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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 허물기 ㅣ 우리 시대의 고전 22
주디스 버틀러 지음, 조현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12월
평점 :
0. 본서는 주체라는 기계(/)장치의 system*에서 결정성 문제를 성차화(= (정신(분석)적 )sexuation 및( 사회문화적) gender(-mold)ing/genderization**) 문제와 뒤섞어 ’미결정성’, ’불확정성’ 등의 엄밀하지 못 한 개념을 남용하고 있기에 우선 이 점에 대하여 유감을 표하는 바입니다.
원래 비결정성이나 불확정성이란, 주체의 system 내/외부 모두에서 그 system의 작동/행동에 관해 어떠한 요구나 지시도 하지 않거나 못 하고 있는 상태를 말하는데, 이러한 상황은 실질적으로 발생하지 않고 대개는 내/외적 요구 간 간섭적 과잉결정의 불일치나 모순상태를 과장한 문학적 rhetoric에 불과하고, 특히나 Judith Butler는 거의 언제나 이것에 관해서만 말하고 있습니다.
매우 예외적인 특이개체의 정신(분석)적 성차화와 사회문화적 판별/판정이 모두 오류나 괴리, 모순에 빠지거나 실패해 판단중지에 이른 상태에서조차도 Biochemical process는 나름의 조절 mechanism에 의거하여 독립적으로, 그리고 거의 언제나 굳건하게 자기운동을 전개해 나가고 있으며, 이 경우 ’미결정’이나 ’불확정’이란 곧 system 정지를 의미할 뿐입니다.
주체 system의 이러한 지평은 정신분석적, 사회문화적 범주와 판단의 경계들을 모두 넘어서 있는 실재의 차원이기 때문에 상기의 판단중지 상태에서도, 아니 역설적으로 오히려 이 판단붕괴 상황에서만 드디어 순수한 ’단일결정’의 실현이 가능하게 되므로 이 지평의 내적 요구에 충실히 따르면 되고 그때에야 비로소 자신의 ’몸’이 (번역되지 않은) 자신의 말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 경우 전거( ¶ http://blog.aladin.co.kr/705625157/7699565 )한 바와 같이 대개 system의 hormone 종별 농도의 수리통계적 모형에 따라 기본적으로는 결정되겠지만, 잠복-성의 경우는 사회적/일시적 오해에 불과할 뿐 성소수자로 보기도 어렵고 (굳이 따지자면 표현적/잠정적 성소수자일 뿐이며), transgender나 transexual은 오히려 여타의 (특히 물질적) 제결정을 모두 전복하는 초과잉결정이라 할 수 있고, 간성의 다수는 과잉결정이며, 극소수의 ((XO적) 일부 간성이나) 무성도 생각하는 것처럼 ’미결정’이나 ’불확정’은 전혀 아니며, 이는 오히려 이 소수자들에 대한 인권적 모욕이기도 합니다. 이들도 나름대로 하나의 완전한 개체로서 완결된 결정상태에 있는 것으로 보아야만 할 것입니다.
이러한 실재의 지평은 생(-)화학적 장과 사회문화적 장 간 적응적 기제( / )interface로 발명돼 온 임상의학적 진단 규범과도 다른 것입니다.
[이하 경어 생략]
즉물적 ’가부장제 주적론’류의 성/gender-의식 과잉을 넘어 여성없는 feminism으로, 보편주의적 소수자 연대(/)공동체론으로 진화해 나아간 후기 Butler의 사상은 분명한 발전으로 평가받기에 의심의 여지가 없으나 다음과 같은 문제들은 여전히 해결되지 못 한 채 남게 된다.
1. 결국 탈Gender화를 통해 (보편주의) (범)소수자-정치(론)의 급진민주주의 도식으로의 뒤늦은 수렴이라는 본질적 한계를 노정하면서 오래된 급진민주주의론의 문제와 난점들 또한 고스란히 떠안게 되지만 이를 하나도 해결하거나 인식하(려들)지도 않은 채 갑자기 윤리철학으로 도피해 버리고 만다.
