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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을 뒤흔든 11가지 연애사건 - 모던걸과 모던보이를 매혹시킨 치명적인 스캔들
이철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08년 6월
평점 :
두뇌용량의 한계일까나..? 책 앞부분의 구구절절이 슬픈 사연들을 다 잊어버리기라도 한 듯, 책 뒷부분에 실린 사회주의독립운동가들의 삶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가슴에 깊이 사무친다. 앞부분의 이야기들도 인간사에 대한 여러 생각을 하게 했지만, 특히 우리 역사의 흐름과 깊은 관련을 맺으며 희비가 교차된 혁명가들의 이야기가 더욱 가슴 절절하게 다가왔다.
이 책을 처음 손에 들었을 땐, 붉은색의 강렬한 표지가 무척 인상적이라 어떤 이야기가 실려있을지 기대도 됐지만, 한편으론 그저그런 시시껄렁한 연애이야기면 어떡하나 하는 약간의 우려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뒤흔든"시리즈 중의 몇권을 재미있게 보았지만, 가장 최근에 읽은 한권의 "뒤흔든" 시리즈에 적잖이 실망한 터였기에. 하지만 이 책은 내가 기대했던 것 이상의 만족감을 안겨 주었다. 독자의 취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역사 속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개인적인 취향에 비춰보자면 말이다.
일제강점하의 우리 역사에 대해서는 그닥 많은 책을 접하지 못했다. 대충만 알고 있는 일제강점기의 모습은 그저 암울하고, 짓눌려서 멍든 것 같은 우울한 느낌이었다. "나쁜 놈"들에게 수탈당하면서도 끽 소리 한번 못 내는 약한 민중들의 모습이거나, 혹은 달걀로 바위치기 식으로(이런 평가를 하고 있는 나를 그들은 기회주의적이고 타협적인 반동으로 볼지 모르겠다.) 그 "나쁜 놈"들에 대항하다 철저히 탄압받은 독립운동가들의 모습이 가장 먼저 연상되기 때문일까.. 하지만 얼마전에 본 영화 [라디오데이즈]는 그 시절의 경성을 다른 관점에서도 볼 수 있음을 생각케 했었다. 앞서 이야기했던 두 부류의 고난으로 얼룩진 삶을 외면해버렸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그래, 그 시대에도 사람들은 하루하루를 살아가야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것처럼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면서 말이다. 조국의 독립을 생각하며 뛰어다니던 사람들조차도 하루하루의 삶을 살아가야했다. 그 모습이 내 머리속에 그려진 것처럼 그저 암울한 것만은 아니었을테다.
그리고 이 책에선, 한발짝 더 나아가 나의 얕은 사고력으론 상상하기 힘들었던 그 시대의 청춘남녀들의 "연애사건"을 담고 있다. 연애사건이라. 그 시대 사람들도 연애를 했던가? 시대는 이제 막 전근대적 봉건 국가 조선이 일본에 의해 강제로 병합된 험난한 시기이다. 그로부터 길게는 100여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가부장적, 남성우월적 유교적인 가치관을 고집하고 있는 사람들이 널려있는데, 그 시대에 연애라...? 남들에게 들킬까 숨어서 조용히 한 연애도 아니고 경성을 "뒤흔들" 정도로 떠들썩한 연애사건들에 대한 이야기라니 일단 구미가 당긴다. 그리고 이 책에 실린 연애사건들은 현재의 관점에서도 가히 파격적이고 놀라운 이야기들이다.
그 시대의 모던보이 모던 걸. 기존의 인간상과는 다른 개성을 가진 인간들, 세간의 이목이 집중된 그들은 요즘의 연예인과 비슷한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을까..? 그렇잖아도 눈에 띄는 그들이 사랑의 도피행각이나 동반자살 사건을 일으켰으니 얼마나 관심의 대상이 되었겠는가. [사의 찬미]를 불렀다는 성악가 윤심덕에 대해선 어디선가 주워들은 적이 있었다. 그녀가 연인과 함께 바다에 몸을 던졌다는 이야기도.. 그녀의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보다 이 책을 통해 살펴본 그녀의 이야기는 더욱 놀라웠다. 기구하다는 말밖에 뭐 더 할말이 있으랴.
"발가락이 닮았다"와 관련한 염상섭과 김동인 간의 잡음에 대해서는 알았지만, 그 즈음에 "모델소설"을 둘러싼 논쟁이 한 여자(소설가 김명순)의 삶을 그렇게 파탄냈으리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나를 비웃지 말고 나의 운명을 비웃어 다오"라는 그녀의 말.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녀를 둘러싼 괴소문 때문에 끝내는 미쳐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그녀의 삶을 무엇으로 보상할 수있을까. 화가 나혜석과 소설가 김명순의 이야기는 최근에 문제가 되고 있는 특정연예인을 둘러싼 근거없는 뜬 소문으로 인한 피해를 연상케 했다.
요즘도 심심찮게 들려오는 연인들의 동반자살 소식. 하지만 100여년전의 사회에 대한 내 고정관념 같은 것 때문인지, 홍옥임(홍난파의 조카라는 사실이 내겐 놀라웠다.)과 김용주 두 동성애자의 자살사건이며, 카페 여급 김봉자와 의사 노병운의 한강 투신 자살, 기생 강명화와 모던 보이 장병천의 동반자살에 관한 이야기는 더욱 파격적이고 충격적이다. 그리고 박헌영과 주세죽, 김단야와 고명자, 박진홍과 이재유, 김태준까지.. 최린과 나혜석. 지금도 이름만 대면 "아.."하고 알만한 그 당시의 유명인사들의 얽히고 설킨 인연의 실타래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지... 지금과 같은 인터넷시대라면 연일 "검색어 1위"를 차지하고도 남을 떠들썩한 그들의 삶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내겐 놀랍고도 기이하고 안타깝기도 했다.
책을 읽다, 책앞날개에 실린 저자에 대한 간단한 이력만으론 저자에 대한 궁금증이 풀리지 않아, 출판사 홈페이지에 들어가 저자 인터뷰까지 챙겨보았다. 저자의 첫 책이라고 하니, 앞으로 그의 책이 기다려질만큼 내겐 흥미로운 책이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활발하고, 흥미로웠던 경성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사람들의 삶의 모습은 거기서 거기인 모양이다. 열정적으로 사랑했던 그들, 그들의 치열했던 삶이 궁금한 사람이라면, 나만큼이나 이 책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