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이 글은 반론이라기 보다는 최근 제기된 작은 견해차들에 대한 해명서에 가까운 것으로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1. 철학사의 미래











   심심찮게, 매우 비슷한 통찰을 보여주는 세계적 지성들을 만나게 되고, 대개 그 때의 감정은 확신과 연대감에 기인하는 반가움이지만, 이 책은 당시 마치 생각을 그냥 통째로 도둑맞은 것처럼 너무나도 똑같은 나머지 당혹감에 압도되어 서평도 작성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이 책은 미래 철학사의 (새로운) 방향 전환을 예시하는 매우 중요한 책이자, 내가 이 계열의 지적 작업 전통을 버릴 수 없는 결정적 사유인 동시에, 그래서 여기에 무지하게 되면 기계와 Data, 산업혁명과 Data혁명 등을 단순 이분법으로 대립시키면서 (sub-/post- indivdual quantum(ic)) Data혁명이 단지 채굴[data-mining]기술과 채굴기계혁명에 의존하는 후기산업혁명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간파해내지 못하고 역사변동 및 시대전환의 방향들과 scale을 완전히 오독하게 되어 득한 혼란에 빠져버리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그러한 종류의 척도 이론에 해당한다.

Data(산업)혁명을 마치 산업혁명을 대체하는 혁명으로 과대평가하게 되면 다음 위기에 이어질 5차 산업혁명이 생화학기계[1] 혁명으로서의 Bio(-pharmaceutical) revolution이 될 것이라는 사실도 예견은커녕 도저히 설명조차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rf. 

















2. 기업이 주도하는 혁명??  Data 자본주의 Utopia라는 환상 

  ;위로부터의 수동(사회)혁명의 본질 대 아래로부터의 주체적 근원혁명의 관계






























O'NEIL, Cathy('2016). Weapons of Math Destruction: How Big Data Increases Inequality and Threatens Democracy. NY: Crown Publishing Group;

>국역: 김정혜 ('2017) [[대량살상수학무기 :어떻게 빅데이터는 불평등을 확산하고 민주주의를 위협하는가]] 흐름출판;


SHAFFER, Kris ('2019). Data versus Democracy How Big Data Algorithms Shape Opinions and Alter the Course of History. Apress;

>국역: 김선 ('2020) [[데이터, 민주주의를 조작하다 :빅데이터 알고리즘은 어떻게 여론을 만들고 역사의 경로를 바꾸는가]] 서울: 힐데와소피;




3. 객체지향에 관한 오독들

  ; 오직 사소설만이 존재할 이 신물나는 개인주의 시대에 맞서기 



66

어떤 식으로 자연의 문제가 정신 안에서 해소되는지 설명하는 자연철학과 어떤 식으로 정신의 문제가 자연 안에서 해소되는지 설명하는 초월적 철학은 분명히 상반된 과제를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일한 체계를 구축하며, 이 체계를 바탕으로 ‘보이는 정신’인 자연과 ‘보이지 않는 자연’인 정신이 ‘하나의 전체hen kai pan’로 통합된다. 이것이 바로 셸링의 몇 안 되는 완성작 가운데 최고의 걸작으로 간주되는 『초월적 관념주의[2] 체계System des transcendentalen Idealismus』(1800년)의 핵심 내용이다.

이 저서에서 셸링은 정신의 진화사에 관한 생각을 발전시켰다. 이를 모형으로 구축된 것이 바로 헤겔의 변증법이다. 셸링에 따르면 정신은 필연적으로 무의식 상태에서 일종의 ‘외부 세계’로 객관화되며 이 객관화 과정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서야 완성된 자의식의 형태를 갖추게 된다. 이 ‘자아’의 역사를 지배하는 것은 자연철학에서 유래하는 대조의 메커니즘, 즉 무한하고 무의식적인 원심 활동과 자의식 및 유한한 세계를 생산해 내는 제한적이고 의식적인 구심 활동 사이의 상응관계다.

99[3]


이상의 서술이 극명하게 보여주는 바와 같이 Schelling-Hegel에서 만개한 독일 관념론 철학 전통의 합리적 핵심을 전복적으로 계승한 Marxism은 당연히 자연과 정신, 객체와 주체의 통일을 넘어 그 형이상학적 이분법 자체를 지양하고자 한다.

그러나 당면한 시대적 문제의 핵심 중 하나는 자유(지상)주의 지배체제의 결과로 '너 자신'[4] 이외에는 그 어떤 존재나 가치, 문제에도 전혀 관심 없는 이 저주스런 세계의 풍경이다. 따라서 시대 전환을 만들어 내기 위해 불가피한 과도기의 사상적 구호로, 세계-내적-존재로서의 주체가 녹아 있는, '통일적 세계구성체로서 객체'를 지향하는 '객체지향철학'(으로의 대주제 변경)이 요청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5]    






4. 다시, Sokrates에 대하여


당시 제출한 반론은 먼저 모든 문제상황(의 원인)을 오직 개인만의 통제불가능한 내적 충동과 욕동의 반복에 의해 설명하려는 방법론에 반대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특히 Sokrates의 경우 당대 최고의 자기통제적 지성 중 하나로 그의 행적은 당시 주어진 사회정치적 상황에 대한 의식적 인지 분석과 대응으로서 개입의 결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대안적 방법론에 기반한 것이었다. 이것은 붕괴 직전의 연속위기 속에서 (상대주의적) 궤변론 진영이 장악해 중우정치[6]로 타락해버린 민주정파와 이에 도전하는 비판적 귀족주의 참주/과두정파[7] 간의 대립이라는 당대의 사회정치적 핵심모순을 무시하고서는 그의 기괴한 행적들이 전혀 이해될 수가 없다는 관점의 분석틀인 것이다. 이 관점에 입각하면, Sokrates의 죽음은 제자들이 주도했던 coup d'etat와 재발 위험에 공포를 느낀 민주정파들에 의해 그 배후[ 뿌리]로 지목됨으로써 제자들을 위해서라도 궁극적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음이 그야말로 명약관화하다. 


이미 처음 반론을 제출했을 당시부터 이것은 너무나 명확히 현시된 사실이었고 이를 포함한 전모를 밝힐까 했으나, 별로 난해한 관점도 아니고 많은 분들이 조금만 들여다 보면 곧 아시게 될 문제라 생각된 데다, 고백하건대 그 오래전부터 일일이 모든 것을 적기가 매우 귀찮아지기도 했던 터라 실행에까지 옮기지는 못 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이후 사회적으로 Sokrates에 대한 많은 관심과 의문, 논의가 일어나는 것을 목도하다 이제 다시 촛점이 모아진 계제에 결국 마무리를 지어야 하겠기에 마음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그런데 기나긴 서술을 이어 나가야 할 바로 그 찰나에 마침 완전히 동일한 관점으로 정리된 기존 논의가 발견되어 이하 인용으로 대체키로 한다.


