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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이긴다 - 천국과 지옥, 그리고 지금까지 살았던 모든 인간의 운명에 관하여
랍 벨 지음, 양혜원 옮김 / 포이에마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추천 권유도 10
내가 존경하는 분 중에서 종교 이론이 강한 분이 계시다면 본 제목과도 같은 질문을 던지고
싶었던 내용이었고 작품을 통해 깨달음을 확인한 그런 시간이었다.
(그렇다고 '목사님'이나 '전도사님'을 붙잡고 물을 수도 없었다. 본 작품을 읽어 보시면 아시겠지
만 초심자들도 약간의 고뇌만 한다면 쉽게 이해할만한 그런 내용이었지만 이런 질문에 쉽게
답할 수 있는 성질이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겉모습만 자칭 기독교 신자인 나와는 달리 나의 와이프는 뼛속까지 착실한 크리스찬이다.
그래서 나는 아래와 같은 질문을 미안하게도 수시로 아내에게 던져서 괴롭혔다.
나의 질문은 이렇다.
1. 태어나자마자 죽거나, 깊은 산골에서 살다 주님이나 예수님을 알지도 못하고 죽어간 사람은
천국에 갈 수 있을까?
2, 모두를 사랑하신다는 예수님은 정말 인간을 사랑하신다면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무조건
유황불과 지옥불로 벌을 주실까?
3. 주의 종들의 설교를 들어 보면 대체적으로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천국에 가는 준비만
하는 사람들 같다. 그럴러면 주님께서는 왜 이 땅에 우리 인간을 태어나게 하셨는가 바로
천국이나 지옥으로 보내시지?
4. 다 사랑한다고 하시면서 이 땅에 정말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왜 구원하지 않으시고 착한사람을
등치는 사기꾼들을 왜 활개치고 돌아다니게 세상을 만드셨나?
등 이었다.
이 질문을 놓고 마누라와 싸우다가는 화해하고 또 싸우기를 수 없이 했었다.
하지만 마음 한 켠에는 항상 그 답을 스스로 찾고자 노력했었다.
어느 날 우연히 마주한 본 작품이 그런 답을 줄 수 있는 것 같아 접하게 되었다.
작품은 나의 질문에 대한 답을 주는 대신 답을 내 스스로 생각하게 하는 질문을 던져 주고
있었는데, 나와 같은 덜 열렬한 신자뿐만이 아니라 비신자들도 가질 수 있는 기독교와 주님에
대한 의문들이기에 나는 가슴으로 읽으려 노력했다.
과거 한 때 우리 사회에서 한 편의 CF가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CF 내용은 산골 소녀 영자네 집에 모회사 이동통신이 설치된다는 이야기였는데 그 CF로 그
소녀는 일약 대 스타가 되었고 아마도 얼마간의 출연료도 받았던 모양인데, 이를 노린 불한당
같은 놈들이 출연료를 강탈하기 위해 소녀의 집에 들어갔다 소녀의 아버지를 살해했으며 그
소녀는 충격으로 스님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산골에 살면서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살다 돌아가신
그 아버지와 영자라는 소녀가 죽게 된다면 '천국에 갈 수 있을까? 없을까?'
나와 토론을 벌이던 와이프의 결론은 '갈 수 없다'였고, 나는 '간다고 보장은 못 하지만 만약에
못 간다면 소녀와 소녀의 아버지는 너무 억울하다'였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라면 어떻게 생각할까?
작품도 이런 내용을 화두를 던지고 있다.
어느 소녀가 자동차 사고로 15세에 죽었는데, 그 소녀가 12살 이전에 죽으면 하나님이 거두어
주시는 데 그 소녀는 12세를 넘겼으니 하나님이 거두시기가 곤란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게 맞는 소리일까 생각해 본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굳이 12세를 넘어서 살 필요가 있을까?
대충 살다 12살만 되면 죽던지 죽임을 당하는 게 맞지 않을까?
