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영
김이설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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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단지 저 멀리로부터 빛들은 물러나고 서서히 어둠이 내려앉는 시간, 매미는 빛과 어둠의 교대식을 주관하는 수문장이라도 된듯 날카로운 울음을 멈추지 않는다. '아마도 이맘쯤이 아니었나' 싶어 달력을 확인해 본다. '末伏'이다. 더위와 주말과 말복이 한 데 버무러져 도심의 외곽은 열대야로 식지 않은 열기와 닭삶은 비린내가 진동하고 있을테다. 『환영』을 읽고나선 뽀얀 속살을 드러낸 채 뚝배기에 웅크리고 있는 닭을 쳐다보기 전 또다른 '서윤영'들은 없는지 주변을 두리번 두리번 거리게 될 것만 같다. 『환영』에 대한 가장 즉자적인 반응이겠지만 그런만큼 쉽게 떨쳐내기 힘든 반응이 될 터이다.

 
"언제나 처음만 힘들었다. 처음만 견디면 그다음은 참을 만하고, 견딜 만해지다가, 종국에는 아무렇지 않게 되었다.(...) 따지면 세상의 모든 것이 그랬다. 버티다 보면 버티지 못할 것은 없었다."
 

아침에 눈을 떠 간단한 세면으로 잠을 쫓은 뒤 커피와 담배로 허기진 뱃속을 채우고나선 곧바로 사무실로 향한다. 눈앞에 닥친 모든 것들이 낯설고 생경해 몸은 균형을 잃어 바둥거리고 연신 진땀을 쏟아낸다. 열다섯 시간을 넘게 버티던 사무실, 일 년이 넘게 몸을 부리며 지냈음에도 하나 둘 형광등이 꺼지고 희미한 가로등 불빛만이 텅빈 공간을 비집고 들어와 있는 풍경이 끝내 익숙해지지않는다. 그렇기 이 주라는 시간이 흐르고 난 뒤 삐걱대고 파열하던 시간은 차차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내며 자신만의 궤적을 그리기시작한다. "세상의 모든 것이 그랬다. 버티다 보면 보티지 못할 것은 없었다"

 불평은, 단지 여유로운 자의 기만은 아니었을까. 아픈 부모도, 나 몰라라 생때를 부리며 짐만 되는 형제도, 나만을 해바라기 하며 기다리는, 건사해야 할 가정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나의 불만이 정당될 수 있는 건, 생물학적 유기체로서의 무한한 연장만이 인간적인 삶의 전부는 '결코'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다. 단지 일하는 기계가 되어 하루하루 주어진 시간을 밀어내며 나아가는 시간은 그 지나간 자리에 '허무'와 '無明'의 자취만 진하게 새길 뿐이기에. 견딤은 익숙함으로 다시, 본연의 자리로 더디나마 돌아오게 해준다. 네모난 얼음이 동동 떠있는 똑 쏘는 콜라와 선풍기 바람을 맞으며 『환영』 읽었다. '누구도 반겨주지 않는 환영'을 숙명처럼 짊어지고 살아가야 하는 윤영을.

얼마전 TV에서 '포항 성매매여성 자살사건' 보도를 보았던 기억이 났다. 일년 새 여덟 명의 성매매여성이 자살한 사건이다. 세상에 그런 일도 있었나 싶었을만큼 전혀 몰랐고 무지했던 사건이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세상에 드러나지 않고 묻혀버린 죽음은또 얼마이던가. 작년 한해 1만 4천명이, 하루에 40명이, 두 시간에 세 명이 자신의 목숨을 저버리는 나라, 바로 오늘의 대한민국이 아니었던가. 좀더 깊고 음습한 절망만이 내일을 환영해주는 사람들, 앞에서 '인간적인 삶'을 운운하는 것은 그들에 대한 기만이거나 폭력은 아니었을까. 아니다. 난 분명, "나는 누구보다 참는 건 잘했다. 누구보다도 질 길 수 있었다. 다시 시작이었다"라는 『환영』의 저 도저한 마지막 문장을 감당할 수도, 공감할 수도 없다. 무엇을 위한 '참음'이고 '시작'이란 말인가. 단지 생명이 갖는 존엄성과 윤리적 의무로만 지탱되는 생은 도대체 무어라 말인가. 저 마지막 문장에서 시작되었다는 『환영』은 또다른 시작을, 질기게 참고 또 참으며 살아가는 불투명한 희망을 말하고자 했는지 모르지만, 역설적으로 그것들은 결국 언어 밖의 살풍경한 세상을 온전히 투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절망을 벗어날 수 없는 이들에게, 참으라고, 참고 견디며 살아내라고, 나는 말 할 수 없다.

