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구구한 오독들에 대하여 무시로 일관해 왔으나, 이번 계제에 몇몇 만연한 오해들만 사소한 것부터 점차 중요한 문제들로 간략히 일괄키로 합니다.[이하 경어 생략]



I. 


II. 


III. 


IV. 정신분석과 Lacanian politics


1. 정신분석적 Marx주의 이론사

1a. 20c 초반

1b. 20c 중반 →파산 후 Spinoza주의로 전환

1c. 21c 초반


2. 정신분석 비판

2a. 인간과 동물의 관계

2aa. 자연 동물계에서의 억압과 거세

        특히 동물계 대타자로서 Alpha male의 독점과 독식에 의한 억압

        거세된 가축들의 경우

2ab. '인간/문명(화)' 범주 내에서 '억압/거세'와 '(순수)욕망 고수'의 양립 불가능성

2ac. '순수욕망'이라는 환상과 욕망의 미로

      +타자와 주체의 sub-/post-individual quantum constitutive relations;

        즉, 타자와 주체 간 개체 수준 이하로의 해체적 구성 및 얽힘(이라는 실재적 중층복합) 관계들과 복잡미묘한 항시적 상호감응 때문에도

        타자의 욕망과 주체의 욕망은 정밀한 원천적 분할이 불가능하며, 그 자체가 관념적 욕망에 불과함.

         욕망이란 기본적으로 Tabula rasa의 토대 위에 sub-&super- individual level의 총체적 중층 관계망 속에서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되고, 계발되며, 죽끓듯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



2b. Foucault(ian Turn)의 선구성과 '억압가설'에 대한 비판적 재고의 필요

2c. Deleuze도 대동소이하나, Lacan도 seminar에서 박사과정의 중국출신 유학생을 초빙해 장기간 불교경전들을 강습받았고, 이런 식으로 알게 모르게 Europe과 France 현대 철학들의 그 고도한 현대성은 불교철학에서 착상받은 바가 크다.

그러나 Lacan 정신분석과 불교철학의 가장 큰 이단점은 불교가 전적으로 가혹한 금욕주의였던 데 반해, Lacan은 본질적으로(는) jouissance를 탐닉하는 쾌락주의로 전향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절대 욕망을 양보하지 마라"는 Lacan의 계명과 "욕망들을 끊임없이 베어내고 비워내야 한다"는 해석은 20세기 후반을 풍미한 Lacan주의자들의 실제 행태와 특히 2ac를 고려하면, 일정한 재해석이고 반성적 회귀를 통한 갱신이며 하나의 분기에 가깝다.



2g. 문제의 심각성 : 심리 체제와 정치경제 체제의 융합

                           대타자 살해의 불가피성

2h. 대안노선의 문제 : 'Menger sponge' vs '대주체'라는-이념의-연대
      Lacanian politics에서 연대 개념의 공백


2s. 결국 극단적 억압가설에 사로잡혀 '모든' 주체와 공동체, 개인과 사회의 개연관계를 대립적 이분법으로만 과도 일반화함으로써 개인주의적 자유지상주의나 개인주의적 anarchism 이외의 (정치적) 대안을 사유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 Lacan주의 최대 문제의 하나이며, 이에 대하여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연합체”로서 개인과 사회가 서로를 상승시키는 Marx적 공동체 이념(을 향한 (영속적) 상호변혁의 재도전)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 나가는 한 대안으로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대안공동체는 '대주체' 이념의 첫 현실적 구현형으로 고려될 수도 있음.)[1]



 

V. Populism의 문제 ; 좌파 Melancholia에 맞서는 T-1000형 좌파를 위하여














V1. 좌파 Melancholia의 패배주의, 허무주의와 그 원인으로서의 역사 및 시대 인식


       역사는 절대 직선적으로 변화하는 것이 아니며, 모식화한다면 그나마 가장 근사[近似]한 model은 오히려 3차원 나선형 모형이고, 2차원 사영으로 단순화할 때 (sine) 파동형이 된다. (이것이 Deleuze의 [[차이와 반복]] 같은 사상들이 탄생할 수 있었던 근본 토대이다.) 따라서 하나의 역사객체, 특히 사조나 사상, 철학, 종교 등의 Meme을 포함한 문화객체들은 결코 Wallerstein의 주장처럼 완전한 사멸/소멸이나 만료, 단절이 되지 않기 때문에 사망선고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오늘날에도 너무나 건강하게 살아 끊임없이 재해석, 인용되며 현대인의 생활을 깊숙이 지배하고 있는 수천 년 전의 고대 종교들과 철학들의 경우를 환기해 보라. 특히 2세대 구좌파와 3세대 신좌파의 관계는 역사의 나선/파동 운동을 규정하는 2대 기선의 여러 속성들 중 가장 대표적 대립물인 국가주의 대 자유주의를 각각 구현한 사조이자 무엇보다 신좌파라고 해서 결정적 오류와 한계 없이 현재 상황에 효율적으로 대처하고 있고, 구좌파만 극복 불가능한 치명적 오류/한계 때문에 완전히 도태된 구시대의 유물이 아니라는 점에 유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잘못된 역사/시대 인식은 상황( 변화)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자칫 또다른 치명적 실수와 패배로 우리를 인도할 것이다.

따라서 Wallerstein의 '거대한 순환[;대순환의 직역]' 가설도 시대주기를 세분하여 그 안에서 운동과 상부구조의 미세조절과정을 세밀하게 고찰, 이론화하지 못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는데, 이 150년 이상의 과정을 남한의 '80년대 12년 순환으로 축약하여 무리하게 적용시키면서 구좌파 전체에 섣부른 사망선고를 내리는 것은 그 엄청난 정치적 효과에 비해 그 근거가 너무나도 박약하다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시대구분 및 역사인식과 관련하여 많은 분들이 전고에서의 다음과 같은 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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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반복 재현되고 있는 시대적 혼란을 극복할 새로운 상황 인식과 '인지/담론/Media 전략'으로 제출된 다음과 같은 견해는, 주체의 동물화 감정화를 오히려 적극 추동해 온 3세대 (post)anarcho 신(사회운동)좌파와도 구별되고 양대 계보를 통합하면서 최신작 [[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For A Left Populism]]를 저술한 Chantal MOUFFE의 시대/문제 의식 및 대안적 시도와도 공명하는, 강력한 4세대 좌파의 맹아적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기에 각자의 일독과 판단을 권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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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마치 필자가 populism을 옹호하는 것으로 오독하셨던 듯한데, 이 언급의 진의는 국제 좌파 진영 내에서 (Nancy FRASER와 함께) 가장 민감하고 신속한 시대인식(전환)을 보여주고 있는 이론가들 중 하나로 평가할 수 있는 MOUFFE의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좌파운동사관을 지시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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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클라우와 무페의 작업은 늘 당대의 정세에 대한 면밀한 분석에 입각해 있다. 그들의 대표작인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1985)은 2차 세계대전 이후 확립된 유럽 사회민주주의 체제의 위기에 대한 이론적 대응이었다. 전후 자본주의 고도성장의 종식이라는 경제적 환경과 여성운동, 반인종차별운동, 환경운동 같은 신사회운동의 부상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채, 마거릿 대처와 로널드 레이건의 신자유주의에 맥없이 무너졌던 구좌파의 한계를 넘어서 새로운 사회주의 전략을 모색하려는 것이 그 책의 주요 관심이었다.
30여년 뒤에 출간된 무페의 이번 책은 신자유주의의 위기에 대한 성찰의 산물이다. 2008년 이후 신자유주의는 근본적 위기에 빠져들게 되었지만, ‘제3의 길’을 주창한 신좌파는 이번에도 위기에 대처하는 데 무능했다. 오히려 스페인의 포데모스, 그리스의 시리자 같이 대중의 민주주의적 요구에 귀를 기울이고 이를 “대중적 집합 의지”로 구성하려고 시도한 새로운 종류의 좌파 포퓰리즘 정치만이 두각을 나타냈다. 그렇다면 위기에 처한 민주주의를 회복하고 신자유주의 이후 새로운 진보 헤게모니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좌파 포퓰리즘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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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공통점은 공히 한국 좌파들과 달리 이미 지금 여기의 당대와 신좌파에 대한 깊은 성찰에까지 도달해 있다는 것이다.