또 그 악명 높은 아우슈비추 수용소에서 히틀러의 만행으로 아무 이유 없이 독가스 실에서
죽어간 자매가 있었는데 한 소녀는 11살, 언니는 15살이었는데 죽어서 보니 동생은 천국에
언니는 12살이 넘어서 천국에 들어가지 못했다면 그것이 올바른 하나님의 잣대인지를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작품은 바로 이런 점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는데 무심하게도 어떤 답도 주지 않고 있지만,
작품의 서두를 보면 작품을 추천하고 있는 여러 분들의 이야기가 어느 정도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주고 있었지 않나 생각한다.
작품의 내용과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각종 추천사들을 읽어보면
추천사 1.
저자는 인간을 협박하고 종교적 신념을 배타적으로 갖도록 만들기 위해 천국과 지옥이 동원되는
것을 거부하며, 이 세상에서 진실로 이루어져야 할 하나님 나라의 모습에 우리가 눈뜨기를
호소하고 있다. 결국 사랑만이 이 모든 절망과 패배의 시간을 영원한 감격으로 전환시킬 힘의
근본임을 강조하고 있는 작품이다.
추천사 2.
그의 관심을 지옥 자체가 아니라, 지옥에 대한 집착 속에 숨은 좁은 우리. '당신들의 지옥’을
말함으로써 '우리들의 천국'을 확보하려는 바리새인 같은 우리의 실상이다.
추천사 3.
내세에서의 지옥에 대해서는 두려워 떨면서 이 땅에 존재하는 지옥의 현실에 대해서는 무감각한
그리스도인들이 적지 않다. 저자는 현세의 천국과 지옥에 대한 책임을 강조하고 있다.
나도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부분은 거듭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혹은 구원받았다고 믿는
사람들 대개가 '누가 구원받지 못할까?를 즐기는 경향이 있다.
이런 저런 추천사 보다 가장 가슴에 닿은 내용은 '임어당 선생'이 말씀으로
"내가 가 본 교회에서는 항상 분노한 목사가 분노한 목소리로 분노한 하나님에 대해
설교했다"
였다.(나도 그런 기억 밖에는 없다)
내가 과거 교회 그러면 생각나는 모든 내용을 두 줄로 요약하신 아주 정곡을 찌르는 임어당
선생의 말씀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하는 데, 날벼락처럼 나를
'죄인'이라 부르고 착하게 살았다고 생각하는 데, 사사건건 '지옥'에 간다고 설교를 하는 목사님이,
전도사가, 교역자들이 정말 싫었고 그런 주장을 하셨다는 주님과 예수님은 더욱 싫었다.
그렇지만 와이프를 사랑하고 교회를 다니게 되면서 그런 설교가 주는 의미를 나름대로의 연구
끝에 정확히 알고는 그리 겁먹지 않게 되었지만 아직도 뭔가 찜찜한 구석은 남아 있다.
기독교가 뭔지, 산골에 사는 영자네 가족들과 같은 사람들에게 갑자기 찾아가 그냥 그렇게 살면
지옥에 간다던가, 최후의 날에 유황불로 심판받는다고 하면 어느 누가 좋아하겠는가?
짧은 시각으로 우리 기독교를 보았을 때, 기독교에 매료되어 믿게 하기보다는 위협당하여 믿게
하려 하고 있다는 저자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감하는 바이다.
즉, 설교자들은 메시아의 복된 말씀 전파가 아닌 위협으로 일관하면서 그 분의 참 뜻을 입만 열면
비신자들에게 '지옥'과 '유황불'을 들먹이며 위협 아닌 위협을 일삼으면서 다가 올 신천지를
준비하라고 강제하고 있는 게 오늘날 우리들의 기독교라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현실에 대한 무기력을 유발시키는 발언을 서슴지 않게 하고 있다.