2. 시대적 과제와 문제 설정의 퇴색으로서의 parachronism
; 세계사적 시대/정세 변화에 따른 문제계의 이동
현재 남한사회에서 (소위 ’mirroring’등 vulgar feminism 진영의 잘못된 감정적 과잉 대응으로 오히려 여혐 mention량 연간 9배 이상의 증폭을 계속하며 폭발로 치닫고 있는) ’이’성혐오와 성대결 현상의 숨은 근인인 경제 위기와 사회 양극화에 대해 과연 Queer feminism은 이런 현상적 갈등들을 넘어 어떤 결정적 해법과 대책을 제출할 수 있단 말인가? 결국 Queer feminism은 호황기의 한가하고 표피적인 작은 문제 설정이란 측면이 강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어 보인다.
이는 또한 더 본질적으로는 Queer feminism과 3세대 feminism의 신자유주의와 동성애/Queer 제국주의에의 착종-교란 및 역이용 문제로 귀결된다.
원래 한국의 Queer (Pride) Parade와 Culture Festival은 여타 진보 단체들의 행사와는 달리 매우 이례적으로 철저한 경찰력의 비호 아래 치러져 왔고, 경찰들은 항상 Queer 진영을 입장시부터 호위병들처럼 도열하여 환대해주거나 행사 내내 참가자들을 등 뒤로 보호하며 기독교 세력에 맞서는 대형으로 진을 쳐 제반 관련 행사들을 도와 왔고, 뿐만 아니라 그 유명한 전지구적 미래산업 전략기업의 해마다 계속되어 온 대대적 후원 등은 이미 익히 알려진 바이나, 이에 더하여 최근의 주목할 변화는 영미권 주도 구미 강대국 대사관들의 적극적 후원과 참여라 할 수 있다. 아래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동아시아 질서와 정치군사전략의 판을 짜고 그 실현 관철을 추진하느라 눈코 뜰 새없이 바쁜 대사들을 많은 시간 아낌없이 할애해 그 많은 위험부담을 무릅쓰고 등 뒤로 보이는 경호원들까지 대동한 채, 언론 interview 요청들은 거부/차단하면서 저토록 열심히 참가할 수 밖에 없게 만든, 저 미소 뒤에 가려진 고도의 치밀한 정치경제적 계산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가를 Queer진영은 반드시 숙고해 보아야만 한다.
3. 이러한 결정적 대안은 고사하고 Feminism bloc 내부에서도 극소수에 불과한 queer (feminism) 진영은 과연 bloc 내부에서의 정치력조차 (주도적으로) 행사할 수 있으며, 그러한 (극)소수성의 한계를 넘어 실질적/거시적 주요 사회 변화를 실현시켜낼 수 있는가?
4. 현미경적 미시분할과 근시안에의 편집증적 집착과 매몰 대신 망실하는 장기적 거시관점
현재 Queer진영은 Gender binary를 극복한다면서 자신들의 성정체성과 지향성, 그리고 관계성[!!!], 취향 등의 서로 다른 차원들을 뒤섞어서, 정립된 분류 체계도 없이 나름 광적으로 미시분할을 반복하며 종족 분류학에 현미경적 편집증을 보이고 있다. 현재는 Bi-sexual이 독립범주로 성립 가능한지 연성 Homo-sexual로 통합해야 하는지 등의 문제를 둘러싸고 또 예의 그 "혐오!!" matador를 휘두르며 분열하고 있는데 이 갈등이 가까스로 봉합되어 봤자 다른 분류 단계마다 이와 유사한 문제는 계속 반복 출현할 것이다. 이들은 이 모든 것들이 Binary(체)계의 문제점이 아니라 언어(적 사고)체계 자체의 본원적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이해하지 못 한다. 이는 기본적으로 (정규분포의) Spectrum계이기 때문에 수리통계적 사고체계인 (Cognitive) System IV***로 도약하지 못한 채 언어적 사고체계인 (Cognitive) System III*** 수준에 갇혀 있는 한 아무리 이러한 미시분할을 반복해봤자 결코 분류의 최종단계에 도달할 수조차 없는 것은 물론, 게다가 더욱 치명적으로는 이런 언어적 구획과 분류에는 항상 "어떻게든 금을 그어 봐!! 삐져나와 줄테니까!!!"하고 벼르는 종자들이 기다리고 있기 마련이어서 구축해 온 모든 분류체계는 곧 마디마디 분기점마다의 저항과 반론에 흔들리게 될 것이다.