.......



V2. Melancholia의 그림자를 벗어나는 경로들


하나의 경로로서 '애도'와 그 최대문제로서의 청산주의 유도 및 유착


애도에 맞서는 강력한 Antithese로서의 사도 바울의( 충실성) 경로 

 

또 하나의 경로로서의 T-1000형 좌파

  : 자유자재의 변형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핵심요소로서, 선택가능한 Configuration들의 대량 증식



V3. 좌익 Populism의 깊이


Populism의 문제는 그에 대한 어떤 결론 자체 보다도 미정립과 혼란에서 기인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이 혼란은 한국 좌파 전체에 일반적으로 퍼져 있는 상태이고, 단위 안에서는 물론 심지어 개별 논자 안에서도 마찬가지여서 본서 저자를 포함해, ㅎㅈㅊ 자체가 한국 사회에 좌익 Populism 논의를 선도적으로 도입, 선전해 온 group이면서도 자기 단위와 과거의 자신에 반론을 전개하고 있는 형국인데,




zero-base에서 (좌파는) Populism에 대하여 반대, 옹호, (비판적) 연대의 3가지 stance를 선택할 수 있겠으나, 최근 며칠 상간에도 잘 확인되는 바이지만 한국 좌파에게 있어 Populism의 첫 번째 문제는 순수이론적 동기에서 Populism을 비판하자마자 한국적 상황의 특수성 때문에 그것이 곧바로 자기에게 Boomerang처럼 되돌아와 자신은 물론, 복지확대 등 인민의 요구를 관철시키려는 모든 노력들을 공격하게 된다는 사실이며, 이러한 Populism 비판의 역설이 자신들의 숙명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의식이 다른 일정들 때문에 계속 묵혀 두었던 본고를 미완성 형태로라도 급하게 공개하게된 직접적 계기이다.[3]




그러므로 이러한 역설적 난관을 돌파하기 위한 대안 품행의 하나로 오히려 좌익 Populism의 긍정적 측면들을 검토하는 다음과 같은 자료들을 진지하게 논의할 필요성이 대두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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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국의 마오와 프랑스의 마오


.....얼마간 잘 알려져 있다시피 1960년대와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프랑스의 좌파 철학자들은 마오의 사상에 상당히 경도되었었다특히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라는 맑스주의 철학자와 그를 중심으로 연구하고 활동하던 다수의 청년 좌파 철학자들이 그러했는데여기에는 바디우 자신뿐만 아니라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 에티엔 발리바르(Étienne Balibar) 등이 포함된다이 가운데 특히 바디우가 특이한 점은 60년대에 그가 보여줬던 마오에 대한 열광적 동의를 (내용상 어떤 변화도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여전히 공공연하게 고수하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 예컨대 발리바르와 같은 경우 마오에 대한 평가가 다소 복잡하다중국의 인민해방전쟁기의 마오는 다소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반면(유보 없는 긍정은 아니다), 문화혁명 시기의 마오에 대해서는 상당히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을 볼 수 있다그러나 어떤 마오가 발리바르 안에서도 여전히 흔적으로 남아있다고 우리는 추정해볼 수 있을 것이다랑시에르 또한 오늘날 문화혁명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진 않을지 모르겠으나 그가 지식인과 무지대중 간의 지적 차이를 완전히 거부하고 모든 사람은 지적으로 평등하다는 주장을 펼칠 때 나름대로 그는 어떤 마오주의를 계속 실천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들 청년 좌파 철학자들(피에르 마슈레레지스 드브레자크-알랭 밀레 등도 여기에 포함된다)은 1964년 말에 창설되었다가 68년 5월 이후 해산된 맑스-레닌주의 저널(Cahiers marxistes-léninistes)의 가장 젊은 필진을 이루었는데이들은 모두 알튀세르의 제자들로 스승의 권유를 받아들여 그 저널의 점점 더 뚜렷해지는 친-중국화의 경향성을 만들어냈다.

 

알튀세르 자신은 무엇보다 마오의 모순론에서 많은 이론적 영감을 이끌어 냈으며변증법을 헤겔의 종말목적론적이고 관념론적인 논리로부터 떨어뜨려 놓기 위해 그것을 이용했다(그의 첫 번째 저서인 맑스를 위하여에 그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다). 비록 알튀세르는 마오의 문화혁명에 대해서는 공공연한 발언은 자제했지만그는 맑스-레닌주의 저널』 14호에 익명으로 문화혁명에 대하여라는 글을 발표했으며 거기에서 문화혁명을 맑스와 레닌이 구상했던 대중의 이데올로기적 혁명을 최초로 실행에 옮겼던 유례없는 역사적 사실이라고 평가했다즉 문화혁명은 사회주의 혁명이 단지 권력 장악이나 소유관계 및 생산관계의 변혁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또한 이데올로기의 혁명을 반드시 통과해야 하며이에 미달할 경우 자본주의로 후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러한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행해진 전대미문의 시도였다는 것이다상당히 긍정적인 평가라고 이해될 수 있지만사실 알튀세르는 이 글을 자기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하지 않았으며이후 문화혁명에 대해서도 다시 논한 적이 없다.

 

그렇다면 이런 상이한 입장의 결들이 보여주는 차이점들은 그만큼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방식들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며이런 쟁점들을 그 자체로 살펴보는 일이 분명 필요할 것이다프랑스의 마오가 중국의 마오와 같은가그렇지 않은가 하는 질문도 얼마간 유의미하겠지만프랑스의 마오에 대해 사유할 때 우리가 가장 먼저 생각해봐야하는 것은 프랑스의 마오가 하나가 아니라는 점이다(과연 중국의 마오는 하나일까).

 

바디우가 자신의 대담에서 공산주의적 정치를 추구하기 위한 근본적 경험은 문화혁명이지소비에트 국가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마오는 사회주의 국가 내에서 대중 행동이라는 수단을 통해 상황을 혁명적인 방식으로 공산주의를 향하게 만들려 시도했던 자였으며, “국가가 공산주의적 해결책이 아니라 단지 그 혁명을 위한 새로운 콘텍스트에 불과하다는 것을 사유했던 사람이었다고 말한 것은 어떤 의미에서였을까왜 그는 자신의 대담에서 갑자기 문화혁명을 파리 코뮌(1871)의 경험과 연결했던 것일까?

.......