작품도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람들을 다른 어딘가로 가게 하는 것이 예수가 하시는 일이라면, 기독교 핵심 메시지와 이생의
관계는 고작 다음 생에 필요한 것을 손에 쥐어 주는 것 밖에는 안 된다.“
는 논리라고 역설하고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원하시는 최선이란 말인가?
제반 여러 이야기를 읽으면서 최종적으로 이야기하는 저자의 이런 주장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자가 던지는 중요 질문에 대한 작품의 요약과 거기에 덧붙인 나의
의견을 간단하게 피력해 보면
질문 1) 인간이 저지른 일순간의 실수를 이유로 영원한 고통 속에서 수천 년의 세월을 보내게
하는 게 진정한 우리들의 하나님이라는 말인가?
그것은 아닐 것이다.
성경에도 자식이 밥을 달라고 할 때 돌을 줄 부모가 없듯이 자식이 공부는 안 하고 매일 놀기만
해 얄미운데 밥 때만 되면 짜증내며 밥 달라고 보챈다고 밥 대신 흙덩이나, 돌덩이를 던져 주는
부모는 없을 것이다. 육신의 부모보다 더 크나 큰 사랑을 지니신 하나님께서 유한한 삶을 살다가
잘못을 저질렀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빌미로 인간에게 영원한 벌을 주신다?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는 게 저자와 나의 생각이다.
그렇다고 생명을 경시여긴 흉악범이나 전쟁같은 반 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놈들까지도 동일한
잣대를 적용하실 지 여부는 좀 뒤에 이야기하고 여기서는 위에 해당하는 간단한 사항만을 놓고
이야기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사소하게 저지른 순간의 실수 - 인간의 긴 일생을 놓고
보았을 때 - 를 이유로 절대 영원한 벌을 내리지 않으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질문 2) '천국'은 진실로 있는가?
나는 '천국'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천국'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각박한 현세를 사는 인간들에게 최소한의 '희망'도 없다는 이야기로
밖에는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들에게 '천국'이라는 희망마저도 없다면 그 날이 그 날이고,
어제가 오늘이고, 오늘이 내일이니 '절대 꿈도 꾸지 마라 그런 나라는 없다'라는 의미라고 한다면
현세의 고난과 괴로움을 무엇으로 이겨내고 힘든 하루 하루를 무슨 낙으로 견뎌 낼 것이며 그런
고난을 무엇으로 극복할 수 있겠는가?
'천국'의 실체는 사람마다 각자 주관적으로 생각한다 해도 공통적인 것은 아마도 걱정, 근심 없는
세상, 고통과 고난 없고 항상 복과 즐거움이 넘치는 신나는 곳일 것이다.
현재가 힘들고, 어려워도 보다 나은 내일, 복되고 아름다운 날을 기대하며 사는 것이 일반적인
사람들의 마인드 아니겠는가?
즉, 미래란 희망의 현실적 표현이고, 천국이란 각박한 현세를 살아가는 이들의 또 다른 희망의
현실적 증표라고 생각해 볼 때 나는 반드시 '천국'은 있다고 굳게 믿는 바이다.
천국이 반드시 있다고 믿는 또 하나의 강력한 이유는,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이생의
각박한 삶을 살고 돌아온 자녀들에게 편히 쉬게 해 주실 처소를 마련해 놓고 있을 것이라는
굳은 믿음이 있기 때문이라는 점도 있다.
덧붙여서 저자가 '천국'에 대한 단상을 강조한 몇 가지를 첨언해 이야기한다면,
'천국'의 '존재 유무'를 떠나 지금 살고 있는 우리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하면서 생각의 방식에 따라 현재 살고 있는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 사용 방법도
달라질 것임을 강조하고 있는데, 예수께서도 제자들을 불러 하나님의 세상에서 하나님의 방식
으로 사는 방법을 자신을 통해 배우게 하고 있다.
