 남자가 자살했다는 뉴스를 듣게 된다.
회사 사람들은 그만둔 지부장과 반대되는 적당하게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는, 오지랖보다 업무에 충실한 사람들을 좋아한다.

타지에서의 그 남자와 지 부장이 그만둔 일에 대해 도시의 밤을 밝히는 불빛들의 화려함 속에 어둠도 함께 있다는 것. 

 

나를 주시하는 낯선 이들의 시선을 느꼈지만, 그런 경계의 시선은 익숙한 사람들이 타성적으로 범하는 무례보다는 낫기에 개의치 않았다. P69

 

“지 부장은 항상 쓸데없는 말이 너무 많았어요.”
그 마지막 말이 이상하게 가슴에 와 박혔어. 쓸데없는 말. 그래, 나는 그게 듣고 싶었던 거야. 결국 도시의 밤 속으로 형체도 없이 사라져버릴 거라는 걸 잘 알면서도. 이 컵을 전해준다면 지 부장은 내게 고마움을 표시할 테고 둘 사이엔 무언가가 계속 꼬리를 물게 되겠지? 그러다 그녀의 쓸데없는 말에 연연하게 될까봐 두려워졌어. P90



📚 <파라다이스 리조트>

 

직장인 희수를 바라보는 시점이다. 발리로 여행을 떠났지만 긴 시간 이동도 모두 짜증스럽다. 자신의 사무실 방이 생긴 이후라 그럴까. 이메일 확인이 되지 않는 리조트도 불만이고 휴가이지만 코코넛 열매따듯 업무를 잘 해야한다는 생각에 초조함이다. 
최악의 진상 고객으로 리조트의 아니쉬 직원에게 화풀이다. 

정작 자신의 화를 어디에 내야할 지 모르는 화풀이를 엄한데 하는 사람들. 여기서 희수는 최악이다. 

 

무엇보다 금단현상처럼 자꾸 사무실에서의 저녁 시간이 생각나 미칠 지경이었다. 희수는 사람들이 퇴근한 후 아무의 방해도 받지 않고 업무에 집중할 수 있는 저녁 시간을 사랑했다. 방이 생긴 후부터 굳어진 버릇이었다. 딴생각할 틈을 주지 않는 그 꽉 찬 시간 속에 머물 때 희수는 살아 있음을 느꼈다. P109



📚 <방문객>

 

형의 손님을 거절하지 못한 동생네 부부는 방문객의 등장으로 교양적인, 지적인 모습으로 드러내보이려 노력했으나 와인 한병으로 남편과 부인의 감추고 있던 섭섭함이 술주정이 되면서 초대는 엉망이 된다. 
변기 속 똥을 그냥 두고 나간 미스터 자파. 형의 부채감만 아니었다면 저런 무례한 사람을 초대하고 부부가 싸울일은 없었을 텐데 이 모든 것이 형에 대한 부채감 때문으로 돌아갈지도. 쯧쯧

 

두 사람의 형제애는 대단했다. 하지만 그게 여자의 눈에는 오랜 세월 한쪽이 일방적으로 다른 한쪽에 물질적인 관대함을 베풀며 굳어진 결속 같았다. 남자에게 아버지 같은 형의 말은 ‘안 된다’는 가정조차 상상할 수 없는 당위였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P131



📚 <디디를 기다리며>

 

잘난척 쩌는 인간들이 자신이 쩔쩔매던 시절 기억못하고 자본력과 인맥으로 권력을 유지한다. 빌라 그레이에 모인 예술로 투자를 받고 하기 위한 목적으로 모인 사람들은 파티를 개최한 최종 목적 디디를 기다리는데 거들먹거리는 제프 강이 꼭 꼴보기 싫은 임원을 보는 듯했다. 교양과 배려따위는 갖다 버린. 오로지 위로 오르기만을 연구하는 사람들. 디디가 궁금했는데. 안나옴!