  2. 알튀세르가 마오에게서 발견한 것

 

최근 루이 알튀세르의 제자 중 하나인 에티엔 발리바르에 따르면, 1917~1968년의 기간에 유럽 공산주의 진영은 두 개의 거대한 노선으로 분할되어 논쟁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계급 대 계급’ 노선이라고 볼 수 있다면 다른 하나는 ‘인민전선(popular front)’ 노선이라고 볼 수 있다. ‘계급 대 계급’ 노선은 자본주의 사회는 기본적으로 부르주아 계급과 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 나뉘어 있으며 이 두 계급간의 대결은 점차 격화되어 필연적으로 내전으로 치닫게 되고 결국 이 싸움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승리로 귀결된다는 관념에 기초한 노선을 말한다. 물론 현재 자본주의 사회 내에는 두 계급에 정확히 속하지 않는 중간적 계급들이 있지만, 이들은 계급투쟁이 발전함에 따라 점차 분해되어 프롤레타리아트 안으로 흡수될 수밖에 없는 존재에 불과하다고 보는 것이다. 이 노선의 가장 대표적인 이론가라고 볼 수 있는 사람은 죄르지 루카치(특히 <역사와 계급의식>)로 그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즉자적 계급에서 자기 자신의 조건에 대해 의식적인 대자적 계급으로 이행함으로써 사회주의를 열어내는 역사의 주체가 될 것이라고 바라봤다(맑스 자신에게서 이런 입장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텍스트는 <공산주의자 선언Communist Manifesto>이다).

 

다른 한편, ‘인민전선’ 노선은 모순들의 복수성과 복잡성에 대해 사유하면서 자본주의 사회 내에는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의 모순만이 아니라 다양한 다른 모순들이 있으며 따라서 이질적인 세력들의 연합으로서의 인민전선을 형성함으로써만 자본주의에 대한 투쟁을 유효하게 조직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한다. 여기에 대표적인 이론가로 꼽을 수 있는 사람은 안토니오 그람시인데, 특히 그는 저발전된 이태리 남부의 문제(‘서발턴’이라는 유명한 표현이 여기에서 유래한다)를 부각시키면서 모순들의 복잡성과 불균등성을 사유하고자 시도했으며, 자본주의의 경제적 상황이 자동적으로 혁명으로 귀결되지 않는다고 바라봤다. 따라서 그는 혁명적 해법을 다시 사유했으며, 모순들의 복잡성을 반영하는 인민전선의 형태를 특권화 했던 것이다(맑스 자신에게는 자본주의 사회구성체는 발전을 거듭할수록 복잡해진다는 사유가 담겨 있는 다수의 텍스트가 있는데, 무엇보다 <자본> 1권이 공산주의로의 혁명적 이행을 메시아주의적인 방식으로 논하는 32장 이후에 갑자기 식민지 문제를 논하는 33장을 추가하며 마무리되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눈여겨 봐야하며, 또한 중간에 착취의 엔지니어러로서의 공장감독관에 대한 분석을 하면서 자본주의가 이른바 사회민주주의적 개혁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도 시사했다는 점을 봐야한다).

 

발리바르에 따르면, 대립하는 이 두 가지 노선 가운데 ‘계급 대 계급’ 노선의 계보에 속하는 후대의 이론가가 이태리의 마리오 트론티라고 볼 수 있다면, ‘인민전선’ 노선의 계보에 속하는 후대의 이론가가 알튀세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알튀세르는 그람시와 유사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가 1968년 저서 <맑스를 위하여>에 수록되어 있는 “모순과 과잉결정”이라는 장에서 그람시를 자신의 이론적 선구자로 상찬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의 과잉결정(overdetermination) 개념은 그람시가 봤던 모순들의 복잡성을 사유하기 위해 고안된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알튀세르는 그람시의 입장이 모순들의 복잡성을 너무나 강조한 나머지 그 모순들의 접합이 왜 전체적인 차원에서 여전히 자본주의적인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지를 파악하지 못할 수 있다는 우려를 가지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람시에게서는 자본과 노동의 대립이 어떻게 ‘최종심급’을 구성하는지에 대한 설명을 찾아낼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알튀세르는 그람시를 대신할 수 있는 인민전선의 이론가를 추구하게 되는데, 이때 알튀세르가 찾아낸 것이 바로 또 다른 인민전선의 이론가이자 그러한 노선에 입각하여 혁명을 성공시킨 실천가로서의 마오쩌뚱이다. 알튀세르는 마오의 텍스트들 가운데 유일하게 <모순론>에만 관심을 기울였는데(예를 들어 그는 <실천론>을 서구의 실용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영향 받은 텍스트로 저평가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맑스주의적인 변증법적 유물론의 완전히 혁신된 상이 제시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마오의 <모순론>을 읽어보면, 마오는 모순의 보편성과 절대성에 대해서만 주목하는 것의 과오를 지적하면서 모순의 특수성과 상대성에 주의를 기울이자고 주장하면서, 혁명과 같은 “거대한 사건은 발전과정에 많은 모순을 포함하고 있”으며, “예를 들어, 중국의 자산계급민주주의혁명 과정에는 중국사회의 피압박계급과 제국주의 사이의 모순, 인민대중과 봉건제도 사이의 모순, 무산계급과 자산계급 사이의 모순, 농민 및 도시의 소자산계급과 자산계급 사이의 모순, 각각의 반동적 지배집단 사이의 모순 등이 있어 그 상황은 매우 복잡하다”고 주장한다. 모순들의 복잡성에 대한 이런 인식에 기반하여 그가 개념화하는 것이 바로 기본모순, 주요 모순 및 부차적 모순, 모순의 주요 측면 및 부차적 측면이라고 말할 수 있다. 특히 마오는 이때 기본모순 자체는 하나의 사회구성체 내에서 지속적으로 유지되지만, 주요 모순은 기본 모순이 아니며, 게다가 주요 모순은 부차적 모순과 구체적인 정세 속에서 자리를 바꾸는 전위(displacement)의 운동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그는 “중국과 같은 반식민지국가에서는 주요 모순과 부차적 모순의 관계가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는데, “제국주의가 이러한 나라에 침략전쟁을 일으켰을 때”, “이때 제국주의와 이러한 나라 사이의 모순이 주요 모순이 되고, 이러한 나라의 내부 각 계급 간의 모든 모순(봉건제도와 인민대중 간의 주요 모순을 포함하여)은 모두 일시적으로 부차적, 종속적인 위치로 떨어지게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또 다시 상황이 변화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제국주의가 무력을 통한 억압을 꾀하지 않고 정치, 경제, 문화적 수단을 통한 온건한 억압을 행하는 경우, “반식민지국의 지배계급은 제국주의에 투항하고 양자는 동맹을 맺어 인민대중을 공동으로 억압”하는바, (제국주의와 동맹한) 지배계급과 인민대중 간의 내부 모순이 오히려 주요 모순의 위치로 올라서게 된다.

 

알튀세르는 바로 이런 마오의 <모순론>에서 기본모순이라는 ‘최종심급’의 상과 주요모순 및 부차적 모순의 ‘과잉결정’의 상을 발견했고, 경제주의에 대해 급진적인 비판을 가하면서도 다원주의라는 역편향으로 빠지지 않을 수 있는 길을 찾아냈던 것이다. 알튀세르는 경제적 환원론을 비판하기 위해서 최종심급과 지배적 심급을 구분하고(이 둘을 일치시키면 환원주의에 빠진다), 또한 모든 사회구성체는 지배관계를 갖는 구조(structure à dominance)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데, 이는 사실 마오가 이미 다 말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마오는 “어떠한 발전과정에 많은 모순이 존재하고 있다면 그 중의 하나는 반드시 지도적,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주요 모순이며 다른 것들은 부차적, 종속적 위치에 놓이게 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알튀세르는 마오의 논의를 좀더 정밀하게 가공하기 위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의 개념들을 도입했다고 볼 수 있다.