즉, 예수께서는 우리가 창조하는 것, 베푸는 것 그리고 시간을 사용하는 방법을 세상에서도
지속되도록 지금 여기서부터 연습할 것을 가르쳐 주면서 '천국'을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지금
이 세상의 고통도 동일한 방법으로 진지하게 생각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누가 '천국'에 가느냐의 문제와 관련해서 예수가 우리에게 계속해서 경고하시는 것은, 누가 가고
누가 못 가는가에 대해 경솔한 판단을 내리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는 현재의 영원하고, 강렬하고,
실제적인 기쁨과 평화와 사랑의 경험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천국'이라는 표현을 쓰셨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천국'은 단순히 '언젠가는' 아니었다. 그건 현제의 실재였다.
그 경계를 흐리시면서 하늘과 땅이 합해지고 미래와 현재가 합해지는 삶을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살라고 우리를 초대하셨다.
질문 3) 그렇다면 '지옥'은 정말 있는가?
아주 어려운 질문이라고 생각하는 데, 아주 수준 낮은 나의 주장일 것으로 비춰 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천국이 있다면 이와 반대되는 '지옥'도 반드시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대개의 인간들은 '지옥'이라는 단어로부터 받는 중압감인지는 모르겠으나 죽어서 '지옥'에 가는
것에 대해서 무척 신경을 쓰고 있지만 지구상의 지옥에 대해서는 그만한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게 현실이 아닌가 생각한다. (저자의 이 주장에 대해 나는 천 %, 만 % 동감하는 바이다)
'천국'의 존재를 부각시키기 위해서는 부득이하게 그 어떤 반대 개념의 존재가 필요했을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의 세상에서 하나님의 방식으로 살지 못 할 때 일어나는 거대한 사회
전반적인 붕괴와 혼란에 이르기까지, 악을 지칭할 단어가 필요하다고 보았을 것이며 그것을
지칭하는 단어로 아마도 '지옥'이라는 단어가 제법 어울린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종교가 삶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인간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중세 유럽 당시에 태동된
작품, 예로서 단테의 '신곡'을 읽어 보더라도, '지옥'은 반드시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다.
이유는 그를 비롯한 여러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성을 제고시키기 위해 헛소리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믿음 때문이다. 더욱 중요한 이유는 이 땅에 태어나 사람답게 살지도 못했으면서 반
인륜적 범죄로 인해 많은 사람들에게 피 눈물을 흘리게 했던 인간들에 대해 비록 모든 것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용하시는 하나님이라 할지라도 그런 인간들에 대해 일정기간 단죄를
반드시 하실 것이라는 개인적인 소신이 있기 때문이며, 그런 인간들을 벌 줄 수 있는 곳으로
'지옥' 만한 장소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예수께서는 이교도와 이방 종교인들이 하나님을 믿도록 설득하려고, '지옥'을 사용하지
않고, 이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라고 하신 소명과 정체성에서 벗어나면 어떻게 되는지
경고하기 위해 매우 종교적인 사람들에게 대해 '지옥'에 대해 말씀하셨다고 하시는 데, 그 단적인
예로 ''히브리 성경'의 경우 '지옥'이라는 단어나 그러한 개념을 묘사하는 단어가 없고, 죽음과
무덤을 일컫는 단어들이 몇 개 있을 뿐이라고 한다.
'신약성경'에서는 '지옥'이라는 단어가 12번 정도 사용되었는데, 영어로 '지옥(hell)'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는 '게헨나'로 불리는데, 이를 어원적으로 따져 보면, '게'는 '골짜기'라는 뜻이고, '헨나'는
'힌놈'이라는 뜻으로
즉, '게헨나''라는 뜻은 힌놈의 골짜기로 예루살렘 성의 남쪽에서 서쪽에 걸쳐 있는 실제 장소로
그 당시 '쓰레기 처리장'이었다고 한다. 쓰레기 처리장이란 무엇인가?