66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기원전 404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패배한 후에 위기를 맞이했다. 전쟁에서 많은 피를 흘린 것은 물론이고, 전쟁이 끝나자 스파르타의 조종을 받는 30인 참주정이 세워지면서 또다시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했다. 또한 소크라테스의 재판이 열리기 2년 전, 30인 참주 독재의 끔찍한 기억이 채 가시기도 전에 아테네에서는 쿠데타가 일어났다.


소크라테스는 이 쿠데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여겨졌다. 반역의 주역들이 대부분 소크라테스와 가까운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스파르타 편에 서서 아테네를 배신했던 [Sokrates의 젊은 연인] 알키비아데스와, 30인 참주정의 지도자였고 쿠데타의 주범인 크리티아스와 카르미데스는 모두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다.


소크라테스는 이 부유한 귀족 청년들과 어울려 다니며 대화를 나누곤 했다. 이 청년들은 민주주의를 별로 탐탁하지 않게 여겼다. 이는 다분히 소크라테스의 영향이었다고 볼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보기에 다수의 어리석은 사람들을 따르는 민주주의보다는 현명하고 정의로운 탁월한 통치자가 지배하는 사회가 더 완벽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아테네의 시민들 입장에서는 청년들에게 그러한 영향을 미친 소크라테스는 민주주의에 가장 중대한 위협이 되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결국 소크라테스에 대한 사형 선고는 아테네의 민주주의를 유지하고자 하는 정치적인 판단이 근저에 깔려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의 재판은 제비뽑기로 추첨된 배심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 재판에 501명의 시민 재판관이 참여했는데, 이 정도의 숫자면 당시 얼마 되지 않았던 아테네 시민의 숫자와 비교해볼 때 시민의 의사가 반영된 것이라고 해도 전혀 무리가 없을 것이다.


501명의 시민 재판관들은 280 대 221로 소크라테스에게 유죄판결을 내렸고, 형량에 관한 두 번째 표결에서는 더욱 압도적인 표차인 360 대 140으로 사형을 선고했다. 아테네 시민들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것으로 보였던 소크라테스를 용인할 수 없었던 것이다.

99[8]




그런데, 당시 이러한 취지의 반론을 본격 제기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Sokrates가 어찌 되었든 그동안 자신이 뱉어 온 수많은 '말'들을 지키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 탈출도 거부한 채 차라리 자살에 가까운 죽음을 향해 걸어갔던 데 반해, 그에 관해 여러 궤변을 늘어놓은 한 사람은 순수하고 무구한 의도의 단순이견일 뿐임을 강조했음에도, 약간의 비판이 들어오자마자, 그간 자신이 청년들을 유혹하기 위해 그토록 쏟아 놓았던 중요한 말들을 (바로 직전 것까지) 곧바로 손바닥 뒤집듯 뒤엎으며 모욕을 포함한 정반대의 비윤리적 언행들을 거침없이 행했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그 '말'들을 실제로 지켜가기 위한 어떠한 실질적 노력도 전혀 없다는 점에서 그에게 그것은 단지 일신의 생계를 위한 달콤하고 얄팍한 유혹의 수단에 불과할 뿐이라는 강렬한 진실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더욱이 기가 막힌 것은 이후 1년이 넘어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이익 보호를 위해 바로 다음날 있었던 강연에서도, 임상교육도 전혀 받지 않은 그가 임상윤리의 철칙까지 유린해 가면서 강연 내내 청중들을 세뇌시키기 위해 십여 차례가 넘도록 Sokrates를 멋대로 재단한 것보다도 훨씬 못한 방식으로, 그야말로 분석이나 깊이는커녕 그 어떤 근거도 뭣도 없이 다짜고짜 환자로 몰기 위한 공허한 규정과 선언 행위들을 반복 자행했다는 사실이다.

이또한 그가 역설해 온 정상과 비정상의 전복, 환자에 대한 옹호와 정당화 논리들을 정면으로 뒤엎는 또 다른 파렴치의 추가된 일례일 뿐이다.


겸허히 성찰하건대, 그의 제자와 독자들은 이런 점들을 각별히 유의해야 하며, 우리 둘은 목숨을 걸고 치열한 자성을 통하여 더욱 맹진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9]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X. 

여기서 생산되는 글들은 직접 통신이 어려운 산포한 여러 신/구 좌파들, 특히 (범)Marxist 동지들께 드리는 진정 어린 보고서이자, 정책 기획-제안서들로 의도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갈수록 변혁적 실천에는 전혀 관심 없고 심지어 내용이나 논의 자체에도 별 관심 없는, '아님 말고' 식의 극히 무책임한 호사가들과 사찰단들만 꼬여 들고 있어 글쓰기가 점점 더 역겨워지고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투명한 문장 의도까지 마음대로 왜곡하고, 목적 대상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 그런 분들은 제발 관심을 좀 꺼 주셔도 좋겠다는 강력한 당부 말씀을 다시 한번 드리는 바입니다.










SS.


악법에 의해 그간 불거져 온 보안문제에 대하여 정면돌파와 측면돌파 양안 사이에서 고민하다 일단 측면돌파를 선택하고 이미 보안계정이긴 하나 가일층 강화된 보안을 위해 이곳은 일단, 이 쯤에서 폐쇄키로 합니다.





떠나기에 앞서...


한 물리학자께서 제기하신 예측가능성 문제에 대하여는 이미 충분한 답변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전혀 이해 못한 채 증명을 못 했다고 아직도 분위기만으로 착각하고 있는 심각한 문송이 분이 어제 발견되어 이에 대해 해당 문서에서 상술하고 싶지만 기회가 더 있을지 몰라 그냥 여기서 잠깐 약술하는 것으로 갈음코자 합니다.

예측에 있어서는 거시 vs 미시 관계가 매우 중요하며, 이것은 기후모형을 예로 들면 계절과 일기[日氣; 일일기상]의 관계와 같아서 일일기상을 정밀하게 예측하는 것은 극도의 초기조건 민감성에 지배되지만, 계절변화에 따른 변동 대역(/)폭 등의 추세 예측은 전혀 다른 차원의 system이기에 상당히 정확한 예측이 가능하고, 일일기상 같은 미시data 복잡계도 주장하신 것처럼 예측이 보편적으로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말씀을 드립니다. 제가 그 때 강조드린 근원변수와 이들을 타고 하향하여 실사해야만 하는 심층구조 분석의 중요성이란 이러한 총-기후계에 있어서는 목표 국소계 상의 일조량과 태양광 energy의 (누적) 총량이 근원변수에 해당하고, 구조실사 이전에는 절대 상상할 수 없었던 지구 자전축 기울기 같은 배후에 숨어 이 모든 변동을 시초 규정하는 숨은 매개변수들의 존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기울기에 의한 단위(지표)면적 당 입사광량[광속]이 경제순환 sysytem에서는 이윤률과 그 확장/파생변수로서의 Piketty지수(군)[10]에 해당하고 이 수치의 시계열 통계자료가, 반복되는 (pattern의) 많은 역사 사건 변동들과 가장 높은 상관계수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너무 빠른 답변으로 이후 동어반복적 방송들이 계속되는 바람에 더 증폭된 듯한) 일각의 오해와는 달리, 말씀드린 바처럼 "충분한 답변"이 이미 애초에 주어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문송이 분이 더 한심했던 이유는 일반상대론적 예측의 증명방법을 생각해 내고, 실제 증명을 실행한 것도 Einstein 본인이 아니고, 오히려 이것이 과학 발전의 일반적 (작업)방식인데, 제출된 타당성과 개연성 높은 생산적 이론이나 가설, 예측에 대하여 발전과 보완을 위한 사회적 협력이라는 방향의 사고는 전혀 못 한 채 알만한 분이 시비 걸듯 "증명해 봐" 같은 태도만을 풍긴다는 것이었습니다.