 
지독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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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 딕
허먼 멜빌 지음, 김석희 옮김 / 작가정신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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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 '삶'으로 승화되는 건 죽음이라는 절대지를 두려움 없이 마주했을 때만, 해서 누구나 자신의 생을 살아가고 있음에도 그 모든 개별적 시간들에 '삶'이라는, 그것이 다소 빈약한 표현이라면 '진정한' 이나 '예술적 또는 영웅적'이란 형용사를 덧대어도 무리는 없을 그런 '삶'을 살아가지는 못한다. 자신의 유한성을 인식하며 살아가는 種임에도 '죽음'은 늘, 타인들에겐 필연적·보편적이라는 定義를 자연스럽게 부여함에도 스스로에겐, 도래할 그러나 영원히 지연되어야 할 어떤 '우연적' 사건으로서만 자각하며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현재진행형의 시간을 살아낸다.

프로이트의 '죽음충동'은 문명화된 인류의 보편적인 무의식적 기제로 알려져 있느나 반복되는 생활-세계에 발목잡혀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겐, 만일 그것이 언제고 의식의 표층을 뚫고 출현할 수 있는 '실재'의 것일지라도 과거 어느 때보다 더 그런 '충동'은 억압되거나 치유되어야 할 병리학적 개념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우리는 단지 예술이라는 매개물을 경유해서만 인류의 태곳적 충동이 되어버린 '죽음충동'의 자취를 설핏 바라볼 수 있을 뿐이다.

'블랙스완'의 니나(나탈리 포트만)가 도달한 'Perfect(완벽함)'는 죽음이라는 자신의 파멸을, 예정된 미래의 시간을 지금, 여기로 당겨와 또는 그곳으로 나아가 일시에 소멸시켜벼리는 광기어린 열정 없이는 결코 실현될 수 없는 세계의 끝이었다. 에이해브의 저 무모하리만치 광적인 모비딕에의 집착은 단지 구체적인 가해자에 대한 피해자의 삭힐 수 없는 분노라는 일차원적 감정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악마를 보았다'의 수현(이병헌)의 경철(최민식)에 대한 복수가 또다른 악마되기의 전이이거나 악마의 피를 통한 카타르시스(정화)를 보여주긴 하지만 그럼에도 수현의 행위에서 그 어떤 '숭고미'를 기대하기 어려운 것은 '모비딕'과는 다른 맥락에 서 있기 때문일테다.

700페이지가 넘는 완역판 『모비딕(백경)』은 거대한 향유고래만큼이나 위압적이고 쉽게 다가서기 어려운, 말그대로 '고전'의 반열에 올라선 책이다. 그리고 많은 고전이 그렇듯 『모비딕』 또한 마크 트웨인의 고전에 대한 정의("A Classic is something that everybody wants to have read and nobody wants to read)를 비껴서지 않는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기도 하다. 고래에 대한 정의로 시작해 당시까지 고래에 대해 알려전 전방위적인 과학적·경험적 또는 상상적 지식들이 소설의 중간중간-마치 고래에 대한 한 편의 논문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상세한 설명들이-배치되어 있는 것은 물론이며 근대소설에서 보여지는 일관된 서술방식이 아닌 서사시와 연극적 장면들, 서술적 시점의 변화 등은 『모비딕』을 '에이해브' 선장이나 그가 좇는 '모비딕'만큼이나 신비스럽고 신화적으로까지 읽히게도 하나 그 자체가 독자에겐 쉽게 건널 수 없는 '대양'으로 다가오기도 하기 때문이다.

불안은 증가했지만 '공포와 외경'은 사져버린 시대에 '에이해브'는 히스테리적 사디즘이라는 종합적 병명으로나 호명될 수 있는, 광기와 에고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결국 죽음으로 생을 마감하는 예외적 인물인지도 모른다. 더구나 자신의 목적을 위해 나머지 선원들 모두를 바다에 수장시켜버리는 운명을 알면서도 스스로의 의지를 꺽어버리지 않는 것은 '샌델'의 윤리학적 가치들을 끌어오지 않아도 충분히 비난받을 수 있는 날 것 그대로의(문명화의 세례를 받지 못한) 인간적 충동일 뿐이다.