  3. 바디우와 중국의 문화대혁명


 

앞선 칼럼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알랭 바디우는 루이 알튀세르의 제자 가운데 하나로, 68혁명 당시 마오주의 좌파에 적극적으로 가담했으며,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열렬히 옹호했던 사람이다. 다른 제자들(특히 우리가 앞으로 이어질 다른 칼럼들에서 살펴보게 될 에티엔 발리바르)은 문화대혁명에 대해 부정적인 판단을 내리거나 또는 그렇게 돌아섰지만, 바디우는 지금까지도 그것을 고집스럽게 지지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이런 바디우의 특이한 입장은 그의 독특한 진리 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바디우는 자신의 책 <윤리학>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한 사건에 대한 충실성의 실재적 과정을 ‘진리’(하나의 진리)라고 부른다. 그 충실성이 상황 속에서 생산하는 것이 바로 진리이다. 예컨대 중국 문화대혁명과 프랑스 68년 5월이라는 두 개의 서로 얽혀진 사건에의 충실성을 사고하고 실천하고자 했던 1966년에서 1976년 사이의 프랑스 마오주의 정치가 그것이다.”

 

이렇게 바디우는 중국 문화대혁명과 프랑스의 68혁명을 진리적 사건이라고 보며, 그 사건들에 대한 충실성(fidélité)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윤리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그 사건들이 이후 역사 속에서 어떤 실패를 경험했든지 간에 그것들이 당시 정치 상황 내에 어떤 “내재적 단절”을 가져온 한에서 여전히 배반되어선 안 되는 것으로 남아 있다는 뜻이다. 바디우에게 진리란 기존의 체계 및 그 체계를 다소간 합리적으로 설명하거나 정당화하는 지식이 가지고 있는 어떤 공백을 명명하는 ‘사건’으로 발발하며, 그런 사건이 일단 발발하면 그것은 진리과정의 담지자인 ‘주체’의 ‘충실성’에 의해 보존되어야 한다.

.......

이제 우리는 바디우가 어떤 의미에서 중국의 문화대혁명(그리고 프랑스의 68혁명)을 진리 사건이라고 보는지 이해할 수 있다. 마오쩌뚱의 문화대혁명은 당의 국가화(관료제화)를 중단시키고 당을 그 외부로부터 공격하기 위해 행한 혁명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배제되었던자들이 하나의 집합으로 출현한 사건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마오의 유명한 슬로건인 “모든 반역은 정당하다”(造反有理)라는 말에 따라 문화대혁명에 가담했던 많은 청년들은 중국의 사회주의 혁명 과정에서 혁명의 적으로 배제되었던 전-부르주아지의 자식들이었다. 마오는 이들을 동원함으로써 당시의 상황상태, 즉 당시의 국가를 해체하려고 했던 것이다. 따라서 바디우에게 중국의 문화대혁명은 파리코뮌, 러시아혁명, 중국의 인민해방전쟁 등과 함께 국가를 해체하고 사멸시키려고 시도했던 혁명적 사건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우리가 첫 번째 칼럼에서 논했던 마오에 대한 인터뷰(버소)에서 바디우는 이렇게 말한다. “공산주의적 정치 추구의 근본적인 경험은 문화혁명이지 소비에트 국가가 아닙니다. 오늘날 러시아와 중국은 모두 자본주의 국가이며, 그와 같은 것으로서 그것들은 정치사상과 관련해서 나에게 어떤 흥미도 주지 못합니다. 당분간 마오는 사회주의 국가 내에서 대중행동에 의해, 상황을 혁명적인 방식으로 공산주의 쪽으로 맞추어 나가려고 시도했던 그 최후의 위대한 역사적 실험과 연계된 고유명사입니다. 마오는 국가란 공산주의적 해결책이 아니라 그 혁명의 새로운 콘텍스트일 뿐이라는 것을 사유했던 첫 번째 사람입니다.”

 

물론 우리는 바디우의 이런 견해가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사유하기에 충분한 것인지 비판적으로 질문해봐야 할 것이다. 마오의 “혁명적” 시도는 왜 처참하게 실패 했을까에 대해서 말이다. 바디우는 문화대혁명의 실패는 인정하지만, 이 실패에 대한 설명은 제공치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는 문화대혁명을 단순히 마오가 자신의 권력을 유지, 강화하려고 했던 폭력적인 시도였다고 보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적어도 그 점에 대해 바디우는 우리에게 알려주는 바가 있다.

 

 

  4. 좌파 포퓰리즘, 인민전선의 새 이름인가

 

2014년에 작고한 에르네스토 라클라우(Ernesto Laclau)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정치철학자로 정확히 프랑스 철학자는 아니다. 그러나 프랑스 철학이 오직 프랑스에만 있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다. 라클라우와 오랜 기간 동반자로 함께 작업한 벨기에 출신의 정치철학자 샹탈 무페(Chantal Mouffe)는 실제로 젊었을 때 알튀세르의 세미나에 참여했으며, 라클라우 자신도 알튀세르를 탐독하고 그의 몇몇 개념들(과잉결정, 이데올로기적 호명)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알튀세르의 이단적 상속자라고 볼만하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에서는 무페의 <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이승원 역, 문학세계사, 2019년)가 번역됨에 따라 라클라우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포퓰리스트 이성에 대하여>(On Populist Reason)라는 저서도 국내 연구자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아마 조만간 국내에도 번역이 되지 않을까 한다). 이 칼럼에서 우리가 포퓰리즘에 대한 라클라우의 논의에 주목하는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우선 그의 논의가, 우리가 두 번째 칼럼에서 다룬 ‘인민전선’ 전술의 최근의 이론적 발전을 대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둘째, 그의 논의의 큰 윤곽이 세 번째 칼럼에서 우리가 다룬 바디우의 이론과 몇몇 지점에서 놀라울 정도로 수렴하고, 또 매우 중요한 지점에서 발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양자의 수렴과 발산은 우리 자신의 정치를 사유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쟁점을 이룰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두 번째 칼럼에서 이미 말했듯이, 유럽 공산주의 진영이 20세기에 서로 갈라져 싸웠던 가장 큰 쟁점은 ‘계급 대 계급’ 노선인가, ‘인민전선’ 노선인가 하는 문제였다. 이 두 노선이 처음으로 가시적인 방식으로 서로 부딪혔던 것은 나치를 비롯한 파시즘 세력에 어떻게 맞서 싸울 것인가 하는 질문을 둘러싸고였다. 당시 소련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코민테른은 처음에는 ‘계급 대 계급’ 노선을 채택했지만, 이후 이 노선이 처참하게 실패함에 따라 인민전선 노선으로 급선회한 바 있었다. 이런 노선 전환은 매우 복잡했던 독일에서의 상황과 관련된다. 러시아 혁명의 성공에 고무되어 1918년에 행한 독일혁명이 (이후 바이마르 공화국의 집권 세력이 되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배신으로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손에 스파르타쿠스단 지도자인 칼 리프크네히트(Karl Liebknecht)와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가 즉결 처형된 사건은 사회민주주의자들에 대한 독일 공산주의자들의 적개심을 극단화했다. 또한 나치 세력이 발흥하고 있었을 당시 독일이 맞이한 경제 위기는 매우 심각한 것이어서, 곧 자본주의가 붕괴될 것이라는 예상을 가능하게 만들어줬다(로자의 붕괴론은 이를 뒷받침하는 이론적 준거가 되어주었다). 독일 공산주의자들은 이런 낙관 속에서 독일 인민이 조만간 자신들을 지지해 줄 것이라고 여기면서, 심지어 나치세력과의 공조 속에서 사회민주주의정부를 흔들기 위한 파업을 조직하기까지 했었다. 그리고 나치가 권력을 잡았을 때에도 독일 공산주의자들은 곧 인민이 나치의 거짓을 깨닫고 곧 자신들을 지지해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알다시피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며, 코민테른은 결국 계급 대 계급 노선을 포기하고 인민전선을 주장한 디미트로프 테제를 채택하게 된다. 인민전선(popular front)은 다양한 조직에 소속된 노동자 및 농민 세력을 통일시킨다는 통일전선(united front)에 대립하는 것으로, 그것은 소부르주아지뿐만 아니라 일부 부르주아지까지 전선으로 광범위하게 묶어내야지만 파시즘에 대한 효과적인 저항을 할 수 있다는 사고에 기반한 전술이었다.

