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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 딕
허먼 멜빌 지음, 김석희 옮김 / 작가정신 / 2011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일상'이 '삶'으로 승화되는 건 죽음이라는 절대지를 두려움 없이 마주했을 때만, 해서 누구나 자신의 생을 살아가고 있음에도 그 모든 개별적 시간들에 '삶'이라는, 그것이 다소 빈약한 표현이라면 '진정한' 이나 '예술적 또는 영웅적'이란 형용사를 덧대어도 무리는 없을 그런 '삶'을 살아가지는 못한다. 자신의 유한성을 인식하며 살아가는 種임에도 '죽음'은 늘, 타인들에겐 필연적·보편적이라는 定義를 자연스럽게 부여함에도 스스로에겐, 도래할 그러나 영원히 지연되어야 할 어떤 '우연적' 사건으로서만 자각하며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현재진행형의 시간을 살아낸다.
프로이트의 '죽음충동'은 문명화된 인류의 보편적인 무의식적 기제로 알려져 있느나 반복되는 생활-세계에 발목잡혀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겐, 만일 그것이 언제고 의식의 표층을 뚫고 출현할 수 있는 '실재'의 것일지라도 과거 어느 때보다 더 그런 '충동'은 억압되거나 치유되어야 할 병리학적 개념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우리는 단지 예술이라는 매개물을 경유해서만 인류의 태곳적 충동이 되어버린 '죽음충동'의 자취를 설핏 바라볼 수 있을 뿐이다.
'블랙스완'의 니나(나탈리 포트만)가 도달한 'Perfect(완벽함)'는 죽음이라는 자신의 파멸을, 예정된 미래의 시간을 지금, 여기로 당겨와 또는 그곳으로 나아가 일시에 소멸시켜벼리는 광기어린 열정 없이는 결코 실현될 수 없는 세계의 끝이었다. 에이해브의 저 무모하리만치 광적인 모비딕에의 집착은 단지 구체적인 가해자에 대한 피해자의 삭힐 수 없는 분노라는 일차원적 감정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악마를 보았다'의 수현(이병헌)의 경철(최민식)에 대한 복수가 또다른 악마되기의 전이이거나 악마의 피를 통한 카타르시스(정화)를 보여주긴 하지만 그럼에도 수현의 행위에서 그 어떤 '숭고미'를 기대하기 어려운 것은 '모비딕'과는 다른 맥락에 서 있기 때문일테다.
700페이지가 넘는 완역판 『모비딕(백경)』은 거대한 향유고래만큼이나 위압적이고 쉽게 다가서기 어려운, 말그대로 '고전'의 반열에 올라선 책이다. 그리고 많은 고전이 그렇듯 『모비딕』 또한 마크 트웨인의 고전에 대한 정의("A Classic is something that everybody wants to have read and nobody wants to read)를 비껴서지 않는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기도 하다. 고래에 대한 정의로 시작해 당시까지 고래에 대해 알려전 전방위적인 과학적·경험적 또는 상상적 지식들이 소설의 중간중간-마치 고래에 대한 한 편의 논문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상세한 설명들이-배치되어 있는 것은 물론이며 근대소설에서 보여지는 일관된 서술방식이 아닌 서사시와 연극적 장면들, 서술적 시점의 변화 등은 『모비딕』을 '에이해브' 선장이나 그가 좇는 '모비딕'만큼이나 신비스럽고 신화적으로까지 읽히게도 하나 그 자체가 독자에겐 쉽게 건널 수 없는 '대양'으로 다가오기도 하기 때문이다.
불안은 증가했지만 '공포와 외경'은 사져버린 시대에 '에이해브'는 히스테리적 사디즘이라는 종합적 병명으로나 호명될 수 있는, 광기와 에고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결국 죽음으로 생을 마감하는 예외적 인물인지도 모른다. 더구나 자신의 목적을 위해 나머지 선원들 모두를 바다에 수장시켜버리는 운명을 알면서도 스스로의 의지를 꺽어버리지 않는 것은 '샌델'의 윤리학적 가치들을 끌어오지 않아도 충분히 비난받을 수 있는 날 것 그대로의(문명화의 세례를 받지 못한) 인간적 충동일 뿐이다.
그럼에도 돈과 물질에 속박되어, 영원히 자신의 미래를 저당잡힌 채 '일상'이라는 반복된 시간을 살다 어느순간 찾아 온 죽음이라는 절대지 앞에 무기력하게 무릎꿇어야만 하는 현대인에게 '에이해브'는 "우주와 삶의 신비"를 찾으려는, 현대인들이 오래전에 잃어버린 인간적 열정을 순간적이나마 기억해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매력적인 '피쿼드'호의 선장임에 틀림없다.
에이해브가 피쿼드호와 함께 하얀 물거품을 뒤로한 채 검푸른 바다에 삼켜져 버린다. 그리고 그때 그는
"He Was Prefect" 했다.