그럼에도 돈과 물질에 속박되어, 영원히 자신의 미래를 저당잡힌 채 '일상'이라는 반복된 시간을 살다 어느순간 찾아 온 죽음이라는 절대지 앞에 무기력하게 무릎꿇어야만 하는 현대인에게 '에이해브'는 "우주와 삶의 신비"를 찾으려는, 현대인들이 오래전에 잃어버린 인간적 열정을 순간적이나마 기억해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매력적인 '피쿼드'호의 선장임에 틀림없다.

 

에이해브가 피쿼드호와 함께 하얀 물거품을 뒤로한 채 검푸른 바다에 삼켜져 버린다. 그리고 그때 그는
 

"He Was Prefect"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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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지음 / 창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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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묻는다.
다시 태어난다면 무엇이 되고 싶으냐고.
나는 큰 소리로 답한다.
아버지, 나는 아버지가 되고 싶어요.
아버지가 묻는다
더 나은 것이 많은데, 왜 당신이냐고.
나는 수줍어 조그맣게 말한다.
아버지, 나는 아버지로 태어나, 다시 나를 낳은 뒤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싶어요.
아버지가 운다.
『두근 두근 내 인생』, p7"

 



 

어미로부터 버림받은 아이, 그 아이가 자라 자신의 아이를 낳았지만 결코 '어미'가 될 수 없던 아이. 그렇게 혜화는 열여덟에서 스물세 살, '아름이'가 부러워했던, '청춘에 무지한 청춘'조차 박탈당한 채 긴 겨울의 바람을 온 몸으로 받아내며 희망이 탈색된 청춘의 시간을 이겨낸다.

병들고 버려진 유기견을 돌보며 자신의 상처에 딱지가 생겨 아물기도 전에 한수는 이미 떠나버린 아이를 불러내 혜화에게 '어미'라는 '가족'이라는, 더이상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을 것만 같은 불가능한 '이름들'을 강요(!)한다. 상처는 덧나고 얼어붙었던 기억은 되살아나 과거의 아픔을 길어내지만 어느덧 혜화의 겨울(冬)은 새로운 희망이라는 봄을 향해 움직이기(動) 시작한다.

(백미러를 통해 한수에게 다가가는 혜화의 마지막 씬, 은 개인적으로 불만이었다. 혜화가 한수를 또다시 껴안아 줄 필요가 있었을까. 한수라는 존재와 함께 하지 않아도 혜화는 이미 겨울은 건널 수 있었는데...)

 



 


"누군가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그 사랑을 알아보는 기준이 있어요"
어미니의 두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그건 그 사람이 도망치려 한다는 거예요"
"......"
"엄마, 나는...... 엄마가 나한테서 도망치려 했다는 걸 알아서, 그 사랑이 진짜라는 걸 알아요."
어미니가 내 입술에 귀를 갖다댔지만 소용없었다. 나는 입을 여는 대신 어머니의 손을 잡는 걸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리곤 곧 긴 잠에 빠져들었고, 다음날, 놀랍게도 살아 있었다.



 하나의 사회적 현상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더이상 감추어 덮어버리거나 절대금기시 될 수 없을만큼 일반화 되어가는.

십대의 출산이라는 동일한 모티브에서 출발했지만 『두근 두근 내 인생』과 『혜화, 동』은 초록의 여름과 '假死'의 겨울만큼이나 서로 대척점에 서있다. 계절의 순환이 선택되거나 거부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닌 모든 생명체의 삶 속에 스며들어 세월의 나이테를 아로새기듯 여름과 겨울은 그렇기에 반대의 지점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모습이기도 하다.

21세기 한국소설에서 '가족'은 더이상 애착의 대상이 아니다.
부부와 부모, 자식은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주고 피흘리게 만드는 그럼에도 벗어던지거나 달아날 수 없는 끈덕진 굴레일 뿐이다. 그것이 자본주이라는 정치·경제적 이데올로기 때문이든 억제되거나 감추어져야만 했던 욕망의 느닷없는 시대적 분출 때문이든.
문학은 현실을 반영하고 현실은 소설을 재생산한다. 그것이 오늘, 날 것 그대로의 얼굴이다.

김애란은 자신의 첫, 장편에 겁도 없이 '가족'을 끌고 들어온다.
이미 이전의 단편들에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종종 출몰했음에도 「침이 고인다」, 「나는 편의점에 간다」 등 그녀의 소설은 오늘의 사회 속에서 사람들과의 '관계' 맺기가 얼마나 지난하고 버거운 것인지를 '제대로' 보여주었고, 그것은 문인들과 대중들의 화려한 갈채 속에 하나의 '사건'으로까지 각인되었다. 그런 그녀가 '가족'과 '사랑', '행복'이라는, 고대박물관의 화석에서나 온전한 의미를 체집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사라져버린, 짊어지기 버거울만큼 무거운(!) 가치들을 이끌고 나타난다. (그녀는 '사건'을 좋아한다.) 