동일 맥락에서, 당시 과학을 존중하는 태도에 입각해 상찬만을 하였으나 냉엄하게 돌아보면, 애초의 예측가능성 문제 제기 자체가 그리 엄밀한 과학정신으로만 이루어졌다고도 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할 것입니다. 제기 내용도 그렇고 진술 방식도 상당히 수사(학)적이었으며, 직접 반증은 전혀 없고, '많은 경우에서 예측이 쉽지 않다'는 일반적 진술의 변주와 예시 열거들만이 반복되는 전형적 환유 뿐이었다 사료되고 또한 그 의도에 있어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은 영롱한 과학정신과는 다른 정치경제적 목적이 느껴지기에 상기한 협력적 태도가 더 아쉽습니다.)






마지막으로 그간 일정 쪼개 잠깐씩 갈겨 쓰느라 항상 느슨한 졸고였던 글들에 관심 가져 주신 많은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이만 작별인사를 고합니다.

  
















[각주]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 전태일 열사는 우리의 영원한 사표이자 진정한 영혼의 스승입니다.

이 철학적 '기계' 개념은 스승의 유훈 선언과는 다른 것이지만, 어떤 우려들 하고 계시는지는 잘 알기에 그러한 염려조차 완벽히 일소할 수 있는 철학적 방안을 반드시 찾아내도록 최선을 다해 나가겠다는 약속을 올립니다.




[2] 초험적 관념론



[3]

¶ GRIFFERO, Tonino Bernardo('2012). 'Friedrich Wilhelm Joseph [von] Schelling

@ ECOUmberto (a cura di). Storia dell’età moderna e contemporanea.  Gruppo Editoriale l’Espresso. vol11;

@ ECO, Umberto et al. Storia Della Filosofia;

>국역: 윤병언 ('2020:53).



rf.

  Schelling은 Hegel의 사상적 직계가족으로서 뿐만 아니라, Max WEBER가 [[종교사회학Gesammelte Aufsätze zur Religionssoziologie]]에서 Bougeoisie적 근대(성)의 주요 지표 중 하나로 본격 개념화하고 따라서 혁명적 현대 Mao주의 문화(혁명)이론[11]에서 핵심 공격 목표의 하나로 설정된 '탈주술화[脫呪術化;Entzauberung]'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인물이기도 하기 때문에 여러가지로 중요성을 가지며, 

  Griffero는 Italia를 대표하는 독일철학, 미학 연구자이자 Schelling 전공자로서 주목할 가치가 있기에 이하 동저자의 조사된 관련 주제 저작 목록을 공유키로 함. 



직접주제 단행본

(1994) Senso e immagine. Simbolo e mito nel primo Schelling, Guerini, Milano

(1995) Cosmo Arte Natura. Itinerari schellinghiani, "Pratica Filosofica 9", Cuem, Milano

(1996) L’estetica di Schelling, Laterza, Roma-Bari

(2000) Oetinger e Schelling. Teosofia e realismo biblico alle origini dell’idealismo tedesco, Nike, Segrate (Milano)



직접주제 논고

('1992) Schelling: filosofo della mitologia (with F.C.), ≪Informazione filosofica≫, 7, may, 39-42

('1993) L'≪immagine in quanto immagine≫. La pittura nella filosofia dell'identita di Schelling, ≪Rivista di estetica≫, XXXIII, nn. 44-45, 24-51

('1994) ≪Misteri≫ della filosofia nel giovane Schelling, in Filosofia '93, ed. by G. Vattimo, Laterza, Roma-Bari, 95-119

('1994) Intuizione intellettuale e intuizione estetica. Theoria e visio beatifica nel primo Schelling, ≪Paradosso≫, 9, 59-82

('1995) Paradossi del theatrum mundi nel giovane Schelling, ≪Bollettino A.I.S.E.≫, III, n. 4, 18-20

('1995) La coscienza postuma. Immediatezza e autoriflessivita dell'autocoscienza nel pensiero del primo Schelling, ≪aut aut≫, nn. 267-268, 125-160

('1995) Essentification. Escatologia e Geistleiblichkeit nello Schelling intermedio, in G. Carchia e M. Ferraris (edd.), Interpretazione ed emancipazione. Studi in onore di G. Vattimo, Cortina, Milano, 11-33

('1995) Perche l’arte e non, piuttosto, la filosofia? In margine alla prima ≪estetica≫ di Schelling, in G. Vattimo (ed.), Filosofia '95, Laterza, Roma-Bari, 119-140 (spanish transl., ¿Por que el arte y no, mas bien, la filosofia? Notas marginales a la primera "estetica" de Schelling, in G. Vattimo, compilador, Filosofia y poesia: dos aproximaciones a la verdad, Gedisa, 1999)

('1996) Signatura siderum. Pianeti e comete nella filosofia dell'identita di Schelling, in La natura tra Oriente e Occidente, Atti del Convegno Nazionale A.I.S.E, Trento 11-12 aprile 1994, ed. by R. Troncon, Luni Ed., Milano, 277-294

('1996) Mathesis universalis. Costruzionismo e metodo assoluto in Schelling, ≪Rivista di estetica≫, XXXVI, n.s. 1-2, 103-136

('1998) Introduzione. Identita di essere e significato: la mitologia come processo teogonico della coscienza, in F.W.J. Schelling, Filosofia della mitologia. Introduzione storico-critica, ed. by T. Griffero, Guerini, Milano, 11-66

('2000) Grund ed Existenz. Classicita e melanconia alla luce della “Teoria dei principi” di Schelling, in C. Tatasciore (ed.), Dalla materia alla coscienza. Studi su Schelling in ricordo di Giuseppe Semerari, Guerini e Associati, Milano, 238-272

('2001) Clef de voute et chef-d’?uvre. Esthetique et philosophie de l’art dans le Systeme de l’idealisme transcendental, in A. Roux-M. Veto (ed.), Schelling et l’elan du Systeme de l’idealisme transcendental, L’Harmattan, Paris-Montreal-Budapest-Torino, 153-174

('2003) Essere senza poter essere. Spunti ontologici nell’ultimo Schelling, ≪Rivista di estetica≫, n.s., 22, XLIII, 71-84

('2003) Presentazione, in F. W. J. Schelling, Le arti figurative e la natura, ed. by T. Griffero, Aesthetica Edizioni, Palermo, 7-30.

