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역사
수키 김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9월
평점 :
품절


물론 내용도 중요하다. 스토리. 하지만 마지막 별을 추가하기까지. 기어이 별 다섯 개를 주기까지는 심장이 흔들리는 감정의 동요가 있어야 한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내가 이 책을 읽었는데요. 글쎄. 죽이더라니까요. 우아하지만 날렵하게 주절대고 싶을만큼 마음을 움직여야 한다. 나의 경우에는 문장에 담긴 분위기가 한 몫을 한다. 실용서의 대부분은 내용전달이 우선이기에 문장이 밋밋하다. 반면 문학이라 불리는 것들은 내용은 둘째 치고 그것을 표현하는 문장의 방식에 매료될때가 많다. 하지만 너무 감정적이면 오히려 짜증이 나고 너무 딱딱하면 읽는 재미가 없다. 


생각해보면 ‘독자의 시선이 어떤 첫경험을 하느냐’도 사실 중요하다.


오전 9시의 담배는 절망감의 표현이다. 11월, 비, 6호선 지하철 사우스브롱크스 역 앞의 붐비는 맥도널드, 이런 아침이 아니라면 그녀에게 흔치 않은 일이다. 골목 파티 같은 이곳, 학교를 빼먹은 멍한 여덟 살배기들, 고함 지르기에 지친 미혼모들, 테이블마다 따분한 실직자들, 아침이 가득하다. 모두가 함께다. 공동 경험, 이 날, 이 삶. 하지만 그녀의 삶은 아니다. 그녀는 이 삶을 알지 못한다. 그녀는 이 삶을 원치 않는다. 대신 그녀는 고개를 들어 창문 너머로 아침 특선 메뉴가 적힌 커다란 간판을 쳐다본다. 그곳에는 신비함이 있다.


이렇게 시작하는 소설이라면 나는 마땅히 사고 싶어진다. 수십권의 책에 손을 대보며 유일하게 충동구매를 느끼기도 했다. 붉은 표지, 옛날스런 교복의 경직된 여학생, 말끔하고 이성적인 제목, 저자 소개, 어디서 본듯한 저자의 사진 그리고 책의 첫부분. 모든 것이 확실히 따로 놀면서도 독특한 분위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넘치게 진한 카페라떼처럼 진한 쿨함이 곳곳에 깔려 있다. 이런 종류의 굵직한 쿨함이 좋아지는 시기는 이십대 후반부터 시작될지도 모른다. 이 책의 주인공이 29세 여자 통역사라 하니 그 시기에 느낄법한 감정을 나는 확실히 알 것도 같다.


수지는 부모의 살인을 추적한다. 정확하게 명중한 총성의 울림 속에서 마이클과 그레이스, 데미안과 수지, 아이리스와 롤리타, 빈센트 반 고흐와 테오... 셀 수 없이 많은 단어들이 융합하고 흩어지며 의문을 증폭시킨다. 누구인가.. 누가.. 긴장감 속에서 그 의문을 이어가며 수키 김 특유의 문장 속으로 이성을 잃고서는 빠져들어간다. 바나나라고 불리는 1.5세대. 어느 세계에도 완전히 소속되지 못하고, 어느 곳에서도 감정의 동요를 느껴서는 안되는 상황을 ‘통역사’라는 직업에 투영시키고 있는 수키 김의 첫. 소설. 하지만 첫.스럽지 않은. 수키 김은 자신의 소설에 100점을 준다고 했다.

결국 범인은 그였던가. 그녀였던가. 누구였던가. 아무도 아니었던가. 왜 그랬던가.


언제나 살인, 자살이라는 소재는 그 자체로 불을 뿜듯 강하다. 그래서 꼭 그만큼 강력해진 독자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보다 그럴듯한 작가의 힘이 그 소재를 감싸줄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볼 때 나는 살인이라는 소재보다 이 작가와 이 소설에 더 매혹당한 것이 틀림 없다.

진한 커피만 위로가 되는 날, 독한 술 한잔이 당연한 날..

하지만 세차게 내리치는 빗 속을 걷게 되더라도 감정의 동요가 없을 그런 날..

이 책을 읽는다면 그 서늘한 마음이 독서의 짜릿함을 기억해내며 한층 부드러워 질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벌써부터 그녀의 두 번째 소설을 기다리고 있다.


비가 내리기 직전.

뒤틀리는 하늘.

마지막 빛 속의 텅 빈 회색 아스팔트.

예고 같은 것은 없다. 가볍게 한 방울 떨어지는 법도 없다. 빗물이 퍼붓기 시작하자 그녀는 허리 너머로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채 무릎을 양팔로 감싸 안으며 현관 위에 웅크리고 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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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6-01-17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런 이번에 지를 때 이걸 생각 못했군요. 흠. 얘도 찍어놨었는데

piano避我路 2006-01-18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시죠? 멋진 리뷰 잘 읽었습니다.

진진 2006-01-20 0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락사스님: 넴. 재밌어요. 다음 지를 때.. ㅎㅎ

piano避我路: 감사. 잘 계시죠? 오랜만이예염.

2006-01-31 13: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진진 2006-02-03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글게.. 뜸하게 리뷰를 올리고 있엉.. 책도 뜸하게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