각종 폐기물과 불필요한 물건들이 물질로서의 자신의 생을 다한 뒤 소각되고 매몰되는 현장
아닌가. 쓰레기를 소각시키듯이 악인들을 완전 폐기시킨다는 상징성으로 당시 쓰레기
처리장이었던 '게헨나'라는 단어를 차용했을 것이고, '지옥'이라는 곳도 그 '게헨나'와 별반 다를
것이 없을 것으로 여겨 '지옥'과 '게헨나'라는 곳을 동격으로 염두에 두고 사용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참고로 '바울'은 '사탄'의 존재는 사람을 변화시키려는 목적에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존재였다고
하는 바, '지옥'과 '사탄'에 대한 사용 의미를 잘 새겨 볼 필요가 있다고 저자는 이야기하고 있다.
질문 4) 복음은 그렇게 작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이 해석해서 들려주시는 우리의 이야기를 믿거나 아니면 우리가 해석하는 우리의
이야기를 고수할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야기를 믿으려면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복음이 '천국에 들어가느냐 마느냐'의 문제로 축소된다면 기쁜 소식은 문지기를 지나 클럽안으로
들어가는 티켓으로 축소되는 것이다. 복음은 그렇게 작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다
지옥에 가지만 자신은 천국에 간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 그리스도인이 벌이는 잔치는 재미가
없다. 복음을 즐거운 참여가 아니라 천국 입장권으로 이해하면 폭발적이고 해방감 넘치는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게 만들 수 있다.
기타 주요한 문구들
- 예수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하나님은 잃어버린 모든 것을 찾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정말 포기하지 않으신다. 결코
- 참으로 겸손해지고 상한 마음으로 화해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미안하지만 너무
늦었구나'라고 말씀하실 수 있을까?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며 사과하고 회개하면서 하나님께
들어가게 해 달라고 하는데, 하나님이 열쇠 구멍을 통해서 '문이 잠겼구나 미안하다 여기에
좀 더 일찍 왔더라면 어떻게 든 해 보았겠지만 이제는 너무 늦었구나'라고 말씀하실까?
- 결국은 너희가 원하는 대로 될 것이다. 왜냐면 결국 사랑이 이기기 때문이다.
- 성경이나 고대 신앙을 보면 동물을 제단에 바치고 그 피를 뿌리는 모습이 보이는 데 이는 바로
자신의 운명을 통제하는 신이나 세력이나 신적 존재들과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는 방법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즉, 모든 문화가 신들을 만족시키는 일을 중요하게 여겼다. 하지만 더는 그러한 희생이 필요
없게 되었다. 그것은 예수가 정말로 신경 써야 할 유일한 신을 철저하게 만족시킨 궁극적
희생이셨기 때문이다.
- 이생에서 예수를 믿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또 한 번의 기회'같은 것이 주어져야 한다.
- '속하지 않은' 그룹을 배제시키고 '속한 그룹'만 계속 인정하고 지지하는 편협한 복음은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을' 포함하는 이야기를 그대로 전하는 복음이 아니다.
- 예수는 죽음과 재 탄생의 양식이 우리를 지탱해주고 고취시키는 유일한 삶으로 가는 길임을
보여 주는 근원이시며, 힘이시며, 모범이시고, 보증이시다.
- 자신의 죄와 증오를 꽉 쥐고 놓지 않으려는 것은 마치 낙엽을 떨어뜨리지 않으려는 나무와
같다. 가을에 붙잡혀 있으면 봄은 오지 않는다.
- '십자가'는 새 창조에 참여하고 싶어 하는 우리의 가장 깊은 열망을 상기시키고 언뜻 보게하고,
가리키는 아이콘이다.
- 예수는 모든 사람을 위해 오셨다. 그러나 예수는 어느 한 문화로 차출되거나 그에 소유되지
않으신다. 예수라는 말을 쓸 때는 어떤 예수를 말하는 것인지를 묻는 것이 중요하다.
-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사랑 때문에 예수가 오셨고
사랑 때문에 예수는 계속해서
해마다 모든 사람에게 오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