('2004) “Wie die Alten sagen…”. Bemerkungen zum Verhaltnis von Schelling zu Oetinger, in R. Adolphi/J. Jantzen (hrsg.), Das Antike Denken in der Philosophie Schellings, Frommann-Holzboog, Stuttgart-Bad Cannstatt, pp. 497-519.

('2005) Un ≪segreto pubblico≫. Schelling e l’idea di proprieta intellettuale, in F. Vigano (a cura di), La natura osservata e compresa. Saggi in memoria di Francesco Moiso, Guerini e Associati 2005, Milano, pp. 54-86.



간접주제 논고

(2012) Arte e verita, in U. Eco (a cura di), Storia dell’eta moderna e contemporanea, Gruppo Editoriale l’Espresso, vol. 11, pp. 90-97



직접주제 편집저작

(1998) F.W.J. Schelling, Filosofia della mitologia. Introduzione storico-critica, ed. by T. Griffero, Guerini, Milano

(2003) F. W. J. Schelling, Le arti figurative e la natura, ed. by T. Griffero, Aesthetica, Palermo



[4] ☞[14] P.S.


[5] ☞[13]


[6] 衆愚政治, 현대 Greek: χλοκρατία=okhlokratía, 영어: ochlocracy


[7] 이 진영의 정치체 대안에 대한 평가와 형식적 단계론에 대한 회의를 반영한 규정임.


[8] ¶ http://www.redian.org/archive/26197


[9] ☞[12] P.S.


[10] Piketty 체계는 그 연역적 구조에 있어(서는) 결국 Marx 체계, 특히 이윤률 개념으로부터 제2 기본법칙을 거쳐 자본 대 (총)소득 (비교) 관계를 지시해 주는 지수군들의 개발과 이 지수들의 (귀납(/)통계적) 관측 관계를 표현하는 제1 기본법칙을 향해 수립되어 나아간 것으로 요약되기 때문에 제1 법칙이 명시하는 바와 같이 자본수익률γ가 역사적으로 큰 변동이 없는 (실증)조건에서는 자산(자본):소득비β가 함수 α[자산소득분배율]를 포함한 주요 경제(system) 지표들을 결정하는 원인변수가 된다. 그러므로 β를 정의하는 수식인 제2 기본법칙이 Piketty 체계에서의 핵심 중 핵심에 해당하고, Marx 체계로부터 Piketty 체계로 확장하는 디딤돌로서의 제2 기본법칙이란 결국 이윤률 변동에 대한 자본의 대응(전략)으로서 금융 중심 자산화를 통한 금융 (및) 독점 자본주의 지대 (추구) 경제로의 전환 정도를 수학적으로 포착해 내기 위한 매우 '근사적'인 방편이었기 때문에 이윤률 곡선의 inversion 형태를 띄는 것이며, 그래서 Piketty 체계에서 (유사)근원변수로 등극할 수 있었던 것이다.

즉, 세속적 주류경제학 체계에서는 통상 g값이 이윤률을 (간접) 표현하고, 여기서 s값은 금융화 정도를 추출해 보여주는 sampling 지표, 표본값으로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동원된 여러 개념들이나 방법론적 엄밀성에 있어서 다소 문제가 있을 수는 있어도 본질적 논리구조 상에서는 궁극적 이단 관계라기보다 확장적 응용 관계로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애초엔 제도(/)개혁주의자로서 순진한 기대를 품고 매우 '합리적'인 조세 개혁 방안을 제안했다 그조차 전혀 받아들여질 기미도 보여주지 않는 체제의 완고한 보수성을 깨닫고 후속작에서 정치의 불가분한 연계성을 중요하게 역설하며 급진화하고 있기 때문에 지나치게 그를 비판이나 경쟁 상대로만 여겼던 일부 Marxist (경제학) 분파의 초기 대응은 재검토의 여지가 있어 보인다.

[여기서 쓰인 '이단 관계'란 용어에 대하여 간혹 일부 종교계의 image를 떠올리는 분들도 계시던데, 이 맥락은 현대 France 철학에서 온 것으로, 이단(점)이란 Gaston BACHELARD적 과학사학 전통 상의 '인식론적 단절'에서 유래한 분절, 절단(점)과 유의어이며, 반대 의미의 접합(점)과 함께 '절합' 개념을 형성하는 하위 요소의 변용이므로 굳이 불필요한 우려나 걱정을 갖지 않으셔도 좋을 것임. (간혹 절합과 동의어로 '이접'이 사용되기도 하나 이는 논리학적 빈용어인 'disjuction[Le.]/disjonction[Lfr.]'과 혼동을 초래하므로 주의를 요함.)



[이후 (Marxism 전통에서의) '이단' 개념과 관련하여 수려한 논변이 발견되어 여기에 추기함.

66 

한국에서 알튀세르 전유는감히 말하자면알튀세르가 스피노자에 대해 말했던 바를 상기시킨다. “만약 스피노자가 이 세상에 출현한 이단이 남긴 가장 위대한 교훈 가운데 하나일 수 있다면이단적 스피노자주의가 되는 것은 거의 정통 스피노자주의인 것이다![Louis Althusser, “Éléments d’autocritique”, in Solitude de Machiavel, p. 182.] 우리는 비슷한 방식으로이단적 알튀세리언이 되는 것은 알튀세르 사상 자체의 일부라고 말할 수 있다.[따라서 알튀세르 같은 철학자에 대해 적용” 운운 하는 것은알튀세르가 어떤 유형의 이론가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그것이 마키아벨리가 됐든 스피노자가 됐든아니면 바슐라르나 캉길렘 또는 프로이트나 라캉이 됐든아니면 레닌이나 마오심지어 마르크스 자신이 됐든 간에알튀세르는 자신이 활용하는 사상가들의 사상을 비틀고 때로는 뒤집어서 활용한다이처럼 이단적인 방식으로 그들을 활용하면서도알튀세르는 그 사상들에 관해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진리 효과를 산출한다그에게는 그것이 그 사상가들에 대한 충실성을 지키는 유일한 방식이다.] 그리고 한국의 경우가 바로 그랬다이는, 1980년대 말과 90년대 초 마르크스주의의 몰락이 거의 모든 사람에게 불가피한 것으로 비쳤을 때 PD의 알튀세리언들이 수동적으로 세계사의 흐름을 추종하지 않고오히려 역설적이게도 1970년대 말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를 선언했던 알튀세르의 저술에 의지하여 마르크스주의의 현재성을 입증할 수 있는 길을 추구했으며나중에는 한국의 국민적 역사의 시간 속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전화할 수 있는 길을 필사적으로 모색하려고 했다는 데서 단적으로 드러난다그리고 바로 이러한 상상적인...막대 구부리기’ 덕분에 알튀세르는 상아탑 속에만 현존하는 서방 마르크스주의자들’ 가운데 한 사람 또는 현대 프랑스 철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는 데 그치지 않고, 1980년대 이후 한국 인문사회과학 및 사회운동 속에 깊이 지속되어온 정치적지적 효과의 부재하는 중심이 될 수 있었다.