 

이런 인민전선 노선을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한 정치가 가운데 하나가 바로 마오였으며, 그것은 바로 일본제국주의에 맞선 국공합작뿐만 아니라, 국공합작 이후 대장정 시기 중국 ‘인민’의 생성을 도모한 그의 성공적인 실천으로 나타났다. 라클라우는 <포퓰리스트 이성에 대하여>에서 마오의 대장정 시기의 투쟁에 대한 짧지만 매우 중요한 다음과 같은 코멘트를 남겼다. “하나의 극단적 예로 마오쩌뚱의 ‘대장정’을 들어보자. 여기에 위에서 묘사한 의미의 ‘포퓰리즘’이 있다. 즉, 복수의 적대적 상황들에서 ‘인민’을 역사적 행위자로 구성하려는 시도가 있다. 마오쩌뚱은 심지어 ‘인민 내부의 모순’에 관해 말하고 그래서 고전적 맑스주의 이론에 파문이었던 실체, ‘인민’이 등장한다. (…) ‘인민’은, 순수한 계급 행위자들(생산관계 내의 정확한 위치에 의해 정의되는)의 속성으로 간주되는 동질적 본성을 갖기는커녕, 복수의 단절 지점들의 [등가적] 연결로 인식된다.”(On Populist Reason, Verso, p. 122) 여기서 우리는 라클라우가 마오의 인민전선 노선을 좌파 포퓰리즘의 명확한 사례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라클라우가 말하는 ‘좌파 포퓰리즘’이란 바로 인민전선 노선의 새 이름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매우 놀라운 방식으로, 포퓰리즘을 설명하는 라클라우의 이론적 논의의 틀은 바디우의 것과 몇 가지 점에서 수렴하는 양상을 보인다. 우선 라클라우가 이질적 세력들로부터 등가적 사슬을 만들어내는 실천으로서의 포퓰리즘을 주장할 때, 그런 이질적 세력들이란 바로 기존의 권력(헤게모니) 안에서 자신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자들, 다시 말해서 배제된 다양한 세력들을 지칭하며, 이들이 자신들의 이질성들을 하나의 등가적 표면 위에 등록하는 데에 성공할 때에 비로소 효과적인 대항-헤게모니적 정치가 출현할 수 있다고 말하는데, 이는 바디우가 배제된 다양한 자들이 하나의 집합(즉 자신의 이름을 포함하고 있는 비정상적인 집합)으로 출현할 때 그것이 바로 진리 사건이라고 말하는 것과 대동소이하다. 바디우는 상황상태(국가) 안에 있는 ‘공백’을 명명하는 것이 진리 사건의 정치라고 주장하면서, 이때 이런 공백이란 하지만 단순한 없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의 다양성”(즉 무는 하나가 아니라 다양한 것들이 그 안으로 모두 들어올 수 있는 공이라는 의미에서)을 뜻한다고 말하는 것은 라클라우가 이질적인 세력들의 등가적 접속을 사고하는 것과 상당히 가깝다. 게다가 라클라우와 바디우는 또 다른 면에서도 수렴하는데, 그들이 공히 인민(등가적 사슬 또는 자신의 이름을 포함하고 있는 집합으로서)을 생성시키기 위해 필수적인 조건으로서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하지만 라클라우와 바디우가 수렴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하나의 결정적인 지점에서 발산한다. 라클라우는 인민의 이름을 공동체적 충만성(이런 충만성이 종국에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그가 인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을 의미화 하는 이름이어야 한다고 보는 반면, 바디우는 인민의 이름은 결코 충만성의 이름이어서는 안되며, 오히려 공백을 명명하는 것이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바디우는 공동체적 충만성을 명명하려는 행위는 반드시 진리의 도착으로서의 시뮬라크르(그것의 가장 대표적인 이름은 나치다)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고 본다. 비록 라클라우가 현정세에서 민족적 경계를 넘어서는 포퓰리즘을 생산해야할 필요성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라클라우의 논의가 민족 공동체 또는 더 나아가 초민족적 공동체(supranational community)로서의 유럽 등에 준거하는 공동체주의처럼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다른 한편 바디우에게 제기해야 할 질문은 그가 공백을 명명해야한다고 말하면서 국제주의를 강조할 때 그것을 어떻게 지도자에 대한 개인숭배와 화해시킬 수 있다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최근 에티엔 발리바르는 포퓰리즘의 문제설정을 일정하게 인정하면서도 포퓰리즘이 아니라 대항-포퓰리즘의 필요성에 대해 역설했는데, 그가 말하는 대항-포퓰리즘은 좌파 포퓰리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포퓰리즘의 핵심적인 요소로서의 지도자 숭배와 모종의 (민족적이거나 그렇지 않은) 공동체에 대한 준거를 거부하는 것이다.


  5. 반폭력의 정치로서 혁명을 사유하기

 

알튀세르의 제자인 에티엔 발리바르는 1990년대부터 폭력이라는 문제를 다시 사유하기 위한 이론적 작업을 심도 깊게 진행해 왔다. 폭력을 제거하거나 적어도 제어하려는 전통적인 모델은 기본적으로 세 가지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첫 번째가 국가에 의한 폭력적 수단들의 독점을 통해 사회로부터 폭력을 제거하려는 ‘폭력 독점’(monopoly of violence)의 모델이라고 한다면, 두 번째는 지배계급(또는 그들을 대변하는 국가)의 폭력을 종식시키기 위한 혁명적 폭력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대항폭력’(counter-violence) 모델이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지배의 수단으로서든 그런 지배에 대한 저항의 수단으로서든 간에 모든 폭력은 잘못이라고 비판하는 ‘비폭력’(non-violence) 모델이다. 맑스주의는 통상 두 번째 모델, 즉 대항폭력 모델을 특권화해 왔다고 알려져 있으며, 이는 어느 정도까지는 사실에 부합한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주지하다시피 첫 번째 모델은 토마스 홉스에 의해, 그리고 세 번째 모델은 마하트마 간디에 의해 특권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발리바르는 맑스주의 내에 대항폭력 모델과는 개념적으로 구분될 수 있으면서도, 그렇다고 폭력 독점 모델이나 비폭력 모델로 환원될 수 없는 또 다른 폭력에 대한 정치가 경향적으로 구성되어 왔다고 주장하면서, 그것을 반폭력 모델(anti-violence)이라고 부른다. 반폭력의 정치는 폭력에 맞선 투쟁의 정치로서, 지배계급의 압도적인 폭력에 저항함에 있어서 폭력적 수단을 사용할 필요성이 있다고 인정하지만(따라서 비폭력 모델은 채택할 수 없다), 동시에 모든 폭력적 수단의 활용은 극단적 폭력을 제한하거나 감축하여 (전쟁이 아닌) 정치 그 자체가 가능해지는 방향으로 조직되어야 한다는 관념을 핵심으로 한다.