한편 이들에게는, 몇 계단의 섬세한 분할을 통해 도달한 범주인 Asexual 안에서도 가령 Demisexual과 Grey-Asexual 사이의 차이점 등은 매우 중요하지만 예를 들어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의 차이 등에 관해서는 별반 관심을 보일 정도로 중요한 게 없다. 왜냐하면 Carol Hanisch 이래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 Personal is Political]"이라는 신앙 때문이다. 설령 정말 만의 하나 그 말이 진리일지라도 이들이 왜 자신의 개인적 경제생활 상의 문제 같은 중요한 것들에 대하여는 함께 고민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개인적 성/gender, 그것도 취향 문제에만 집착을 보이는지는 설명되지 않는다.
또한 (정체성(의 구성)이 교차하는) 각 분야 전 방면에서 이런 광적인 미시분할을 계속해 나간다면 그 누구도 소수자가 되지 않을 도리가 없게 되는 문제도 있다. 결국 모두가 언제까지나 영원히 고독한 소수자로 남을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실질적 지배자는 인식의 장막 뒤편으로 사라지고 남는 것은 자칭 소수자=피해자들 간의 고통-전시-"쇼당"[show-down]( / )battle 뿐이다. 누가 누가 더 아픈가?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그럼 누가 누구에 맞서 싸워야 하고, 누구의 편을 들어줘야 하는가? 결국 실제로 도래하는 것은 소수자들의 연대(/)공동체가 아니라 역사 상 한번도 실재한 적 없고 단지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의 상상 속에만 존재했었다고 주장되는 바로 그 자연 상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상태로서의 무한 이기주의 Narkissist들의 전쟁터 뿐이다. 왜냐하면 장막 뒤에 숨은 실질적 지배자는 결코 죽지 않고, 그로 인해 현실의 적대적 구조와 갈등 관계, 목숨을 건 생존경쟁 등은 계속 심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욱 큰 난점은 이것이 Queer 정치(학)만의 문제가 아니라, 몫(소리) 없는 존재자들, 유령적 존재들의 가시화를 위한 (감각의) (재)분할을 추구하는 급진민주주의론( / )진영 일반의 한계로 완전히 확대될 수 있다는 점이다. Queer진영은 이를 단지 예시해 주고 있을 뿐인 것이다.
본질적으로 근원의 적대적 모순을 해결하지 못 하는 한, 아무리 감각의 재분할과 episteme의 인지적 해체 및 재구성을 반복해도 결코 평화와 연대는 도래하지 않을 것이다.
S.
묻고 싶다.
아직도 보수 개신교를 "가부장제", 혹은 "젠더체계"(라는 현실)의 제1계급이라도 된다고 생각하는가?
그래서 그들만 무너뜨리면 되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가?
아니면 아직도 정말 (숨은) 지배자들이 그 보수 개신교의 Anti-queer운동을 바라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우리는 이제 (현실의) Queer 정치학에 도대체 어떤 정치성을 바랄 수 있단 말인가??
(이 질문들을 직설적으로 좀 더 정련하면 다음과 같은 뜻이다.
"젠더체계"나 "가부장제" 붕괴시도실험을 했을 때 도출되는 data값은 계속해서, 당신들의 주장과는 완전히 다르게 그 열렬한 수호자들이 실질적 지배세력과는 거의 상관이 없고, 실질적 지배세력은 그에 대해 (더이상) 별로 개의치 않고 연연하지도 않으며 더군다나 "근본적" "체제" 위협 따위로는 전혀 조금도 생각하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발빠르게 이미 다른 견적서들을 얼마든지 뽑아 놓고 기다리다 이제는 조급해져서 눈치고 뭐고 본색을 드러내며 오히려 발벗고 나서서 부추기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특정 자본주의 단계에서, 그리고 지금도 일정 정도는 지배세력이 (잔존하는) 가부장제를 통해 특히 성별 임금차별과 무급 재생산 노동 수탈 등으로 대표되는 이익들을 취해 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가부장제 정도가 붕괴한다고 해서 차별적 임금-승진체계나 ’무급 재생산( / )돌봄 노동체계로서의 가족제도’ 자체가 붕괴하는 것도 전혀 아닐 뿐 아니라 설령 이것까지 붕괴해 버린다 해도 그런 이익이나 효과를 대체할 새로운 경제 및 지배 양식들은 얼마든지 있으며, 오히려 선진국들은 이런 Queer(/)Feminism을 적극 이용한 선도적 Pinkwash(ing)를 통해 미처 전환/적응하지 못 한 주변국들에 대해 압도적 경쟁력을 강화하면서, 위협적 압박을 강화하는 데 동원하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이 후기의 Judith Butler조차 아직도 극복하지 못 한 채 허우적거리고 있는 소위 "GENDER 체계 근본주의"같은 종교가 얼마나 허황된 허구인지를 보여주는 극명한 data들이다.