99

¶ 진태원('2020). '필연적이지만 불가능한: 한국에서 알튀세르 효과'@{황해문화}no.108 '2020가을호. 새얼문화재단 간. p238.]

]




참고로 3체 문제 불능 증명을 통해 태양계 안정성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태양계도 chaos system이라는 사실을 암시한 등의 업적으로 chaos 이론의 아버지로 불리는 Poincaré의 반론을 최대한 고려하더라도, (초기 조건들에 대한) 거시계와 미시계의 민감성 임계/역치는 단순히 공간지리적 규모에서뿐만 아니라, (병진)운동에서의 관성량인 질량과 특히 시간 단위에서도 그 scale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北京에서의 나비 한 마리 날갯짓이나, 심지어 수백 수천 번의 핵폭발(/)실험을 하더라도 인간의 인식 가능 범위 내 시간 단위에서 지구가 궤도에서 이탈하는 등의 일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또한 거시 system의 경우 (초기) 조건 변수의 수치가 작을수록 발생빈도가 급격하게 많아져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상쇄 효과와, 거시계 특유의 자기조절 효과 창발 등등도 반드시 고려되어야만 할 요소이다.)


 





[11] 막다른 골목에 몰려 정체에 빠진 문화연구 진영(/)Group들은 바로 이 방향에서 광활한 새 활로의 착상을 찾아 보아야만 할 것이다.


(여기서 Mao주의는, 물론 전고에서와 마찬가지로 당연히 Mao를 전적으로 숭배하는 교조주의나 그 체제 자체, 특히 현재의 중국 체제에 대한 평가 논의와는 전혀 아무런 관련이 없(고 현재 지금 여기의 문제상황을 돌파해 나가기 위한 정신적, 이론적 도구 자원으로서 활용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12] P.S.

이후, 사회적으로 쟁점이 된 이 문제에 대하여 한 선생께서, 근거가 수반되진 않았지만 그 이름과 얼굴을 걸고 지상파 전국 방송에서 이견을 제기하셨기 때문에 존중과 예우의 의미로 일단은 열린 문제로 남겨두기로 하겠습니다.

(

그러나 양 계열의 해석차는 본질적으로 Text 표면에 천착하는 (내재적) 하등비평Lower Criticism과 Text 이면을 관통해 토대와 조건의 Context를 위주로 읽어내려는 (초월적) 고등비평Higher Criticism 간 관계, 특히 방법론 상 근거자료 우선순위에 대한 차이로부터 비롯하는 것으로 Text 표면에 이런 맥락들이 (명시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Sokrates 본인이 정치 문제에 직접 관여하거나 정치적 주장을 노골적으로 행하기보다 청년 정치가들의 Mentor나 정신적 지주로서, ('진리의 정치'로 필연 귀결될) 진리론을 중심으로 하는 추상적 철학 및 이념적 지향을 주로 제공한 그야말로 사상적 뿌리에 해당하는 관계였기 때문으로 보이며, 후자의 해석은 무수한 논자들에 의해 지지되고 있다는 사실과 함께,

더욱이 전자적 해석의 최대 난제는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나 도덕군자들은 항상 존재해 왔고 세속화, 속물화된 욕망의 노예라는 성격에서 당시보다 결코 뒤지지 않을 자본주의 말기인 현재의, 성철이나 법정과 유사한 존재로 상정되는 그 해석에서 왜 유독 Sokrates만이 이런 이유만으로 극형에 처해졌다는 것인지 납득시키기가 쉽지 않다는 점일 것임을 주지해 주시기 부탁드립니다.


참고로 후자 계열(의 무수한 논자들)에 속하는 주요 논의로는 같은 방송에서 수 차례 강의하신 바도 있는 박홍규 선생님의 명료하고 선명한 논의나, 미국을 대표하던 치밀한 전설적 급진주의 탐사보도 전문 기자로, 그 자신에 관한 전기도 여러 권 출간되어 있는 Isidor Feinstein STONE을 위시한 다음 자료들을 우선 검토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




그리고 차제에 철저한 학문적 솔직성을 위해 반대 자료들도 모두 공개하면, 애초 문제가 되었던 δαιμόνια[daimonia]에 대한 과잉 주목으로 특징지어지는 특이 해석도 전혀 계통 없는 돌출은 아니고, 한일 모두에서 역시 많은 비판을 받긴 했지만 유명한 柄谷行人 선생이 최초 제출했던 착상들의 기본 Frame에 기대어 그 일부를 postmodernism적으로 과장한 열화본이라 할 수 있으므로 이 문제에 관심있는 분들은 다음도 참조해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13]) 

또한 비록 비판은 많이 받았지만, 柄谷 선생의 일관 해석 중 몇몇 발상은 참고할 만한데, 특히 흥미로운 한 가지는 객체지향철학 계보와 완전히 동일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면서, 그 정치적 의의를 서술하고 진정한 철학(의 기원)으로 승인하고 있는 Ionia 자연철학에 관한 다음과 같은 대목들입니다.

66

이오니아의 사상가는 윤리나 인간에 대한 인식을 ‘자연학’의 관점에서 이야기했다. 그것은 인간과 세계를 일관되게 자연(physis)으로 보는 것이다. 그들은 그와 같은 보편적 시점을 처음으로 제기했다. 나는 바로 이런 태도를 ‘자연철학’이라고 부르고 싶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이오니아의 정치(이소노미아)와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다.99

66

이오니아에서 인간에 대한 사랑은 인간을 노모스가 아니라 피시스[퓌지스]에 의해 보는 태도, 즉 인간을 폴리스, 부족, 씨족, 신분과 같은 구별을 괄호에 넣고서 보는 태도와 분리할 수 없다. 이와 같은 태도를 가져온 것이 이소노미아다. 이소노미아(무지배)는 단순히 개개인이 참정권에 있어 대등하다는 것만이 아니라 좀 더 근본적으로 생산관계에서 지배-피지배의 관계가 부재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임금노동이나 노예와 같은 시스템은 인정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피시스에 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99





[14] P.S. "너 자신을 알라Γνώθι Σεαυτόν."