 

맑스 자신의 경우를 먼저 살펴볼 것 같으면, 맑스는 <공산주의자 선언>(1847년)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가 투쟁 속에서 점점 자신을 정치적으로 통일시켜나가 결국 부르주아지와 계급 대 계급의 최후결전을 치르고 국가권력을 장악함으로써 공산주의 사회로 이행할 수 있으리라는 폭력혁명에 대한 낙관적 전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848년 혁명이 잔인하게 진압되어 실패로 돌아가자 맑스는 더 이상 이런 전망을 유지할 수 없었고, 그리하여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에 대한 좀 더 근본적인 이해가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정치경제학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에 착수했으며, 런던 도서관에 파묻혀 이후 근 20년을 작업하여 <자본> 1권(1867년)을 출판하게 된다.

 

<자본>에서 맑스는 예전과 달리 역사의 방향에 관한 세 가지 다른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하게 된다. 하나는 <자본>의 32장에 제시되어 있는 생각인데, 이는 <공산주의자 선언>에서 이미 나왔던 메시아적 종말론 테마의 반복으로, 혁명을 수탈자들의 수탈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자본>의 33장에 제시되어 있는 생각인데(혁명을 논하는 32장이 마지막 장이 아니라 그 뒤에 33장이 추가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많은 것을 말해준다), 거기에서 맑스는 중심의 자본주의 국가 내의 모순들이 식민지에 대한 착취를 통해 완화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러나 가장 놀라운 것은 <자본>에 나와 있는 공장 감독관 제도에 대한 그의 분석이다. 여기서 그는 공장 감독관이 국가의 편에서 파견된 ‘착취의 엔지니어’라고 볼 수 있지만, 동시에 공장 감독관은 아동노동 착취를 비롯한 자본가들의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초과착취를 제한하는 역할을 수행한다고 파악하면서, 계급적대에 관해 자신이 과거에 가지고 있던 생각을 일정하게 수정한다. 과거에 맑스는 계급적대를 화해 불가능한 것이라고 보았으며, 따라서 (누가 이기든 간에) 계급 대 계급의 폭력적 충돌이 불가피하다고 여겼지만, 이제 <자본>에서는 계급적대를 화해 불가능한 것이 아닌 ‘환원 불가능한 것’으로 보면서,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이 (여론 등을 활용하고 다른 시민 세력들과 연대하여) 자본가 계급의 극단적 폭력을 제어하면서 자본주의를 좀더 민주적인 방향으로 발전하도록 만들 수 있다고 본다.

 

분명히 <자본>에서 혁명에 대한 사유는 결코 사라지지 않지만, 그것은 역사가 발전할 수 있는 하나의 가능한 경로로서만 고려되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 부르주아지의 폭력에 맞서는 반폭력의 정치가 폭력적 혁명의 정치의 곁에 또 하나의 가능성으로 나란히 제출되고 있는 것이다. 발리바르는 맑스가 바로 이 두 가지 가능성 사이에서 망설이고 있었지만, 얼마 안 있어 발발한 1871년의 파리 코뮌으로 인해서 그 망설임이 강제로 중단되었다고 말한다. 맑스는 파리 코뮌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될 수 있다고 보면서 봉기 이전에는 봉기에 반대했지만, 대중들이 실제로 봉기에 나서자 찬성 입장으로 돌아서서 파리 코뮌에 실천적으로, 또 이론적으로 동참하게 된다(비극적이게도 맑스의 애초의 예상은 틀리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으며 맑스는 이 사건으로 인해 심각한 우울증에 빠지게 된다).

 

맑스주의에서 또 다른 반폭력의 정치의 거대한 사례는 레닌에게서 발견될 수 있는데, 레닌은 혁명 그 자체를 하나의 반폭력의 정치로 만들어낸 최초의 이론가이자 실천가였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제2인터내셔널은 반전 입장을 취하고 있던 많은 좌파 정치인들이 1차 대전이 발발하자 애국주의와 찬전으로 돌아서면서 돌이킬 수 없이 붕괴하게 되었다. 끝까지 반전의 입장을 고수했던 극소수의 사람들(레닌, 룩셈부르크, 트로츠키 등)은 짐머발트 회의(이른바 제2.5인터내셔널)에서 제국주의 전쟁을 혁명적 내전으로 전환할 것을 결의했지만, 유일하게 레닌만이 그것을 실제로 어떻게 가능하게 만들 것인가를 이론적으로 연구했다.

 

발리바르에 따르면,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을 탐독하면서 레닌은 전쟁이 ‘시간이 걸리는 과정’이라는 통찰을 얻어냈으며, 따라서 전쟁 초기에는 대중들이 애국주의에 고무되어 전쟁에 찬성할 것이지만 장기간 지속되는 전투 속에서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경험들을 하게 되면 결국 근본적인 불만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예상하고, 볼셰비키 조직원들로 하여금 제국주의 군대에 스스로 지원하게 만들었다. 이 조직원들은 처음에는 전쟁에 나온 다른 병사들과 함께 전투를 하면서 그들과의 유대감을 발전시키다가 전쟁에 대한 대중들의 불만이 쌓여나가기 시작하면 그 불만을 정치적으로 조직해내는 임무를 맡았다. 이 때문에 러시아에서 2월 혁명이 발발했을 때 만들어진 대중조직은 단순한 노동자 소비에트가 아니라 노동자-병사 소비에트였으며, 재향 군인들은 이 평의회 조직의 거대한 한 축을 구성했다. 레닌은 바로 이런 정치적 개입을 통해 러시아를 혁명적으로 패배하게 만듦으로써, 사실상 1차 대전이라는 거대한 폭력 그 자체를 멈출 수 있었다(실제로 2월 혁명이 발발했을 때 망명 중이었던 레닌은 독일 정부를 찾아가, 만일 자신을 러시아 한복판으로 들여보내만 주면 혁명을 일으켜서 러시아를 전쟁에서 빼내고 이 전쟁을 멈추게 만들겠다고 약속하고 독일 정부로부터 그 유명한 ‘밀봉열차’를 받아내서 러시아로 멈추지 않고 들어가 10월 혁명을 성공시킨다).