이 "견적서"에 대하여는 상기 전거 후단($ ’X.S. 최종 결론과 남겨진 문제’ 절)을 참고할 것.
)
’2016.06.12일 Florida주 Orlando의 한 LGBT club에서 ISIS/L에 동조하는 미국 국적의 자생적 Muslim terrorist에 의해 49명의 사망자와 53명의 부상자를 낸 미국사상 최악의 총기난사 사건이 발생했다. 무엇보다 우선 먼저 그 희생자들에 말할 수 없는 깊은 애도를 드린다. 국내 뿐 아니라 국제 정치적으로도 극도로 미묘한 시점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한편 이것이야 말로 Queer와 갈색 feminism이 post-Fordism기반 (미래 인간자원산업과 시장창출, 그리고 2,3세계 주변부 적대국가와 경쟁기업들의 압박을 위한) 신자유주의-신제국주의의 총알받이 (문화) 돌격대로 역이용 당한 참혹한 역사의 현장이 아니면 도대체 무엇으로 해석되어야 한단 말인가****.
이런 점에서 Queer는 선주민/현지인들에게 살해 당하는 21세기 선교사들에 다름 아니다. 그 자체로는 일정 정도 진보적인 평등 사상도 대변하고 있고 또 때로는 숭고하기까지 하지만 대개는 너무나 탈맥락적이고 Naive하며 그 뒤에는 언제나 열강들의 제국주의 군대와 거대 상단들, (척식) 기업들이 역시 "견적서"를 뽑아 들고 계속 치밀하게 검토하면서 바짝 따라 붙을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대답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당신은 무엇을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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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식론에서 반과학주의와 반기계론에 대해 이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의 기계론은 고전적 mechanism이 아닌 Deleuze-Guattari의 machin(e-)ism 계보를 잇는 것으로 특히 ’인식론적/전략적 기계주의’로 새롭게 불려야 하며, 모든 신비주의 해체를 (제1)목표로 의도적으로 설계된 것임을 밝힙니다.
** 불과 10여년 전에 출간된 이 책 원서의 제목은 Undoing Gender인데, 왜 Judith Butler는 그 멀지 않은 당시에 좀 더 창의적으로 Ungendering이나 Degendering같은 단어를 그 스스로 착안해내지 못 했을까하는 의문이 드는 것은 나의 과문 때문일 뿐인가? 어쨌든 다소 거슬리고 거추장스러운 word-formation이 아닐 수 없다.
*** 학계의 공식 용어는 Cognitive없이 그냥 System II와 System I으로만 명명, 통용되고 있는데 여간 딱한 일이 아니다. 이에 대하여는 기회가 되면 다른 곳에서 상술하기로 한다.
****오늘(’160615) 자로 가해자가 10년 이상 스스로 동성애자 성향이었다는 새로운 증언들이 쏟아지고 있고 FBI는 이것이 금번 terror를 위한 치밀한 사전준비의 일환이었을 가능성을 조사하고 있다는 바보같은 입장을 표명했는데, 이에 대한 합리적 추론은 다문화 자녀의 (문화)정체성 갈등과 분열적 동요 속에서 증폭배양되어오고 하층이민자 유색인종 식민주체, 특히 Muslim들에 대한 만성적 일반 혐오의 누적 속에서 어떤 결정적 계기로 임계폭발한 자기혐오적 붕괴의 극적 대반전이자 외전투사로서, ’귀향한 탕자의 회심/개종(=회개)적 보복 성전’이라는 해석이 되아야만 할 것이다.
[초고 memo 작성중]
[당분간 좀 긴급한 중기적 사정이 발생해 당분간은 본격적 서평 작성이 곤란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혹시 예기치 않은 시간이 생길 때마다 조금씩 추가해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