             ; Frame과 Main Frame, 그리고 Meta인지. 수구반동의 사상적 본질


웬만한 기타 오독들은 그냥 철저히 무시하고 떠나려 하였으나, 정말 알만한 유명인사 행세를 하며 돌아다니는 분 중에 자신의 무지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이 말이 '네 분수를 알고 나대지 말라'는 뜻이라 우겨대는 분들이 계셔서, 보다 못해 이에 대하여는 한마디만 덧붙입니다. 


a. frame

   일단, 특히 기자분들이나 언론계 쪽에서 frame을 무슨 가짜 news 같은 범주와 동일시하는 분들이 많이 계시던데 frame이란 인간 인식의 선험적 조건이자 형식으로서의 인식틀을 의미하며, 따라서 frame의 외부란 있을 수 없고, 다만 눈에 쉽게 띄는 국소적 조각 frame들과, 배후에 숨어 전체를 장악한 채 모두를 포획/세뇌함으로써 결코 보이지도, 의심받지도 않는 Matrix가 되어 버린 거대한 default (/) main frame이 있을 뿐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가짜 news를 파헤친답시고 설치고 있는 바로 당신 자신이 지배체제와 지배질서를 유지하고 정당화하기 위한 가장 거대한 거짓의 세계를 지탱해 온 [나사와 조이개를 움켜쥐고 있는] 가짜 중의 가짜, Smith 요원이 아닌지를 항상 의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b. meta인지

    이 frame들 중에서 세계와 주체의 관계, 특히 사회 내 주체의 위치에 대한 가상적 도식이 바로 ideology입니다.

그런데 위 '인사'들은 이런 일말의 의심도, 자성도 없이 기성/기득권의 main frame과 ideology적 상징(체)계에 매미처럼 찰싹 달라 붙어서 마치 한 몸이라도 된 듯 이 체계를 곧 세계 전체이자 실재 그 자체라 철석 같이 신봉하며, 조금이라도 자기 믿음에 맞지 않게 행동하는 타자를 발견하면, 무조건 그는 이 현실을 '몰라서' 그러는 것이라며 분노에 휩싸여 자기 믿음(/)체계에의 맹종을 강요하느라 울어대기 바쁜 나머지 자기 의심은 꿈에도 해보지 못 하는 노둔한 한계를 보여주고 있을 뿐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수구보수반동이란 바로 이 추호도 자기 자신은 의심해보지 않는 반성적 무능, 반성능력의 부재 이외 다른 그 어떤 것도 아님을 이들은 결코 깨닫지 못 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바로 꼰대 중의 꼰대왕이라는 사실과 그렇게 된 이유조차 끝까지 알아채지 못 한 채 엉뚱하게 fashion이나 humour 같은 사소한 변장술에만 목을 매고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심한 문제의 진원지인 최경영 기자는 여러 심각한 요소가 있어 보이므로 도대체 뭘 어디서 어떻게 확인했다는 것인지 밝히고 책임을 지시기 바랍니다.




____________________



나름 언론개혁 부르짖던 분이라 일단 자정능력 test 기간을 가졌습니다. 


바라는 개혁이 이루어진 세상에서는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조심조심 눈치보며 "부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아직 그간 자신이 한 일의 역사적 의미를 전혀 모르고 계시고, 그걸 알 수 있거나 지금이라도 자정이 가능했던 분이라면 애초에 그런 일을 하지도 않으셨으리라 생각됩니다.


문재인 정부의 검찰개혁이 난관에 빠진 이유가 (인사참사에 의한) 조국사태 때문이었다면, 

대한민국 언론사에서 문재인 정부의 언론개혁을 좌초시킨 것은 바로 당신(이 일으킨 나비효과) 때문으로 기록될 것입니다.


언론의 2대 핵심 가치로서의 '정론'과 '윤리'를 완전히 유린하면서 위기 부정론을 가장 열렬히, 가장 저열한 방식으로, 가장 뒤늦게까지 주장하다 심지어 이미 재난재원금까지 풀리고 난 위기의 한복판에서 재출연한 {Journalism Talk Show J}에서조차 "이것은 위기가 아니다"라는 주장을 다시 펼쳐 경제 문외한인 panelist로부터도 핀잔을 들을 정도의 행태를 반복하고 그녀와 함께 Corona19 Pandemic도 별것 아니며 금방 회복하고 원래의 상태로 복귀할 것이라는 둥의 얼토당토 않은 주장들을 계속해 언론개혁세력의 신뢰성에 결정적 의혹과 파열구를 발생시켰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먼저, 민주당 정부에 대하여는 우호적인 입장을 견지해 왔고, 지금도 복잡한 심경으로 지켜보고 있는 분파에 속함을 밝히며 오해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언론개혁 팀의 기본정서

 : 보수언론보다 극심하고 외설/노골적인 천박한 elitism을 가장한 반동적 위계주의.

   이는 진실된 개혁세력이 그 관점과 태도에서만 일시적 실수를 범한 것이라기 보다 정치권력 경쟁을 중심으로 일부 경제 정책에서만 부분적 진보성을 띄면서 지식교육문화 분야에선 극단적 보수반동성을 가진 사이비 개혁세력의 본질이 폭로된 사태로 보아야 합니다.








'210110___________________


1.

문맥을 보면 아시겠지만 원래 진행하려던 문화자본의 욕망과 행동 특성 및 계급적 속성 등등 자세한 추가분석이나 비판은 일단 중단한 (/) 대기 상태입니다.

최근 좌측으로부터 격화된 비판과 지지율 급락으로 위기감에 사로잡힌 일부 민주당(내) 우파 인사들의 본격적 우경화 타개 시도 등으로 급작스럽게 조성된 정세적 고민 때문에 길어진 것이긴 하지만, 그런데 그새 점차 개인의 실수를 넘어 집단적 비호를 통해 조직 전반의 문제로 비화하면서 자칭 개혁언론의 민낯과 밑바닥이 드러나는 점입가경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원래 문제를 제기한 계기도 진중권 교수 등, 이 사건을 그 결과의 진위와 상관 없이 [일부] 소위 '대깨문들의 타정파 제거와 인신공격을 위한 신상털기 시도'로 보는 시각이 있고, 이 시도를 어리석고 섣부르게 밀어붙이는 과정에서 적어도 4~5가지의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인데, 이들은 복잡한 문제의 구조나 도대체 뭐가 진짜 문제인지도 전혀 이해를 못 한 채, 애초에 진심어린 사과와 반성, 피해회복과 재발방지 등을 위한 자정조치 정도만 취해도 될 일을 일부 몰지각한 외부 인사가 "잘 버텨라"며 선동을 하는 듯싶더니, 급기야 강 씨는 1일 공장장으로 출연한 program에서 막판에 "한마디만 하겠"다며 "소비자가 원하는 방송입니다. 어느 한사람에 의해....."까지 말하다 잘리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분명히 밝혔듯이 문재인 정부에 대하여는 우호적 입장을 견지해 왔고, "국민"이 간절히 원하는 소중한 과업이므로 망치지 말고 제대로 하라는 고언이자 채찍인데 이 충정을 완전히 곡해하면서 "소비자"나 "국민"이 원하는 방송이므로 무슨 짓을 해도 되고 무슨 말을 해도 면죄되는 거라고 생각하는 인사들이 사태를 정반대 방향의 걷잡을 수 없는 시한폭탄으로 키우고 있습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정의롭고 윤리적인 개혁 세력인지, 단지 새로운 주류 (/) 권력 밑으로 줄만 바꿔 섰을 뿐 기본적인 자기 정정과 자기 개혁 능력조차 전혀 없는 참칭 세력인지 헷갈리는 많은 분들은 당장 그들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지 하나만 관심 갖고 지켜보셔도 극명한 시금석을 얻게 될 것입니다.