 

“아니, 주제 파악 못 하고 나대는 게. 난 말이지. 맥도날드 알바가 글로벌 전략을 논하는 꼴은 정말 못 봐주겠어.” P159



📚 <2백만 원어치 마음>

 

아빠와 전처 딸 혜선 언니는 한국에 두고 엄마와 나(혜린)는 미국으로 왔다. 엄마는 재혼 후 동생 폴을 낳았고. 
언니와는 어릴 적 헤어진 후 아빠 장례식장에서 만났는데 언니는 갑자기 돈을 빌려달라고 한다. 그것도 문제인데 언니가 일하던 중 쓰러지며 보호자로 등록되었다며 연락까지 온다. 

내가 원해서 봉사하고 기부하는 마음과 반 강제적으로 지출해야하는 마음은 전혀 다르다!! 

 

유전자 일부를 공유했다고 해서 그녀와 나는 가족이 될 수 있는 걸까. 불시에 뒷덜미를 잡혀 원치 않는 곳, 원치 않는 사람들 앞에 끌려나온 기분이 들었다. P208



📚 <무탈>

 

하나도 되는 일 없는. 늘 있는 일이지만 하나하나 신경 곤두서 날늘 세우고 상대방을 대하게 되는 매일. 인내심을 갖고 사는 수 밖에. 또 내일이 올테니까…

 

오늘 하루가 지났다. 나는 무너지지 않았다. 어쩌면 아무것도 아닐지 모른다. 오늘이 어제와 비슷했듯이 내일도 오늘과 비슷하겠지. 따지고 보면 다 거기서 거기인 날들일 뿐이다. P233



📚 <어느 날 은유가 찾아왔다>

 

제주도로 갑자기 떠난 어느 날. 은유를 보러 경태의 권유로 갔다고 해서 실제 인물인 줄 ㅠㅠ. 원래의 모습을 잃어가는 나를 과거 깜깜한 밤하늘로 수박씨를 날리던 외삼촌이 날 것의 은유법을 말하듯 자신을 꺼내보라고 스스로 되뇌이는 듯했다. 

 


 

나는 하루하루를 견디는 데 몰두하느라 충동이 멋진 추동이 되는 순간을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P242

 

바보들은 출구를 알려줘도 못 찾아가지. P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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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동네’로부터 도서지원 받았습니다.

시든 채소 같은 꼴로 매사에 심드렁해진 지가 꽤 오래되었다는 자각에 이르자 더 꼼짝도 하고 싶지 않았다.P13 <흔들리는 것들>

그들은 모든 것을 다음으로 유보하는 방식으로 그들 자신 역시 지금과는 다를 거라고 믿는 미래로 유보했다. 나는 부모님의 다음에를 불신했고 나중엔 혐오했다. 그러면서도 삶에 큰 불만이 없는 그들이 비겁하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그들과 비교하면 나는 영영 나태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게 싫었다. P29 <흔들리는 것들>

사장의 소박한 꿈을 완성해주는 일부가 되고 싶진 않았다. 미래의 가능성을 그 조그만 회사의 초라한 사무실에 한정한다는 건 나 자신에게 비겁한 일 같았다. P43 <오피스>

그때부터 꽃병의 물을 가는 건 자연스럽게 내 일이 되었다.
기꺼이 시작한 일이었지만 돌이켜보면 비굴에 가까운 선의가 아니었나 싶다. P46 <오피스>

"지 부장은 항상 쓸데없는 말이 너무 많았어요."
그 마지막 말이 이상하게 가슴에 와 박혔어. 쓸데없는 말. 그래, 나는 그게 듣고 싶었던 거야. 결국 도시의 밤 속으로 형체도 없이 사라져버릴 거라는 걸 잘 알면서도. 이 컵을 전해준다면 지 부장은 내게 고마움을 표시할 테고 둘 사이엔 무언가가 계속 꼬리를 물게 되겠지? 그러다 그녀의 쓸데없는 말에 연연하게 될까봐 두려워졌어. P90 <도시는 밤>

"아니, 주제 파악 못 하고 나대는 게. 난 말이지. 맥도날드 알바가 글로벌 전략을 논하는 꼴은 정말 못 봐주겠어." P159 <디디를 기다리며>

나는 하루하루를 견디는 데 몰두하느라 충동이 멋진 추동이 되는 순간을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P242 <어느 날 은유가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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