김애란의 문장은 가볍고 경쾌하다. 그렇게 사뿐히 걸음을 옮기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읽는이를 깊은 '크레바스' 위로 안내에 '말(言)'의 아찔한 깊이와 울림을 보여주곤 한다. '바람이 불면, 내 속 낱말카드가 조그맣게 회오리친다. 해풍에 오래 마른 생선처럼. 제 몸의 부피를 줄여가며 바깥의 둘레는 넓힌 말들'을 통해.

『혜화, 동』의 정적이고 차분한 화면을 『두근 두근 내 인생』의 '말'들과 비교할 순 없을지라도 난 김애란의 '말'을 타고 달리는 것이, 그 끝에 상상적 가족이데올로기라는 표지판이 덩그마니 서있을지라도 훨씬 행복하고 아련하다.
『두근 두근 내 인생』은 '아버지'라는 '아이'와 '가족'이라는 기표가 결코 비참한 생의 굴레라는 '기의'만으로 다 채워질 순 없다는 걸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김애란, 어서어서, 부지런히, 다음 장편을 (다음 단편집이 먼저이겠지만) 시작하라!
명령이라기 보단 한 독자의 애틋한 애원이자 사랑이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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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민음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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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쿤데라는 『소설의 기술』에서 '늙음'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나이든 학자는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젋은이들을 바라보다가 문득 그 교실에서 자유라는 특권을 지닌 사람은 자기 혼자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내하면 그는 나이가 들었던 것이다. 사람은 늙어서야 비로소 집단의 의견, 대중의 의견, 미래의 의견을 무시할 수 있게 된다. 오직 그 혼자만이 닥쳐올 죽음과 함께 있는데, 죽음에는 눈도 귀도 없어서 비위를 맞출 필요가 없다. 그는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말하고 행동할 수 있다."

일흔이 넘은 쿳시와 작가 세뇨르 C의 경계는 선명하게 갈라서지 않는다.
"카프카가 요제프 K보다 관심을 끌게 되는 순간부터 죽은 카프카는 또다시 죽게 된다" (『소설의 기술』 p.196)라며 쿤데라는 다시 작가와 작품의 동일시를 경계하지만 그럼에도 나에게, 『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는 소설을 읽어나감에 따라 소설 속 작가인 '세뇨르 C'가 지워지고 실제의 인물인 '쿳시'라는, 작가이기 전에 한 개별적 인간으로서 그가 살아온 삶의 조각들이 퍼즐이 합쳐지듯 점점 구체적인 인상으로 그려지기 시작했다. '장편소설'임에도 책의 삼분의 이 가량이 국가와 정치, 문화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한 노작가의 개인적 에세이들이 중심 텍스트를 이루고 있다면, 작중 화자와 그녀의 타이피스트인 안야, 그녀의 남자친구인 앨런이 만들어가는 짧은 단편은 상부텍스트를 담아내는 컨텍스트로 구성되어있다. 이런 실험적 형식이 작가와 화자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지만 결국, 『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는 애초부터 그런 둘의 분리를 의미 없는 형식적 제약으로 전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55개 꼭지의 에세이 중에서 정치와 국가를 바라보는 쿳시는 대단히 비판적이고 동시에 냉소적이기까지 하다.  가령 "민주주의는 민주적인 시스템 밖에서의 정치를 허용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민주주의는 전체주의다"(p23) , "뭔가를 입 밖으로 얘기할 때 당신이 직면하게 되는 것은 침묵하게 만드는 검열관의 일격이 아니라 추방 명령이다."(963)와 같은 주장들은 비판적 지식인으로서 일견 정당해 보이면서도 '조류독감' '경쟁' 소아성애' 등에 대한 의견은 중립적 비판에 '냉소'라는 첨가물 없이는 그 정도로까지 나아갈 순 없던 것들이 아니었을까란 생각이 든다.