2. frame론 재고


학문적 솔직성 원칙을 위해, 상기 개진된 frame론은 당연히 최근의 결론에 해당하는( 신neo-Kantian계보의 명맥을 잇는 후예들), 특히 post-Althusserian적, Balibarian적 frame론을 전제하고 있는 것임을 숙지하고 읽어 주시기 바라며, 그 이전 논의까지 포함하는 frame론들의 전체 계보 구조를 모두 공개하면 다음과 같음.  



  a. (전기)Althusserian과학주의   유물론적 정신분석 및 해체론, 정동이론

      ↘                                   ↗                                    ↘

  b.        post-Althusserian                                              Balibarian계열 탈해체주의

                                            ↘                                    ↗

  c.                                            postmodernism



a열은 아직 frame의 외부를 견지하고 있었고, b열은 외부를 상정하나 직접 대면/인지의 불가능성을 강조함으로써 인식론적 외부는 부정하는 것이며 따라서 frame 간 평면 관계를 부인하는데 반해, c열은 담론의 물질적 외부를 부정하거나 frame 간 평면 관계를 강조함.


그러므로 a, b열에서 '사실'과 '진실'은 frame에 균열과 파열구를 내는 중요한 경로이자 핵심 수단으로 설정되며 '사실'은 주로 과학적 이성의 종합을 통해 위로부터, '진실'은 무의식과 정동, 대중/민중 등의 경로를 통해 아래로부터 정신분석적 진리 개념과 정동이론, 소수자 위치/관점론 등의 형태로 주어짐.


여기서 중요한 점은 따라서 항상 최소한 이 두 방향으로 동시에 준거/참조점이 주어져야 하는 것이지, 하나가 다른 하나를 대립적으로 배타/배척하거나 억압하는 관계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며, 특히 소위 '전문가'가 욕망과 이해관계로부터 완전히 면제, 해방된 존재가 전혀 아니고 인문사회 분야에서는 더욱더 그러하기 때문에 온전한 과학성을 항상 보증하는 동의어가 절대 될 수 없다는 점으로, 본인의 입장이 이런 모든 점들을 도외시한 'τέχνοκρατία[Tekhnokratia]전문가 독재론'을 비판하는 것일 뿐 '전문가 참조론'을 반대하는 것도 아니므로, 또다시 '전문가'를 외설적으로 강조하는 전략은, {Journalism Talk Show J} season1을 통해 기자 계층 자신을 포함한 여타 주체들의 강력한 감정적 저항을 불러 일으키는 역효과를 수반할 뿐 아니라 그 자체로 언제나 과학적 진리일 수도 없다는 것이 스스로 충분히 입증되면서, 중도하차 등을 포함한 파산 과정을 이미 겪을 만큼 겪었기 때문에, 이를 반복하는 것이 결코 현명한 선택이 될 수 없고 반동적 퇴행에 불과하다 아니할 수 없으며, 차후 상황에 따라 문화자본 분석론을 통해 상술될 수 있음. 


(이 외에도 전문가 독재론의 폐해 중 하나는 그 어떤 분야의 전문가도 자기 영역에서 한 발자국만 벗어나면 모두 곧바로 대중으로 복귀하게 되는 것이 현실인데, 이 사이에 존재론 상의 고정불변한 절대적 격차를 공상하면서, 한 분야 전문가에게 영원한 특권적 작위를 부여하고 모든 분야에 대한 독점적 발언의 전권을 허용하는 인식론적 착오로 여기에서 수많은 치명적 오류가 발생하며 전문가들의 세계란 사실 항상적 논쟁 상태이기 때문에, 이에 무지한,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식의 초등 교내 방송 동아리를 연상시키는, "전문가들은!", "전문가들에 의하면!"만 강조하며 전혀 상관없는 분야 종사자들을 뭉개고 퉁쳐서 뭉뚱그리는 얄팍한 조작적 포장 방식 보도보다 여론조사 인용과 마찬가지로 정확한 취재원과 출처를 명시해 그에 대한 신뢰도(평)가는 보도 수용자들의 주체적, 개별적 판단에 맞겨야만 함. 더구나 평소 기껏해야 1명, 좀 중요하거나 헷갈리는 문제라야 2~3명 정도 취재하는 관행에 비추어 그토록 모호하고 정의도 안 된 출처를 최근처럼 너무 티나게 빈용하다간 곧바로 정말 취재는 한 건지 한낱 기자 개인 의견에 불과한 조작인 건지조차 의심받게 될 것임.)






3. 和와 不和














和란 군국주의적 전체주의를 포장하는 기만일 뿐이며, 不和야말로 실재하는 갈등과 모순을 투명하게 드러내어 진정한 변화와 혁신을 불러올 수 있는 유일한 원천이자 진정한 동력이라는 것이 우리의 확고한 정치철학적 신조임을 천명함.

 

(또한, Carl Schmitt(-Claude Lefort) 이래로 Chantal Mouffe에 이르기까지 '정치(적인 것)'[이]란 본질적으로 적과 동지의 구분 행위로서 정의되므로, 그 자체로는 어떠한 문제도 없으며 단지 이를 경쟁 관계로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 (광의의) 자유(민주)주의 주류 양당제라면, [다만 원론적 체계화 차원의 논의일 뿐이지만] 실재하는 적대 관계를 반영하며 정체되고 붕괴 중인 기득권 기성 정치를 초월하여 위기의 대안으로서 새로운 (해법의) 정치를 발명해 보고자 모색하는 것이 급진(민주)주의 정치라 할 수 있는데 반해, 요즘 다시 부상하려는 통합은 [특히, Jacques Rancière의 분석에 의하면] 본원적으로 행정의 영역에 속하는 것임.


이상 제3절은 특히 이 선생님께 대한 존경을 담아 서술하였음을 양해 부탁드림.)