 

반폭력의 정치의 또 다른 사례는 바로 대장정의 마오에게서 발견된다. 마오 또한 국공합작이 깨진 이후 중국 공산당이 처해 있던 거대한 열세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에 제시된, ‘방어전이 늘 공격전보다 용이하다’는 테제를 독특하게 해석하여 중국 상황에 적용시켰으며, 중국 공산당원들이 인민대중 속으로 숨어들어가도록 만드는 전략을 구사했다. 공산당원들은 이렇게 대중 속으로 도망침으로써 그 속에서 전세의 역전을 도모할 수 있는 시간을 벌게 되었는데, 그 속에서 그들은 주민대중을 정치적으로 자신들의 편으로 돌려놓을 수 있었고, 또한 다양한 소규모 게릴라전을 수행함으로써 전쟁에 필요한 무기 및 전쟁기술들을 확보하여 마침내 반격에 나설 수 있었다. 불가능해 보였던 중국의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으로까지 이어지는 이 놀라운 대역전극은 지배계급의 압도적 폭력에 대해 맞서 싸우기 위해 무대의 중앙을 단번에 장악하는 전술(예컨대 파리 코뮌의 전술)을 구사하지 않고 오히려 대중들 속으로 숨어들어가 정치와 방어전쟁을 결합하는 길을 마오가 찾아낼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반폭력의 정치로서 혁명을 사유하고 또 성공시켰던 레닌과 마오의 정치는 혁명 성공 이후 오히려 홉스적인 폭력 독점의 모델로 도착되고 말았을까? 우리는 다음 칼럼에서 이 문제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고자 한다.

 

 

  6. 어떻게 혁명을 문명화할 것인가?

 

지난 번 칼럼에서 우리는 대항폭력 노선으로 환원될 수 없는 반폭력의 정치 모델, 곧 폭력을 단순히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고 그것과 맞서 싸울 수 있는 길을 찾아내는 정치로서의 반폭력의 정치 모델에 대해 논하면서, 맑스주의의 역사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몇몇 탁월한 사례들을 검토했다. 특히 발리바르가 지적하듯이 레닌은 1차 대전이라는 거대한 극단적 폭력을 멈출 수 있는 효과적인 길을 발견할 수 있었던 실로 유일한 정치가이자 이론가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폭력을 단순하게 거부하는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노선은 (오늘날 유행하는 이러저러한 비폭력론이 취하는 형태와는 명확히 구분되는) 비타협적이고 투쟁적인 성격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극단적 폭력에 맞서 싸울 수 있는 길을 찾는 데에 실패했다. 왜냐하면 간디는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이 성취된 이후 인도 내의 종교적 갈등이 폭력적인 방식으로 터져 나오자, 갈등을 단지 일시적으로 유예시킬 수나 있었던 단식(간디 자신의 목숨을 건 단식) 외에 그 어떤 유효한 개입의 수단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비폭력 노선은 간디 사후 인도 내 종교 분파 간 대학살의 참극이 일어나는 일을 전혀 막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왜 맑스주의의 이런 반폭력의 정치는 혁명 이후 폭력 독점의 홉스적 모델로 변질되는 것을 피할 수 없었는가? 이 문제는 사실상 모든 사회주의 혁명이 경험했던 문제로, 단순히 (스탈린으로 대표되는) 몇몇 지도자들의 개인적 오류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며, 오히려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맑스주의 노선의 필연적 귀결이라고 봐야 한다.

발리바르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관념은 단번에 가공된 것이 아니다. 그 용어가 처음으로 출현한 것은 1848년 혁명에 대한 분석(<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에서였는데, 맑스는 그것을 공산주의자들이 채택할 수 있는 여러 전술들 가운데 하나의 전술로 제안했으며, 그 내용을 이루었던 것은 노동자와 농민의 동맹이었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투쟁이야말로 농민들을 해방시켜줄 수 있는 유일한 투쟁임을 보여줌으로써 중간계급으로서의 농민들을 부르주아지의 편에서 분리하여 자신들의 동맹군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알다시피 1848년 혁명은 실패했으며, 그 후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관념은 (맑스의 정치경제학에 대한 연구의 착수와 더불어) 맑스의 텍스트에서 완전히 실종되었다가 20여년이 흐른 뒤 1871년의 파리코뮌에 대한 분석(<프랑스 내전>)에 이르러서야 다시 등장하게 된다. 이때 그 관념은 단순히 적절한 정세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취할 수 있는 가능한 하나의 전술이 아니라 모든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취해야할 이행의 보편적 형태라는 성격을 부여받았으며, 그 내용의 핵심은 노동자 계급의 직접민주주의적인 자기 통치에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가공할 모순이 이미 이런 프롤레타리아 독재 관념의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으며, 이 모순으로 인해 맑스가 노동자 계급의 직접민주주의적인 자기 통치로서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논하는 바로 그 텍스트에서 하나의 문제에 대해 완전히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즉 우리는 그 텍스트에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안에서의 공산당의 역할에 대한 어떤 논의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자기 통치’와 공산당의 ‘지도’라는 관념을 어떻게 화해시킬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다양한 이질적 세력들로 구성되어 있는 노동대중을 통일시켜 하나의 단일한 통치 계급으로 조직하기 위해서는 그 조직화의 중심으로서의 공산당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맑스에게 수십만 대중들의 희생으로 끝난 파리 코뮌의 처참한 실패는 바로 이 점을 보여주는 듯이 여겨졌을 것이다. 지배 계급의 압도적인 폭력과 대결함에 있어서 직접 민주주의적인 자기 통치는 무장해제까지는 아닐지라도 매우 곤란한 문제를 야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피의 일주일”이라고 불리는 파리 코뮌 진압 이후 맑스와 엥겔스가 곧바로 전위당을 건설하기 위한 투쟁에 돌입한 것은 이 때문이고, 이런 그들의 노력은 1875년 독일 사회민주당 창립으로 귀결된 바 있다.

 