남아프리카에서 네덜란드계 백인으로 태어나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어두운 역사와 그 시간 속에 점철된 지독한 인종차별을 온몸으로 지나왔고, 알 수 없는 이유로 (만델라로 상징되는 흑백의 장막이 사라진 뒤에도 쿳시는 혹시, 남아공의 현실적 상황이 결코 바뀌지 않았다고 느꼈던 것은 아니었을까?) 생의 막바지에 오스트레일리아로 이주하였지만, 그곳에서 쿳시가 맞닥뜨린 건 '테러와의 전쟁' '이민법의 강화' 등 점점 보수화 되어가는 대륙의 미래였다. 쿳시의 세상에 대한 냉소와 비판이 현실에서 멀리 떨어져 자신만의 안락한 서재에서 바라 본, 노인들만의 전유물이라 할 수 있는 자조섞인 푸념이나 훈계가 아닌 실제적 무게를 갖게 되는 것은 과거로부터 지금, 이곳에서 그가 직접 체험한 세계로부터 발아 된 것이었기 때문일테다.

하지만 『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가 정치적 에세이가 아닌 '장편소설'이 될 수 있었던 것, 삶과 세상에 대한 비판과 냉소만이 작가가 독자에게 전해줄 수 있는 전부가 아닐 수 있었던 것은 결국, '사랑'이 소설의 중심을 가로지르고 있기 때문이다.

3단으로 나뉜 독특한 구성에서 실제 텍스트의 분량으론 삼분의 일에 지나지 않음에도 '세뇨르 C'와 '안야'의 사랑과 소통, 그로인한 인간애 대한 공감이 에세이에 첨부된 단순한 곁다리 단편이 아닌 전체 소설을 묶어주는 컨텍스트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저 '사랑'의 힘 때문이다.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이야기임에도 『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가 한 편의 소설로서, 작품으로서 다가오는 것은 어쩌면 저 '늙음'이 갖고 있는 시간의 무게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일흔이 넘은 작가, 그가 보는 세상은 여전히 암울하고 비관적이지만 그럼에도 세상의 독자들에게 쿳시가 진정으로 전해주고 싶었던 것은 '사랑으로 낙관하라'는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사족.
세뇨르 C에겐 생의 가장 빛나는, 축복된 한 해였음에도 왜 작가는 제목을 『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로 정했을까.
반어적으로도 해독되지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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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의 구애 - 2011년 제42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편혜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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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전 『아오이가든』의 그녀와, 오늘 『저녀의 구애』의 그녀는 얼마나 달라졌는가.(겉표지의 사진과 더불어 그녀의 소설까지)
중년의 멋은 남성의 전유물이 아니었던 게다.

그녀의 미모가, 그리고 그녀의 소설이 무르익을수록 그녀의 구애는 보다 적극적이다. 누구도 거부할 수 없을만큼.


'카프카'와 '문명'이 떠올랐으나, 이미 누군가 발설해버린 내용이다.

중언할 필요가 없다.

단지 낭자한 피도, 죽음도,  부패하는 사체,에서 흐르는 진물도 없다. 오물과 쓰레기가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져 어딘가로 흘러가 처리되듯이-그것이 바로 '문명'이 아니던가,-야만과 본능은 문명의 세계로 진입하면서 말끔히 배제되었다. 하지만 사라져버렸던 '그 것'들은 언제고 우리내 일상을 찢고 되돌아온다. 우리가 사는 오늘이다.

『저녀의 구애』를 읽으면서, 그녀만의 문체나 색깔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소설을 읽을 땐, 아무리 좋은 문장이 보여도 줄을 긋거나 하진 않는데,
"죽음은 비통하고 엄숙한 세계를 떠나 정체되고 지연되는 시간의 문제로 남았다"라든가,
"씹고 있는 통조림의 맛처럼 삶이 너무 자명해진 느낌이었다. 미래는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이미 지나가버린 것 같았다."등 몇 곳에 자연스럽에 선이 그어진다. '물건을 보면서 노동의 경로를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는 작가의 말처럼, 저런 문장들은 사물과 일상의 사소함을 통해 삶과 세계를 인식하는 작가의 고뇌 없이, 단지 순간적인 아이디어나 감각으로 튀어나오는 것들은 아닐테다.

『저녁의 구애』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단편은, 마지막 '작가의 말'이었다.

"소설을 쓰는 일이 매번 같은 강도의 노동을 반복하는 것임을 알게 되고,
나는 좀 달라졌다.
자괴하고 한탄하는 일이 줄었다.
소설쓰는 일의 묵묵한 수련 방식을 조금씩 깨우치고 있다.

'그녀의 구애'가 인스턴트식 만남이나 원 나잇 스탠드가 될 수 없는 이유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좀더 부지런히, 좀더 묵묵히 소설을 써나가는 그녀를 위해서라도, 출간되는 족족 장바구니로 바로바로 담아주고 읽어주는 것뿐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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