'210117___________________



4. 기계지향철학 문제


이에 대한 논평을 하시려는 분들은 신유물론 계열과 객체/기계지향철학 계열의 최신 철학들이나 최소한 Deleuze-Guattari 사상만이라도 검토를 하고 나서 해주십사 당부를 드려왔는데, 아주 단순한 image 하나에만 의지해 함부로 1변수 선형함수 (운동)만을 "기계적"(인과론)이라 인상하면서, (초)다변수 경향 인과와 대립하는 것처럼 말하시는 분들은 이에 대하여 신유물론 계열과 객체/기계지향철학에선 '(nano)경향기계동맹 대 (nano)반경향기계동맹들 간 전쟁'으로 설명하고 있음을 숙지해주시기 바람.


여기서도 곧바로 드러나는 바와 같이 이 철학적 '기계' 개념은 여러분이 상상하는 그 낡은 기계가 아니라 차라리 '변수' 또는 '함수' 개념에 가까움. 

원래는 GUT[대통일이론] 등의 통일적 세계구성체론을 향한 하나의 경로로서 제기된 매우 추상적인 개념 model이나, 혹시 19~20세기와 그 이전 기계 image에 개인적으로 너무 깊이 침윤되어 심각한 기계-혐오감을 극복하기 어렵다 느껴지시는 분들은 대신 그냥 '행위소'나 '행위자'와 동의어로 이해하고 계셔도 큰 문제는 없겠음.


(참고로 '당신은 기계이다'라는 문장을 '당신은 예술품이다'의 경우와 비교하면 이것이 단순히 생명의 문제는 아니라는 사실을 곧 아실 수 있으리라 사료됨.)


그러므로, 존재자들 간의 관계는 그 차이뿐 아니라 공통성 또한 균형 있게 동시에 인식되어야 한다는 것이 기본 정신으로, 인간의 특별한 입장만을 배타적으로 강조하는 대립적 인식체계로서의 humanism을 '인류세anthropocene' 시대에도 여전히 다시 주장하기보다는 협력적 동물-인간-기계 공동체로서의 commune을 지향하는 post-humanism[ 일각에선 trans-humanism]에 더 친화적이며, 따라서 이러한 새로운 철학들은 우리가 아무리 저항한다 해도 결국엔 Big Data와 IoT 시대의 정신이 되고 말 것으로 보이나, 아직 형성 중에 있는 최신 철학이기에 모두 열려있는 문제이므로 이에 대한 불순하지 않은 이론적 토론과 논의는 언제든 환영함.



(이에 대한 지독한 오독을, 가해공격의 빌미로 삼고 있다는 건 정말 구토 나는 일이 아닐 수 없음.)








SSS.


"짤리지만 않으면 좋겠"다며 잔뜩 주눅 들어 있다가 고삐라도 풀린듯이 신이 나서 오히려 도발을 계속하고 있는 최 기자 등으로 인해 우울해하고 슬퍼하시는 분들이 계셔서 몇 자만 적습니다.


애초 문제 자체도 주요하게는 시금석으로서 제기했던 것이자, 응당한 최소한으로서 당사자의 진심어린 반성과 사과 정도만을 요구했고 이외 어떠한 법적 대응도 없을 것임을 시사하며 최대한의 협력 의지를 밝혔을 뿐 아니라 오늘도 사실 문재인 정부에 적극 협력하여 돌파해 나아가야 하는 정세라는 취지의 글을 쓰러 들어 왔었건만, 이와 정반대로 집단적 2차 가해 담합과 (절대우월적 지위를 이용, 출연자에 대한) 사주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므로 이는 슬퍼할 문제가 아니라 분노해야 할 문제입니다. 


담합의 (배후) 주체들을 정확히 특정할 수 있지만 여기선 하지 않겠으나, 국민은 바보가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 대책 없이 사태를 키우다간 제가 굳이 뭘 하지 않더라도 곧 그 얕은 의도를 모두 알아채게 될 것이고 제2, 제3의 진중권을 탄생시키며 자칫 중요한 보궐선거 모두를 잃고 언론개혁만이 아니라 개혁 자체와 정권을 좌초시킨 장본인들로 역사에 길이 남게 될지도 모른다는 깊은 우려를 전합니다.















분노해야 할 문제라고 말씀은 드렸지만, 사실 저부터도 분노보다 웃음이 나긴 하는데 누누히 강조해 왔듯, 너무 황당하게도 '전문점'[ㅋㅋㅋ] 같은 걸 부정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거니와 전문가의 가치 자체를 부정하는 것도 전혀 아닐진대 자존심에 치명상이라도 입으셨다는 건지 더욱 극성을 부리려는 기세인 듯하나, 앞으로 언론 신뢰도 평가 여론조사 추이도 주시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는 더욱더 깊어져야 하고 동시에 넓어져야 하며, 따라서 우리에겐 specialist들 뿐 아니라 훌륭한 융합적 generalist들도 필요합니다. 

이 중, 한없이 깊어진 공부의 모범을 보여주는 분들은 물론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애초 문제제기의 이유는 그것을 무기로 다른 국민을 깔보고 무시하며 깔아뭉개려는 태도와 고정적 독점 권력-계급화 시도를 통한 전문가 독재 체제 욕망에 대한 준열한 비판과 반대였음을 명심하고 사건의 본질을 덮어버리려는 불순한 의도로 왜곡하고 호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전문가들은 자신의 지식을, 대중 위에 군림하고 지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겸손하게 그들 속에서 그들을 위해 복무하고자 사용해야 한다는 점을 일깨워 주는 대중노선을 강조하기 위해 불가피 그것을 공 중의 공으로 갖는 Mao주의까지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인데, 

이미 저리톡1에서 스스로 파산하고 중도하차된 반동적 권위주의에 20세기 공장형 지식 model을 잔뜩 버무려 다시 들고 나와, 그나마 season2에서 보여주었던 반성과 전환 시도조차 완전한 위선과 연기였을 뿐임을 스스로 폭로하고 있는 당신들은 앞으로 언론개혁은 포기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번 일을 계기로 그나마 단 한 가닥 남겨두었던 희망도 완전히 접었습니다.

이것은 완전한 치기이자 광기 이상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 수준이니까 스스로 좌초한 거지 대체 누구 탓을 하는 겁니까? 전 아주 조금 빨리 현상을 명료히 의식화했던 것에 지나지 않고 그조차도 이미 season1이 스스로 실패한 뒤였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정권이 교체될 경우 동북아 정세가 본격적으로 불안해질 수 있는 매우 위험한 시기입니다.

유치한 짓은 그만두고 서둘러 연대와 협력의 길로 돌아 나오실 것을 강력히 촉구합니다.











(정부에 비판적인 여러 동지와 선생님들께는 너무 죄송하고, 혹시 다른 판단이나 전략을 가지고 계신 분들은 서재 내 아무 문서에나 비Login 비댓을 달아주시는 등등의 방법으로 조언과 입장을 적극 표명해 주시기를 간구드립니다.)










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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