하지만 맑스 자신을 포함하여, 맑스주의는 이 이론적 모순에 대한 해결책을 찾아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렇기는 커녕, 파리 코뮌 뿐만 아니라 러시아 혁명, 중국 혁명 등 모든 사회주의 혁명을 결정적으로 홉스적 폭력 독점 모델로 변질시킨 것이 바로 이 모순이었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발리바르에 따르면, 이 모순은 정확히 혁명의 방어를 둘러싼 딜레마로 정식화될 수 있다. 혁명은 노동대중을 점점 더 자율적으로 만들고 그들의 자기 통치의 역량을 확장시켜 나가야 하는 것으로 가정된다. 그러나 혁명을 부르주아지나 또 다른 반혁명세력들(외국의 군대를 포함하여)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서는 노동대중을 군대로 조직해야만 하며, 따라서 그들을 규율화해야만 한다. 문으로 내보낸 근대 자본주의의 핵심으로서의 규율권력(미셸 푸코)이 다시 창문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 없는 것이다. 대항혁명을 불러오지 않는 혁명이란 있을 수 없다면, 권력장악으로서의 혁명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늘 자신을 더 극단적인 혁명 또는 “초-혁명”(Ultra-Revolution)으로 전환시킬 수밖에 없으며, 이는 곧 혁명의 도착(perversion)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러시아 혁명의 성공 이후 전시 공산주의 시기 레닌은 크론슈타트 수병들의 반란의 진압을 계기로 당 내외부에서 터져 나온 비판에 대응하기 위해 공산당 내에서의 ‘분파형성권’(right to tendency)을 금지하는 권위주의적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는 결국 스탈린에 이르게 되면 당의 일괴암적 통일성을 최우선으로 하는 숙청의 정치로 귀결되고 만다. 우리는 또한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유사한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다. 마오는 중국 공산당의 기술관료주의화를 비판하기 위해 ‘요새를 포격하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대중들을 동원하여 반역을 조직했지만, 점점 상황이 통제 불가능하게 되자, 계급투쟁이 당을 관통해야 한다고 할지라도 이런 계급투쟁의 최종적인 해결장소는 여전히 당이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혁명을 봉합할 수밖에 없었다. 당이 진리의 장소로 나타나야 한다는 맑스주의의 뿌리 깊은 사고를 마오 또한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1976년에 있었던 프랑스 공산당 22차 당 대회에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의 폐기 문제를 둘러싼 큰 논쟁이 벌어졌는데, 알튀세르는 이 개념을 폐기하려는 당의 주류적 입장에 맞서 투쟁했으며, 그의 제자인 발리바르도 알튀세르와 대동소이한 입장을 택하여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하여>라는 글을 썼다. 그러나 1977년 11월에 이탈리아 공산당 기관지 <선언>(Il manifesto)이 주최한 “혁명 이후의 사회에서의 권력과 저항”이라는 콜로키움 이후 사정은 크게 변했다. 알튀세르가 자신의 종전 입장을 되풀이하는 글을 그 콜로키움에서 발표하고 몇몇 인터뷰를 행한 반면, 발리바르는 1978년 초에 작성한 글(<국가, 당, 이행>)에서 자신의 스승의 입장을 명시적으로 비판하면서 사실상 1976년 논쟁 당시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의 폐기에 찬성했던 니코스 풀란차스(Nicos Poulantzas)와 수렴하는 입장을 취하기 시작했다(물론 풀란차스의 입장이 당의 주류적 입장과 같은 것은 아니었다).

 

1980년대와 90년대 발리바르의 이론적 작업의 축들 가운데 하나는 마오의 “조반유리”를 스피노자의 “오히려 인식하라”라는 슬로건과 결합함으로써 어떻게 혁명을 문명화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사유하는 작업이었다.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라고 볼 수 있는 이 작업에 있어서 그는 혁명의 지배적인 상 자체를 전환해야할 필요성을 제기하는데, 그에 따르면 우리가 갖고 있는 혁명의 상은 사실상 프랑스 대혁명의 모델에서 연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혁명이 반드시 이런 권력장악의 형태를 취해야 하는가? 앞서 말했듯이 권력장악으로서의 혁명, 특히 프롤레타리아트라는 통일된 계급의 독재로서의 혁명은 필연적으로 제기되는 혁명 방어의 딜레마를 좀처럼 극복할 수 없어 보인다.

 .....지배자들의 폭력뿐만 아니라 그에 맞서는 피지배자들의 대항폭력까지도 분석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상호 도착을 제어하는 혁명 문명화의 길을 우리가 발명할 수 있을까? 나는 거기에 좌파 정치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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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 불한당에게 고함!!!


X0. 반지성주의와 반권위주의를 전혀 구분 못하고 무례와 모욕을 선동하는 불한당에게, 그리고 학회와 해당 교육학회에 국립((국어))원 model을 권고함.


X1. 우선 2천 5백년 역사의 논리학에서 오류론의 제1조는 필수적으로 다음에 관한 것이다.

   Argumentum circumstantialis ad hominem via auctoritatem=ad verecundiam


X2. 그러므로 "과학이란, 전문가들도 실은 잘 모른다는 믿음"이며[: Richard Feynman],

"아무리 Nobel상 수상 과학자라도 대학원 신입생의 질문 하나에 쩔쩔매며 진땀을 뻘뻘 흘려가면서 열심히 최선을 다해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철저한 평등 정신의 소산"이다[: 이정모]. 


X3. 우리 운동의 Lenin주의 선배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고 목숨까지 기꺼이 희생할 정도의 무한한 헌신성으로 무장하고 있었음에도 전위주의, 아니 단지 계몽주의를 추구한다는 단 한가지 이유 때문에 지난 30년을 운동 안에서조차 갖은 욕을 들으며 죄인처럼 숨죽여 지내야만 했다.


X4. 더구나 빛나는 대중노선을 그 핵심정신으로 하는 Mao주의에 의하면 당신은 반동이자 인민의 적이다.[5]


X5. 그래서 일찌기 산전수전 다 겪어 오신 한국 Marx주의의 쟁쟁한 거장들과 선배들은 함께 모여 다음과 같이 합의하신 바 있다.

    "우리 모두는 대중이며, 대중의 외부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만 대중 안에서 우리 모두가, 대중 하나하나가 훌륭한 과학자들이 될 때까지 서로를 가르치고 서로 배우며 도와 나갈 뿐이다."[6]  


X6. 그런데 이제 헌신성이라고는 아예 말조차 할 것도 없고, 일생을 자기 자신과 자기 시간만을 위해 살아 와서, 쓸데없는 문제에 천문학적 시간을 허비하고 검토를 부탁하며 찾아 온 한 사람을 구원해 내는 데는 단 하루도 온전히 쓰기 싫다고 선동하는 당신이 나타나서 함부로 대중들을 비웃고 깔아뭉개며 세상과 정신의 주인이자 지배자 행세를 하려 드는 걸 도대체 어떻게 용납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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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물론 '더 나은 실패를 위하여 다시 한번 더'의 전형이 될 수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과정이 바로 ('인간'의) 역사 그 자체로(서) 사고되어야 한다.




[3] 따라서 골조만 드러난 미완성 초고이기에 혹시라도 다소 거친 비판으로 읽힐 수도 있으나 저자를 비롯한 ㅎㅈㅊ 선생님들께는 두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정신분석을 연구하시는 여러 선생님들께도 따뜻한 사랑과 존경을 보내는 바이며, 사정상 틈틈이 매우 조금씩 완성해 나갈 수 밖에 없을 가능성이 매우 높기에 당장은 어렵겠지만, 시간이 주어진다면 차츰 그러한 진심과 진의가 글 전반에도 오롯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4] https://marxpino.tistory.com/258



[5]

V3a. Mao의 공과와 그에 합당한 올바른 처우

V3b. Maoism의 눈부신 보석으로서의 대중노선


V3s. 따라서 이는 물론 당연히 Mao를 전적으로 숭배하는 교조주의나 그 체제 자체, 특히 현재의 중국 체제에 대한 평가 논의와는 전혀 아무런 관련이 없(고 현재 지금 여기의 문제상황을 돌파해 나가기 위한 정신적, 이론적 도구 자원으로서 활용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6] 당조직 자체까지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며, 당이 설정되더라도 그 위치만은 반드시 대중 내부가 아니면 안된다는 규정임. 



[7] 최근, 특히 불과 며칠 간에 사회 각 분야에 급격한 전문가 숭배 및 신격화와 진보운동에 대한 Populism 비난 현상의 파급이 목격되어 이를 직접 선동한 것으로 판단되는 2(+1)개 핵심 text (/) node를 타격하는 목적으로 수행된 작업이며, 본인들 각자에게 요지는 전달되었다고 판단되어 더 이상의 구체적 지목은 생략하기로 함.


(아울러 이는 사상투쟁을 전개하는 투사모형의 행동노선에 입각한 사회정치적 개입의 일환이므로 가끔 이와 유사한 어떤 작업 행위를 목도하시더라도 심각한 오해 없도록 각별한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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