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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지음 / 창비 / 2011년 6월
평점 :
"아버지가 묻는다.
다시 태어난다면 무엇이 되고 싶으냐고.
나는 큰 소리로 답한다.
아버지, 나는 아버지가 되고 싶어요.
아버지가 묻는다
더 나은 것이 많은데, 왜 당신이냐고.
나는 수줍어 조그맣게 말한다.
아버지, 나는 아버지로 태어나, 다시 나를 낳은 뒤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싶어요.
아버지가 운다.
『두근 두근 내 인생』, p7"

어미로부터 버림받은 아이, 그 아이가 자라 자신의 아이를 낳았지만 결코 '어미'가 될 수 없던 아이. 그렇게 혜화는 열여덟에서 스물세 살, '아름이'가 부러워했던, '청춘에 무지한 청춘'조차 박탈당한 채 긴 겨울의 바람을 온 몸으로 받아내며 희망이 탈색된 청춘의 시간을 이겨낸다.
병들고 버려진 유기견을 돌보며 자신의 상처에 딱지가 생겨 아물기도 전에 한수는 이미 떠나버린 아이를 불러내 혜화에게 '어미'라는 '가족'이라는, 더이상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을 것만 같은 불가능한 '이름들'을 강요(!)한다. 상처는 덧나고 얼어붙었던 기억은 되살아나 과거의 아픔을 길어내지만 어느덧 혜화의 겨울(冬)은 새로운 희망이라는 봄을 향해 움직이기(動) 시작한다.
(백미러를 통해 한수에게 다가가는 혜화의 마지막 씬, 은 개인적으로 불만이었다. 혜화가 한수를 또다시 껴안아 줄 필요가 있었을까. 한수라는 존재와 함께 하지 않아도 혜화는 이미 겨울은 건널 수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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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그 사랑을 알아보는 기준이 있어요"
어미니의 두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그건 그 사람이 도망치려 한다는 거예요"
"......"
"엄마, 나는...... 엄마가 나한테서 도망치려 했다는 걸 알아서, 그 사랑이 진짜라는 걸 알아요."
어미니가 내 입술에 귀를 갖다댔지만 소용없었다. 나는 입을 여는 대신 어머니의 손을 잡는 걸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리곤 곧 긴 잠에 빠져들었고, 다음날, 놀랍게도 살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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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사회적 현상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더이상 감추어 덮어버리거나 절대금기시 될 수 없을만큼 일반화 되어가는.
십대의 출산이라는 동일한 모티브에서 출발했지만 『두근 두근 내 인생』과 『혜화, 동』은 초록의 여름과 '假死'의 겨울만큼이나 서로 대척점에 서있다. 계절의 순환이 선택되거나 거부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닌 모든 생명체의 삶 속에 스며들어 세월의 나이테를 아로새기듯 여름과 겨울은 그렇기에 반대의 지점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모습이기도 하다.
21세기 한국소설에서 '가족'은 더이상 애착의 대상이 아니다.
부부와 부모, 자식은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주고 피흘리게 만드는 그럼에도 벗어던지거나 달아날 수 없는 끈덕진 굴레일 뿐이다. 그것이 자본주이라는 정치·경제적 이데올로기 때문이든 억제되거나 감추어져야만 했던 욕망의 느닷없는 시대적 분출 때문이든.
문학은 현실을 반영하고 현실은 소설을 재생산한다. 그것이 오늘, 날 것 그대로의 얼굴이다.
김애란은 자신의 첫, 장편에 겁도 없이 '가족'을 끌고 들어온다.
이미 이전의 단편들에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종종 출몰했음에도 「침이 고인다」, 「나는 편의점에 간다」 등 그녀의 소설은 오늘의 사회 속에서 사람들과의 '관계' 맺기가 얼마나 지난하고 버거운 것인지를 '제대로' 보여주었고, 그것은 문인들과 대중들의 화려한 갈채 속에 하나의 '사건'으로까지 각인되었다. 그런 그녀가 '가족'과 '사랑', '행복'이라는, 고대박물관의 화석에서나 온전한 의미를 체집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사라져버린, 짊어지기 버거울만큼 무거운(!) 가치들을 이끌고 나타난다. (그녀는 '사건'을 좋아한다.)
김애란의 문장은 가볍고 경쾌하다. 그렇게 사뿐히 걸음을 옮기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읽는이를 깊은 '크레바스' 위로 안내에 '말(言)'의 아찔한 깊이와 울림을 보여주곤 한다. '바람이 불면, 내 속 낱말카드가 조그맣게 회오리친다. 해풍에 오래 마른 생선처럼. 제 몸의 부피를 줄여가며 바깥의 둘레는 넓힌 말들'을 통해.
『혜화, 동』의 정적이고 차분한 화면을 『두근 두근 내 인생』의 '말'들과 비교할 순 없을지라도 난 김애란의 '말'을 타고 달리는 것이, 그 끝에 상상적 가족이데올로기라는 표지판이 덩그마니 서있을지라도 훨씬 행복하고 아련하다.
『두근 두근 내 인생』은 '아버지'라는 '아이'와 '가족'이라는 기표가 결코 비참한 생의 굴레라는 '기의'만으로 다 채워질 순 없다는 걸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김애란, 어서어서, 부지런히, 다음 장편을 (다음 단편집이 먼저이겠지만) 시작하라!
명령이라기 보단 한 독자의 애틋한 애원이자 사랑이라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